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는 것이라고는 땅뿐이요 믿고 살 것은 땅 뿐인 인간이라서 땅에 뿌리를 내리고 땅에 의지해서 생을 영위해야 할 인간을 향해 땅을 믿지 말라고 하면서 다가서는 신은 당혹스럽다. 죽으라는 이야기가 아닌가? 신의 당혹스런 명령을 받들었다 치자. 그 다음 수순이 뭘까? 이웃과의 절연, 사회에서의 고립, 이래저래 죽음 아닌가. 뭐 이런 신이 다 있나!
성경이 우주의 발생과 지탱의 근거, 또는 존재의 이유를 새 언약 속에서 밖에는 찾을 수 없다고 한다면 새 언약 속에서 그 현실을 파악하는 성도 그 자체의 생성 혹은 출현은 이미 새 언약의 결과물로서 생성이고 출현일 수밖에 없다. 예수님께서 이루신 새 언약의 완성은 그 속에 이전 비언약적 인간상이 와해도 포함되어 있기 마련이다. 새 언약은 오직 십자가로만 다 이루어진 언약이기에(141).
곧 새 언약 속이란 비언약적 인간상의 그 바닥부터 점검하고 와해시키는 충돌이 일어나는 지점이다(143, 요 3:12-15). “언약지식 자체가 선과 악을 분리시키는 것이 아니라 양쪽 다를 간직하면서 그 나름대로 현실성을 펼친”다는 실정, “죄악은 세상에서 없어지지 않고 오히려 세상이 죄악의 실재함을 반영해 주기 위해서 번져 가는” 실정이 보이는 지평이기도 하다(144).
비언약적 인간상이란 한마디로 나를 중심으로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공전하도록 배치된 내 몸 중심의 자아관, 내 몸 중심의 세계관이다. 내 몸의 속성발휘로 예수님의 몸까지 도달해 내겠다는 구원의 꼼수, 악마가 구상한 구원의 시계가 멈추지 않고 속에서부터 시시각각 째깍거리니 인간은 이 공포의 시계소리에 평생을 짓눌리며 가위눌리기 마련이다(히 2:14).
레위기 23장의 안식일 언약도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죄악의 심각성을 하나님 바로 앞에서 체험할 기회”요 “인간의 육이란 땅에서 올라오는 비언약적 저주에서 벗어날 수 없는 신세”(145)임을 체험할 기회다. “돈으로 밥 먹고 산다는 개념은 언약 없이도 누구나 아는 육적 개념인데 …… 본래의 욕정은 내면으로 감추고 합리적인 사고를 요구하는 사회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해서 마치 욕심과 욕망을 진압할 수 있는 능력을 행사하는 점잖은 사람인 것처럼 살”아도, 그리고 “이것이 세상에서 ‘산다.’에 해당하는 요령”으로 얼마든지 인정해준다고 해도, “동행하시는 하나님이 주신 양식이 없으면 ‘산다.’고 말할 수 없”고 하나님께서 ‘사는 것’으로 여기는 경우란 “언약이 준수되어 안식 상태를 누리게 될”경우뿐인데 곧 “안식일에는 만나를 제공하게 한 그 원천 자가 소개되는데 거기에는 흠 없는 제물의 희생제사가 벌어”지고 그래서 “성도가 사는 것은 평소에도 자기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예수님이 그 생명 증거 하려는 의도에서 살려주시는”(148) 그 경우뿐이란다. “누가 나 대신 고통을 당했는가를 생각하는 것이 안식일”(레위기 23:32)이다.
“자신이 고대한 자기만의 행복과 평안을 생각해서는 아니 되는 날”인 이유란 우리 예수님이 안식일정신의 구현인 고엘 입장에서의 구원자가 되시기 때문이다. 당연히 교회는 “단순히 ‘하나님이 세우심’이 교회가 아니고 ‘하나님이 피로 세우심’이 교회”이며 “‘하나님은 못하시는 것이 없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다.’라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전능하심의 절정은 오직 ‘피를 흘렸다.’라는 그 사실에 있다.”(150)
안식일은 “시간에 종속되지 않는 삶”의 예언이다. “내가 시간을 관리하면서 사는 삶이 아니라는 말이다. ‘시간 속’의 인물이 아니라 ‘사건 속’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존재하는 인물이 된다.”는 예언이다. ‘살아남기’에 탁월한 재주 있는 인간, 혹은 교회 만들기가 아니다. “나는 어떤 사건에 의해서 죄인이 되었으며 예수님의 어떤 사건에 의해서 의인이 되었는가.”(153)라는 언약의 구조 안에서 살 사람들에 대한 예언이다.
마지막 때에 이 구조를 그대로 이 지상에 발현해 낼 새 백성에 대한 예언이다. 일렬로 늘어서 있는 1,2,3,4 …… 6, 그 다음에 순서상 따라오는 기계적인 날 들 중에서 인간이 실용적으로, 삶의 편의상 고안해 내 토막 낸 제 7일이 아니라 1~6과는 다른 질의 7, 곧 7일째에 숨어계신 묵시적 인물이 일으키는 사건의 구조에 의해서 역으로 1~6일의 날들, 이 날들에 함유된 인간의 시간성자체가, 혹은 시간성에 휘감긴 비언약적 인간상 자체가 함몰되고 와해되는 지경에 이른다.
그리되면 노동하는 날, 그리고 노동을 위하여 재충전하는 날 이라는 인간의 의식구조하의 자기 몸 중심적 안식일은 빛이 바래고 주님을 위한 안식(일)이 제의미를 갖고 침투하는 날이기도 하다(고후 5:14-15 ; 갈 4:10,11 ; 로마서 14:5-8) 주일성수니, 혹은 모든 날들을 주일처럼 살아야 된다느니, 하는 안식일의 실천적 해석들이란 사도바울에 따르면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갈 2:21)는 짓이고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2:21)다고 선전하는 짓이고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갈 4:29)하는 짓이기도 하며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갈 5:4)들이나 하는 짓이다.
구원의 공로를 어린양의 발아래 돌리기 싫어서 교회라는 신의 이미지에 영광을 돌리도록 물꼬를 터줘서, 그래서 행위로 구원에 이르는 길목을 틀어쥐고 교회라는 장터를 벌여서 오가는 잡상인들과 천국구경을 그렇게라도 하고 싶은 행인들의 지갑을 터는 강탈행위, 그러니 교회(목사)는 주의 공로 가로채는 강도의 떼거리다. 천만번 들어도 신에 대한 정성이 뻗치기만을 고대하는, 그래서 천국의 보물창고를 왕창 털어낼 궁리뿐인 우리 심중에 새겨질리 만무하고 실천은 아예 요원한 다음의 이야기는 그래서 더욱 더 계속 들려져야 한다. 그렇게도 주의 음성 듣기를 싫어하는 우리 마음이 닳고 닳아서 아예 구멍 난 신발바닥처럼 지워질 지경에까지, 이 세상을 사랑하는 우리의 모든 신경 줄이 가닥가닥 끊어져 무력해지는 지경까지.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이스라엘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를 위한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교회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145). 이 소리가 왕왕 울려 퍼지는 좁은 문, 좁은 길만 천국 가는 여정이다. “예수님의 구원경로를 가득 채우는 예수님의 사건리스트 위를 통과하는 인생”(153), 그 길속에서 “온전히 하나님이 구속하신 사건에만 관심 두고 다른 문제들은 다 날아가 버리는 안식”(153)을 아니 누리면 절대로 되지 아니하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우리가 부르는 바로 주 예수 그 이름은 이렇게 사랑이 많으신 분이다.
He is a cross pendant.
He is engraved with a unique Number.
He will mail it out from Jerusalem.
He will be sent to your Side.
Emmanuel
Bible Verses About Welcoming ImmigrantsEmbracing the StrangerAs we journey through life, we often encounter individuals who are not of our nationality......
Who We AreWhat We EelieveWhat We Do
2025 by iamachristian.org,Inc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