[2016.4.24. 성경모임-히 4장]
안식, 믿음, 순종 그리고 십자가
히브리서 4장에서 유독 눈에 자주 띄는 단어는 ‘안식(쉼)’입니다. 안식에 관한 성경의 생각과 인간의 생각은 판이하게 다릅니다.
인간에게 안식은 내가 주도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숨을 쉬다, 휴식하다는 뜻을 가진 한자 식(息)을 살펴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息은 스스로 자(自)와 마음 심(心)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스스로 自가 사람의 코를 본떠 만든 상형 글자라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자기 마음이 곧 쉼이라는 조합은 인간의 상태를 잘 보여줍니다. 인간은 자기 마음대로 무엇인가를 주도할 때 쉼을 느끼는 모양입니다. 인간이 가장 귀하게 여기는 가치 중 하나인 자유! 그것이 인간의 쉼입니다.
인간은 은밀한 장소와 시간에서 내적 평안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프라이버시(Privacy)권이라고도 하죠. 인간의 기본적 권리 중 하나로서 근대적 헌법 대부분에 규정되어 있습니다. 그만큼 중요하다는 의미이고, 그만큼 인간에게 꼭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결국 인간에게 쉼이란 은밀한 자유라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4장의 안식은 인간이 생각하는 안식과는 정확히 반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히4:12~13)
성경의 안식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죽은 자로 낱낱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내가 선택한 안식이 아닙니다. 나 혼자 키득거리며 즐기는 쉼이 아닙니다. 남에 의해서 갈기갈기 찢기고 벌거벗은 듯 드러나는 안식입니다. 은밀하게 숨은 안식이 아니라, 죽은 채로 드러나는 안식입니다.
인간 마음대로 선택하지도 않았고 즐길 수도 없는 상태가 안식인 이유는, 인간이 원래 죽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원래 죽은 존재가 살아 있다고 나를 속이고, 이웃을 속이고, 하나님을 속이기 위해 참 수고 많았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로 드러나는 안식은 100% 순수하게 하나님 쪽에서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선택할 수 없습니다. 완벽하게 타율적입니다. 정리하자면, 인간이 원하는 ‘자유-은밀의 안식’에서 ‘죽음-드러냄의 안식’으로 전환하는 모든 작업을 하나님 쪽에서 담당하시는 겁니다.
히브리서 4장의 앞부분은 죽음-드러냄의 안식이 태초부터 있었다고 말합니다. 이 안식에 들어오고 못 들어오고는 이미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완성된 일입니다.(3절) 창조적 사건입니다. 바로 제7일입니다. 하나님은 제 칠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습니다. 이 안식에 참여하는 자들은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쉽니다.
그런데 이런 타율성의 반대, 그러니까 우리 쪽에서 뭔가 스스로 해야 할 것 같은 단어가 히브리서 4장에 분명히 있습니다. 믿음과 순종이 바로 그것입니다. 안식이 있음을 복음을 통해서 들었더라도 듣는 자가 믿음으로 화합하지 않으면 안식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2절) 우리는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광야에서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죽은 것처럼 불순종의 대가를 받기 때문입니다.(11절)
이것이 히브리서 3장과 4장에서 여러 번 인용되고 있는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강팍케 말라.’에 대한 일반적인 해석입니다. 믿음과 순종, 이것이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안식으로 들어가기 위한 준비물인 셈이죠. 해외여행갈 때 필요한 여권처럼 말입니다.
자, 그럼 문제는 위에서 말한 믿음과 순종의 의미를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믿음과 순종은 심리적인 결단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실천하면서 마음과 몸에 어긋남이 없는 상태가 바로 믿음과 순종입니다. 마음 속 믿음이기에 은밀하고, 순종의 방식은 자유입니다. 은밀-자유의 안식입니다. 어디에도 십자가지신 예수님의 공로는 없습니다. 자신이 죽은 자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방식이 아니죠. 그래서 보통은 예수님의 공로 혹은 성령님의 도움만이 이런 믿음과 순종을 가능하게 만든다고 합니다. 하지만 인간이 소유한 믿음과 인간이 생산한 순종의 부족한 부분을 보충해주는 정도로 예수님은 가짜입니다. 인간의 자유와 그에 따른 책임 구조가 이미 깔아놓고 장식처럼 예수님을 꽂아 놓은 것에 불과합니다.
히브리서에서 말하는 믿음과 순종은 번제물로서의 믿음과 순종입니다. 태워져서 고기 굽는 냄새에 불과한 것이 번제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을 번제물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의 육체화, 그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자유-은밀의 안식’에 이론적 기초를 제공하는 혼과 영을 찌르고 쪼갭니다. 인간의 몸을 결합시키고 있는 관절과 골수를 해체시킵니다.
예수님께서 칼을 들고 수술대 위에 누워있는 인간을 도살하는 방식이 아닙니다. 예수님 스스로 인간이 되어서 자기 자신의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어떻게 죽고 어떻게 사는가를 자신의 몸으로 보여줍니다. 찌르는 손도 예수의 손이요, 찔림을 받는 골수도 예수의 골수입니다. 인간에게 안식을 줄 수 없다는 분노의 하나님과 어떻게든 살아남겠다는 인간의 사악함이 예수라는 번제물을 통해 깨끗하게 씻기고 있는 현장이 안식입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로만 가능한 거룩한 산제사에 의해 새로운 창세기가 생생하게 펼쳐집니다. 이것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복음을 듣고 우리의 마음을 강팍하게 할지, 믿음과 순종으로 화합하게 할지를 결정하는 것은 누구입니까? 맞습니다. 십자가 지신 예수님뿐입니다. 우리는 그저 그 분의 손에 들려 태워지고 있는 연기일 뿐입니다.
성도의 담대함은 이것입니다. 연기라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 있기에 그 분의 십자가 칼에 의해 쪼개지고 갈라지지만, 그래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이면서 동시에 번제물인 예수님 안에 한 점 고기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넉넉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성도를 긍휼하게 여겨주시고, 때를 따라 돕기 때문입니다.(16절)
He is a cross pendant.
He is engraved with a unique Number.
He will mail it out from Jerusalem.
He will be sent to your Side.
Emmanuel
Bible Verses About Welcoming ImmigrantsEmbracing the StrangerAs we journey through life, we often encounter individuals who are not of our nationa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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