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 사랑이 가능한가?

이웃 사랑이 가능한가?


이웃 사랑이 가능한가? 


내가 죄인임을 알고, 그 어떤 누구도 나의 죄를 씻어 줄 자 없음이 분명하고, 오직 예수님의 피만이 나의 죄를 씻어 줄 수가 알게 되었다면 구태여 ‘이웃’을 찾을 필요가 뭐가 있는가? 이 구원의 논리 안에 ‘이웃 사랑’이 끼어들 여지가 없어 보인다. 

정리하자면, 나의 구원에 눈에 보이지 않는 예수님만이 필요하다면 눈에 보이는 인간들이 나의 곁에 얼쩡거리는 것이 몽땅 귀찮은 일이 아닐까? “다들 내 눈 앞에서 꺼져 버려라. 내 구원에 일말의 보탬도 되지 못하는 것들아!”라고 마구 고함질러도 구원하고 상관없는 일아 아닐까? 

그런데 왜 성경에 ‘이웃 사랑’이라는 말이 나오고 왜 성경에 형제 사랑이 나올까?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요일 3:15-17) 

이웃 사랑이란, 나 구원에 필수 조건은 아니라 단지 구원받았다는 여유로움을 가지고 자신이 구원받은 티를 자랑하면서 가끔 툭툭 날려보는 동정이나 동냥 같은 것일까? 아니면 구원 여부를 측정하는 검증체제 같은 것일까? 

사람은 자신의 죄를 빼놓고 ‘구원’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죄에서 구원’인데 ‘죄’를 놔두고 그냥 ‘구원 불가능한 나를 구원 가능한 나’로서 구원을 생각하게 된다. 이러다보니 이기주의적인 구원관을 고수하면서 거기에다 예수님의 고귀한 피 흘림을 연접시켜 구원을 성사시키려고 한다. 

쉽게 말해서 고장 난 TV에다 전원 플러그만 꽂으면 TV가 나오는 줄로 아는 것이다. TV가 어디에 고장 났는가를 보지를 않는다. 아니 TV 당사자로서 그것을 인정하기 싫은 것이다. 그냥 고장 난 채로 천국으로 통하는 전원 플러그만 꽂아보려고 한다. 즉 나 자신이 어디가 고장 났는지, 왜 고장 나 있는지를 살펴보려고 하지 않고 그냥 천국에 가고 싶으니 무작정 예수님의 피를 믿고자 덤벼드는 것이다. 

십자가에 같이 달린 강도가 본인이 십자가 달리지 않았으면 예수님을 예수님답게 알아 봤을까? 분명히 강도질 하면서 잡힐 때까지 예수 믿기는커녕 계속 강도질을 했을 것이다. 그 구원받은 강도가 예수님을 알아 본 것은 예수님이나 자신이나 절망이라는 처지에 함께 묶여 있음을 파악했을 때이다. 즉 자신이 저주받아 마땅함을 통감하는 자리에 도달했을 때, 비로소 예수님의 구원의 의미를 제대로 알게 된 것이다. 그 때, 그는 그 곁에 있는 예수님이 진정한 ‘이웃’임을 받아들인 것이다. 

성도가 이웃 사랑을 실천하기 전에 먼저 ‘이웃’이 발견되어야 하는데 이 ‘이웃’의 발견은 자신이 저주받아 절망스러운 존재에 불과함‘을 자리에 그냥 그대로 머물러 있을 경우뿐이다. 그 자리, 곧 강도처럼 예수님과 더불어 십자가 달린 그 절망스러운 처지에 놓여 있으면 자기와 현재 접촉하고 있는 모든 자가 자신의 이웃이 되며 그 이웃에게 사랑의 시선과 용서를 날리게 된다. 

그런데 인간들은 ‘만나지는 이웃’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이웃만을 모집’하게 된다. 즉 교회라는 것을 만들어 놓고 자기중심, 자기 즐거움을 위한 사교장으로 변신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그 모임의 장은 나의 존재 자체가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장소가 된다. 즉 나 스타일, 나 취향에 맞는 이들에게만 호의를 베푸는 자리가 곧 ‘사랑이 넘치는 이상적인 교회상’이라고 여기게 된다. 따라서 나에게 호의를 베풀지 않거나 나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거나 나의 존재 가치를 무시하는 교회는 더 이상 자기가 출석할 필요가 없는 교회가 되어버린다. 

사교장으로서의 교회란, “나의 가치를 무시하는 자들은 다 내 곁을 떠나든지 아니면 내가 떠나든지 한다!”라는 엄포들로 늘 웅성거리는 교회다. 이것은 기세와 기세의 만남이다. 힘과 힘의 충돌이다. 교회 안에서 서로가 서로들 향하여 다음과 같은 무기들을 쏘아댄다. “날 무시하면 너 다친다. 주의하라” 그러면 상대방도 다음과 같이 맞받아 나온다. “네가 먼저 나를 무시했으니 너도 나에게 무시당해봐라. 날 건드린 대가가 얼마나 혹독한지 평생 가슴시리도록 해주겠다”

이런 속셈들을 품고 있으면서 겉으로는 이렇게 발언들을 한다. “하나님, 이런 사람들이 아니라 오로지 예수님의 피로서만 저를 구원해주시니 너무 감사합니다. (그러니 내 곁에 내가 원해서 모집하지 않는 자는 모조리 싹쓸이 되어 내 눈에 띄지 않게 하옵시고 그것이 원활하지 않으면 제가 이 교회를 떠나겠습니다. 나는 이런 쓰레기들 없어도 예수님의 피로만 구원받기에 저는 손해날 리는 없습니다.)”라는 투다.

과연 이런 마음 자세를 가지고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이웃 사랑’이 가능할까? 고장 난 TV라면, 정말 어디가 고장 났는지 꼼꼼하게 살펴봐야 한다. 그 고장 난 상황을 인식케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교회라는 형식으로 구성케 하신 것이다. 고장 난 것을 살피는 기준은 오직 하나 뿐이다. 

“하나님, 저 무시당해도 괜찮아요” 정신이다. 이 정신에서 벗어나 있으면 그 사람은 교회 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사교장에 다니는 사람이다. 당연히 그 사람에게는 사랑해야 될 이웃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본인만큼은 고장 난 TV가 아니라고 우기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고장 난 것을 지적하실 수 있는 분은, 고장 난 것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고장 난 TV 마냥 우리와 함께 ‘늘 잊혀진 존재’ 취급받는 예수님뿐이다. 

띠라서 모든 이로부터 무시당하고 모든 이로부터 모독 받으신 그 예수님에 합류한 자들만이 그 안에 예수님이 살아계셔서 자신을 무시하는 자들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행 7:69-70) 이것이 스데반 집사가 끝까지 보여준 이웃사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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