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의 설교는 목사의 평소 관심사를 드러낸다. 목사가 평소에 십자가 복음에 관심이 있다면 설교에도 그것은 토대로 하여 진행되고 최종적으로 그 십자가 복음만을 부각하는 설교가 된다.
반면에서, 목사가 평소의 관심사가 자기 생존에 몰두해 있다면 결국 설교가 교인들을 향하여 다음과 같이 질책하는 식으로 진행된다. “이 나쁜 놈들아. 왜 돈을 안 내놔. 교회에 돈 좀 내놔라!”라는 결론을 부각한다.
물론 어느 뻔뻔한 목사가 노골적으로 돈 내라 라고 하겠는가. 단지 ‘성령을 따르는 삶이 되어라’ 혹은 ‘말씀에 복종하려고 노력하는 성도의 모습을 보이라’라는 식으로 우회적으로 발언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교인들 입장에서는 평소에 세상 바닥에 나가서 죽자 살자 돈 벌기에 혈안이 되어 자아가 너무 속물적이고 너무 비참하고 이것이 너무 싫어서 일요일날 교회 나와 십자가 복음으로서 다시 죄 용서를 받고자 했는데 교회에 와서 마저 십자가 복음에 최종 관심을 두지 않는 자의 공갈치는 소리를 장시간 설교랍시고 들으려고 하니 미칠 지경이다.
교인들은 기대했었다. “목사야, 제발 너 마저는 우리처럼 돈에 영혼 팔리지 말고, 돈의 노예가 되지 말고, 속물 되지 말라”라 속으로 얼마나 빌고 또 빌었던가!
그런데 강단에서는 교인들이 눈치 못 채는 식으로 설교하면서 (실은 은연중에 목사의 진짜 본심-교회에 돈 내라 라는 본심-을 눈치껏 알아주기를 바라면서) 십자가 복음의 무용론(無用論-십자가 복음은 결국 아무 소용없는 것이라는 논리)을 강변하고 있으니 교인들이 그동안 정립해 온 십자가 복음만으로 구원론이 목사로부터 핍박을 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단지 교회에 뭉칫돈을 못 내고 있다는 이유 만으로!
그렇다면 그 목사는 평소에 십자가 복음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 알고 있었더란 말인가? 참으로 십자가 속까지 들어가 본 목사라면 결코 이런 식의 설교는 나올 수가 없다. 왜냐하면 십자가 복음 안에서는 ‘법’이 박살나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법이란 반복 가능성을 근거로 수립된다.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들은 자신의 행위를 통해서 반복적으로 법적인 것들을 실행에 옮긴다. 즉 전에 했던 행위를 나중에 합법적으로 그대로 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동일한 법적 문장을 들먹이면 충분히 수행이 가능하다고 보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십자가를 빼버려도 신약 성경에 나오는 사도의 명령을 법으로 간주하는 해석이 나온다. 예를 들면, ‘성령을 따르는 삶’을 법 조항으로 규정하게 되면, 이 ‘성령을 따르는 삶’을 인간의 행위로 백 번을 되풀이 해도 동일한 행위가 가능하다고 여기는 결론에 도달된다.
그런데 생각해 보라. 어제 한 행위를 오늘 그대로 되풀이했다고 동일한 행위인가? 동일한 의미를 산출하는가? 동일한 결과를 낳는가? 결코 동일하지 않다. 똑같은 양치질하고 똑같이 세수하고 똑같이 도시락 사들고 출근을 해도, 그 행위 속에서, 그 시간대에 느끼는 감정과 의미와 공상하기는 결코 동일한 내용들이 아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들은 이러한 행위들을 소위 ‘법’이라는 의식을 동원해도 한꺼번에 묶어 버리고자 한다. ‘동일한 법’을 준수하는 행위로 간주해 버리는 것이다. 달리 말해서 ‘매일 아침 나는 나의 법과 원칙을 준주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곧 “나는 십자가를 모릅니다. 십자가는 모르고 있지만 법에 대해서는 압니다. 그래서 법적으로만 설명하려는 겁니다”라는 소리다.
‘성령을 따르는 삶’을 사도가 언급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만드신 십자가 내부의 영역 안에서의 이야기이다. 십자가 안에서 반복이란 십자가 반복이 어떻게 가능한가에 따라서 이루어진다. 이미 2000년 전의 십자가가 어떻게 반복적으로 2000년 후에는 동일하게 죄 사함의 능력으로 임하는지, 그 메카니즘(논리 과정) 을 알지 못하면 ‘성령을 따르는 삶’의 메카니즘도 모르는 일로 남는다.
십자가 사건이 후대에 반복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소위 ‘개혁주의자들’의 주장이다. 이렇게 되면 지금의 시간대와 십자가 사건의 시간대와의 차이가 없게 되어 버린다. 즉 십자가 사건은 어디까지나 과거 사건으로 자꾸만 먼 소실점 속으로 이동해서 사라지게 된다.
그러나 사도가 말하는 바는 오히려 그 반대이다. 십자가 본격적으로 더 부각해서 크게 다가오는 것이다. 이렇게 되려면, 후대에 십자가가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있었던 십자가 사건 자체가 유일하게 반복하는 사건이 되어야 한다. 나머지 후의 시간들 속에서는 그 십자가 반복 시건 속으로 시간을 초월해서 끌려들어가야만 구원될 판이다. 이 시도는 인간의 힘이나 행함으로 가당치도 않고, 가능하지도 않을 일이다. 그 이유는 인간의 행위 시간 의식을 동반해서 이루어지는데 인간은 시간의 틀을 못 벗어나기 때문이다.
즉 인간은 시간에 따라 ‘법적 반복’ 이외에 달리 생각할 수가 없는 존재다. 그것은 인간 내부에서 법을 자꾸만 생산해 내기 때문이다. 뭣하나 제대로 했다고 자처하면 그것은 다음에 또 반복시키기 위해서 '법‘이라는 형태도, 규칙이라는 형태를 만들어서 그 안에다 저장시킨다.
사도의 모든 명령이나 권면이나 심지어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이라는 명령까지도 이런 법적인 반복이 가능한 형식으로 변형시켜 버린다.
여기에 성령이 개입하신다. 성령께서는 십자가 의미를 그대로 꺼내놓으신다. 왜 인간은 법적 의식으로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으며, 왜 인간의 죄관이나 의(義)관이나 심판관(觀)이 법이라는 테두리를 벗어날 수 없는지를 예수님의 십자가 지신 의의를 통해서 밝혀준다.
그것은 인간이 이미 악령의 지배를 받고 있고, 이 악령의 지배는 곧 선악과를 알지 않았어야만 하는 존재를 선악과를 알게 되므로서, 신적인 세계에 포함될 수 없는 존재임이 뻔함에도 불구하고 이미 신적인 존재로서 취급당하는 처지에 놓이도록 악령이 그렇게 조치해 버린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태도는 냉정했다. 선악과를 아는 것이 분명 신적인 존재가 되어버린 것에 해당되지만 그러나 도리어 그 이유 때문에 결코 신의 세계에 더불어 함께 살 수 없는 입장인 것을 분명히 하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에덴에서 추방된 유일무이한 이유이다. 다른 이유는 없다. (창세기 3:22)
그러니까 하나님이 뜻은 분명하다. 선악을 아는 지식을 잊어버려야 함께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에게 무리한 요구다. 왜냐하면 “십자가 복음을 믿으면 구원 받는다”라는 계시까지 인간 내부에서는 법적인 창고에 집어넣어 놓기 위한 법적인 틀로서 변형된 법적 조항 중이 하나이다. 그래서 수시로 되풀이해서 끄집어내어 믿는다는 행위를 반복할 수 있게 하겠다는 것이 인간들의 본능이다. 이것은 선악과에 기초한 십자가 복음으로서 가짜 고백이며, 사기다.
인간은 자신이 언제가 신으로 승격되는 것과 그 승격을 위해서는 되풀이 해서 실행에 옮기는 것이 가능하게 만들 법적 형식들이 필요하다는 것 밖에 모른다.
성령을 언급할 때는 반드시 악령을 언급해야 한다. 악마가 뭘 노리는지, 뭘 제일 싫어하는지를 봐야 한다. 악마는 십자가 사건의 절대화를 제일 싫어한다. 왜냐하면 그 사건 외에 다른 식으로는 절대로 자신의 본질이 노출되지 않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서 선과 악을 대비시키는 의식으로, 법적 의식으로 존재하겠다는 이 본심은 오로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만 공박 받는다. 이 점을 악마도 잘 알기에 그들은 예수님보다 십자가 져서는 안 된다고 베드로를 통해서 시험해 온 것이다. (마 16:21-23)
십자가 사건은 인간의 근원적 자아에 대한 절대 죄성을 말해준 사건이다. 즉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저주받을 육신을 지고 온 자들이다. 왜 저주의 대상인가 하는 것은 그 육신에서 무엇이 뿜어져 나오는가를 살필 수 있는 일평생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 쉽게 말해서 성경에 나오는 모든 말씀은 인간이 자신의 한평생을 펼쳐놓고 일일이 대조해 봐야 될 말씀들인 것이다.
“ 왜 예수님은 나 같은 자식을 위해 대신 죽어야만 했고, 왜 그분의 ‘대신 죽음’이 없다면 나는 무엇 때문에 영원한 저주를 받아 마땅한 인간인가?”라는 것을 일평생을 걸쳐 확인해 봐야 하는 것이다. ‘신의 성품에 참예하고’(베드로후서 1:4), ‘성령을 따르는 삶’이란 이것이 구체화 되고 실제화 되는 현상을 말한다.
그런데 어느 미친 인간이 이미 모든 것을 법제화 해서 할 수 만 있다면 자기만 따로 해석해서 법제화시켜 놓은 규칙을 준수하여 자기 의로움에 도취되어 인생을 사려는 본심을 지니고 있으면서 이 본심을 거스려 오히려 ‘자신의 저주받을 이유’를 찾고자 나서겠는가!
사람은 불가능한 것을 성령님은 하신다. 이것이 성령을 따르는 삶이다. 성령은 인간이 악령에 속함을 아신다. 그리고 악령이 인간이 어떤 식으로 유도함도 아신다. 이것을 깨부수는 것은 십자가 능력 밖에 없다. 즉 ‘저주받을 인간을 위한 대신 죽으심’ 밖에 없다.
따라서 성령 안에서만 유일하게 ‘반복’이 일어난다. 법적 인식을 깨트리면서! 인간에게 있어 시간이란 무의미하다고! 인간에게 있어 시간에 따라 자체적으로 축적되는 진보란 의미 없는 것이라고! 성도의 삶이란 오로지 십자가 사건에서 길게 뻗어 나온 광채나는 하얀 그림자에 불과하다고! 네가 행하는 반복되는 법제화는 악마의 굴레라고!
지금도 멈출 수 없는 악령과의 영적 전쟁을 염두에 두지 않는 성령 언급은 곧 악마의 함정에 빠진 성령 개념이다. 그만큼 목사 본인이 영적 전쟁보다 생존 전쟁을 최종 관심사로 삼고 살다는 증거인 셈이다.
“교인들아, 돈 내놔라, 나도 내 자식 새끼 있다. 나도 내 새끼한테 피아노 가르치고 싶다. 그래서 사람처럼 살게 하고 싶다. 나도 고기가 맛있는 줄 안다. 맨 날 저거들만 고기 먹고 …”
여기에 대해서 교인들은 이렇게 항변한다.
“목사님은, 목사님의 평소에 소원대로 그 좋다던 천국이나 후딱 올라가소. 우리들은 이미 우리가 가짜 인 걸 알지만 목사님 당신마저 가짜라면 우리는 누굴 믿소! 제발 한 사람이라도 신자가 있어야 우리도 희망을 품고 교회 나올 게 아니요”
악령, 그의 눈동자는 여전히 빛을 발하고 있다.
He is a cross pendant.
He is engraved with a unique Number.
He will mail it out from Jerusalem.
He will be sent to your Side.
Emmanuel
Bible Verses About Welcoming ImmigrantsEmbracing the StrangerAs we journey through life, we often encounter individuals who are not of our nationa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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