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가지 옷

두 가지 옷

두 가지 옷 이야기


옷이 날개란 말이 있다.
어떤 옷을 입느냐에 따라서 사람이 달라 보인다.
인류 역사는 옷의 역사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의, 식, 주이다.
옷을 가장 앞세워 말하는 것을 보면 옷의 가치를 알 수가 있다.


그러나 재미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처음 인간을 창조하여서 에덴동산에서 살게 하였을 때에는 옷이란 것이 필요 없었다는 것이다.


창 2장 25절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한 인간은 처음엔 옷을 입지 않고 벌거벗고 살았다.
그럼에도 부끄러움을 몰랐다.
인간이 옷을 입게 된 것은 범죄이후부터이다.
선악과를 먹고 난 후 벌거벗음이 부끄러움으로 느껴지기 시작하였다.


우리는 흔히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은 것을 죄라고 한다.
그렇다면 죄가 인간으로 하여금 옷을 필요로 하게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기 전에는 벌거벗음이 수치가 아니었다.
죄가 수치를 몰고 온 것이다.
죄란? 하나님 앞에서 수치이다.


수치라고 여겨지면 가리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다.
아담과 하와가 옷을 입게 된 배경은 수치를 가리기 위함이었다.


그렇다면 왜? 선악과를 먹었는데 수치를 느끼게 되었을까?
벌거벗음이 수치라고 여겨진 것은 다른 눈이 떠졌다는 뜻이다.
선악과는 인간으로 하여금 다른 눈을 뜨게 만들었다.
선악과가 다른 눈을 뜨게 하였다는 것은 다른 생각으로 판단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선악과가 하나님과의 다른 생각을 갖도록 한 것이다.
이름하여 죄이다.


하나님과 다른 눈을 가졌다는 것은 곧 하나님과 다른 생명이라는 말이다.
결국 선악과 속에는 하나님과 다른 생명이 들어있었던 것이다.
알다시피 하나님은 영생하시는 분이다. 하나님의 생명은 영생하는 생명이시다.


그러나 선악과 속에는 죽음이 들어가 있다.
영생이 들어가 있는 생명과 와는 전혀 다른 생명인 것이다.
생명과 속에는 생명이 들어가 있지만, 선악과 속에는 죽음이 들어가 있다.


생명과 죽음은 하나가 될 수 없는 다른 본질이다. 영역이 다르다.
마치 빛과 어두움과 같다.
서로 영역이 다르기 때문에 하나가 될 수가 없다.


하나님은 영생하시는 분인데 선악과를 먹은 인간은 죽은 자가 되었다.
하나님은 산 분이신데, 인간은 죽은 송장이다.


사람들은 사람이 죽으면 송장과 같이 살수가 없기 때문에 멀리 내어다 격리시킨다.
산 자와 송장은 서로 다른 영역에 속한 자가 되었다는 말이다.
서로 다른 영역에 속하였기 때문에 그 영역의 선과 악 기준에 따라 판단하게 되는 것이다.


생명의 세계에선 선악과 자체가 수치이다.
즉 영생 없음 곧 죽음이 수치이다.
그러나 선악의 세계에선 선과 악을 이분적으로 나누어서 선에 속한 것은 선으로 보고 악에 속한 것을 수치로 본다.
그러니 선악의 영역에서 내어놓은 선을 생명의 영역에선 선으로 보지 않고 악으로 본다.
물론 악 역시 악이다.
생명의 세계에선 선악의 세계에서 내어놓은 그 모든 것을 악으로 규정한다.
이처럼 생명과 죽음은 종(種)이 다르고 영역도 다르고 가치 기준도 다르다.


성경적 증거는 죄인은 사람으로 보질 않는다.
성경은 죄 없는 의인만 사람이라 한다.
그렇다면 선악과를 먹은 아담의 후손에선 의인이 없다는 말이다.
의인은 죄와 상관이 없는 생명의 세계에서 오신 분이라야만 된다.
그래서 이 세상에선 하늘로부터 오신 예수님만이 진짜 사람인 것이다.
예수님은 인자라 함은 곧 예수님만이 참 사람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선 이런 원리로 예수 안에 있는 성도만 사람으로 보신다.
예수 밖에 사람은 짐승이지 사람이 아니다.
결국 예수 안에 있는 성도와 예수 밖에 있는 사람은 서로 다른 종(種)인 것이다.
성경은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다른 종(種)이어서 하나 될 수가 없었듯이 성도와 이방사람은 다른 종(種)이므로 믿지 않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원리가 교회 안에선 율법 아래 있는 사람과 은혜 아래 있는 사람은 서로의 영역이 다르고 종(種)이 다르기 때문에 선과 악이 다르게 된다. (율법과 은혜는 차후에 살펴보자)


각설하고 같은 종(種) 끼리는 벌거벗어도 수치를 느끼지 않지만, 다른 종(種)을 만나면 수치를 느낀다.


이러한 현상은 인간 세상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동일한 성(性)을 가진 사람들끼리 있으면 벌거벗음을 수치로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자기와 다른 성(性)가진 사람을 만나면 벌거벗음을 수치로 여기게 된다.


사람이 처음 태어날 때는 벌거벗은 몸으로 태어난다.
어린 아이 때는 벌거벗음을 수치로 여기지 못한다.
어린아이들은 남자와 여자라는 성(性)을 모른다.
갓난아기들은 발가벗음을 수치로 여기지도 않고 남자와 여자가 벗고 있어도 수치를 모르고 함께 어울린다.


그러다가 자라가면서 자기 성(性)의 정체성에 눈을 뜨게 된다.
남자와 여자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비로서 벌거벗음이 수치로 느껴지고 옷을 찾아 입게 된다.
옷을 찾아 입게 되는 것은 벌거벗음이 수치라는 생각이 들면서부터이다.


그렇다면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고 나서 벌거벗음이 하나님 앞에서 수치로 다가왔다는 것은 곧 자신들이 하나님과의 다른 종(種)이라는 것을 알았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으면 정녕 죽는다고 한 것은 하나님과 다른 생명의 눈을 같게 되기 때문이었다.
하나님과 다른 눈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에 문제의 심각성은 하나님과 다른 눈을 갖게 되면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아름다움으로 보이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벌거벗음을 수치로 보시지 않았는데도 아담과 하와는 수치로 본 것이다.


하나님과 다른 눈 때문에 급기야는 옷을 만들어 입고 수치를 가리고자 한 것이다.
인간들이 에덴동산에서 쫓겨 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처럼 하나님과 다른 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나라에선 하나님과 다른 눈을 가지고서는 함께 살아갈 수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보시기엔 선(善)한 것도, 인간의 눈엔 악(惡)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눈에 좋은 일도 인간의 눈에는 나쁜 일로 보이기 때문이다.


다른 눈을 가지고 함께 있으면 서로가 불편하다.
그래서 하나님은 부득불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쫓아 낼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하나님 앞에서 죄가 무엇인지 알 수가 있다.
죄란? 하나님과 다른 눈을 가지게 된 것이다.
즉 다른 생명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러니 죄인과 하나님은 같이 살 수가 없다.


하나님이 세상을 바라보는 것과 인간들이 바라보는 세상은 다를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불로 태워 버릴 곳으로 보는데 인간들은 살기 좋은 곳이라고 본다.
하나님은 인간들을 죽은 자로 보는데, 인간들은 우리가 왜? 죽었느냐? 이렇게 시퍼렇게 살고 있는데 라고 하며 산 자로 본다.
이처럼 하나님과 인간이 보는 눈은 극과 극으로 다르기 때문에 합일점이 없다.


요한계시록 3장에 보면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한 영적 진단을 내리는데 있어서 하나님과 인간들이 보는 시각이 극과 극임을 알 수가 있다.


계 3:17-18=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라오디게아 교회 교인들은 스스로 "부자고, 부요하며, 부족한 것이 없다"라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모습이라고 한다.
전혀 다른 시각이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아시아의 일곱 교회 중에 맨 마지막 교회인데 어쩌면 마지막 시대의 교회 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들의 영적 상태가 한마디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영 아니올시다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 보시기에 그렇지 라오디게아 교회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처럼 보는 눈이 다르니 어찌하겠는가?
그래서 하나님은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가리라고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네 꼬라지를 제대로 좀 보라고 하신다.


그렇다면 교회들이 가장 우선적으로 하여야 하는 일이란 안약을 사서 눈을 뜨는 것이고, 흰옷을 사서 부끄러운 수치를 가리는 일이다.


하나님은 라오디게아 교회를 통하여서 지금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다.
수치를 가려줄 옷을 입으라고,,,,


그럼 에덴동산에서 인간이 옷을 입게 된 이야기를 탐사해 보자.


어느 날 뱀이 하와를 찾아 와서 말을 건넨다. 뱀이 여자에게 한 말을 들어보자.


창 3장 5절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뱀은 여자에게 선악과를 먹으면 눈이 밝아 하나님 같이 된다고 말해 주었다.
그러자 하와는 뱀의 말을 듣고 선악과를 따 먹었다.


7절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뱀이 선악과를 먹으면 눈이 밝아진다고 한 말을 거짓말이 아니었다.
실제로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 먹고 난 후 눈이 밝아졌다.


선악과를 먹기 전에 눈은 벌거벗음이 아름다움이었는데, 선악과를 먹고 난 후에는 벌거벗음이 수치로 보여지는 눈으로 밝아진 것이다.


벌거벗음이 수치란 것을 알게 된 눈을 갖고 보니 하나님이 두려운 존재가 되어버렸다.
눈이 밝아지고 나니 하나님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하였다.
선악과를 먹기 전에는 다정다감하신 하나님이었는데, 선악과를 먹고 나서는 두렵고 무서운 하나님으로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평온하던 마음에 두려움이 엄습하면서 갑자기 하나님이 무섭고 싫어졌다.
하나님이 무서워 보이는 데서야 어찌 숨지 않고 도망을 치지 않겠는가?
하나님이 없는 곳으로 도망을 치고 싶어졌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가 눈에 띄지 않자 찾기 시작 하셨다.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


8절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9절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아담과 하와는 서로를 바라보면서 아니! 우리가 왜 이렇게 되었지!
왜? 하나님이 무서워지고 싫어졌지!
전엔 안 그랬는데!
이상하네!
마음 속에 하나님이 무섭고 싫어져서는 에덴동산에서 살라고 해도 살지를 못한다.
싫고 무서운 하나님과 함께 산다는 것은 그 자체가 지옥이다.
차라리 하나님이 안 보이는 곳으로 도망치고 싶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쫓아낸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다.
참 희한한 사랑도 다 있다.
이런 사랑을 히 12장에서 아버지가 아들을 징계하는 사랑이라고 한다.


암튼 선악과를 먹고 난 이후에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이 싫어졌다.


이제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 완전히 다른 종(種)이 되다 보니 자연히 하나님과 다른 눈으로 보고 판단하게 된다.
그러니 판단한 것도 하나님과 다를 수밖에 없다.
이렇게 다를 수 밖에 없으니 자기방식으로 수치를 가리는 일을 시작 한 것이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부름에 더는 숨을 수가 없었다.
그리곤 벌거벗은 모습으로는 하나님 앞에 두려워서 나아갈 수가 없다.
자기 양심에 따라서 뭔가로 수치를 가려야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두 사람은 부랴부랴 무화과 나뭇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수치를 감추게 된다.
이렇게 하여 인류 최초의 옷이 만들어졌다.
아담과 하와는 옷으로 수치를 가릴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인간들은 수치를 가리는 일에 일평생 허비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
이것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허비하는 삶이지 인간들은 허비로 보지 않고 최고로 아름다운 삶이라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뙤약볕에서 무화과나뭇잎으로 만든 치마를 가차없이 걷어 내어버린다.
결국 아담과 하와는 헛 고생만 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담이 만든 옷을 벗겨 냄으로서 너희가 수치를 가리려고 하는 일은 허튼 짓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이 만든 옷을 벗겨내고 하나님이 친히 옷을 만들어 입혀 주었다.
이는 곧 죄의 수치는 하나님이 가려 주셔야만 기려진다는 것을 알려 주신 것이다.
너희들은 수치를 가리고 싶겠지만 그러나 그 수치는 내가 가려주어야만 된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입혀준 옷은 짐승의 희생으로 얻어진 가죽으로 만든 옷이다.
이는 곧 인간의 수치는 누군가가 대신 가려주어야 된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가죽 옷을 입히시고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쫓아 내셨다.


여기서 두 가지 알 수 있는 것은
첫째로는 죄인들의 수치는 하나님이 가려주신다는 것이고,
둘째로는 죄인들의 수치를 가리기 위해서 흠 없는 짐승이 죽는다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어떻게 처리하실 것인가를 알려 주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죄란? 수치를 말하는데 죄는 하나님께서 가려주신다는 뜻이다.
인간 쪽에서 죄를 가릴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죄는 하나님께서 가려 줄 때만 가려지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가리기 위해 입혀준 옷이 짐승의 희생을 통하여 얻어진 가죽옷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수치)를 가리기 위해 죄 없는 짐승을 죽이신 것이다.
희생당하지 않아도 될 짐승이 인간의 죄로 인하여 죽임을 당하였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죽어야 할 아담과 하와를 살리기 위해서 대신 짐승을 죽인 것이다.


그런데 에덴동산에서 죽은 짐승의 실체가 구약 이스라엘에서는 어린양으로 나타난다.
(물론 신약에 와서는 세례요한은 아예 유월절 어린양은 예수님이라고 규정하였다. 즉 예수님이 죄라는 수치를 가려주실 분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옷이다.)
암튼 에덴동산에서 죽은 짐승이 구약마당에선 이스라엘 대신 유월절 어린양으로 등장한다.
애굽에 죽음의 재앙이 들이닥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린양의 피로 살아났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살리기 위해 흠 없는 어린양을 죽인 것이다.
어린양이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죽었다.


이는 에덴동산 식으로 말하면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입혀 준 것과 같다.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선 아담과 하와의 수치를 가리기 위해 어린양을 잡아 그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혔듯이 애굽의 심판 때는 이스라엘에겐 어린양을 대신 죽여 살려준 것이다.
아담과 하와가 수치를 가린 것이나, 이스라엘의 장자가 죽음에서 살아난 것이나 영적인 의미는 동일하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어린양을 잡아 죄의 수치를 가려줄 옷을 입혀 준 것이다.


죄가 있는 곳엔 옷이 필요하고, 옷이 있는 곳엔 반드시 죄가 드러나야 한다.
죄와 옷은 항상 한 셋트가 되어 붙어 다닌다.
옷이 있음으로 죄가 드러나고, 죄가 드러남으로 옷이 필요해진다.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자는 옷을 필요로 하고, 모르는 자는 옷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신약에서는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자는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모르는 자는 예수그리스도를 믿지 않는다.
죄인에겐 예수가 옷이 된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피가 죄라는 수치를 가려주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예수를 믿는 성도를 일컬어 예수그리스도로 옷을 입은 자들이라고 하였다.


갈 3:27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


그렇다면 아무리 예수그리스도가 죄인의 옷이 되기 위해 오셨다고 할지라도 인간이 죄인임을 모르면 허사인 것이다.
예수님이 아무리 십자가에서 죄인의 수치를 가리기 위해 대신 죽어 주셨다고 할지라도, 어디까지나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자에게만 통용될 일이다.


그렇다면 예수라는 옷의 필요성을 알게 하려면 인간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먼저 들추어내는 일을 하여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구약마당에선 이스라엘에게 죄(수치)를 드러내기 위해서 율법을 주셨다.
율법 속에 제사 제도를 주신 것은 율법의 정죄를 흠없는 제물의 피로서만 덮어진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함이다.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은 죄를 깨닫게 하여 어린양의 피로서 수치를 가려주시기 위함이었다. 즉 옷을 입혀주기 위함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율법으로 죄를 깨닫기보다는 율법을 지킴으로서 자신의 의로움을 드러내기에 바빴다.
하나님은 "율법으로 넌 죄인이야!" 라고 하는데, 이스라엘은 "율법을 지켜서 난 죄인이 아닙니다" 라고 한다.
하나님은 어린양의 희생으로 죄를 용서 해주시려고 하는데, 이스라엘은 율법을 지켜서 난 용서가 필요치 않습니다 라고 한다.
결국 구약 이스라엘은 아담과 하와 같이 수치를 가리려고, 율법 지킴이라는 무화과 나뭇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입기에 바빴던 것이다.
율법 지킴이란 하나님 앞에선 무가치하고 폐기되어질 무화나무잎으로 만든 치마 일뿐이다.


앞서서 인간은 선악과를 먹고 나서 하나님과 다른 눈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그래서 구약 이스라엘도 그 다른 눈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율법도 다르게 본 것이다.
생명의 세계에서 율법을 보지 않고 선악의 세계에서 보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율법으로 죄를 깨달으라고 주었는데, 이스라엘은 율법을 지켜야 되는 것으로 본 것이다.


하나님은 율법을 지키라고 준 것이 아니라 죄를 깨닫게 하려고 주신 것이므로,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죄로 보지 않는다.
다만 율법으로는 죄를 들추어 낼 뿐이다.
그렇다면 하나님 앞에 죄는 율법으로 자기 죄를 들추어 내지 않는 것이 죄가 되는 것이다.
즉 율법으로 난 죄인입니다 라고 하는 것이 율법을 지킨 것이 된다.
반대로 율법을 지키려고 하면 죄가 된다.
그러나 인간은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죄로 본다.
이게 죄인과 하나님과의 다른 눈이다.


자기 눈에 율법을 지키지 않음이 죄로 보이는 한 지키지 않고는 못 배긴다.
이런 상태를 "율법이 살아있다" 라고 한다.
그러니 율법이 시퍼렇게 살아서 너 왜? 율법을 안 지키느냐고 그림자같이 항상 따라다니면서 닦달을 하는 것이다.


율법이 살아 있는 자는 그 율법의 요구를 따라야 쉼을 얻을 수가 있다.
그러나 율법에 죽어버린 자는 율법과 상관없이 쉼을 얻고 산다.
법이 살아 있으면 그 법은 끝없이 요구를 한다.
법은 인간을 죽여야 비로서 그 역할을 다하게 된다.
그러므로 법의 끝에는 반드시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은 죄를 고발하고 죄는 죽게 한다고 하였다.


고전 15:55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고전 15:56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법이 속에서 살아 있는 사람은 끊임없이 율법을 지켜야 하는 쪽으로 살게 된다.
율법을 지켜야 성도답다고 여기는 한 율법을 지키지 않고서는 성도다움을 누릴 수가 없다. 법이 살아 있는 한 아무리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고 하여도 말씀을 지켜야 한다는 법은 놓치지 않는다.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관념일 뿐이지 실상에선 전혀 힘을 쓰지 못한다.
그래서 법 아래 있는 자들은 자기 행함으로 일희일비(一喜一悲) 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죄가 되지 않으려면 자신이 율법에 대하여는 죽어야 한다.
왜냐하면! 율법이 쏘는 것은 사망이기 때문이다.
죽은 자에겐 율법은 아무런 효력을 발휘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율법에서 벗어나려면 율법에 대하여 죽어서 율법과 상관없는 자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문제는 인간이 어떻게 율법에 대하여 죽어서 벗어 날수가 있느냐이다.


사도바울은 인간이 율법으로부터 벗어 날 수 있는 길을 명쾌하게 답을 해 주었다.


사도바울은 율법과 성도를 남편과 아내로 비유하여 설명하였다.


롬 7장 1-6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율법이 사람의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2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느니라 3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부라 이르되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케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4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5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6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바울의 증거는 율법을 남편처럼 아내의 몸을 주장한다고 한다.
율법이 아내더러 너!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으면 죽여버릴꺼야! 라고 협박을 하고 공포에 떨게 한다는 것이다.
율법이라는 남편이 눈을 부릅뜨고 시퍼렇게 살아 있는 한 아내는 날마다 두려움에 숨을 죽이며 살아가야만 한다.


아내 입장에선 죽지 않기 위해서라도 율법이라는 남편이 요구하는 것을 듣지 아니할 수가 없다.
법 아래 있는 아내에겐 오로지 율법이라는 남편이 요구하는 것을 지켜내는 것뿐이다.


하지만 율법이라는 남편의 요구는 너무도 완벽한 것이라서 흠이 많은 아내로서는 도무지 감당 할 수가 없다.
지옥이 따로 없다.
인정머리 없는 남편과 사는게 지옥이다.
아내 입장에선 남편이 아니라 원수다.
어휴! 저 원수 같은 놈의 신랑 확 뒈지지도 않나!


이 전쟁은 남편이 죽든지 아내가 죽든지 양당간에 누가 죽어야 끝이 나는 싸움이다.


만약 그 율법이라는 남편이 객사라도 하여서 없어져 준다면 아내는 자유인이 될 수가 있다.
그러나 이 율법이라는 남편의 명줄은 고래심줄보다 더 질겨서 세상 끝 날까지 죽지 않고 살아 있는 남편이다.
남편이 죽지 않는다면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아내가 죽어야 한다.
아내가 죽기 전에는 율법이라는 남편으로부터 영영 벗어 날 수가 없다.


그렇지만 문제는 말이 쉬어 죽는다고 하지!
막상 죽으려고 하니 본능이 죽어서는 안 된다고 바짓가랑이를 부여잡고 놓아주질 않는다. 죽는 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으니 어쩌랴!
그냥 한숨쉬며 율법이라는 신랑과 살 수 밖에!
어휴! 이놈에 팔자는 어찌 된 것인지!
차라리 나지 아니했으면 좋았을 것을!
넋두리를 늘어놓으면서 하루 하루를 보낼 뿐이다.


그런데 어느 날 이 가련한 아내의 모습을 지켜보던 예수님이 오셔서 율법이라는 남편으로부터 벗어 날 수 있는 길이 있다고 알려 주신다.
율법이라는 남편이 아내에게 요구하는 것을 예수님이 대신 담당해 주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율법이라는 남편을 인간들에게 보낸 것은 인간들을 모두 죽이라고 보낸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아내를 대신하여 죽어주기 위해 오신 것이다.
아내가 율법을 다 지키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 죄를 예수님이 대신 담당하신 것이다.
여보시오! 율법이라는 남편!
내가 당신 아내 대신 당신의 요구를 들어 주겠소!
당신은 당신이 요구하는 일만 성취하면 될 것 아니요!
손해 볼 것 없지 않소!
당신은 아내를 죽이려고 하니 내가 대신 죽어 주겠소!
그러니 내가 당신 아내 대신 죽어줌으로서 당신의 요구를 충족시켜 주겠소!
내가 죽는 것은 당신 아내를 대신하여 죽는 것이니 내가 죽을 때 당신 아내도 같이 죽은 것이오.


그리곤 예수님은 율법이라는 남편이 보는 앞에서 아내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었다.
예수님이 아내를 대신하여 죽은 것이므로 아내도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죽었던 예수님이 사흘만에 살아났다.
그리곤 율법이라는 남편 앞에 나타났다.
율법이 말하기를 당신 죽었잖소!
그렇지 난 죽었지!
그런데 어찌 살아 난거요.
당신 아내한데 장가들려고 살았소.
당신 아내 죗값은 내가 대신 치렀으니 당신은 아내에 대한 권리가 없소.
그러니 이제부턴 당신 아내는 내 것이요.
권리가 내게 있소. 알겠소.


그리곤 아내에게 이제부터 당신 남편은 내니까 율법의 말을 듣지 말라고 한다.
율법이 아무리 뭐라고 하여도 난 예수님의 아내라고 하시요.


예수님이 살아났을 때 예수님만 살아 난 것이 아니고 아내도 같이 살아난 것이다.
예수님이 살아 날 때 같이 살아난 아내는 이제 예수님의 아내로 살아난 것이다.
율법이라는 남편과 상관없는 자로 살아난 것이다.
이걸 믿으라고 한다.


아니 예수님 혼자 북치고 장구치고 다 해놓고 믿으라고 한다.


아내 입장에선 자신은 죽지도 살지도 않았는데 죽었다가 살아난 것을 믿으라고 하니 믿어질 리가 없다.
못 믿으니 성령을 아내의 마음 속에 넣어서 이런 일들이 믿어지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성도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자기 실력이 아니고 하나님이 믿게 해 주신 것이기 때문에 자랑 할 것이 못된다. 그져 감사하여야만 한다.)


이제부터 자신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믿어지는 자는 율법의 요구를 들을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율법이라는 남편에게는 이미 죽은 자이기 때문이다.
율법이라는 남편입장에선 아내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을 때 같이 죽었기 때문에 이젠 자기 아내가 아니다.
아내는 예전에 사람이 아니라 새로운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라는 새로운 남편은 법으로 대하지 않고 사랑으로만 대해 주신다.
예수라는 새 남편은 아내가 허물투성인줄 알고 결혼을 해주었다.
그러니 아내의 허물을 책하지 않고 오로지 용서와 사랑으로만 대하시는 것이다.
살림을 못해도 용서하시고 행동거지가 불량스러워도 용서하시고 청소를 못해도 용서해주신다.
세상에 이런 남편이 어디 또 있단 말인가?
아내 입장에선 남편을 보면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지만 아내 입장에선 여간 좋은 일이 아닐 수가 없다.


그러니 아내 입장에선 입만 열면 남편 자랑이다.
세상 사람들아! 여기 우리 신랑 좀 보소!
우리 신랑은 나의 모든 허물을 용서해 주시는 분입니다.
난 이런 남편과 사니 얼마나 행복한 줄 모르겠소! 라고 소리치며 남편을 자랑한다.


예수라는 남편은 법으로 섬기지 않고 사랑으로 섬기는 분이다.
아무리 시아버지인 하나님의 말씀이 추상같다고 하여도 이젠 두렵지가 않다.
왜냐하면! 예수라는 남편이 아버지의 요구를 모두 완벽하게 지켜주시기 때문이다.
시아버지가 이런 저런 일들을 아내에게 요구하면 남편이 나서서 말린다.


♬ 당신은 가만히 있어! ♬ ♪
♬ 다 내가 해줄게! ♬
♬ 내 품에 둥지를 틀어! ♬ 


이런 사실이 믿어지는 아내는 자기 몸으로 하나님의 요구를 수용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자기 대신 하나님의 요구를 수용하셨다는 것을 믿고 산다.
내가 율법의 요구를 들어주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대신 들어준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이렇게 믿는 것을 일컬어 영으로 섬기는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런 방식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도무지 믿을 수가 없는 법칙이다.
인간은 선악과를 먹고 난 후 모든 것을 자기가 지켜야 하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법 아래 가두어졌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선악과를 먹고 난 후 아담과 하와가 제일먼저 한 일이 자기들이 수치를 가리려고 치마를 만들어 입는 일을 한 것이다.
지금도 영으로 섬기는 방식이 안 믿어지는 자는 자신의 힘으로 수치를 가릴 옷들을 분주히 만들고 있다.
이름하여 날마다 거룩해져 가는 성화이고 행함이라는 신앙이다.


행함엔 사랑은 없고 오직 의무와 계산뿐이다.
열심과 충성만이 행함 속에서 살아남을 수가 있다.
행함 없음이 불 신앙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곧 과거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먹고 난 후 벌거벗음을 수치라고 여긴 것과 같다.



하나님께서 행함이라는 치마를 해 입고 온 이런 아담들에게 일갈한다.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라고,,


창 3장 11절 "가라사대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


어느 놈이냐!
나는 너희들을 벌거벗었음을 수치로 보지 않는데,
어느 놈이 벌거벗었음이 수치라고 알려 주었느냐? 라고 물으신다.
너! 언제부터 그랬느냐!
야! 이놈아! 너희들이 벌거벗은 것이 수치라고 한다면 애당초 내가 너희를 입혔을 것이 아니냐? 라고 책망하신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누가 너희로 하여금 벌거벗음을 수치로 여기게 하였느냐 라고 추적해 나가신다.
너희들 내가 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를 따먹었느냐!
예!


아담에게 벌거벗었음을 수치로 여기게 한 놈의 정체가 드러났다.
선악과는 마치 하나님 말씀을 지키기 않으면 수치라고 여기게 하는 율법과 같다.
그래서 율법은 법 아래 있는 인간들로 하여금 행함을 요구하는 것이다.


말씀을 지키지 않으면 죄라고 여기게 되면 말씀을 지키는 것으로부터 벗어 날 수가 없다.
말씀을 지키지 않는 것이 수치로 여겨지지 않아야 말씀을 지키려고 하는 싸움으로부터 벗어 날 수가 있어진다.
말씀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이 부담으로 작용하면 말씀을 지키지 않고서는 마음에 쉼을 얻을 수가 없다.
마음에 쉼을 얻기 위하여 또 말씀을 지키는 삶을 살게 된다.
결국 악순환의 연속이 된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은 지켜야 하는 것이라고 인식이 되어지면 그때부터 말씀을 지키려는 쪽으로 움직여지게 된다.
그 속에 선악의 법이 살아 있는 한 말씀을 지키지 않고서는 배기지 못한다.
스스로의 양심이 용납하지를 않는다.
그래서 날마다 자기 몸을 학대하면서 살아간다.
그러면 율법은 오늘도 참 잘했어요! 라고 칭찬을 한다.
칭찬 받는 재미가 솔솔하다.
그래서 이젠 말씀을 지키면서 희열을 느낀다.


아담과 하와에게 있어 죄란?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한 것이다.
마귀는 인간들에게 너희가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여서 죄인이 되었으니 이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의인이 되라고 부추긴다.
너희들 언제까지 그러고 살래!
목사가 그 모양이냐?
장로가 되어서 아직도 그 모양이냐?
예수 믿은 지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났는데도 어째 변하지 않느냐 라고 타박한다.
이제 정신 좀 차리고 하나님 말씀을 열심히 지켜야 되지 않겠느냐! 라고 한다.
목사 됨과, 장로 됨과, 집사 됨을 말씀을 지키고 반듯한 행동으로 증명해 보이라고 한다.


마귀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라고 하지 불순종하라고 하지를 않는다.


마귀는 도적질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마귀는 간음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마귀는 살인하지 말라고 한다.
왜냐하면! 이런 것들은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을 하라고 한다.


마귀는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한다.
마귀는 죽도록 충성하라고 한다.
마귀는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기뻐하라고 한다.


마귀의 노림 수는 인간이 마음만 먹으면 하나님 말씀을 지켜 낼 수가 있다고 한다.
그래서 성도들에게 성경을 갖다 들이댄다.
봐라! 성경에 이렇게 말하고 있지 않느냐! 라고 한다.
성도가 되어서 말씀을 지키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 라고 한다.
지당한 말씀이다.


그러니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말씀을 지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한다.
지금도 뱀의 말에 넘어간 사람들은 열심과 충성을 다하여 말씀을 지키려고 여념이 없다.
열심히 말씀을 지키기에 온 정성을 쏟는다.
교회 안에서 누가 누가 말씀을 더 잘 지키느냐의 싸움을 벌린다.
행여 남에게 뒤질세라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더 많이, 더 높이, 더 멀리 경쟁을 한다.
모두가 제사 드리기에 분주하다.


그런데 이를 어이할꼬!
하나님은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상함 심령을 원하시는데!


상한 심령은 아무리 해도 할 수 없다고 느낄 때 나타나는 마음에 절망이다.
절망은 자기를 포기하게 만든다.
상한 심령 앞에서는 반성이니 분발이니 하는 것들은 호사스러운 말들이다.
상한 심령이 일어나면 난 죽어야 마땅한 자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니 어떤 이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반성하고 분발을 촉구하고, 어떤 이는 하나님 말씀 앞에서 자기 한계를 느끼고 자기를 포기하게 된다.


성령은 말씀을 지키라고 하지 않고 주 예수를 믿으라고 한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반성하고 분발을 다짐하였지만, 세리와 창기들은 하나님 앞에서 절망하고 죽여달라고 하였다.


그런데 예수님은 반성하고 분발하여 하나님 말씀을 열심히 지키겠다고 하는 바리새인들은 지옥으로 보내고, 절망하고 불쌍히 여겨 달라는 세리와 창기들은 천국으로 보내셨다.


인간들 입장에서 본다면 어떻게 의롭다고 여기는 자는 지옥으로 보내고, 죄인이라고 여기는 자는 천국으로 보내어서는 안된다.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예수의 이런 처사는 받아들일 수가 없다.
어떻게 열심히 하나님 말씀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은 지옥으로 보내고, 하나님 말씀과 상관없이 산 자들은 지옥으로 보내는가? 이건 분명히 하나님의 횡포이다.


그래서 세상의 지혜로는 십자가를 알 수 없다고 하질 않았는가?
왜? 하나님께선 인간들이 보기에 횡포라고 여기는 방식으로 일하시는가?
이는 십자가의 도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이고 능력으로만 남기게 하기 위함이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세리와 창기들과 어울리는 것을 도무지 이해하지를 못하였다.
어떻게 울법을 지키지 않는 저런 개 같은 인간들과 어울릴 수가 있느냐!
같은 유대인으로서 화가 치밀어 도저히 묵과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예수님을 참람죄로 죽여 버린 것이다.


바리새인들의 착각은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낼 수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는 인간은 죄 아래서 태어난 죄인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다.
죄 아래서 태어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 없는 인간으로 태어난다는 뜻이다.
죄란 하나님 말씀을 거역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죄인이라는 말은 넌 하나님 말씀을 거역한 놈이야! 라는 뜻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본성이 하나님을 거역하는 놈인데도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라고 속이고 있는 것이다.
반면에 세리와 창기는 가슴을 치면서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하였으니 얼마나 솔직하지 아니한가.


바리새인은 마치 자기의 수치를 무화과나뭇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입고 하나님 앞에 나선 아담과 하와와 같다.
아담과 하와는 죄의 수치를 자신들의 힘으로 가리려고 하였다.
그래서 뙤약볕에서 열심히 치마를 만들지 않았던가?
그런데 하나님은 일고의 가치도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벗겨 내동댕이를 쳐버렸다.
다시는 이런 짓거리 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래서 지금도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고 쉼을 주신다고 한다.


마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마 11: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하나님 앞에선 율법의 행함으로 수치를 가리고자 하는 것은 죄가 된다.
인간 쪽에서 수치를 가리고자 하는 것은 바벨탑을 쌓는 것과 같다.
하나님은 인간들이 올라오지 못하도록 바벨탑을 헐어버리셨다.


이러한 일들이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바리새인들이 모습이 그러했다.
바리새인들은 인간의 착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하였다.
바리새인들에게 있어 신앙이란? 하나님 말씀을 철저하게 지키는 것이었다.
바리새인들이 말씀을 열심히 지킴으로 수치가 가려지는 줄 안 것이다.
바벨탑을 쌓는 인간들에게 천사를 보내서 헐어버리게 하셨듯이,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을 보내셔서 율법 신앙을 헐어버리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율법신앙을 고수하는 유대인에게 거치는 반석으로 오신 것이다.


하나님은 에덴동산을 떠나는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입혀 주시면서 너희가 가죽옷을 벗으면 수치가 그대로 드러나니 절대로 벗어선 안 된다고 가르쳐 주셨다.


가죽옷을 입혀주시면서 야! 이놈들아!
너희들이 만약 죄를 짖지 않았다면 여기 어린양이 죽지 않았을 것이 아니냐!
어린양이 죽은 것은 다 너희들이 죄를 지어서이다.
여기 어린양은 너희 대신 죽은 것이야!


그러니 어디를 가든지 어린양이 우리의 수치를 가려주셨구나!
우리는 어린양의 희생 때문에 살고 있구나! 를 잊지 말라고 한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과 하와에게 있어 죄란? 가죽옷을 벗는 것이다.
어린양의 희생을 잊는 것이다.
반대로 마귀는 어떻게 하든지 인간들이 어린양의 희생을 잊게 하고자 온갖 것으로 미혹할 것이라는 것을 쉽게 유추해 볼 수가 있다.
어린양의 옷을 벗는 것은 다름 아닌 무화과나무 잎으로 만든 옷을 입는 것이다.
즉 스스로의 힘으로 수치를 가려보겠다는 뜻이다.
이름하여 말씀을 지켜서 의를 만들어 내겠다는 것이다.


에덴동산에선 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먹은 것이 죄였다면, 에덴동산에서 나온 후로는 가죽옷을 벗고 어린양의 희생을 잊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것이 된다.


스스로 말씀을 지키겠다고 하는 것은 무화과나무로 만든 치마를 입는 것이고, 예수님께서 인간의 수치를 가리기 위해 죽임을 당하셨다는 것을 믿는 것은 가죽옷을 입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성도는 예수그리스도로 옷을 입은 자라고 하였다.
즉 예수님이 수치를 가려주심으로서 사는 자라는 말이다.
예수그리스도의 행위가 옷이라고 한다면 인간의 행위도 옷이 된다.
예수그리스도의 행위는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위해 대신 죽어 피 흘리고 죽임 당한 어린양의 가죽옷이지만, 인간의 행위는 무화과나무 잎으로 만든 치마이다.


가죽옷을 입은 사람은 무화과나무 잎으로 만든 옷을 부러워하지 않는데 가죽옷을 입지 않는 사람은 무화과나무 잎으로 만든 옷을 부러워한다.
예수그리스도로 옷을 입은 사람은 인간의 행함을 신경 쓰지 않는데 예수그리스도로 옷을 입지 않은 사람은 인간의 행함에 신경을 쓰게 된다.


예수그리스도가 대신 말씀을 지켜 주셨다는 것을 믿는 것은 하나님이 입혀주신 가죽옷을 입는 것이지만 자신이 말씀을 지키겠다고 하는 것은 자신이 만든 무화과나무 잎으로 만든 옷을 입겠다는 것이 된다.


이를 예수님께서 천국잔치의 비유를 통하여서 잘 말씀해 주셨다.
왕의 아들에 혼인 잔치에 초대를 받은 사람들은 왕이 준비해 둔 옷을 입고 왕의 아들에 혼인 잔치에 참석 할 수가 있다고 하셨다.
왕의 아들에 혼인 잔치에는 자기 옷을 입고서는 들어 갈 수가 없다.
왕이 준비한 옷이란? 바로 예수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대신 죽어주신 대속에 가죽옷이다.


나는 지금 어떤 옷을 입고 있는가?


 



 

The Cross Pendant

He is a cross pendant.
He is engraved with a unique Number.
He will mail it out from Jerusalem.
He will be sent to your Side.
Emmanu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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