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로마 여행기
(1일째 )
깊은 밤, 도둑고양이 모양 몰래 독일 쾰른 시에 들어갔다.
사방이 고요하다. 모두 잠자고 있다.
그래서인지 낯선 곳이라는 의식이 들지 않는다.
(2일째)
아침이 되자 모든 것이 윤곽이 드러난다.
벌써 나는 이방인이 되었다.
거리에 나서자 온통 독일 냄새다.
쾰른 대성당이 시야를 가린다.
높이 157m
두 개의 첨탑
안으로 들어서자 엄청난 공간을 품고 있다.
그래서 장엄하고 신성한가?
시커멓게 수백 년 세월을 짋어진 잿물을 홀로 뒤집어쓰고 있기에 더 고상해 보인다.
천당 만들기 참 쉽다.
하나님께서 바깥의 넓은 공간을 버리고 사람의 손으로 지은 공간에 자진해서 갇힐 것이라는 그 악마적 발상이(행 7:49) 시대와 지역을 초월해서 일반화된다는 것이 신기할 지경이다.
라인강을 둘러보았다.
예상외로 물살이 거세다.
그래, 변화다.
그것도 급하게 변한다. 어제 기억조차 채 정리하지 못한 채 늘 새 사건에 부딪치며 살아야 한다.
건물의 모서리에는 신화에 나오는 인물들을 요란스럽게 손질을 해놓았는데 이곳 사람들은 그것을 정성이라고 보는 모양이다. 하기야 시간이 남아 돌던 시절인 것을.
지금은 무척 좁아 보이는 옛 골목에는 반듯하게 네모난 돌들로 반원형 무늬로서 깔아놓아서 걸을 때마다 물결을 밟는 듯하다.
다리 난간에는 비둘기들이 나란히 걸터앉아 오고가는 관광객들의 눈치를 살핀다.
그것들도 늙었다.
이 도시처럼.
(5일째)
쾰른시 근교로 나갔다. (Brühl 시)
이번에는 백작이 살던 성이다. ( Augustusburg Palace 1729∼1737 건축 )
입구부터도 저만치 뚝 떨어져 있기에 한걸음 두걸음 위용을 충분히 느끼면서 조금스럽게 도달하게 만드는 궁전.
희멀겋게 생긴 자태부터가 주변의 농토를 갈던 농노들의 기를 충분히 죽이고도 남겠다.
합리적인 측량에 따른 배치를 주제로 한다는 그 프랑스식 정원까지 수입해 다 그대로 조성해놓았고 분수의 물줄기는 한 가운데서 힘차게 뿜어지고 있다.
설명하는 현지 가이드는 18세기 바로크 스타일의 조밀하게 세밀한 예술미를 극찬하고 있지만 내 눈에는 권력의 집중화 덩어리로 보인다.
잘 훈련된 개는 대소변을 어디서 봐야 하는지를 안다. 처음과는 달리 시간만 좀 지나면 어디서 대소변을 봐야 하는지 알아서 잘 한다. 권력이란 이런 것이다. 처음에는 복종당하는 주체로 시작했다가 나중에는 알아서 복종하는 주체로 변질된다. 처음에는 자기에게 명령해주는 권력자가 따로 있음을 느낀다. 하지만 조금 지나면 그 권력자가 사라져도 주변의 모든 것들이 권력자가 남겨 주고 떠난 권력의 미세 요건들로 기억된다. 그 안에는 주체는 자진해서 주변 상황에 맞추어 길들여지려한다. 달리 대안이 없다는 것이다. 그 안에서 비로소 “내가 사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인간이 숨쉬는 이 공기는 참 요상하다. 늘 쏘아대는 권력과 권세 없이는 주체성조차도 구성 못하는 미숙아로 전락되어버리는 것이 아담의 세계의 현실이다. 주인이 없어도 주인을 찾는 알 수 없는 노예들의 사회, 18세기 백작의 살았던 시기도 그랬을 것이다.
농노들은 매일같이 햇살에 와서 하얗게 부서지는 그 백작 저택을 날마다 바라보며 살아야 했고 거기서 오는 차이를 신의 절대적 질서라고 이해하면서 백작의 농토를 갈아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백작은 수시로 프레스코화로 둘러싼 호화로운 파티장 장식에 신경 쓰면서 권력의 휘광을 과시했을 것이다. 근대국가 바이마르 공화국이 들어서고 난 뒤 백작의 재산은 몰수 당했을까?
독일의 에스프레소 커피는 더욱 쓰다.
저녁에는 대성당과 인접한 현대미술관을 찾았다. 마침 리히텐슈타인( Roy Lichtenstein) 특별전이 열려서 엄청난 인파들이 전시장을 휘감고 있었다.
현대 사회의 천박함과 경박함을 만화 기법으로 옮겨다 그렸던 사람이다. 이 사람의 그림은 모든 게 과장되게 보이지만 그 과장을 통해서 현대인이 스스로 놓치고 있거나 숨기고 싶어하는 본인들의 천박함을 폭로한다. 그리고 인간은 항상 그 수준을 유지해왔다는 것이다. 늘 일류를 꿈꾸지만 실은 만화같이 늘 2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소위 명화라는 것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모든 예술은 만화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의도적으로 대상의 해상도를 과감하게 떨어뜨려 해체해버린다. 그러면 그의 손에서 그 어떤 그림도 만화가 된다. 명화나 사물들은 그냥 굴직굴직한 점들의 엉성한 조합들로서만 자리 잡게 된다.
이 강렬한 인상은 나중에 로마가 갔을 때, 미켈란젤로로 그렸다는 ‘천지창조’조차 만화나 천장 낙서의 일종으로 이해되게 했다.
(6일째)
외국인들이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얼굴의 차이는 사라지고 몸의 움직임으로서 사람임을 느낀다.
일주일 동안 쾰른이라는 도시를 벗어나지 않았다. 볼 게 많아서가 아니다. 독일이 주는 안정감은 어디서 오는지 충분히 느끼고 싶었다. 그들이 추구하는 뭘까? 영웅이다. 영웅다운 영웅상이다. 로마, 그리스 신화에서 소위 영웅이라고 할만한 신인(神人)들에 대한 흠모심으로 독일 도시 어디를 가나 그들의 도시를 영웅들의 거리로 헌정하고 있다.
동시에 이제는 그들 자신이 그 영웅의 대열에 합류했다고 자부하는데서 오는 안정감을 독일이 보여주고 있다. 달리 표현하자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이 기대할 수 있는 바를 일찍감치 다 얻게 된 나라라는 것이다.
독일은 사회보장제도가 잘 되어 있다. 노인네들이 거리의 활력을 아침부터 선두하고 있는데 그것은 돈 모으는 재미가 아니라 돈 쓰는 재미를 만끽하도록 나라에서 그렇게 제도화해 주었기 때문이다.
이같은 영웅성에서 오는 안정감은 자본주의 경제 체제를 바탕하고 있다. 이 자본주의는 사실 17세기 이전부터 존재해왔다. 중상주의가 그 시초라고 볼 수 있다. 중상주의는 기본적으로 우리나라 제품을 많이 팔고, 다른 나라의 제품을 적게 사자는 이념이다. 그렇게 해서 자국의 경제를 키우자는 것이다. 이 중상주의 이념은 특히 영국과 네덜란드에서 활발했다, 영국이 1600년, 네덜란드가 1602년 인도에 동인도 회사라는 무역회사를 설립했다.
중상주의가 활발해지면서 무역으로 많은 돈을 버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이런 재력가들의 재산은 경제학 용어로 상업자본이라고 부른다. 상업자본가들은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무역을 확대했고, 돈이 되는 정보를 더 많이 알기 위해 서로 정보를 교환하기도 했는데 여기에서 오늘날 신문으로 발전한다.
이들 상업자본가들은 오늘날 우리들이 말하는 산업자본가하고는 다르다. 산업자본가는 공장에서 노동자를 고용해서 기계를 가동시키고 상품을 대량생산한 뒤, 이윤을 얻는 경영자를 말한다. 이런 산업자본가들이 등장한 것은 산업혁명 때부터다.
산업혁명은 18세기 후반쯤 시작되었다. 200여 년 전부터 서서히 발전하는 산업이 이때 비약적인 속도로 올라서게 된다. 산업혁명은 영국에서 시작했다. 이윽고 프랑스, 벨기에ㅡ 독일 등으로 퍼져나갔다. 바다 건너 미국에도 전파되었다.
그전까지는 모든 물건을 사람들이 일일이 손으로 만들어야 했다. 그러나 이때부터 사람들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제품을 만들 수 있는 기계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론상으로는 모든 일을 기계가 대신 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편해졌다고 여겨지겠지만 실제로는 자본가들만 편해졌다.
사람을 적게 써도 되니 인건비가 적게 들어가게 되었다. 반면에 노동자들은 더 적은 월급을 받거나 일자리를 잃어야 했다. 산업혁명의 어두운 특면이다.
산업혁명은 영국의 면직물 산업에서 시작되었다. 인도에서 수입된 품목 가운데 영국에서 불티나게 팔렸던 게 바로 면직물이었다. 막상 옷을 만들어 입어보니 모직물보다는 면직물이 여러모로 편하고 만들기도 쉬웠다. 게다가 값도 쌌다. 어느 정도 경제적 여유가 있는 농민들은 작은 공장을 만들고 남아메리카에서 수입된 면화를 원료로 면직물을 만들기 시작했다.
면직물 장사가 잘되지 많은 자본가들이 면직물 생산에 뛰어들었다. 그 결과 18세기 중반 이후 영국에서 생산한 면직물은 그전 50년과 비교했을 때, 열배 정도 많았다. 이런 공로는 모두 기계의 투입에서 비롯되었다.
1730년경 존 케이가 일명 ‘나는 북’이라고 불리는 플라잉 셔틀을 발명했다. 북은 실을 만드는 장치다. 그전까지는 사람들이 일일이 북을 움직여서 실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 플라잉 셔틀은 스프링 장치를 장착해 자동으로 북이 튀어나오도록 되어 있다.
누구나 쉽게 이 장치를 쓸 수 있었다. 몇 년 후 이 장치에 대한 특허가 떨어졌고 1760년 무렵에는 면직물 생산업자 사이에 널리 확산되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새로운 방적기가 잇따라 발명되었다. 제임스 하그리브스는 여러 개의 북이 동시에 작동하는 장치를 만들었다. 이 장치는 그의 이름을 따 제니 방적기라 불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수력을 이용한 방적기까지 발명되었다. 점점 첨단의 방적기들이 면직물 생산에 이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면직물을 생산하는 장치들이 많이 좋아졌지만 모두 인간의 힘이나 수력 같은 에너지에 의존하고 있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획기적인 발명품이 나왔다. 제임스 와트가 1770년 쯤 증기기간을 발명하고 이 증기기관을 즉각 면직 산업에 투입되었다. 이 증기기관은 물을 끓여 증기를 얻을 수 있으면 언제든지 에너지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에너지 효율도 자연력보다 훨씬 뛰어났다.
영국은 일찍부터 모직물 산업이 발단했다. 산업이 발달하려면 아무래도 연료가 충분히 있어야 했다. 영국은 16세기 중반 이전까지만 해도 나무 땔감을 연료로 썼다. 그런데 너무 빨리 산업이 발달하다 보니 쓸 만한 나무 땔감이 모두 바닥나고 말았다. 연료가 없으면 산업이 지체될 수밖에 없다. 부랴부랴 16세기 후반에 샤로 찾은 연료가 석탄이었다. 선탁은 나무 땔감보다는 에너지 효율이 좋았다. 다시 산업이 발전하기 시작하고 이때의 발전상을 초기 산업혁명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또 문제가 생겼다. 우선, 석탄을 많이 캐려면 탄생을 잘 정비해야 했다. 둘째, 선탁을 빨리, 많이 수송해야 했다. 이 해결책을 찾으려고 고심하다가 나온 것이 바로 증기기관이었다. 그렇다면 땔감의 부족이 산업혁명으로 이어진 도화선이라고 볼 수 있다. 바로 이 증기기관이 면직물 공장에 투입되면서 산업혁명은 날개를 달았다. 영국의 면직물 생산량은 다시 몇 배로 증가했다 돈을 많이 번 자본가들은 공장을 더욱 키워나갔다. 이런 공장들이 자리 잡은 도시는 산업도시가 되었다. 맨체스터가 대표적이다.
면직물 제품이 대량으로 생산되니 가격도 저렴했고 모든 영국인이 입고도 남았다. 유럽 대륙으로 팔아도 남았다. 영국은 면직물 제품을 팔 수 있는 또 다른 곳을 찾아야 했다. 바로 식민지다. 영국은 대량으로 생산해 저렴한 면직물을 인도에 팔았다. 인도에서는 소규모로 면직물을 팔고 있었는데 그 결과는 뻔했다. 가격에서 경쟁이 안 되니 당연히 인도의 면직물 생산업자들은 모두 파산했다. 이때부터 영국의 제국주의적 속성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본격적으로 철강업이 발전하게 되는 시기가 도래한다. 면직물 산업은 경공업이다. 반면에 철강업은 중공업에 속한다. 경공업과 중공업은 각각 투자되는 자본의 양도 크게 차이가 난다. 면직물 공장은 면을 생산하는 장비와 노동자만 있으면 된다. 그러나 철강 공장은 우선 장비부터 크고 비싸다. 용광로 같은 시설로 필요하다. 또한 경제적 파급 효과는 경공업과 비교가 안 된다.
나라가 발전하려면 철강사업, 기계업과 같은 중공업이 발달해야 한다는 게 경제계의 지론이다. 그래야 도로도 닦고 다리도 만들고 항만도 같이 세워지기 때문이다. 영국의 산업혁명이 면직물 산업에서 이직되었지만 그 산업혁명을 지속적으로 이끈 분유는 철강산업과 같은 중공업이다.
증기기관이 중공업 분야에 투입되면서 강철의 생산량을 크게 늘였다. 강철의 품질도 좋아졌다. 18세기 들어 코크스를 강철 제조에 쓰기 시작했다. 이 코크스는 고체 연료로, 탈 때 내는 온도가 석탄보다 높아 에너지 효율이 좋았다. 철을 만들 때 이 코크스를 쓰면 품질이 좋아진다는 사실을 이때 발견했다.
중간 정리해 보면, 산업혁명이 일어난 이유는 무얼까?
첫째, 이 무렵의 유럽은 농업이 무척 발달했다. 산업혁명을 말하는데 농업의 발전이 관여하는 이유는 농업이 발전하면 농업 생산량이 늘게 되고 그렇게 되면 더 이상 농사를 짓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 늘어난다. 이 사람들이 도시로 가서 노동자로 살기 시작한다. 이런 노동자들의 수가 많아졌기 때문에 산업이 발달한 여건이 마련된 것이다.
둘째로, 패권 전쟁이 많았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유럽 국가들은 대부분 팽창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다른 나라보다 강해지려면 강한 무기와 강한 군대가 필요했다. 첨단 무기를만들려고 연구에 몰두하다 보니 과학 기술이 발달했다. 무기만 발달한 것이 아니라 군수물자를 빨리 전쟁터로 옮기기 위해 도로를 닦고 철도를 설치했다. 도로망은 산업을 발전시키는 필수 요건이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에도 이런 기반시설을 사회간접시설(SOC)라고 한다. 정부가 막대한 돈을 투자해 직접 건설한다.
그렇다면 많은 유럽 국가 가운데 왜 영국이 가장 앞서 갔던 것일까?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영국은 시민혁명으로 입헌군주제가 정착되었다. 왕과 귀족의 세력은 약해진 반면, 부유한 시심은 자본가들의 영향력이 커졌다. 돈은 권력이라는 말이 이때부터 발생했다. 자본가들은 경제뿐만 아니라 정치에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둘째, 유럽의 다른 나라들이 유럽 대륙 안에서 패권 전쟁을 벌이고 있을 때, 영국은 해외를 겨냥했다. 일찍감치 식민지를 개척했으니 대량 생산한 제품을 값싸게 외국에 내다 팔 수 있었고, 원료로 헐값이 사들일 수 있었다.
이러한 산업혁명의 영향으로 다음과 같은 결과를 가져왔다.
첫째, 산업혁명은 자본주의를 발달시켰다.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발생한 원인이 곧 산업혁명의 결과도 되게 되었다. 이제 귀족의 힘은 미약하게 되었고 공장과 기계를 가진 자본가들의 그 힘을 가져갔다.
둘째, 산업혁명은 제국주의를 탄생시켰다. 18세기에 조짐이 보이던 제국주의는 19세기에 본격화한다. 유력 제국주의 국가, 즉 열강들은 전 세계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아시아와 아프리카는 선진 유럽 국가들에 모두 무릎을 꿇었다.
셋째, 산업혁명은 사회 양극화라는 부작용을 남겼다. 자본가들은 부와 권력을 얻었지만 노동자들은 그야말로 비참하게 살아야 했다. 하루 열 두 시간이 넘도록 일을 했지만 겨우 입에 풀칠할 수 있을 만큼의 돈을 받았다. 그나마 기계가 발달하면서 일자리도 줄었기 때문에 관둘 수도 없었다. 노동자들의 불만으로 나온 이론이 바로 사회주의다.
이때부터 프랑스 혁명을 통해서 구체제 몰락하는 시기가 다가온다.
17세기 후반 영국의 명예혁명은 입헌군주제라는 열매를 탄생시켰다. 영국은 안정된 정치를 바탕으로 인류의 삶을 뒤바꿔놓은 산업혁명을 발전시켰다. 18세기 후반에도 유럽에서 커다란 혁명이 일어났다. 바로 프랑스 혁명이다.
오늘날 우리는 민주주의란 단어에 익숙해 있다. 현대의 민주주의와 가장 비슷한 정치 형태를 요구한 유럽의 첫 혁명이 바로 프랑스 혁명이다. 물론 그전에 아메리카에서 미국 혁명이 일어나 영국으로부터 독립해 첫 공화국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혁명을 가벼이 볼 수 없는 까닭은, 19세기 발생하는 여러 유럽의 혁명이 프랑스 혁명의 정신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프랑스 혁명은 바로 계몽주의라는 사상에서 비롯된다. 계몽주의는 기독교 위주의 중세 가치관을 비판하며 등장한 철학 사조이다. 모든 사상의 중심이 있는 신을 들어내고 그 자리에 인간이 이성을 들여놓는 것이다. 쉽게 말해 이제는 종교가 아니라 ‘이성’으로 세계를 바라보자는 철학이다.
계몽주의는 영국의 시민혁명이 발생할 때부터 학자들 사이에 퍼졌다가 18세기 들어 본격적으로 유럽을 흔들기 시작했다.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했다는 주장은 사기라며 종교까지 이성적인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신학자들도 많이 일어났다. 이런 신학자들은 종교를 완전히 내버리는 대신 “종교를 미신이 아닌 합리적인 이성으로 바라봐야 진리를 찾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런 종교관을 이신론理神論이라고 한다.
1748년 계몽주의의 이론서가 나왔다. ‘법의 정신’이란 책이다. 이 책을 집필한 몽테스키외 또한 계몽주의자였다. 몽테스키외는 이 책에서 왕이 모든 권력을 독점해 나라를 통치하는 것을 반대했다. 국가 권력이 한 사람에게만 집중되면 독자가 나타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로 권력이 분산해야 한다는 것이다.
몽테스키외는 어느 한쪽으로 권력이 치우치지 않고 골고루 분산되면 모든 사람의 이성이 제대로 발휘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이념을 삼권분립이라고 한다. 프랑스 혁명에 앞서 탄생한 미국이 사상 처음으로 삼권분립 제도를 도입했다. 오늘날 대부분의 민주 국가들이 이 제도를 따라 운영된다.
장 자크 루소가 등장하면서 계몽주의는 절정에 이른다. 루소는 스위스 제네바 출신이다. 그의 사상은, 인간은 자연 상태로 돌아가야 본성을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정치와 사회 제도가 인간의 본성을 억압한다면 루소는 당연히 그 제도를 뜯어고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1762년 루소는 이런 주장을 담은 책을 썼다. 그것이 바로 ‘사회계약론’이었다. 지배층이 보기에 이런 책이 달가울 리 없었다. 책의 내용이 불온하다는 이유는 그에게 체포령이 떨어졌고 그는 스위스, 영국을 떠돌며 도피생활을 해야 했다.
이 책의 이념은 프랑스 혁명에 큰 영향을 주었다. 게다가 민주주의가 정착하는 데 가장 크게 기여한다. “사람들은 원래 자유롭고 평등하다. 사람들이 사회나 국가를 만드는 것도 사회계약을 체결했기 때문이다. 비록 문서는 없지만 왕도 국민과 이 사회계약을 체결한 것이다. 왕은 왕의 자리에 앉는 대신 국민의 자유와 평등을 보장해야 한다.” 마치 열왕기상 12:6-7에 나오는 르호보암 왕과 백성들과의 대화 내용과 유사하다. “르호보암 왕이 그 부친 솔로몬의 생전에 그 앞에 모셨던 노인들과 의논하여 가로되 너희는 어떻게 교도하여 이 백성에게 대답하게 하겠느뇨 대답하여 가로되 왕이 만일 오늘날 이 백성의 종이 되어 저희를 섬기고 좋은 말로 대답하여 이르시면 저희가 영영히 왕의 종이 되리이다 하나”
즉 이 말을 달리 해석하면, 왕이 국민의 자유와 평등을 보장해주시 않은 때는 계약 위반의 책임을 묻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안 된다는 얘기가 된다는 말이다. 그 말은 곧 왕을 몰아내도 정당하다는 뜻도 된다. 따라서 국민은 못된 왕을 몰아내기 위한 혁명을 일으킬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루소는 생각한 것이다.
삼권분립이나 사회계약론 같은 계몽주의 사상은 민중에게 급속하게 퍼져갔다. 당연히 왕은 계몽주의 사상이 퍼지지 않도록 단속하려고 했지. 그러나 이미 시민 혁명의 경험이 있는 민중들이라 왕이 막아 설 수가 없었다.
제임스 와트가 증기기관을 발명할 무렵인 1772년, 또 하나의 계몽주의 고전이 탄생했다. 21년간 몽테스키외, 루소, 볼테르, 달랑베르, 디드로 같은 계몽주의자들이 공동으로 작업해 만든 30권짜리 대작이었다. 바로 그 유명한 <백과사전>이다. 이 책의 출간으로 이제 계몽주의 이론은 완성 됐다고 할 수 있다. 계몽주의가 멀리 아메리카로 건너갔다. 유럽에서와 마찬가지로 미국 식민지 지도자들도 계몽사상에 흠뻑 빠졌다. 영국에 저항해 미국이 독립을 얻은 것은 결국 계몽주의의 힘이었다고 볼 수 있다.
미국이 영국으로 부터 독립해 민주공화국을 선포한 1789년 7월 프랑스 혁명이 터졌어. 유럽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건너갔던 계몽주의는 미합중국을 탄생시킨 뒤 다시 프랑스로 돌아왔어. 그러잖아도 계몽주의 사상으로 들썩이던 프랑스였는데, 멀리 미국에서 새로운 공화국이 탄생했다는 소식까지 들려오니 혁명의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프랑스 민중의 저항은 더욱 격해졌다. 결국에는 프랑스에서 절대왕정이라는 낡은 체계(앙시앵레짐)가 무너질 수 밖 에 없었다.
이때부터 민족주의와 자유주의가 대립되면서 상호 발전한다.
보헤미아는 오늘날 체코를 가리킨다. 신성로마 제국에 포함되어 있고 합스부르크 왕조의 영토다. 30년 종교 전쟁의 원인이 되었던 개신교와 카톨릭교도와의 싸움도 이곳에서 발생했다. 그렇다면 체코인들은 오스트리아, 독일, 이탈리아와 같은 유럽 국가들과 똑같은 민족일까? 아니다. 지배층만 그곳으로 넘어왔을 뿐, 민중은 모두 슬라브족이다. 결국 메이저 유럽 사람들에게 있어 체코인은 이방인으로 여겨졌다.
체코에서 지유주의에 가까운 범슬라브주의가 일어났다. 범슬라브주의는 민족주의 성격을 띠기는 했지만 실제로는 자유주의에 가까웠다. 이 범슬라브주의와 또 다른 범슬라브주의가 있다. 체코에서 범슬라브주의 운동이 시작될 무렵인 1830년대 후반, 러시아에서도 범슬라브주의 운동이 일기 시작했다. 러시아는 슬라브족이 다른 민족보다 우월하며 러시아가 중심이 되어서 슬라브족을 부흥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동유럽 국가들의 범슬라브주의와 달리 맹목적인 민족우월주의가 녹아 있다. 이 러시아의 범슬라브주의가 점점 커질 수 있었던 전쟁이 바로 러시아-투르크 전쟁이다.
그러자 신성로마 제국의 영방들, 즉 게르만족도 가만히 있지 않는다. 그 당시 오스트리아의 사정은 이러하다. 베스트팔렌조약 이후에 신성로마 제국이 영방 체제로 바뀌면서 합스부르크 왕조의 통치 구역은 오스트리아와 주변의 작은 공국으로 축소되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합스부르크 왕조가 황제를 배출한다는 상징성은 남아 있었다. 오스트리아는 여전히 신성로마제국의 맏형노릇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폴레옹은 프랑스의 황제다. 두 명의 황제가 유럽에 함께 있을 수 없다고 여긴 나폴레옹은 신성로마제국을 해체할 요량으로 전쟁을 일으킨다. 그래서 오스트리아에 가까운 16개 영방을 따로 떼어내어 라인동맹을 만들었다. 쪼가리 난 신성로마 제국을 쥐고 있는 황제 프란츠 2세는 마침내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난다. 이러서 신성로마 제국의 9백년 역사는 끝이 난다.
이런 와중에서 게르만족도 민족주의를 주창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범게르만주의다. 사실 19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범게르만주의는 강하지 않았다. 범게르만주의란 말도 프로이센에 의해 독일이 통일된 19세기 후반에 본격적으로 사용되었다.
따지고 보면 유럽사람들이 민족이란 개념을 중요하게 여기기 시작한 것도 불과 200 여년 밖에 안 된다. 중세 시대만 하더라도 민족이라는 개념은 거의 없었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경우를 봐서는 유럽 여러 나라를 지배했었다. 그 가문의 영토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그냥 합스부르크 가문의 백성일 뿐이다. 민족이란 개념은 근대로 접어든 이후에야 비로소 자리 잡는다.
이 민족주의와 함께 생각해봐야 할 이념이 바로 자유주의다. 이 두 이념은 동전의 양면처럼 늘 한꺼번에 나타난다. 민족주의와 자유주의는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 1848년의 혁명시를 거치면서 유럽 전역에 나타난다. 얼핏 보면 자유주의와 민족주의가 비슷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많이 다르다.
가령 초창기의 범슬라브주의를 생각해보자. 그들이 원한 것은 자유주의 연방국이었다. 반면 러시아의 범슬라브주의는 맹목적 민족주의였다. 자유주의는 아니라는 말이다.
산업과 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 자본가를 포함한 자유주의 시민들의 세력이 강해진 영국과 프랑스에서는 맹목적 민족주의가 덜 발달했다. 그러나 독일, 러시아, 오스트리아 같은 나라는 뒤늦게 열강의 대열에 진입하기 위해 철저하게 국가가 산업을 주도했다. 그러다 보니 개인의 자유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국가가 강해지는 것이 더 중요하니 자유가 억압되어도 반항하지 말하는 것이다.
여러 민족이 뒤섞여 있는 오스트리아가 민족주의 때문에 큰 몸살을 앓는 대표적인 나라가 된다. 1848년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던 북구 이탈리아, 헝가리, 보헤미아에서 독립 혁명이 일어났다. 물론 이 혁명은 모두 실패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들 나라가 독립을 포기한 것이었다.
그 때문에 민족 간 갈등이 폭발 진적의 수준까지 치달았다. 1867년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는 헝가리에게 자치권을 주었다. 헝가리는 왕국을 건설했지만 프란츠 요제프 1세가 헝가리 왕국의 왕에 올랐기 때문에 완전한 독립은 아닌 셈이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나라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다. 오스트리아는 게르만족이고 헝가리는 마자르족이다. 게르만족은 마자르족을 우습게 여겼다. 오스트리아 왕실과 죽이 맞는 마자르족 귀족들이야 벌 제재를 받지 않았지만 평범한 마자르인들은 식민지 백성과 다름없는 생활을 해야 했다. 마자르인들은 독립투쟁을 벌렸다. 오스트리아는 당연히 탄압했다. 오스트리아에 있는 소수민족은 마자르족만 있는 게 아니었다. 슬라브족들도 있었다. 이들도 당연히 탄압을 받았다.
강대국의 지배로부터 벗어나려는 민족은 자유주의를 꿈꿨다. 프랑스 혁명, 7월 혁명, 2월 혁명 1848년 혁명 등이 모두 자유주의 국가를 만들고 싶다는 바람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주의는 맹목적 민족주의에 의해 무너지고 만다. 민족주의와 자유주의는 공존할 수 없다. 민족을 너무 강조하면 개인의 자유를 억압할 수밖에 없고, 개인의 자유를 지나치게 강조하면 민족이고 국가고 상관없다는 자유방임이 되고 만다.
독일국가의 성립하고 비스마르크와 독일 통일한 것은 이 19세기의 혁명의 여파였다.
나폴레옹 전쟁이 한창이던 19세기 초, 이 무렵 프로이센은 특히 군사 분야에서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었다. 구식무기를 모두 최신무기로 바꿨고 군인 수도 대폭 늘어났다, 국가가 주도해 곳곳에 중화학 공장들을 건설했다.
이런 상황에서 나폴레옹 정복 전쟁이 터졌다. 프로이센은 나폴레옹 군대가 두렵기는 했지만 지금까지 나름대로 전투력을 보강했기 때문에 충분히 맞설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아니었다. 1806년 나폴레옹 군대와 치른 예나 전투에서 프로이센 군대는 너무 쉽게 패하고 만다. 프로이센은 곧 나폴레옹에게 점령되고 말았다.
나폴레옹 전쟁이 끝나고 원상회복된 프로이센은 지금껏 자신들이 환상 속에 살아왔다는 것을 깨닫는다. 빈 체제가 만들어진 이후 프로이센은 과거보다 더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개혁을 추진했다. 무엇보다 국민의 교육에 신경을 썼다. 교육이 곧 국력이라는 말이다. 프로이센의 교육 열풍은 그 후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그 덕분에 20세기 초반에는 대부분의 유럽 사람들이 글자를 알게 되었다.
1834년, 독일에서는 39개의 게르만족 국가들이 관세동맹을 맺는다. 이 관세동맹을 주도한 나라는 프로이센이다. 오스트리아는 아예 빠졌다. 이 관세동맹 덕분에 독일 연방의 경제력은 나날이 발전했다. 그러나 이 관세동맹은 게르만족의 통일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전 단계로 추진되었다. 경제 발전에 따른 이익이 민중과 자유주의자들에게는 거의 돌아가지 않았다. 범게르만주의에 따라 개인의 자유는 오히려 더 억압되었다. 민족주의가 자유주의를 억누른 셈이다. 이러니 1848년 3월 혁명이 일어난 것도 우연이 아니다.
프로이센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3월 혁명에 굴복했다. 두 달 후에는 프랑크푸르크에서 첫 독일 의회인 국민의회를 열었고, 이듬해 3월 헌법도 만들었다. 자유주의가 승리하는 것일까? 아니다. 이 자유주의 운동은 1849년 12월 국민의회가 해산되면서 끝나고 만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프로이센을 다시 보수주의로 돌려놓았다.
1861년,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의 동생인 빌헬름 1세가 프로이센의 왕에 올랐다. 이듬해 빌헬름 1세는 오토 폰 비스마르크를 총리, 즉 재상으로 임명했다. 비스마르크는 매우 보수적이었으며 민족주의가 아주 강한 인물이었다. 그는 젊었을 때 프랑스와 러시아 대사관에서 근무했는데, 그때부터 프로이센이 중심이 돼 게르만족 통일국가를 건설해야 세계적인 강국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에게는 독일 통일이 지상과제였던 것이다.
재상(수상)이 된 비스마르크는 철형정책을 추진했다. 철혈정책이란 무력, 즉 철(鐵)과 피(血)만이 강력한 독일을 건설할 수 있다는 정책이다. 좀 더 쉽게 표현하자면, 힘만 있으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 정책은 프로이센 의회와 맞지 않았다. 아무리 군부 국가라고는 하지만 의회는 어쨌든 존재했고, 의원들 가운데서 자유주의자들도 꽤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스마르크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모든 사안을 우선 자기 뜻대로 추진하고 나중에야 형식적으로 의회의 승인을 받았다. 의회는 맘에 들진 않았지만 비스마르크가 무서워 승인할 수밖에 없었다. 철혈정책에 따라 비스마르크가 가장 역점을 둔 분야 또한 군대였다. 프로이센은 처음부터 끝까지 군부 국가를 벗어날 수 없었다. 어쨌든 비스마르크는 군인의 수를 더 늘렸고, 신신무기를 도입했으며 군대 기강을 더 엄격하게 고쳤다. 상사에 무조건 복종하는 군인을 ‘독일 병정’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만큼 프로이센 군대는 엄격했다. 어쨌든 프로이센은 비스마르크 덕분에 다시 군사 강국으로 성장했다.
내부 기반을 다진 비스마르크는 독일 통일을 위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우선 오스트리아부터 제거하기로 했다. 같은 게르만 국가이기는 하지만 오스트리아는 너무 많은 민족들이 뒤엉겨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오스트리아까지 통일 과업에 끼어준다면 자칫 민족 분쟁에 휘말릴 수 있고, 통일은 영영 멀어져버릴 수도 있다. 이런 점에서 비스마르크는 과감하게 오스트리아를 통일 작업에서 제외하기로 한다. 이런 통일 관점을 소독일주의라고 부른다.
반면 오스트리아를 포함해 모든 게르만족이 참여하는 통일국가를 건설하자는 관점은 대독일주의라고 부른다. 프로이센은 오스트리아를 치기로 한다. 우선 주변국이 전쟁에 개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프랑스와 이탈리아로부터 중립을 지키겠다는 약속을 받아낸다. 모든 작업을 마친 프로이센은 1866년 오스트리아를 전격 공격했다, 비스마르크의 예상대로 프로이센은 오스트리아를 물리친다. 이제 프로이센이 오트리아를 확실히 배제하고 소독일주의에 따라 통일을 추진해도 말릴 나라가 없다.
비스마르크가 다음에 노린 타켓은 프랑스였다. 그러나 전쟁을 일으킬 명분이 없었다. 마침 1870년 에스파냐에서 혁명이 일어나 왕의 자리가 비어버리는 사건이 생겼다. 이 왕이 후보로 프로이센 호엔촐레른 왕조의 인물이 거론되었다. 프로이센으로서는 에스파냐의 왕위를 차지할 경우 대륙의 최고 강자인 프랑스를 위아래에서 압박할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프랑스의 입장에서는 프로이센이 에스파냐의 왕이 된다면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이하는 바가 된다. 당연히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는 이를 반대했다.
이 사건을 구실로 프로이센 군대가 출정했고, 1871년 1월 28일, 프랑스를 정복하는데 성공한다. 이 비스마르크의 국내 업적 중에는 1889년 질병, 사고, 노후에 대비할 수 있는 사회보장보험을 처음으로 실시한 것이다.
베를린에서도 1848년 3월 18일 대규모의 봉기가 발생하였다. 이 봉기는 군대를 철수시키고 프로이센 헌법을 제정하기 위해 프로이센 국민의회를 소집하겠다는 왕의 약속을 받고서야 겨우 진정될 수 있었다.
1848년 5월 18일 585명의 대표들로 구성된 독일 국민의회가 전 독일적 자유헌법을 제정하고 하나의 독일 정부를 만들기 위해 프랑크푸르트 바울 교회에 소집되었다. 이 의회의 대의들 중에는 당시의 명망있는 독일 자유주의적 지식인들이 대거 망라되어 있었다.
그러나 정작 독일이 어떤 형태를 띠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두고 독일에서는 여태까지 의견통일이 된 적이 없었다. 바울 교회의 대표자들 역시 이 문제를 두고 가망이 없을 정도로 분열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결국 두 가지 해결책이 유력한 가능성으로 대두되었다. 첫 번째 가능성은 대독일의 해결방안이었는데, 이 안은 합스부르크 황제를 수장으로 해서 오스트리아를 포함한 독일의 모든 지역을 함께 묶자는 것이었다.
두 번째 가능성은 소독일의 해결방안이었는데 이 안의 지지자들은 오스트리아와 이에 속해 있는 지역을 제외한 나머지 독일 국가들을 합쳐서 독일을 통일하고 호헨쫄레른 황제를 그 수장으로 삼자는 것이었다.
독일 국민의회가 좌절한 데에는 유럽 강대국들의 이해관계뿐만 아니라 혁명이 과격화될지도 모른다는 우려 또한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한때 헌법에 바탕으로 한 경제 우호적인 민족국가의 건설을 꿈꾸었던 자유주의 성향의 시민계급은 이제 와서는 제2의 사회적 혁명, 자코뱅당의 테러와 길로틴(단두대)이 목적에 임박했다고 느끼게 되자 베를린과 비인에서 그 새로 결집된 반혁명세력과 손을 잡고 그때까지 자신들이 이룩했던 것을 성급하게 굳히려고 하였다.
그들은 1848년 11월 프로이센을 위한 헌법을 승인하였고 또 상당한 규모로 투입된 군대의 도움을 받아 혁명을 사실상 종식시킬 수 있었다. 이 이후에도 국민의회는 국민대표의 대다수가 지지했던 대독일의 해결방안을 포기하고, 프로이센 왕에서 ‘소독일’ 제국의 황제 타이틀을 부여함으로써 권력문제를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해결하려고 시도하였다.
표면적으로 보면 1848/49년의 혁명은 실패한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상유지세력과 운동세력 간의 갈등은 그래도 하나의 타협을 찾아내는 것으로 끝이 났다. 독일의 지배계급은 이제 어디에서나 명문화된 헌법의 구속을 받게 되었고, 또 입법권 역시 의회와 함께 공유하게 되었다,. 또 국민주권과 인권을 바탕한 대독일 민족국가를 세우려는 1848년 3월이 운동은 유럽 강대국들의 저항과 국내의 상이한 혁명적 세력의 의견차이로 인해 결국 좌절되었지만, 적어도 한 가지 점에서는 분명한 변화가 일어났다.
즉 독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미래의 가능성이 혁명 이후에는 뚜렷한 윤곽을 띠게 되었던 것이다. 이때부터 하나의 독일 민족국가를 건설하려고 했던 사람들은 두 개의 진영에 모여들게 되었다. 하나는 대독일주의 그룹이었고 다른 하나는 소독일주의 그룹이었다.
두 진영 중 처음부터 우세했던 쪽은 소독일주의 진영이었다. 그 이유는 경제적 분야에서 벌써 이 진영의 목표가 실현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미 1834년에 특히 프로이센 재무상 프리드리히 폰 모츠의 치밀한 준비에 힘입어 독일 관세동맹이 결성되었다, 1848년에 이르러서는 39개의 독일 연방국가 중 28개의 나라가 이 동맹에 참가했다. 메테르니히는 이러한 사태의 발전을 불신의 눈으로 바라보았는데, 왜냐하면 그는 그러한 발전이 ‘프로이센의 우이’를 더 강화시키고 또 이 기구를 통해 ‘독일 통일이라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교조적 원칙’이 조장되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실질적으로 오스트리아에 의해 주도되고 있던 독일 연방이 일체의 새로운 상황이나 개혁을 저지하려고 했던 현상유지의 기구였다면, 프로이센에 의해 주도되고 있던 관세동맹은 미래지향적인 공동운명체였고 또 점차 경제적 힘이 증대되면서 주위국가들을 끄어들이는 자석과 같은 견인력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새로 생겨난 비교적 큰 규모의 단일한 경제공간도 만약 옛날처럼 교통이 느리고 불편했다면 그렇게 빨리 제 기능을 발휘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1835년 11월 7일 뉘른베르크에서 퓌르트 간의 독일 최초의 철도가 6Km 길이로 개통되었다. 이를 위해서는 기술의 발전에 저항하는 보수주의들의 편견 및 반대와 오랫동안 싸워야만 했다. 이러한 싸움에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이 시기의 대표적 경제학자였던 프리드리히 리스트였고, 루르 지방의 공장기업가들이 이 싸움에 가세하였다.
그러나 미미했던 독일의 철도망이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면서 1848년 혁명전야에는 무려 5,000Km에 이르는 철도망이 구축되었다. 이것은 프랑스의 두 배, 오스트리아의 네 배가 넘는 길이였다. 관세동맹의 시장이 처음부터 본격적으로 기능을 하게 된 것은 이 같은 철도망의 구축 덕택이었다.
이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하나의 통일된 경제공간이 존재하게 되었고, 또 독일 전역에 동일한 경제압력이 작용하게 됨으로써 수요와 공급의 원칙 그리고 가격의 단일화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 게다가 철도건설은 철강관련 사업에 예기치 못한 호황을 가져다주었다. 기관차와 이에 필요한 부속품, 객차와 선로의 수요가 증가하면서, 이와 관련된 기계공장과 각가지 부품산업이 일대 호경기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1848년경에는 독일 산업의 튼튼한 기초가 마련되었다. 혁명 이후에는 더 이상 정치적 동요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기업가들은 큰 부담없이 장기적인 시설투자 계획을 세울 수 있게 되었다. 또 이와 비슷한 시기에 캘리포니아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엄청난 정도의 풍부한 금광이 발견됨에 따라 자본이 대량으로 유입되었다.
그 결과 대출의 이자가 낮아지고, 반면에 수요가 늘고 가격이 높아지면서 기업가들에게는 그야말로 황금의 시대가 도래하였다. 무엇보다도 철도건설에 따른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기 때문에 도처에 새로운 은행과 주식회가가 설립되었다. 1850년과 1870년 사이 독일 관세동맹 지역 내에서 유통되었던 은행권, 은행수신고와 투자된 자본의 총량은 3배나 불어났다.
경제 붐을 일으켰던 또 하나의 요인은 값싼 노동력이었다. 새로 설립된 공장은 마치 자석처럼 사람들을 흡수하였다. 도시의 빈민화된 비참한 대중들은 일정한 일자리와 안정된 봉급을 받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해 있다. 공장 프롤레타리아의 제 1세대에 해당하는 이들의 열악한 노동조건이나 비참한 생활상을 두고 행해졌던 정당한 비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되는 하나의 사실은, 산업화되기 이전 대중들의 비참한 생활상과 비교해서 당시 보통노동자의 사정이 그래도 나았다는 점이다.
실업과 불완전한 고용, 그리고 가내노동이나 벨기에, 영국과의 경쟁으로 인해 임금이 삭감되는 현상도 줄어들었다. 그래서 1852년과 1855년처럼 흉작으로 인해 생필품가격이 앙등했음에도 불구하고 기아로 인한 폭동은 더 이상 독일에서 발생하지 않았다. 19세기 전반부의 유럽의 미래를 어둡게 했던 커다란 사회적 위협. 즉 포퍼리즘(자유주의)이라는 대중빈곤현상이 점차 사라지면서 한 세대가 지난 이후의 젊은이들은 그러한 현상을 단지 나이든 사람들의 이야기로만 알게 되었다.
산업화와 함께 독일 사회의 여러 분야에서도 일대 변화가 일어났다. 옛 세계를 사라지게 만든 것은 정치적 혁명에 의해서가 아니라 경제 및 노동관계의 혁명에 의해서였다. 그리고 경제 및 노동관계 혁명이 철도에서 전신에 이르는 교통 및 통신수단의 혁명이 연계됨으로써 이 모든 요소들은 상호상승작용을 일으켜 사회변화를 가속화시키게 되었다.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악화일로를 걷던 농촌지역의 생활조건은 집단적 이주현상을 불러일으켰다. 새로 생긴 공업지대, 예컨대 슐레지엔, 작센, 베를린, 라인란트와 루르 지방 등에 안정된 일자리가 있다는 소문이 돌았고, 이러한 소문은 독일 역사상 최대구모의 인구이동을 야기시켰다. 일자리를 찾아 나선 일군의 사람들이 농촌지역인 엘메강 동쪽으로부터 베를린으로 물밀 듯이 몰려들었고, 이러한 이주민의 물결 후에 중부독일로 밀려들었으며, 다시 1860년경부터는 그 파고가 점점 더 높아지면서 드디어 라인-베스트팔렌의 루르 지방에 이르게 되었다.
이와 같은 인구이동은 한편으로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구성성분을 변화시켰다. 이제 프롤레타리아 계급에는 공장노동자 말고도 도시로 이주한 농촌의 일용노동자와 제자리를 잃게 된 수공업들이 아울러 속하게 되었다. 수공업자들의 경우, 그들은 대량생산된 값싼 공산품의 수요가 일일이 손으로 만들어내는 값비싼 수공업상품의 수요를 능가함에 따라 종래의 길드식 작업방식으로 생계를 꾸려가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그러나 1880년에 이르러 전기 모터나 소형발전기를 도입하면서 소규모 수공업공장은 산업시대에 맞는 경제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 수공업이 고사하게 되리라는 칼 맑스의 예언은 그대로 실현되지 않았다.
광범위한 시민적 중산층들 역시 여러 차례 밀려드는 사회의 유동화 과정을 빗겨갈 수 없었다. 프로이센이 개력조치를 통해 자본과 노동을 개방함으로써, 한때 지방에 살던 수공업자들이 도시로 몰려들었고, 중소도시의 기업가들은 보다 큰 판매시장을 갖고 있는 거대한 산업도시로 몰려들었다. 이에 따라 그 규모가 활장된 국가의 행정기구들 역시 행정관료들을 가능한 한 자신의 출생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배치하는 인사규정과 원칙을 발전시켜 나갔다.
한 마디로, 유럽의 신분적 농업사회가 해체되고 그 대신에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조아지 중산층으로 대별되는 도시적 근대산업사회가 등장하였던 것이다.
이 시대의 지배적 감정은 뿌리뽑힘의 감정, 즉 삶의 뿌리가 송두리째 뽑혀버렸다는 생활감정이었다. 가족의 유대가 끊어지고, 종교적 결속은 느슨해졌으며, 전통적인 존경심이나 충성심도 더 이상 유지되기 힘들었다. 산업적 환경, 공장, 행정조직은 전통적 규범이나 예절을 대신할 수 있는 아무런 대안도 제시하지 못하였다. 이제는 무엇인가 알지 못하는 익명의 힘, 언제나 맞바뀔 수 있는 교환성, 그리고 사회의 원자화 현상에 자신이 내맡겨져 있다는 감정이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했다.
다시 말해, 규범의 상실, 사회적 오리엔테이션의 불확실성, 정체성의 위기와 같은 지금까지 한 번도 있어 본 적이 없는 감정이 전 사회를 지배하였다. 이런 식으로 종교와 확고한 사회적 규범이 무너져버린 상황에서 새로운 시대의 수많은 신화와 주의 주장들이 생겨나 서로 경쟁하거나 격렬하게 반복하기도 하고, 때로는 절대로 화해할 수 없을 것처럼 상대방을 배척하기도 하였다.
한편에서는 자유와 행복, 개인의 경제적, 정치적 자율권에 대한 자유주의자들의 요구가 있었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혁명 이전의 절대주의적이고 귀족주의적인 권위적 구조를 고수하려는 정반대의 원칙이 팽팽히 상호대립하고 있었다. 그러니 이러한 모든 것과 맞물려 모든 국민의 공동의지가 구현되어만 할 국가의 통일이라는 이념이 존재하고 있었다.
1920년대 독일의 경제 상황은 어떠했을까?
국내의 진정한 안정을 위해서는 경제회복이 필요했다. 산업계는 화폐의 가치하락을 투자의 기회로 활용했을 정도로 하루가 다르게 솟구치는 인플레를 그런대 잘 극복했다. 도스안이 채택되자 외국자본이 유입되기 시작하였고 이에 자극을 받아 처음으로 대규모의 월스트리트 차관이 들어옴으로써 통화순환체계가 다시 작동하기 시작하였다.
또 몇 년 동안 대서양을 오가는 경제가 계속 활기를 띠게 됨에 따라 독일은 이제 전승국들에게 배상금을 지불할 수 있게 되었다. 전승국들은 이렇게 받은 돈을 다시 전쟁 동안에 미국에 졌던 채무를 갚는 데 쓰고, 미국은 또다시 이 돈을 차관형식으로 독일에 흘러 들어가게 하였다. 이처럼 잘 작동하는 시스템에 힘입어 독일 경제는 놀라운 회복세를 보였다. 1924년에서 1929년 사이 독일의 총 생산량은 50%나 증가하였고, 많은 산업분야가 한때 세계시장에서 누렸던 우세한 입지를 되찾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호황은 수출산업에만 한정되었고, 내수경우는 여전히 답보상태였다. 경제는 기본적으로 불건전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상당한 부분 점차 증가하는 경제의 집중화와 카르텔 형성 때문에 생겨난 것이었다. 이러한 경제의 집중화 현상은 시장에서 신축적으로 대응해야만 하는 기업가들의 경제활동에 큰 걸림돌이 되었다. 경제적 불건전성의 또 하나의 요인은 정부의 보조금이나 대출이 일방적으로 농업이나 중공업분야에만 할당됨으로써 보다 장래성 있다는 다른 산업분야가 제대로 발전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들어야 할 요인은 임금비율의 상승이었다. 외국과의 경쟁 때문에 생산비용은 기업가들의 투자의욕을 떨어뜨리고 종업원들의 수를 계속 줄일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민주국가를 위해 노동자계급을 동원하려면 국가의 복지혜택이 그들에게 돌아가야만 한다는 점이다. 실질임금이 감소하고 실업률이 높아지자 민주국가에 대한 그들의 충성심 역시 점차 사라졌던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노동자계급의 상당수가 반발의식을 가지고 공산당 당원이나 나치 당원이 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었다.
중산층 시민계급은 끊임없는 위기의식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그들은 사회적, 경제적 환경의 급격한 변화로 위협을 받았고, 이 계층의 수입증가율은 다른 계층의 그것에 비해 훨씬 뒤쳐져 있었다. 가옥이나 토지와 같은 부동산에 투자하지 않았던 중산층의 재산가치는 마치 햇볕에 봄눈 녹듯 하루아침에 사라져버렸다. 모든 사회 계층을 엄습했던 이러한 경제적 파국의 책임을 그들은 주로 민주주의와 공화국에 돌렸다.
1929년 10월 25일 뉴욕 증시에서 일어난 ‘검은 금요일’의 여파로 세계적 경제위기가 닥치면서 나치당에 기회가 찾아왔다. 외국 투자가들의 독일 국내 안정성에 대한 신뢰가 크게 흔들렸고 또 이로 인해 그렇지 않아도 조금씩 빠져 나가던 자본이 썰물처럼 한꺼번에 빠져나가는 양상을 보였다.
게다가 경제위가가 닥치면 언제나 그러한 것처럼 전세계에 관세장벽이 높아지면서, 독일에 의존해왔던 외국자본의 유입이 중단되었고 수출로부터 거두어들였던 세수도 급격히 감소하였다. 독일경제는 수출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현상은 생산과 고용 양쪽 모두에 파국적 결과를 초래하였다.
일 년 사이에 실업률은 9%에서 16%로 치솟았다. 하지만 그것은 거대한 경기침체의 첫 단계에 불과했다. 1932년의 독일 산업생산량은 1928년의 정반수준으로 떨어졌다. 같은 기간에 주가는 1/3로 곤두박질했고, 실업률도 1928년의 7%에서 1932년의 30.8%로 무려 4배 이상 증가했다.
경제위기는 모든 유럽 국가를 엄습했지만 특히 독일에 그 파괴적인 영향력을 끼쳤다. 그 이유의 하나는 바이마르 민주공화국 자체가 태어날 때부터 허약한 국가였기 때문이다. 이 국가는 내전을 저지하기 위해 보조금을 지원하고 재분배정책을 통하여 유권자들의 환심을 사려고 노력하였다. 또 이 국가는 지원을 요청하는 모든 이익집단들의 소망을 다 들어줌으로써 전쟁 이전보다 훨씬 많은 공적자금을 지출하였다. 특히 사회분야의 공공지출이 엄청나게 증가하였다.
1929년 국민 일인당 조세부담률는 1913년에 비해 2배 그러니까 9%에서 18%로 늘어났던 반면, 같은 기간 동안 제국정부와 주정부, 지방기간이 일 년에 지출한 사회비용은 무려 13배나 증가했다.
여기에 히틀러가 등장한다. 1933년 3월 23일 히틀러는 이미 공산당의원이 배제된 (독일 공산당은 제국의사당 방화사건을 계기로 금지되었다.) 새로운 제국의회에 ‘전임위임법’을 상정하였다. 그는 이 법을 통해, 제국의회나 제국참의원의 참여나 동의없이 법률을 공포할 수 있는 권을 갖도록 함으로써 의나 국가헌법기관을 유명무실하게 만들었다.
6월에는 사민당도 해되었고 사민당의 많은 간부들은 집단수용소로 끌려 갔고 그들 중 많은 수가 살해되었다. 국가 권력을 떠바치고 있던 두 개의 기둥은 관료집단과 군부였다. 4월 7일에는 ‘직업공무원 정비법’이 공포되면서 마음에 들지 않는 공무원들, 이를테면 민주주의자, 자유주의자, 특히 모든 유태인들이 공직에서 해고되고, 그 대신 나치 당원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사람들의 마음을 장악하려는 나치의 시도는 계속 되었다. 교육계나 대학에서 교수들이 쫓겨나기 시작하고 종교계, 특히 신교 내에 나치의 인종적인 차별을 찬성하는 ‘독일 기독교회 운동’이 번졌다. 물론 반대하는 교회도 있었는데 1934년 바르머에서 열린 신교총회에서 결성된 고백교회가 그것이다.
1933년 7월 20일 교황청과 히틀러 사이에 종교협약이 체결되고 난 뒤에 카톨릭 내부에서도 히틀러 동조하는 신부들이 많아졌다.
독일 민족의 생활공간을 확장하고 아리안족에 의한 세계제패를 추구하면서 유태인들은 1935년 9월 15일 뉘른베르크법에 의해서 모든 것이 빼앗기게 된다.1938년 제국국방군은 영국과 이탈리아가 개입하지 않으리라는 확실한 예상을 하고 오스트리아로 진격하고 오스트리아 국민의 열렬한 환호를 받으면서 드디어 2차 대전은 시작이 된다. 그해 9월 1일 폴란드 침공이 그것이다.
2차 대전 동안 유태인들만 학살한 것이 아니다. 1939년 10월부터 안락사 프로그램이 가동되어 자국민들 중에 정신지체 장애자들이 총살당하거나 가스나 주사를 통해 약 80,000명이 이미 학살 당했다.
1945년 5월 7일, 독일은 행스에서 연합군 앞에서 항복문서에 서명한다.
미국무성의 고위관리들은 독일의 경제적 어려움이 공산주의 확산을 조장하지 않을까 두려워하였다. 그래서 오는 것이 곧 ‘마샬 플랜’이었다. 1947년 6월 5일 신임 국무장관 조지 마샬은 전 유럽 국가들에게 차관, 식량, 원료를 제공하겠다는 원조계획을 발표하였다. 소련 세력권 아래 있던 국가들은 이 원조계획을 즉각 거부했지만, 서부 독일을 포함한 서유럽 전체의 경제개건을 위해서는 엄청나게 큰 도움이 되었다.
서방 국가공동체가 2차 대전 이후 서독을 받아들였다는 것은 그 이후의 독일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처음부터 미국이 아데나우어 정부를 지원함으로써, 독일의 신생 민주주의는 국내정치적으로도 상당한 신망을 얻게 되었다. 민주주의라는 것이 독일 역사상 처음으로 성공을 의미하게 되었다.
그러나 경제적 붐에 대한 전망이 처음부터 그렇게 밝았던 것은 아니었다. 1949/50년 겨울 동안만 해도 바이마르 시절 최악의 해를 연상시킬 만큼 실업이 만연하였고, 1939년 이래 지속되었던 생필품배급제 역시 1950년 3월에 가서야 끝이 났다. 그런데 한국전쟁의 결과로 전 세계적인 경제 붐이 일어났다고, 이 덕분에 서독 경제도 상당한 선전을 하게 되었다.
전쟁 중 못다 한 소비재에 대한 욕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였고, 전쟁의 파괴와 전후 산업시설 해체로 인해 위축되었던 산업계도 최신 생산설비에 상당한 자본을 투자하였으며, 마샬 를랜은 이에 필요한 자금을 공급하였다. 그리고 한국전쟁 기간 동안 서독의 가장 중요한 무역경쟁국이었던 미국과 서유럽 국가들이 군수물자 생산에 산업설비를 총가동하는 동안 서독 수출품은 세계시장에 침투할 수가 있었다. 그 밖에도 노동조합이 정부 수립 초기에 임금인상 요구를 자제한 것도 큰 효력을 발휘했다.
서독 정부는 이러한 경제적 번영으로 생긴 부의 운용공간을 이용하여 거의 혁명적인 방식으로 사회정책 분야에 손을 대었다. 1950년의 ‘연방 원호법’을 통해서는 3백만 명의 전쟁피해자들이 도움을 받았고, 1952년의 ‘고통 부담법’을 통해서는 전쟁, 추방, 재산몰수 등으로 재산상의 피해를 입었던 사람들에게 물질적 보상을 해줌으로써 국민들 사이에 역사상 유례없는 재산변동이 일어났다.
연방 실향민법, 경영협의체 규칙법, 연방 손해배상법, 연금 개혁, 병이 났을 때도 임금을 계속 지불하는 법적 장치, - 한마디로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독일 복지정책의 제도적 장치는 아데나우어 시대, 다시 말해 경제가 무한히 성장할 것이며 언제나 복지국가의 재원을 충당할 수 있으리라고 굳게 믿었던 그 시대에 그 연원을 두고 있다.
(7일째)
새벽부터 몸을 움직였다.
알프스를 찾아 오스트리아쪽행 고속열차를 탔다. 이른 아침인지 노숙자도 아직 보이지 않는다.
ICE(이체)이라는 이름의 고속열차가 시속 244km로 4시간을 달리고 뭔헨에 우리를 내려놓고는 역 내에서 다른 기차로 바꿔 타란다. 이번에는 오스트리아 영토로 들어간다. 짤즈부르크행 완행열차다.
가차 안에 독일의 전통 복장을 한 사람들이 왁짝지끌 함께 오른다. 남자는 반바지에 깃털 달린 모자를 썼고 여자는 앞치마를 입은 차림새다. 귀엽다. 그러나 착해 보이지 않는다. 코가 벌건 것을 보니.
짤즈부르그에 정오쯤 도착했다. 아내가 점심을 먹자고 했다. 하지만 고역이다. 독일에 와서 몇 날이 지나고부터 나는 매끼를 꼭 챙겨야 하는 것에 대해서 매번 얼굴을 돌리고 있는 형편이었다.
앙꼬가 듬뿍 있는 단팥빵과 크림이 들어있는 크림빵이 기대했던 나는 한국의 빵이 애초부터 국적 불명의 빵이라는 것을 여기 와서 처음 알았다. 빵의 원조는 이상한 향과 짜디짠 소시지가 가운데를 차지하는 빵이란다.
그런 힘든 결정을 할 때가 또 온 것이다. 그런데 이게 왠 구제준가! 맥도날드의 노란색 ‘M’자 간판이 보이는 것이 아닌가! 본능적으로 “가격은 한국과 동일하겠지”라고 기대하면서 온 가족이 그곳으로 달려갔다. 오랜 간만에 먹는 즐거움을 가졌다. 역시 가격도 부담스럽지 않는 것이 먹는 즐거움에 더해주는 보너스였다. 아내가 옆에서 “쫌생이”라는 말을 연신해댄다. 어쨌든 이때부터 짤즈부르크 마을이 좋아 보이기 시작한다.
역시 세상 보는 눈은 몸 상태가 결정하나 보다.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세계로 들어갔다. 이곳에서 촬영한 것이다. 높다란 산이 자빠질 듯 다가서서 마중 나온다. 중턱에는, 마리아가 홀로 수도원에서 빠져나와, 자연에서 울러 나오는 ‘음악의 소리 The Sound Of Music’를 듣고 노래하며 뒹굴던 그 풀밭 같은 것이 보인다.
마리아가 트랩 대령의 아이들을 데리고 ‘도레미송’ 노래를 가르치면서 돌아다니던 그 발자취를 거쳐서 강 건너 맞은편 산 정상을 점유하고 있는 호엔 요새(1077년 게르하르트 대주교 Archbishop Gerhard)를 올라갔다. 대주교가 큰 돈을 들여서 지어놓은 대규모 난공불락의 요새란다. 주교가 뭐가 무서워서 이런 요새를 지었는지 참…
(8일째)
Salzburg 미라벨 정원 9:10 150번 버스 타고→ St.Gilgen→Wolfgang호수. 유람선타고 →St.Wolfgang 도착. 12:05 등산열차 탑승 Schafberg 1783m 등정 →오후 2:10에 하산
조그마한 기차가 내 등을 자꾸만 밀어나면서 1700m까지 밀어부친다.
산 아래로 계곡과 맑은 호수가 보인다. 저수지가 아닌 진짜 호수다. 맞은편은 이쪽보다 더 높다. 표지판을 보니 백두산 높이다. 구름이 양쪽으로 연결짓고 있었다. 가파란 절벽이 시작되는 예리선 선위에서 가족은 사진을 찍어두었다.
매일매일은 사라지기 직전의 순간이다.
그러기에 시간상 절벽이며 내 공간이 아닌 경계선상의 존재다.
땅보다
하늘이 더 넓다는 것을
이제 알았다.
여보, 이제 죽어도 되나?
이왕 나선 여행, 박차를 가했다. 경치와 소금광산으로 소문난 할스타트까지 가기로 했다. 기차 달리는 것이 앙징맞다. 지나가는 작은 역마다 다 서면서 손님들에게 마음껏 풍광을 즐길 여유를 준다.
마침내 하늘마저 사라지고 산 덩어리와 넓은 호수가 빈틈을 다 채워놓는다. 멀리서 보니 청명한 물과 맞닿은 곳에는 풀처럼 민가가 돋아나 있다.
사과를 둘로 쪼개니
반은 산이요
반은 호수다
이곳이 할스타트Hallstatt다!
너무 작아서 역무원도 없는 역에 내리니 마침 작은 배가 건너와서 열차 손님을 호수 건너 풀처럼 보이던 그 동네로 실어준다. 벌써 저녁이 되려고 한다. 그만큼 해가 일찍 가리워진다.
숙소에서 창을 열었다. 호수가 처마 밑까지 밀고 들어와 있다.
참 피곤하지만 볼 것은 봐야 했다.
호수 위의 달과 별을.
낮의 청색 이미지는
어딘가 찢어진 하늘 저편으로 사라지고
밤의 호수는
정령이 홀로 사는 양 고요하다.
테이프처럼 반짝거리는 하얀 검은색 물결
손가락조차 담글 수 없구나.
He is a cross pendant.
He is engraved with a unique Number.
He will mail it out from Jerusalem.
He will be sent to your Side.
Emmanuel
Bible Verses About Welcoming ImmigrantsEmbracing the StrangerAs we journey through life, we often encounter individuals who are not of our nationa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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