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오늘날 번영주의 설교 비판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에 너희는 생명을 위해 짐을 지고 예루살렘 성문으로 들어오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영광 신학의 설교와 십자가 신학의 설교”

- 오늘날 번영주의 설교 비판 -

 

 

머리말

 

개혁교회는 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다. 교회는 이 어려운 시대에 이 세상을 바로 이끄는 하나님의 진리등대이다. 교회가 이 시대를 바로 선도하는 수단은 설교이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법이 해이(解弛)해진 시대에 모세의 율법을 바르게 해석했고, 제사장들의 타락한 예배 관행과 설교를 비판하였다. 올바른 설교는 교회의 영성을 바르게 세우는 기반이다.

 

그런데 포스트모던 시대(the postmodern era)에 설교가 소비자 구미에 영합하는 신실용주의(neo-pragmatism)의 사고에 젖어 들고 있다. 오늘날 미국교회를 비롯한 한국교회의 상당수 목회자들이 지나치게 번영과 성공을 하나님 축복의 기준으로 설정하여 설교함으로써 물질주의로 얼룩진 오늘날 시대에 영합하고 있다. 이러한 영합의 정신은 중세 스콜라주의가 가졌던 세속적 번영을 통해서 하나님에게 도달하려는 영광 신학에 물든 현상과 유사하다고 말할 수 있다.

 

본고는 오늘날 번영과 성공위주의 설교를 비판하면서, 그것의 원형인 중세 스콜라주의의 영광신학을 비판적으로 살펴보고 조직신학적으로 종교개혁자 루터의 십자가 신학의 설교 착상이 교회 갱신을 위하여 필요함을 제시하는데 있다.

 

I. 성공주의 설교 - 오늘날 복음주의 미국교회 및 한국교회 설교의 현황

 

1. 미국교회의 번영주의 신학

 

마이클 호튼은 그의 저서『미국제 복음주의를 경계하라』에서 오늘날 미국 번영주의적 복음주의가 지니고 있는 8가지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그것은 민주주의의 시녀가 된 하나님, 실용주의적 복음주의, 소비자 중심주의, 구원으로부터 자기 존중으로, 감정중심의 신앙, 이교도로의 복귀, 각자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공동체의 상실 등이다.

 

미국의 복음주의권은 방송망, 출판사, 광고대행업, 위락시설 들을 갖춘 관광지 그리고 유람선까지 자체적으로 소유하고 운영하고 있다. 복음주의권은 마케팅이 성공하자 이러한 복음주의의 성장을 하나의 영적 부흥으로까지 이야기 하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 여론 조사가인 죠지 바나(George Barna)와 윌리엄 메케이(William McKay)에 의하면 “수백만 달러를 라디오, TV 등을 통한 미디어 사역과 전도를 위한 출판물에 투자하는 데도 불구하고 지난 5년간 기독교의 실질 성장은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고 평가하고 있다.

 

권위 있는 연구기관인 옥스퍼드 분석(Oxford Analytica)는 “인상적인 통계 수치 그리고 외견상 노랄만한 부흥의 열기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기독교는 겉으로 나타나는 현상하고는 판이하게 다른 상황 하에 있다는 증거가 있다. 그러나 기독교의 사회에 대한 영향력에 관한 자료들은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다.”

 

오늘날 미국의 복음주의권 번영신학에서는 권력, 인기 그리고 성장에 대한 잘못된 가치관과 환상으로 말미암아 기독교 내의 성공에 대한 건전하지 못한 선입견과 복음의 메시지보다도 방법론, 진리 보다는 기법, 질보다는 양을 추구해 나가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개혁신학자 프랜시스 쉐퍼(Francis Shaeffer)는 오늘날 복음주의 기독교를 파괴시키고 손상시키는 것은 다름 아닌 복음주의라는 명목을 가진 잘못된 복음주의임을 경고하였다. 그는 오늘날의 기독교가 인생의 진정한 목적이 되질 못하고 사람들의 기호나 만족시켜주는 대용품으로 전락하고 천박해졌으며, 피상적으로 되어가고 있음을 지적했다.

 

미국 번영 복음주의자들은 존 듀이(John Dewey)의 실용주의 철학의 영향을 받아 종교를 적극적 사고방식에 의한 심리학적 긍정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이러한 긍정의 힘과 적극적 사고방식을 강조하는 설교는 종교의 기능 가운데 위로와 소망 그리고 “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서 오는 인간 승리, 사업성공 등 수평적 차원의 행복일 뿐이다. 신앙이란 성공을 위해 필요한 수단이며, 하나님이란 인간의 필요를 충족시켜주는 역할을 하는 존재 이상을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조엘 오스틴(Joel Osteen)과 로버트 슐러(Robert Schuller)의 설교는 신자가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갖는 것을 강조하는 수직적 차원을 경시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오늘날 이러한 미국의 소위 복음주의 설교자들은 청중을 소비자로 간주하고 그들의 구미(口味)에 맞는 설교를 들려줘야 설교를 부담없이 듣게 된다고 주장한다. 미국 버지니아 대학의 사회학 교수인 제임스 헌터(James D. Hunter)는 열여섯개의 복음주의권 학교들의 학생들과 교수진을 분석하였다. 이들 가운데 67%가 자신들이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받아들이는 첫 번째 이유가‘인생의 의미와 목적에 대한 인식"이며,“하나님이 내 삶에 변화를 주셨다”말하고 있다. 이들 거의 절반(46%)이 대부분의 상황에서 사람들에게 회개하지 않으면 지옥갈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주 밥맛없이‘ 느끼고 있다“고 대답하였다.

도날드 블로쉬(Donald Bloesch)는 다음같이 개탄한다: “오늘날 미국의 기독교인들의 교회생활 속에서 뚜렷이 나타나고 있는 현상 중의 하나는 교리적이며 사도들로부터 전승되어 오는 기독교의 본질적 내용이 교회 내에서 점점 사라지고 있으며, 내면적 영성의 개발이나 영혼구원에 관해서는 중요성을 부여하면서, 종교개혁으로 재발견되고, 그 가치가 새롭게 증가된 사도적 신앙에 대한 신뢰는 형편없을 정도로 부족한 지경에 있다.” 그는 역사적 복음주의와 세속화된 복음주의를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 복음주의 신앙은 사도적 증거에 기초하고 펠라기우스주의와의 투쟁과정에서 어거스틴에 의해서 재확인되고 종교개혁자들과 청교도들에 의해 재발견된 역사적 기독교 신앙이다. 이러한 역사적 복음주의는 오늘날 미국 기독교 내에 참으로 심하게 침투되어 있는 관념화된 복음주의 혹은 세속문화에 오염된 복음주의와는 명백히 구분되어야 한다.”

 

2. 번영주의 설교

 

미국의 유명 시사주간지 『타임』(Time)은 2006년 12월호에서 부유한 삶에 대해 높은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 교회들이 늘어가고 있다고 보도했다. 『타임』은 오늘날 미국 복음주의 교회의 설교주제가 부유함을 하나님의 축복이면서 신앙의 열매로 강조하는 경향이 늘어나고 있다고 지적했다. “하나님은 당신이 부자이길 원하시는가? 이를 지지하는 복음주의자들이 늘고 있다”고 심층 보도하였다.

 

『타임』이 보도한 내용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1980년대 구가하던 번영의 신학이 최근 다시 부활한 가운데 예측할 수 없을 만큼 붐을 이루고 있다. 타임지의 보도는, ‘긍정의 힘’으로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른 휴스턴의 레이크우드교회의 담임목사 조엘 오스틴(Joel Osteen), 포터스하우스교회의 담임목사 제이크, 월드체인저스교회의 담임목사 크레플로달람 등 소위 미국사회에 큰 영향을 끼치는 메가처치(megachurch) 목회자들의 목회방침을 집중 조명하고 있다. 이들 목회자들은 번영의 신학을 인용하며 설교하고 있다.

 

미국사회에 영향력을 끼치는 소위 메가처치(megachurch)의 설교흐름은 ‘번영의 신학’(Theology of Prosperity)에 기초하고 있다. 번영신학은 부자 되기 원하는 성도들의 구미에 맞는 설교를 제공한다. 기독교 서적으로서 일반 도서판매량에서 상위권에 오른 ‘긍정의 힘’은 세계 보수주의 교회는 물론 자유주의 교회에까지 엄청난 반향을 일으킨 바 있다. 이와 관련, 레이크우드감리교회 담임목사 템플은 “기독교 문화에서 번영의 복음은 어디에나 있다. 가장 가까운 서점에 가서 많이 판매되는 서적의 종류가 무엇인지 한 번 확인해 보면 우리는 번영의 신학이 얼마나 깊숙하게 들어와 있는지 알게 될 것이다.”라고 밝혔다.

 

현재 3만명이 출석하고 있는 레이크우드교회의 오스틴은 자신은 결코 돈에 대해 설교하지 않았다며 자신의 축복관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나는 누구나 자신의 삶을 향상시킬 수 있다고 설교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잘 되길 원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행복하길 원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청구서에 대해 지불할 돈이 필요한 것도 아시고, 자녀들이 대학에 입학하기 원하는 우리의 생각도 아신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축복이 되길 원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가 부자가 되기 원하신다고 하지는 않았다. 이것은 상대적인 것이다.” 오스틴은 돈에 대해 직접적인 설교는 하지 않았지만 하나님-개인의 관계를 ‘필요를 충족하는 관계’로 설정한 것만은 사실이다. 오스틴은 2009년 4월 25일에도 뉴욕의 양키스 스타디움에서 “희망의 밤”(Night of Hope)을 가지고 여기에 모인 4만7천여명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였다.

 

텔레비전의 인기 설교가면서 목사요 작가인 조이스 메이어(Joyce Mayer)는 다음같이 주장한다. “누가 천국에 갈 때까지 비참하고 가난하고 상처받고 추한 채로 있어야 하는 신앙에 들어가고 싶겠는가. 나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고 싶어 하신다고 믿는다. 하나님은 우리가 부자가 되기길 원하신다.” 그는 직접적으로 기독교신자들은 부자가 되어야 마땅하다고 설교하고 있다.

 

이처럼 번영주의 설교는 메가처치(megachurch)에서 강하게 주장되며 현재는 사회적 정치적으로 늘 비판적이어서 언제나 이방인 취급을 당해왔던 흑인교회를 점령하는 중에 있다. 매주 8,500여 명이 모이는 월드체인저스교회의 담임목사 달라는 이렇게 설교한다. “하나님의 권능이 바로 이곳에 임할 태세로 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합니다. 나는 우리가 언제 교회에 나가야하는지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일터로 나아갈 때 하나님의 권능이 여러분과 함께 할 것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설교는 주로 사람들이, 특히 전문직에서 성공하는데 영감을 받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는 “번영의 복음은 회중이 필요로 하는 것들을 말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달라는 복음서를 인용해 설교하는 중 가능하면 신도들에게 실생활에서 태도를 연마하고 집중력과 활동력을 기르면서 일상생활에서 절도를 지키고 또 사고방식을 바꾸어 결국에는 어떻게 보다 바람직한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알려주려고 노력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복음은 구원의 복음에서 실생활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바꾸는 삶의 실용적인 기술로 변모하고 있다.

 

미국 메가처치들이 강조하는 번영의 복음(신학)은 그동안 의도적으로 무관심했던 재정(財政)에 대한 관심이 목회주제에 포함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합리성과 실용이라는 단어가 익숙한 미국 중산층 이상의 교인들을 대상으로 한 메가처치들의 신 목회조류는 교인들의 기호를 따라가는 현대목회 패턴의 드러내 준다. 이들 번영주의 복음 전도자들은 “예수야말로 자기 향상-자기 개발에 있어서 최상의 프로그램”이라고 본다, 성공과 능력(힘, 재력, 권력) 개발 프로그램을 개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죄나 죄책감 등을 유발하는 부정적인 설교(은혜, 선택, 칭의, 대속적 구속에 관한 주제)로 회중들의 기분을 나쁘게 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미국의 새로운 경향 덕분에 혜택을 본 교단은 오순절교회였다. 신앙 치유운동자인 패트 로버트슨(Pat Robertson)은 믿음을 “우주적 힘(cosmic power)의 단추를 누르는 손가락”이라고 본다. 그는 회중들에게 ‘번영의 법칙“을 활용하라고 설교한다: ”그것은 라디오 주파수나 텔레비전의 채널을 맞추는 것과 같아서 바른 주파수를 맞추면 그 프로그램을 잡을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오순절교단은 사실상 ‘근면히 일하는 것’, ‘좋은 가정경제 꾸리기’를 강조해 왔는데 이른바 번영의 복음 때문에 오순절교단은 미국의 주류교단으로 설 수 있게 됐다.

 

3. 한국교회의 번영주의 및 성공주의

1) 한국사회: 동방예의지국에서 자본주의적 물량사회로 변화

 

최근 동방예의지국인 우리 한국사회를 뒤집어 놓은 것은 ‘돈버는 것’이었다. 경제적인 윤택함을 가장 좋은 미덕이면서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증거물로 주장하곤 했다. 1970년대의 새마을운동, 1980년대의 올림픽 유치에 이어 벤처열풍과 신용카드 시대 등 우리가 살아왔던 지난 시간들은 ‘경제적인 여유만이 유일한 우리의 살 길’임을 주장해왔던 시기였다.

 

여기서 문제는 단 하나, 우리의 안전과 삶을 보장하는 것을 하나님이 아니라 돈이라고 믿는 이 시대의 삶의 문화가 갈수록 견고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물질의 옹위를 받으며 부를 축적해야 삶이 안전해 진다는 우리의 생각들이 매우 강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복지국가에 대한 환상은 경계할 만하다. 풍요로움이 에워싼 복지국가의 실체는 사실 하나님의 보호로 이루어진 국가가 아니라는 점에서 우리는 다른 시각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물질적인 기반을 전제로 한 복지국가의 실현은, 유감스럽게도 하나님 없는 국가의 도래를 기대하는 것일 수 있음을 상기해야 한다. 물질로부터 안전을 기대하는 교회와 신앙인들의 왜곡되고 변질되는 삶의 문화는 우리가 사는 도시를 물질만능의 도시면서 은행과 거대기업을 중심에 둔 도시로 만드는데 도움을 줄 뿐이다.

 

하나님을 믿되 어떻게 믿을 것인가?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물질을 신앙과 관련해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 우리는 21세기를 살면서 매우 진지하고 구체적으로 물어 보어야 한다. 신도시 뉴타운에 교회부지를 분양받은 것을 놓고 기뻐하는 목회자들이 많다. 교회의 가치는 영혼구원이 일어나는 기적적인 장소로서 놀랍기 보다는 엄청난 부동산 가격상승에서 비롯된 교회의 건물가치 상승 때문에 놀라는 곳으로 변질되고 있다. 과부의 두 렙돈에 감격하는 대신 교회건축에 내놓는 수 억 원에 감격한다. 가난한 신앙인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한 사람이어서 빨리 부자가 되어 하나님의 축복을 증거해야 할 책임이 있다고 가르치기도 한다.

 

2) 번영주의와 성공주의에 물든 한국교회 강단

 

미국 복음주의권 목회자들 가운데서도 이러한 번영주의적 설교를 심각한 문제라고 진단하며 “거짓 우상을 만드는 일에 교회가 앞장서고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목적이 이끄는 삶』의 저자로 우리나라에 와서 세미나를 인도했던 새들백교회의 담임목사 릭 워렌(Rick Warren)은 번영의 복음을 ‘허튼 소리’라고 일축하며 ‘우상을 섬기는 일’이라고 크게 우려하고 있다.

 

번영과 기복을 강조하는 시대에 개혁교회와 신학은 개혁주의 전통을 다시 활성화 시켜야 한다. 물질적인 부요보다 영적인 부요가 더 가치가 있다. 영적인 풍요와 함께 물질적인 풍성함 역시 기독교인이 누려야할 복이지만, 이를 너무 강조한 나머지 십자가 복음의 진리를 잊어버리거나 왜곡하게 하는 사실이라는 것을 새겨야 한다. 부(富)와 번영, 긍정의 사고방식은 오직 십자가의 복음을 믿을 때 그 다음에 찾아오는 부차적인 것이다. 우선순위가 뒤바뀔 수 있는 현대사회의 치열한 경쟁 때문에 복음의 진리는 늘 세상 속에서 위협을 받고 있다. 사회 정치적으로 미국의 영향력이 그 어느 때보다 강해지고 있는 최근, 미국 대형교회의 한국기독교에 대한 파워 역시 점점 커지는 양상이다. 우리나라 대형교회들 역시 이같은 흐름을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한국교회는 세속의 가치나 풍조에 따라가서는 않된다. 예수님은 너희는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라고 하셨다. 교회는 세상을 밝히는 등대가 되고 부패를 방지하는 소금이 되어야 한다. 오늘날 포스트모던 시대를 주도하는 가장 영향력 있는 중심의 실체는 경제력이다. 그리고 대도시의 중심에는 은행과 거대기업 건물 그리고 고층빌딩이 자리 잡고 있다. ‘돈 버는 일’이야말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이 시대의 문화를 반영하고 있다.

 

겸손과 양보와 정직과 근면이 신자의 주요덕목이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상징물이 우리의 삶 가운데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어야 하는데 유감스럽게도 세속적 번영과 성공이 오늘날의 금송아지로 자리잡고 있다.

 

최근 일산의 한 교회는 장로를 세우는 과정에서 교회내분이 일어났다. 교회 리모델링을 앞두고 있는 교회는 은퇴장로의 자리를 위해 3명의 장로를 세웠고 후보자는 각각 3천만 원의 헌금을 약정했다. 문제는 장로 후보자의 자질검증에 있었다. 평상시 주일 대예배 지각과 결석을 반복하던 한 성도가 장로후보에 거론되자 성도들이 반발하고 나선 것이다. 교회의 임명 강행에 급기야 성도들은 장로를 뽑는 기준을 제시해달라고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교회의 제직 임명이 헌금과 관련된 것은 한 두 교회만의 특이한 사례가 아니다. 이러한 관행은 한국교회 전반에 퍼진 것이며 헌신과 봉사의 직책보다 명예와 권력의 자리로 인식되고 있다. 실제로 개 교회 장로들은 교단에서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니 권력이 없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왜 교회가 직분을 매매하기에 이르렀을까. 성직자들이 먼저 물질에 무릎을 꿇었기 때문은 아닐까. 교회지도자의 타락은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신학교육의 타락은 목회자의 질적 하락을 가져왔고 검증받지 못한 교회를 여기저기 세우는 결과를 초래했다. 또 교회의 성장은 막대한 헌금을 동원할 수 있는 능력을 목회자에게 주었다. 그래서 스스로 풍성한 헌금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노력한 목회자를 찾기란 힘든 실정이다. 심지어 1990년대 이후 교회건축 붐이 일면서 교회당 매매까지 극성을 부리고 있으니 안타까운 상황이 아닐 수 없다.

 

3) 한국교회 강단의 번영주의 설교

한국교회의 위기는 설교의 위기, 강단의 위기에서 비롯된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대사회적 역량을 상실하고 세상으로부터의 비판을 넘어 혹독한 비난의 대상으로까지 전락하면서 성도들도 급격하게 줄어들고 있다. 우리는 “한국의 대형교회 강단이 건강한 강단일 것이라는 그릇된 인식에서 벗어나야 하며, 물량주의의 대형교회를 우상화하는 한국교회의 잘못된 시각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오늘날 한국교회 위기에는 대형교회의 책임이 적지 않다. 한국교회 상위 20개 대형교회 성도의 수를 합하면 150만 명 이상이다. 또 이들은 사회 각계각층에서 활동하고 있다. 이들이 세상에 나가 그리스도인처럼 살고 있다면 한국교회가 이렇게 비난을 받지 않을 것이다.

한국 성도들은 너무 이기적이고 독선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 같다. 한국교회 성도들은 공익을 추구하기 보다는 사익추구에 보다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고, 교회 안에서의 윤리는 강조하면서도 정작 사회 안에서의 윤리, 사회 정의에는 관심이 없는 것 같다. 이러한 원인은 바로 목회자들에게 있다. 그렇기 때문에 목회자는 청중들이 들을 수 있는 언어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노력을 통해 청중들의 삶을 변화시켜 나가야 한다. 특히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않아야 한다. 사도바울 당시 자신의 권력과 신학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복음을 미끼로 쓴 이들이 많았는데, 오늘날 복음에 불순물을 넣고 있는 설교자들에게도 사도바울은 똑같이 지적하고 있다.

부와 성공을 강조하는 설교는 성경적이지 않고 개혁주의 전통에도 어긋난다. “많은 목회자들이 적극적, 긍정적인 사고방식이나, 성공에만 관심을 집중시켜 예수님의 십자가가 없는 말씀을 전하고 있다. 설교자는 청중들이 듣기 원하는 설교를 하는 것이 아니라 청중들이 들어야 하는 설교를 해야 한다”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이런 십자가 중심의 설교를 듣기 힘들다.”오늘날 교회성장이란 이름으로 마케팅 원리를 적용하여 추구신학을 추진하는 인위적 노력이 행해지고 있다. 오늘날 이러한 인본주의 설교의 경향은 오늘날 한국교회 강단을 오염시키고 있다. 결과적으로 사죄의 은총과 사죄를 통한 구원의 감격이 소멸되어 가는 불행한 교인을 만들어 가고 있는 현실이다.

 

4) 값싼 복음은 면죄부 판매

 

사랑의교회 원로목사 옥한흠은 “예수 이름이면 무엇이나 통하고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든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값싼 복음이 남발되고 있다”고 한국교회 설교의 위기를 지적한 바 있다. 물량주의와 타협한 교회는 더 많은 성도를 끌어 모으기 위해 헌금을 받고 하나님의 축복을 팔아왔다.“사람들의 비위에 맞춘 값싼 설교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고도 회개할 줄 모르는 간 큰 예배자를 양산했다.”“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고도 회개할 줄 모른다”는 표현은 오늘날 ‘어게인 1907’을 외치며 “회개합니다”라고 눈물을 쏟아내는 성도들에게 다시 들려주어야할 말이다. 눈물을 흘리고 애통함에 무릎꿇고 기도하는 이들이 있지만 부흥은 오지 않는다. 진정성이 결여됐기 때문이다. “내 기도만 들어주시는 하나님이 내 죄만은 용서해주실 것”이라는 성도들의 비뚤어진 신앙은 헌금으로 면죄부를 사고 헌금으로 축복을 받는 웃지못할 상황을 만들었다. 교회 밖에서 누가 봐도 손가락질을 받을만한 사람도 교회 안에만 들어서면 존경받은 성도가 되는 것이 교회의 현실이다. 밖에서 숱한 죄를 지어도 교회 안에서는 새벽예배에 성실히 참여하고 십일조를 정확히 드리며 주일성수에 최선을 다하는 교인이기 때문이다.

 

II. 중세교회의 영광의 신학 비판으로서 루터의 십자가 신학

 

위에서 살펴 본 바 번영과 성공을 신앙의 기준으로 보는 번영주의는 신학적으로 이미 중세를 지배한 스콜라의 영광신학에서 나타나고 있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세속적인 번영과 성공에서 하나님을 찾으려고 한 중세 스콜라 신학을 영광의 신학이라고 부르면서 이에 대한 대안으로 십자가 신학을 제시하였다.

십자가 신학(theologia crucis)은 루터가 1518년 개최된 하이델베르그 논쟁(Die Heidelberger Disputation)에서 발표한 그의 신학의 특징을 드러내는 중요한 착상이다. 이 토론에서 루터는 40개 논제를 준비했는데 그중에서 28개는 신학에 관한 것, 12개는 철학에 관한 것이었다. 루터는 이 논제에서 인간의 죄성, 인간의 노예의지,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공로가 배제된 하나님의 절대적 은총을 말하고 있다. 루터는 이 논제에서 신 인식에 관한 중세 스콜라주의를 “영광의 신학”(theologia gloriae)이라 불렀고, 그가 제시한 신학을 “십자가 신학”(theologia crucis)이라고 불렀다.

 

1. 영광신학 비판 - 잘못된 하나님 인식의 길

 

루터는 영광의 신학을 다음같이 정의한다: 영광의 신학이란 “신학자가 하나님의 본질을 그의 사역에서 지각해서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본질을 보는” 신학이다. 영광의 신학은 출애굽기 33장이 보여주는 모세처럼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자 하는 신학이다. 영광의 신학은 하나님의 사역을 통해 하나님을 인식하고자 하며 하나님의 보이는 본질을 통해서 그의 보이지 않는 본질의 지혜를 파기한다. 루터는 피력한다: “만일 인간이 하나님을 십자가의 낮아지심과 수치 속에서 인식하지 않고 하나님을 그의 영광과 존엄성 속에서 인식하는 것은 어느 누구에게도 충분하지 않고 필요하지 않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직접적 인식이요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길이다. 영광의 신학은 “주여 아버지를 보여주소서”(요14:8) 라고 간청하는 빌립의 요구에 상응하는 신학이다. 그러나 예수는 빌립처럼 다른 곳에서 하나님을 찾는 자들을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린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느니라”(요14;8).

 

영광의 신학이란 하나님의 사역(Werke)으로부터 시도하는 하나님의 인식이다. 이 사역이란 창조에 나타난 하나님의 일을 말한다. 그리고 인간의 행위이다. 하나님을 창조사역으로부터 인식하고자 하는 자연신학과 사변적 형이상학과 도덕적 인간의 행위 거룩성은 함께 속한다. 영광의 신학은 인간을 자기 공로를 내세우는 교만으로 이끌고 간다. 영광의 신학은 하나님을 인식하는데 “영광과 능력”(Glorie und Macht)을 기준으로 내세운다.

 

루터는 중세 스콜라주의가 인간의 행위를 강조하는 영광의 신학이라고 비판하면서 하나님의 은총을 강조하는 십자가 신학을 제시하고 있다. 중세의 스콜라주의는 인간의 도덕적 노력과 이성적 추론에 의하여 하나님 인식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보았다. 이것은 인간의 종교적 사색이나 행위의 의(work-righteousness)를 통하여 하나님에게 직접 나아고자 하는 인본주의적 시도이다. 이것은 인간으로부터 하나님에게로 상승하는 구조를 갖는다. 그러므로 이는 영광의 신학이다. 영광의 신학은 하나님을 공개적인 신적 능력, 지혜와 영광 속에서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인식하고자 한다. 영광의 신학은 인간을 윤리적 실적으로 행위하는 자, 하나님 앞에 율법의 이행자로서 세운다. 그래서 도덕적 행위주의(moralischer Aktivismus)를 정당화 한다.

 

세상의 지혜란 인간의 도덕성과 이성의 능력을 말하며, 여기서 인간은 자기의 공로를 통하여 하나님에게로 나가고자 한다. 이것은 영광의 신학이다. 영광의 신학은 십자가에 달리시고 십자가에 감추어져 있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세상의 영광과 인정을 얻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루터는 이 영광의 신학이 인간의 도덕성과 이성을 신뢰하는 도덕주의와 합리주의에 기인한 다. 루터는 이러한 인간의 방법으로는 하나님에게 다가 갈 수 없다고 선언한다. 인간이 하나님에게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에 달려 있다. 세상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을 보지 못한다. 세상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달린 약하고 무능한 자로 보기 때문이다.

 

오늘날 미국에서 시작하여 한국의 설교단에 영향을 미치는 성공주의와 번영주의 설교는 그 역사적 뿌리를 이 중세의 영광의 신학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번영의 신학은 신자가 축복을 받고, 교회가 양적으로 팽창하고, 신자가 하는 모든 사업이 잘 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과 직결되는 것으로 선포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속의 번영과 성공에서 자신을 드러내지 아니하신다. 역사적으로 중세에 있었던 십자군 전쟁, 성지 예루살렘을 이슬람으로부터 탈환하기 위한 십자군 원정은 당시 세속적인 성과를 거둔지는 몰라도 인간의 힘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겠다는 영광의 신학 사고가 지배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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