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비유해석학-비유에 대한 이해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에 너희는 생명을 위해 짐을 지고 예루살렘 성문으로 들어오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비유해석학-비유에 대한 이해

차 례 

Ⅰ.비유에 대한 이해 

1. 비유의 어원과 정의 

2. 학자들의 비유에 대한 정의

3. 비유의 개념적인 범주 

4. 예수님 비유의 목적

5. 예수님 비유의 특징 

Ⅱ. 비유해석의 역사

1. 초기 교부들의 시대 

2. 중세 시대(540-1500) 

3. 종교개혁과 종교개혁 이후 시대(1500-1888) 

4. 현대의 비유 해석법 

5. 비유에 관한 최근의 논의 

Ⅲ.예수님의 비유해석의 의도 

1. 은폐성 

2. 계시성 

Ⅳ.비유 해석의 원리 

1. 비유해석 원리의 기본적인 이해 

Ⅴ. 예수님의 말씀 속 비유에 대한 실례 

Ⅵ. 결 론 

참고자료

 

예수의 가르침은 자주 비유로 제시된다 . 예수님은 자신이 가르치고자 하는 심오한 진지들을 딱딱한 논리적․ 철학적 진술들로 제시해 나가기보다는 다양한 청중들에게 행하여진 구체적인 삶의 정황(情況, Sitz im Leben)에 대한 일상적인 언어로 제시하는 방식을 선호하셨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비유에 대한 적절한 이해가 지극히 중요하다. 

Ⅰ. 비유에 대한 이해 

1. 비유의 어원과 정의 

주전 2세기경에 유대 랍비들이 번역한 것으로 알려진 희랍어 구약성경인 70인역(LXX)은 히브리어 성경에 나오는 “마샬(לשׁפ)”은 21번의 경우를 “παρβολῄ” 의 근원이 되는 “마샬” 자체가 구약 성경에서 이미 “잠언”(겔18:2-3), “속담”(삼상24:13),“수수께끼(겔17:2-3), “이야기”(겔24:3-5), “비유”(겔17:2-10), “시”(시49:4)등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다.

신약성서에서 “비유”(parable)라고 할 때 이것은 주로 헬라어의 παρβολῄ 의 번역으로 이 말은 “곁에 둔다”라는 의미이다. 즉 어떤 사실을 그대로 말하지 않고 다른 표현 방법으로 말한 것을 의미한다. 이 단어에는 신약에서 50번 정도 나타나고 있는데 신약성서에서 “속담”(눅4:23), “일종의 수수께끼와 같은 질문”(막3:32), “직유”(마13:33), 또는 “확대비유”(similitude, 막4:40-32), “은유”(마 5:13), “비유적인 말씀”(눅5:36-38), “이야기 비유”(마22:1-14)등의 다양한 표현법이나 형식을 말하는 데 사용된다. 이것들 중에 특히 이야기 비유(story parable)는 다른 것들보다 긴 이야기의 형식을 가진 것으로 등장인물, 사건, 배경, 플롯 등 보통 이야기가 가지고 있는 요소들을 모두 지니고 있다. 때로는 이러한 이야기 비유를 “서사적 픽션”(narrative fiction, 마25:1-13, 열처녀의 비유), “예화”(눅10:29-37,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알레고리의 비유”(막4:1-19, 씨뿌리는 자의 비유)로 구분하기도 한다. 이들 중 신약성서 해석에서 주로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은 비유 중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이야기 비유들로 신약성서 해석에서 보통 비유라고 말할 때는 이것을 가르킨다.

비유는 하나님의 왕국와 그와 관련된 교훈들을 일상의 일들을 소재로 사용하여 이야기 형식으로 전달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비유는 세복음서에서만 등장하는데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비유를 사용함으로써 내부자(insider)에게는 진리를 더욱 분명하게 알려주시며, 외부자(outsider)들에게는 이해하지 못하게 하면 왜곡이나 공격의 메시지를 보호하며 새로운 형태의 말씀으로서 주의를 환기시키고, 일상의 일들을 소재로 말함으로써 보다 생생하게 교훈할 수 있는 수단이다. 

2. 학자들의 비유에 대한 정의 

사실 어원 연구를 통해서는 자세히 예수님의 비유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나타내는지 알 수 없다. 먼저 비유에 대해 연구한 한자들의 정의를 통해서 개괄적인 의미를 정의하고자 한다. 

• 다드(C.H Dodd):" 가장 단순한 형태에 있어서 비유는 자연이나 일상생활에서 이끌어 낸 일종의 ‘은유’(metaphor) 혹은 ‘직유’(simile)이다.” 

• 예레미아(J.Jeremias):"예수님의 비유는 현대 사회에서 그 실례를 찾아보기 힘든 예수 님 자신의 특수한 대화의 형식이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원래 형태를 회복할 수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비유에서 예수님 자신의 직접적인 육성을 들을 수 있게 된다.” 

• 도나후(J.R.Donahue):"예수님의 비유는 답을 기다리고 있는 질문이며 반응을, 기다리 는 초대장이다.” 비유는 인간의 상상력을 강하게 불러일으키는 일종의 은유이며, 놀 람과 역설과 자유를 자각하게 하는 일종의 이야기이다.”

• 크로싼(J.D.Crossan):"비유는 하나님에게 방을 제공해준다. 비유들은 이미 우리가 알 고 있는 기존 세계에 강한 충격을 주는 이야기들이다. 그들은 우리 자신의 방어력을 제거하여 우리를 하나님에게 로 사로잡아간다. 이러한 비유경험을 통해 하나님은 우 리에게 접촉하신다. 바로 이 순간에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임한다. ” 

• 윌더(Amos N.Wilder):"비유는 사람들에게 주목을 불러일으키고 그들을 생동감있게 하고, 그들을 어떤 것에 직면하게 한다.“ 

• 에벌딩(H.Everding):"비유는 바로 당신에게 말해지는 하나의 이야기이다. 단순히 하나 의 의미만을 가진 이야기가 아니라 여러 종류의 의미를 가진 이야기이다. 

• 스코트(B.B.scott):"비유는 천국이라는 상징과 관련되어 있는 예수님의 짤막한 설화체 이야기이다.” 

• 훌터그린(A.J.Hultgren):"비유는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행동, 혹은 그의 기대와 사 실이든 상상이든 이 세상의 어떤 것과 비교하는 말의 형태이다.” 

학자들의 비유정의를 통해서 예수님의 비유는 예수님 자신의 독특하고 생동적인 언어의 형태를 보이고 ,청중들에게 전달하려고 하거나 그의 반응을 유발하려고 하는 그 무엇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며 이것을 일종의 직유, 은유 혹은 이야기의 형태를 통해서 전달하고 있으며 예수님의 비유는 하나님의 나라와 나와의 만남을 마련한다는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3. 비유의 개념적인 범주 

1) 직유(Gleichnisse) 

직유는 “같이”, “처럼”과 같은 비교사에 의해서 연결되어 서로 본질적으로 다른 두 개의 실재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분명한 비교이다. 직유는 보편타당한 기존의 사실 또는 정규적이며 전형적인 일상생황의 사건에 호소함으로써 청중들의 호의적인 반응을 불러 일으키며 혹시 부딪힐지 모르는 반대를 무마시키는 역할을 지니다. 공관복음서의 비유들은 본질적으로 직유의 성격을 갖는다. 

2) 은유(Metaphor) 

은유는 비교 조사 없이 암시적인 비교만을 한다. 이러한 암시적인 성격때문이 비유의 본질적인 내용이라고 주장한다. 은유는 다음사람으로 하여금 이전 사람이 보았던 것을 보게 하지만 자기 방식대로 보게 하며 결과적으로 그것은 다른 상황들 그리고 미래를 향해 열려졌다는 것이다. 

3) 알레고리 (Allegory) 

사실 비유와 알레고리를 구별하는 일에 너무 엄격한 선을 그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지유가 어느 정도 확대되며 본래 의도한 적용을 위해 알맞은 세부 사항들이 삽입되고 적용이 청중에게 의해서 정확하게 이루어진다면 이러한 세부사항 속에서 이차적인 의미들을 찾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알레고리의 주된 형식적인 특징은 그것이 묘사하고 있는 각 이미지와 세부사항이 자체의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알레고리적 이야기와 그것이 나타내려는 것 사이에는 수많은 관련들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이런 연유 때문에 알레고리의 구조, 형태, 내적인 연관들은 외부에 있는 것, 즉 그 의미나 지시 대상에 의해 결정된다. 

4) 비유(Parable) 

이것은 넓은 의미에서 위의 범주들을 다 포함하지만 좁은 의미는 그것과 대조될 수 있다.직유가 대표적인 상황 혹은 전형적인 일반적 상황을 구상화 한 것이라면 비유는 관심이 가는 특별한 경우를 구상화 한 것이다. 우리는 자유롭게 꾸며낸 이야기들을 볼 수 있고 이것은 현실적으로 일어난 일이 될 수 도 있고 일어난 것이 아닐 수 있다. 또한 비유는 한가지이 비교점이 아닌 다양하게 해석되어 질수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5) 예화(Beispieler Zahlung)

 직유나 비유들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예화는 직유나 비유들ㄹ처럼 동일한 이야기 법칙에 귀속되고 논쟁의 형태를 띠지만 그것이 작용하는 방식이 다르다. 즉 비유가 말하는 자와 듣는 자 사이에 일치를 끌어낸다면 예화는 실례를 들뿐이다. 또한 실재 자체의 힘에 의해서 힘을 얻으며 논증하려는 사실을 강조하거나 설명해준다. 그것만으로 독자성이 없고 말하는 자의 주제에 종속되며 그것을 강조해 주는 역할 밖에 갖지 않는다. 

4. 예수님 비유의 목적 

비유의 일반적인 목적은 사태를 분명히 하고 예증하며 증명함으로써 진리를 분명히 알 수 있게 드러내는 것이다. 트랜취(R.C. Trench)는 만일 우리 주님이 단순한 영적 진리만을 말했더라면 그의 말씀 가운데 많은 부분이 청중의 관심부족과 통찰력의 부족으로 그들의 마음과 기억력으로부터 흔적도 없이 망각되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 비유의 사용을 통해서 그 말씀들이 청중들의 기억 속에 고정되고 그들에 의해 보존될 수 있다.예수의 교훈방법으로 비유의 목적을 네 가지로 살펴본다. 

첫째, 예수님은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그의 메시지를 예증하고 나타내기 위해서 비유를 사용하셨다. 그러한 비유는 단순이 어떤 진리를 설명하고 예증하는 것만 아니라 그것은 “듣는 사람에 대한 말하는 자 편에서의 긴박한 노력이다.” 비유를 말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고 , 그의 동의(同意)를 얻어 내며, 그의 판단을 특별한 방향으로 내리도록 영향력을 미치며, 그를 결단하게 하며, 그를 확신시키고 설복하게 한다는 것이다. 

둘째, 비유는 예수의 사역과 인격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그의 메시지를 반대려는 외부자(outsider)들 에게 그의 교훈들을 은폐시키기 위해 사용되었다. 예수님의 정황은 그의 메시지와 행위에 대해서 트집을 잡으려는 적대적인 상황에 있기 때문에 비유는 자연적으로 그들에게 자신의 메시지를 은폐시키는 역할을 갖게 된다. 비유를 거부하는 자들은 메시야 시대의 은사들 가운데 죄 용서라는 은혜로부터 배제당하고 있다. 

셋째, 예수의 비유들을 대부분 적대적인 상황에서 말해진 논쟁(論爭)의 무기이다. 비유는 예수님의 생애에서 구체적이고 일회적이고 종종 예견되지 않는 상황에서 말해진 것이다. 여기서 주로 문제가 되는 것은 투쟁의 상황, 변호, 방어, 공격 뿐만 아니라 도전이다 

예수님의 비유는 반대자들의 무장을 해제시키고 방어태세를 가추지 못하게 하고 그 말의 가운데 이끌리게 되면서 하나님의 사상과 요구에 직면하게 될 때 그의 메시지에 대한 변호 또는 그의 반대자들에 대한 공격, 도전의 형태를 띠었다. 

넷째, 비유들은 본질적으로 예수의 자기 증언들이며 자기 계시의 표현이다. 예수님께서 비유를 사용하심은 단순히 도덕적인 교훈이나 종교적인 진리를 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사역과 인격의 의미를 계시하고 분명히 하는데 있다. 비유는 예수님의 자신의 인격과 사역에 자리 잡은 종말론적 메시지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비유들은 그의 복음 선포와 더불어서 하나님의 은혜의 시대가 동텄다는 종말론적인 구속사적인 의미를 얻게 된다.

 5. 예수님 비유의 특징 

첫째, 비유는 일상적인 일들을 소재로 한다. 가정생활에서의 온 소재인 집, 음식, 과부, 문지기, 청지기, 술 부대, 결혼, 잔치, 아버지, 아들,주인, 하인등이 있다. 상업적인 소재인 돈, 상인, 빚, 이자, 소작인과 농부, 흙, 씨, 나무, 새, 포도원, 소출인 농업적인 소재도 있다. 

국가적 소재인 재판관, 왕, 전쟁과 종교적 소재인 제사장, 레위인, 사마리아인, 바리새인, 죄인, 기도, 성전이 있다. 

둘째, 비유는 전체적인 이야기를 통해서 중심 진리를 전해주려고 한다. 각 요소들을 통해서 많은 의미를 전달하려기보다는 전체이야기에서 한 가지 또는 몇 가지의 중심 진리를 전하려고 한다. 

셋째, 비유는 보통 당시의 일반적인 기대를 뒤엎는 “전복적(顚覆的:뒤집다) 지혜”를 담고 있다. 이것은 비유뿐 만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침의 특징이다. 특히 비유는 이러한 예수님의 지혜를 더욱 효과적으로 전하고 있다. 

넷째, 비유는 메시지는 주로 “하나님의 왕국”과 관련되어 있다. 세 가지의 복음서의 주제가 그러하듯이 비유의 가르침도 그러하다. 비유는 특히 하나님 나라의 왕국과 관련하여 그 시작, 진행, 종말등의 구체적인 진리를 제공해준다. 그 외에도 기도, 제자의 대가, 재물의 사요, 이웃 사랑등의 왕국과 관련된 하나님 왕국의 윤리를 담고 있다.(※뒷장의 복음서의 비유 분류한 것 참고) 

다섯째, 비유는 원래 말로써 전달된 것으로 즉각적인 반응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비유는 묵상하고 분석할 것이 아니라 듣고 이해하고 즉각적으로 긍정이든 부정이든 응답해야 한다.

 Ⅱ. 비유 해석의 역사 

1. 초기 교부들의 시대 

초기 교부들이 시대에 지배적인 비유 해석법은 우의적 방법 이었다. 비유를 우의적으로 해석하는 데 있어서 초기 교부들은 도덕적으로 민감한 사람들의 양심의 가책을 만족시켜주기 위하여 호머(Homer)의 작품 속에 나오는 영웅들과 그들의 행동을 일반적으로 오랫동안 우의적으로 해석해 온 사실에 크게 영향을 받았던 것이 틀림없다. 

① 필로(Philo) 

그는 구약성서의 가르침과 그가 받아들인 헬라철학의 가르침을 완전히 조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수단으로 이 우의적 해석법을 사용하였다. 이렇게 우의적으로 해석함으로서 “보다 깊은 것”을 “기독교적인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의미가 있는 것으로 발결 할 수 있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이 같은 방법을 성서해석에 사용하는 때가 종종 있다. 예수의 비유의 해석에 있어서 초대 교회에서 이 우의적 방법이 아주 널리 사용되었던 것은 결코 놀라운 것이 아니다. 

② 말시온(Marcion, d 160) 

우의의 사용의 본보기 가운데 하나인데 그에 의하면, 선한사마리아 사람(luke10:30-35)은 실제로 예수였다. 그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으로 역사상에 처음으로 예루살렘과 여리고 사이에 나타났다. 말시온이 왜 또는 어떻게 이러한 우의적 해석을 하게 되었는가를 알아보는 것은 별로 중요치 않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이 그의 가현설의 가르침(docetic teachings)과 잘 부합되는 것이었다. 중요한 것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문자 그대로 윤리적 태도를 가르치는 것으로 보다는 오히려 우의적으로 기독론(christological doctrine)을 가르치는 비유로 취급한 최초의 참고문헌이다. 

③ 이레니우스(irenaeus 130-200년경) 

그의 저서에서 우의적 해석법의 몇 가지 본보기를 볼 수 있다. 포도원 품꾼들의 비유(matt 20:1-16)를 취급하면서, 그는 맨 처음에 일하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창조의 시작에 부른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말했다. 두 번째로 (세시에) 부름을 받은 사람들은 “이후에”, 즉 옛 계약 아래에서 산사람들이라고 그는 말했다. 세 번째로(여섯시에) 부름을 받은 사람들은 “중간 시간 후에”. 즉 예수의 사역 시대에 참여한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그는 말했다. 네 번째로(아홉시) 부름을 받은 사람들은 그와 동시대 사람들이라고 그는 말했다. 마지막으로(열한시) 부름을 받은 사람들은 시간의 끝에 참여할 사람들이라고 그는 말했다. 또 포도원은 의(義)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았고, 포도원주인은 하나님의 영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았고, 또 데나리온은 영원불멸한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지식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았다. 

④ 터툴리안(Tertullian, 160-220년경) 

비유 해석에 대한 훌륭한 통찰력을 갖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비유를 우의적으로 해석하였다. 그가 비유를 우의적으로 해석한 것은 은혜로운 아버지의 비유(Luke 15:11-32)를 다룬데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이 비유를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맏아들은 하나님께서 구원을 이방인에게 주시는 것을 시기하는 유대인을 상징한다. 아버지는 하나님을 상징한다. 둘째 아들은 그리스도인을 상징한다. 낭비한 재산은 인간이 날 때부터 갖고 있는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자연적 능력과 지혜를 상징한다. 먼 나라에 있는 시민은 마귀를 상징한다. 돼지는 귀신을 상징한다. 옷은 아담이 그의 타락을 통하여 상실한 아들의 신분을 상징한다. 반지는 그리스도의 침례를 상징한다. 잔치는 성만찬의 성례전을 상징한다. 탕자를 위하여 잡은 살찐 송아지는 성만찬에 임재하는 구세주를 상징한다. 

⑤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ria, 150-215년경) 

이레니우스와 터툴리안의 동시대 사람인 클레멘트는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성서 해석 전통을 따라 이전의 어떤 사람들보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좀 더 자세하게 우의적으로 해석하였다. 클레멘트는 이 비유를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그리스도 

도둑들=어두움의 지배자들 

상처들=공포, 정욕, 진노, 고통, 속임수, 쾌락 

포도주=다윗 혈통의 피 

기름=하나님 아버지의 긍휼 

(건강한 구원의) 붕대=사랑, 믿음, 소망 

⑥ 오리겐 

우의적 해석 경향성이 하나의 학문(science)이 되었다. 데살로니가 전서 5장 23절에 따라 인가이 세 가지 본성을 가족 있는 것과 같이 성서도 세 가지 의미를 갖고 있다고 오리겐은 주장했다. 이 구절에 관한 오리겐의 해석에 따르면, 인간에게 몸, 혼, 그리고 영이 있듯이 성서도 몸 또는 본문의 문자적 의미(주로 이것은 보다 깊은 의미에 도달할 수 없는 사람들, 즉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혼 또는 본문의 도덕적 의미(비유적 해석이라고도 불려진다), 그리고 영 또는 본문의 영적 의미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오리겐의 해석법을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 적용했을 때에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여리고로 내려가는 사람=아담 

예루살렘=낙원 

여리고=세상 

강도들=요 10:8에 언급되어 있는 도둑과 살인자와 같은 인간의 원수들과 원수의 영향력 

상처=불순종 또는 죄 

제사장=율법

레위 사람=예언자들 

선한 사마리아 사람=그리스도 

짐승=그리스도의 몸 

주막=교회 

두 데나리온=성서와 성자에 관한 지식 

주막 주인=교회를 돌보고 있는 천사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돌아옴=그리스도의 재림 

⑦ 어거스틴(augustine 354-430)

비유의 우의적 해석은 초기 교회에 있어서 최고 경지에 도달했다. 어거스틴에 의하면, 이 비유는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다. 

여리고로 내려가는 사람=아담

예루살렘=평화스러운 하늘의 도시

여리고=우리의 죽어야할 운명을 상징하는 달 

강도들=마귀와 그의 천사들 

옷을 벗기는 것=그의 불멸성을 빼앗은 것 

그를 때리는 것=죄를 짓도록 그를 설득하는 것 

그릴 거의 죽게 한후 내버린 것=죄를 짓게 하여 영적으로 죽게 만들었으나 하나님을 아는 지식 때문에 아직 반쯤 살아 있는 것을 가리킨다. 

제사장=구약의 제사장 제도(율법) 

레위 사람들=구약의 사역자들(예언자들) 

선한 사마리아 사람=그리스도 

상처를 싸매는 것=죄를 억제하는 것 

기름=선한 소망의 위로 

포도주=활발히 일하라는 권고 

짐승=그리스도의 몸 

주막=교회 

두 데나리온=사랑의 두 계명 

주막 주인=사도 바울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돌아 옴=그리스도의 부활 

2. 중세 시대(540-1500) 

초기 교부들의 주요한 강조점이 성서 주석에 있었던 것에 반하여 중세의 스콜라주의 신학자들의 주요한 관심은 조직신학 분야에 있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해석함에 있어서 스콜라주의 신학자들은 분명히 초기 교부들의 해석에 빚을 지고 있었다. 

① 베데(Venerable bode, 673-735) 

그의 글을 읽을 때에 우리는 어거스틴의 글을 다시 한 번 읽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 관한 그의 해석을 다음과 같이 볼 수 있다. 

여리고로 내려가는 사람=아담 

예루살렘=평화스러운 하늘의 도시 

여리고=변화를 상징하는 달 

강도들=마귀와 그의 천사들 

옷을 벗기는 것=아담에게서 영혼불멸과 무죄의 영광스러운 옷을 벗기는 것 

상처=죄

제사장=구약의 제사장 제도

레위 사람=구약의 사역자들 

사마리아 사람=그리스도

 기름=회개 

짐승=그리스도께서 입으신 육신, 즉 성육신 등등 

② 아퀴나스 

아퀴나스는 그의 위대한 저서인 「신학 대전」(summa theologica)에서 우의적 해석법과 본문의 네 가지 의미를 옹호하였다. 그의 저서에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해석하고 있는데, 이것은 당시에 이 해석법이 비유의 신학적 해석에 있어서 특별히 가치 있는 자료이다. 왜냐하면 이 비유에 대한 그의 해석은 본질적으로 초기의 우의적 해석과 스콜라주의 신학자들의 해석의 대요(compendium)이기 때문이다.

3. 종교개혁과 종교개혁 이후 시대(1500-1888) 

종교개혁은 성서 해석법에 새로운 통찰력을 가져다주는 시기였다. 

①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 

그는 성서의 네 가지 의미에 관한 중세의 개념을 부인하였다고 그리고 성서를 우의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은 “속임수(affenspiel)를 쓰는 성직의 사기꾼”으로 비유하였다. 루터에게 있어서 성서는 우의적으로가 아니라 문법적으로 해석해야만 했다. 루터는 이론 면에 있어서는 건전하였다. 그러나 실천면에서 그는 반드시 그의 이론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여리고로 내려가는 사람=아담과 온 인류

강도들=우리에게 강도질하고 우리에게 상처를 주는 마귀 

제사장=모세 이전의 족장들(노아, 아브라함) 

레위 사람=구약의 제사장 제도 

선한 사마리아인=주 예수 그리스도 

기름/포도주=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한 복음 

기름=은혜 

주막=세상 안에 있는 기독교(교회)

주막 주인=하나님의 말씀의 설교자 

포도주=크리스찬이 져야 할 십자가 

짐승=주 예수 그리스도

② 죤 칼빈(john calvin, 1509-1564) 

종교 개혁자들 가운데서 일관성 있고 훌륭한 성서 주석가로 그의 성서주석들은 영속적인 통찰력을 많이 내포하고 있으며 아직도 그것을 읽는 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루터와 마찬가지로, 칼빈도 알레고리적 해석법을 반대하였다. 그리고 그는 초기 교회의 알레고리적 해석법을 “쓸데없는 어리석은 행위”라고 말했다. 칼빈에게 있어서 선한 사마리아 비유의 주된 목적은 “우리 갖자가 서로 행해야할 의무로서의 이웃 사랑은 친구나 친척에게 국한시킬 것이 아니라 온 인류에게까지 널리 개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luke 16:1-8)를 논의하면서, 그는 너무 여러 가지 의미를 상세하게 찾지 말 것을 경고하며 이 비유의 단 하나의 중요한 내용과 의미만을 찾으라고 하였다. 칼빈은 포도원 품꾼의 비유(matt 20:1-16)를논함에 있어 이 비유의 상세한 점까지 조사해보기를 원하는 것은 공허한 호기심이 될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 이상을 구하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통찰력을 갖고 있는 칼빈의 비유 해석법은 확실히 그 당시보다 몇 세기 앞선 것이었다. 

③ 루터와 칼빈은 후계자들 

불행히도 그들의 건전한 성서해석의 원리를 따르지 않았다. 특별히 칼빈의 경우에 있어서 그의 후계자들은 그의 건전한 성서해석의 실천을 곧 망각해버렸다. 그들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예수살렘은 낙원을 여리고는 달(moon)을, 여리고로 내려가던 사람은 아담을, 강도는 마귀를, 사마리아 사람은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으로 그들은 해석했다.

④ 대감독 트렌취(archbishop r.c trench) 

19세기에도 우의적 해석법이 계속해서 비유 해석에 있어서 지배적이었다. 아마 19세기에 영어 사용권에서 출판된 가장 영향력 있는 비유에 관한 저서는 대감독 트렌취(archbishop r.c trench)의 「우리 주님의 비유에 관한 주석」(notes on the parables of our lord)일 것이다. 그는 예수의 시대와 상황의 맥락에서 비유를 해석한 다음에, 이 비유의 윤리적 차원을 강조하였다. 

여리고로 내려가는 사람=인간의 본성 또는 아담 

예루살렘=하늘의 도시 

여리고=세속 도시, 저주 아래 있는 도시 

강도들=마귀와 그의 천사 

옷을 벗김=본래의 의(義)의 옷을 그에게서 빼앗는 것. 

거의 반 죽게 하고 버려둔 것=심한 도덕적 타격을 받는 것, 그의 혼의 생명의 피가 흐르고 있는 곳으로부터 온갖 죄악의 정욕과 욕망이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다시 희생될 수 있는 신령한 불꽃이 아직 남아 있다. 

제사장과 레위 사람=사람을 구원할 수 없는 율법의 무능력 

선한 사마리아 사람=그리스도 

상처를 싸매는 것=영혼의 상처를 치료하는 성례전 

기름=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마음속에서 믿음에 의하여 마음을 정화 시키는 것-성령의 기름부음 

포도주=그리스도의 수난의 피

사람을 짐승에 태우고 곁에서 걸어가는 것=“비록 그는 부하시지만,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신 분을 우리에게 상기시켜준다.” 

주막=교회 

두 데나리온=온갖 은사와 은혜, 성례전, 병 고침과 죄 사유함의 능력 

당신이 사용한 좀 더 많은 비용=의로운 봉사에 대한 상급 

위에서 제시한바와 같이 비유 해석에 있어서 우의적 해석법이 교회를 지배해온 것이 분명하다. 확실히, 안디옥 학파와 루터와 칼빈에 의하여 이러한 비유 해석법이 도전을 받았던 것은 확실하다. 특별히 후자는 비유 해석법에 관하여 가장 면밀한 통찰력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칼빈, 루터, 그리고 안디옥 학파는 비유의 우의적 해석이 널리 사용되고 있던 것을 뒤집어 덮는데 성공하진 못했다. 비록 성서의 네 가지 의미에 대한 종교개혁자들의 저항이 바른 것으로 시인되었으나, 비유를 해석할 때에 문자적 의미만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4. 현대의 비유 해석법 

① 아돌프 율리허 

현대의 비유 해석은 아돌프 율리허의 저서 「예수의 비유」(die gleich-nisreden jesu)의 첫 권이 1888년에 출판됨으로 시작되었다. 1888년까지는 비유 해석에 있어서 우의적 해석법이 지배적이었다. 이 저서의 출판으로 우의적으로 비유를 해석하던 일은 단번에 종식되었다. 율리허는 비유는 알레고리(allegories)가 아니라는 것을 반박할 수 없는 방법으로 논증했다. 각 은유가 자체의 의미와 의의(意義)를 갖고 있는 일련의 은유라고 그가 정의를 버린 알레고리와는 대조적으로, 비유는 단 하나의 비교할 점(tertium comparationis)을 갖고 있는 직유(similitude)라고 그는 정의하였다. 그러므로 하나 하나의 비유는 단 하나의 목적 또는 실재를 표현해주고자 하는 단 하나의 그림(a single picture)이다. 그 결과 그림(비유)의 상세한 점들은 그것 자체들을 나타내주는 어떤 기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그림이 나타내고자 하는 단 하나의 중요한 요점 또는 실재에 대한 다눈한 배경을 제공해주거나 그것을 윤색하는 데 불과하다.

이러한 이해를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 적용해볼 때에, 그 사람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여리고로 내려가고 있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하게 된다. 두 데나리온은 이 비유에 있어서 특별히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 내용은 아니다. 이것은 세 데나리온 일 수도 있다! 

율리허가 비유 연구에 공헌한 중요한 점은 비유와 알레고리 사이의 차이점을 지적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 때까지 여러 세기 동안 휩쓸고 있었던 비유의 우의적 해석 방법을 단번에 중단시키는데 공헌했다. 오리겐, 어거스틴, 그밖에 다른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과 같이, 비유가 알레고리가 아니라는 것이 지금은 명백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비유는 하나의 확대된 직유 또는 은유로서 다만 하나의 비교점(tertium compar­ationis)을 갖고 있는 데 반하여 알레고리는 일련의 은유들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율리허의 저서는 비유 해석에 크게 공헌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한계를 갖고 있다. 율리허의 가장 중요한 첫 번째 한계는 이전 사람들이 지나치게 비유의 우의적 해석을 강조한 것에 지나치게 반발하여 예수의 비유 속에 우의적 요소가 있다는 것을 완전히 부인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우의적 상세한 점 또는 해석이 복음서들 속에 있을 때마다, 그것들의 신빙성은 부인되었고, 또 그 원인을 초기 교회에 의한 비유의 재구성에 돌렸다. 예수의 비유 속에 있는 알레고리에 대한 이와 같은 반발은 율리허가 구약성서 보다는 아리스토틀(Aristotle)과 헬라의 수사학 이론에 의존했다는 사실에 의하여 주로 설명되어진다. 예수의 비유를 우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절대로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예수의 비유 또는 비유의 상세한 내용을 우의적으로 해석하지 않는 것이 현명한 규칙처럼 보인다. 우리가 예수의 비유를 우의적으로 해석할 수 있을 때가 아니라 그렇게 해석하지 않으면 안 될 때에만 예수의 비유에서 알레고리(allegory)를 찾아야 한다! 

율리허의 저서의 두 번째 약점은 그가 예수의 비유에서 항상 일반적인 도덕적 진리만을 본 것이다. 일반적 도덕의 진리를 말씀하신 것으로 율리허가 묘사한 자유주의자 예수와는 달리, 비유의 예수는 그의 말씀을 듣는 자들을 불안하게 만들고 노엽게 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그를 죽이고자 하였다. 만일 예수께서 신학적 자유주의의 일반적 도덕의 진리를 가르쳤다면, 그들은 그를 죽이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두 가지 한계(약점)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서학계는 비유 해석에 있어서 우의적 해석법에 사로잡혀 있었던 상태로부터 단번에 해방된 데 대하여 율리허에게 영원히 빚을 지고 있다. 율리허의 통찰력을 사용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이 비유 연구를 위한 우리의 첫 원리를 만들어 낼 수 있다. 만일 비유를 우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지 않다면, 비유의 상세한 내용에서 우의적 의미를 찾지 말고, 비유의 한 가지 중요한 핵심만을 찾으라. 

② 다드-요아킴 예레미아스 

비유 연구의 두 번째 주요한 통찰력과 원리에 공헌한 것은 어느 누구보다도 다드(C.H. Dodd)였다. 예수의 비유를 적절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예수께서 19세기 또는 20세기의 사람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그의 말씀을 직접 들은 1세기의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다드는 지적했다. 다드의 때까지는 비유의 연구가 그들의 독자들을 위한 비유의 의미에 너무나 관심을 쏟고 있었기 때문에 주로비유들은 각 독자의 시대와 현재 상황의 맥락에서 해석되어졌다. 예수의 비유들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무엇보다 먼저 비유들을 그것들의 본래의 삶의 자리(sitz im leben), 즉 예수의 생애의 본래의 배경과 그의 사역의 맥락에서 해석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어느 누구보다도 다드가 지적했다. 

ㄱ. 예수의 사역 기간 동안에 예수의 말씀을 들었던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있었을 것으로 상 상되어지는 생각들 

ㄴ. 예수의 가르침의 일반적 방향 

다드는 이러한 통찰을 비유 연구에 적용하였는데 그 결과는 매우 인상적인 것이었다. 현재의 곁눈 가리개(the blinders of the present)가 벗겨진 비유는 단순히 영원한 진리의 이타적인 일반적 유추(altruistic general analogies of eternal truthe)만이 아니라 때로는 예수께서 그의 청주의 편견과 표준들을 파괴하기 위하여 사용하신 논쟁의 무기였다는 것이 명백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예수의 종말의 가르침의 본질에 대한 자신의 이해를 종종 본문 속에 도입하여 몇 개의 비유들을 아주 인위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다드는 예수의 메시지는 오직 “실현된” 종말론의 차원(“realized" eschatological dimension)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믿었다. 

다드는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자신의 사역 속에서 완전히 실현되었고 예수께서 가르친 것으로 믿었다. 아직 실현되지 않거나 완성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예수의 사역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완전히 실현되었다! 이러한 확신의 결과로, 다드는 모든 비유들을 “실현된” 종말론의 관점에서 해석했다. 이것이 다드의 저서의 한계이다. 

예레미아스는 다드의 이론을 상세하게 그리고 체계적으로 발전시켰다. 예레미아스는 이러한 일을 수행하기에 아주 탁월한 자격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예수의 모국어에 정통하고 있을뿐 만 아니라 예수 당시의 종교적 관습과 환경에 전통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논증된 의견에 예수의 생애, 행동 그리고 말씀과 그밖에 다른 신약성서의 정경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찾아 볼 수 있다는 그의 견해를 첨가할 때에 그것은 기껏해야 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과 증거이다. 예레미아스가 어느 다른 학자들보다도 비유 속에 나오는 예수의 실질적 말씀(ipsissoma verba)을 확인하려고 애썼다는 것은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삶의 자리의 맥락(the context of the sitz im leben)을 이해하는데 이 저서 보다 더 좋은 자료는 없다. 우리는 다드와 예레미아스의 공헌을 요약할 수 있다. 이요약이 바로 다음과 같은 비유 해석을 위한 두 번째 원리이다.비유가 말해진 삶의 자리를 이해하도록 하라. “이 사람이 죄인들을 용납하여 그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가? 이 행위의 의미는 예수의 사역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을 찾고 계시다는 것이다! 

③ 편집 비평 

편집 비평의 발생과 함께 비유 해석법에 대하여 또 하나의 다른 통찰력을 얻게 되었다. 1950년대 중엽에 한스 콘젤만(hans conzelmann)과 월리 마르크센(willi marxsen)의 저서가 출판된 후로는 복음서 기자들이 그들의 복음서들을 쓸 때에 자기들 자신의 자료들을 자기들의 복음서들 속에 집어 넣었다는 신학적 해석과 강조에 대하여 큰 관심을 갖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다. 복음서 기자들은 단순히 여러 가지 전승들을 가위질 하고 풀칠을 하여 하나로 만든 편집자들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청중들의 요구를 채워주기 위하여 이 전승들을 해석한 신학자들이었다. 그 결과, 제3의 자리(the third sitz leben), 즉 복음서 기자들의 삶의 자리의 빛에서 비유들을 이해하고 또 해석하는 것이 중요하다. 때때로 첫 삶의 자리에서 비유들을 이해하고 또 해석하는 것이 중요하다. 때때로 첫 삶의 자리에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같이 적대감을 갖고 있던 청중에게 본래 말씀했던 비유들이 지금은 제 3의 삶의 자리에서 교회에게 말씀하고 있으므로, 복음서 기자들이 비유들을 어떻게 해석하였으며 또 그들 자신의 상황에 어떻게 적용하였는가를 조사해보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일은 우리로 하여금 복음서 기자의 상황과 그가 복음서를 씀으로서 성취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이냐를 밝히 깨닫게 하는 데 도움을 줄 뿐만 아니라 후에 우리가 오늘날 우리의 삶의 상황에 이 비유들을 적용하고자 할 때에도 도움을 준다. 세 번째 원리 복음서 기자가 비유를 해석한 방법을 이해하도록 하라 

5. 비유에 관한 최근의 논의

비유에 관한 최근의 논의는 비유 연구의 두 가지 다른 분야, 즉 구조의 분석(structural analysis)과 심리적 비평(aesthetic oriticism)에 집중되어 있다. 전자는 이야기의 표면 밑에 있는 의미의 “심층 구조”(“deep stuctures" of meaning)에 주로 관심을 쏟고 있다. 이 심층 구조가 저자의 정신의 무의식층에서 작용하고 있는 유사성의 패턴의 일반 법칙(commom codes of kinship pattern)속에 표현되어 있다는 것을 믿으면서, 그들은 본문의 의미있는 단위를 확인하고자 하며, 또 본문의 심층구조와 의미에 도달코자 노력한다.

훨씬 자주 사용되고 있는 접근법은 심미적 비평이다. 여기서 직유와 은유 사이의 차이점이 매우 많이 강조된다. 이 차이점은 순수한 형식의 영역(즉 직유는 “같은” 또는 “닮은”등과 같은 용어를 사용한 명백한 비교인데 반하여 은유는 은근히 암시된 비교이다)에 있다기 보다는 이 형식들의 존재의 질의 영역(the area of the existential quality)안에 있다. 즉 비유는 듣는 사람의 지식을 보태주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듣는 사람의 태도에 영향을 주어 그로 하여금 결단하게 만드는 것이다. 비유는 그러한 태도를 형성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 이러한 힘을 갖고 있으므로 비유는 단순히 정보를 전달해 주는 하나의 문학 형식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의 언어 사건이다. 모든 심미적 작품들과 같이, 비유도 역시“자주적”이거나 또는“자기의 목적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바꾸어 말하면, 비유들은 그 것들을 만들어 낸 사람들의 의도와는 독립해 있을 수 있다(이것은 소위“의도적 오류”라고 할 수 있다). 또는 그러한 비유가 그것을 듣는 사람들에게 미쳐줄 영향 또는 결과와는 독립적으로 있을 수 있다(이것은 소위“정서적 오류”라고 할 수 있다). 반대로, 그것이 갖고 있는 심미적이고 자기 자체의 목적을 갖고 있는 본질 때문에, 그 자체의 목적을 갖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어져야 한다. 

이 해를 신약성서 비유에 적용할 때에 이것은 비유를 예수께서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 자신에 관한 어떤 진리를 가르치기 위한 도구로서 이해하서는 안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비유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의미와 내용을 전달해 주지 않는다. 오히려 이것들은 하나님의 날에 관한 의미와 내용을 전달해 주지 않는다. 오히려 이것들은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판단하고 또 결단하게 만드는 실존적 경험(언어사건)에 참여케 만드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비유에 대한 이러한 접근법은 율리허, 다드, 그리고 예레미아스가 주장하는 바와 같이 비유들은 한 가지 의미 또는 주요한 핵심적 내용에 국한되어 있지 않다는 견해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비유들은 듣는 자와 독자에게 각기 다른 언어 사건이 됨으로 동일한 비유의 의미가 각 개인에게 필연적으로 다르게 될 수 있다. 그러므로 비유의 개방적 본질은 비유들이 단하나의 의미에 국한되지 않고 여러 가지 의미를 갖고 있는 다각적(polyvalent)인 것으로 인정할 것을 요구한다. 

초대 교회는 예수에게 신성과 신적 권위를 돌렸고, 또 초대 교회는 복음서 기자들의 저술은 신의 영감을 받은 것이고 또 신적 귄위를 작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비유에 관한 최근의 문학 비평은 신성을 비유의 형식 자체에 돌리고 있는 듯이 보인다. 비유는 과거에 하나님의 말씀이었던 것과 같이 현재에도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비유들은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다. 그 결과, 우리는 다음과 같이 네 번째이며 마지막 원리를 명확하게 말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비유를 통하여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계신가를 찾아보라.

Ⅲ.예수님의 비유해석의 의도

 여기에 대해선 여러 가지 견해가 있지만, 아직도 초대 교부시절부터 종교개혁을 거쳐 현 시대까지 많은 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왜 꼭 비유로 말씀하셨는가에 대해서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고 있는 중이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자명한 사실을 말씀하시는데 왜 굳이 비유로 돌려 말씀하셨는가에 대해서 Robert H. Stein과 J. D. Kingsbury의 저서들을 통해 학자들이 연구한 경향과 이제까지 얻어진 결과로 그 목적을 파악해보려고 한다. 

먼저 J. D. Kingsbury는 마13:10-15을 통해서 예수께서 비유를 사용하신 목적을 살펴보기로 한다. 그는 예수의 제자들의 질문 즉 “어찌하여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에 대한 대답은 하나님 나라의 비밀, 즉 진리를 지상의 이야기나 은유적 표현을 통해 인생들에게 가르치기 위함이라고 분명히 말한다. Robert H. Stein 역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진리를 예증하기 위하여 비유를 사용하셨다고 보고 있다. 그런데 이 견해의 문제는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목적이 하나님나라의 비밀을 감추기 위한 은폐적인 이유인가 ? 아니면 드러내기 위한 계시적인 이유인가 ? 하는 것이다. 두 가지 방법을 비평학자들과 복음주의 학자들의 견해로 비교해 마13:13-15과 막14:10-12 말씀을 통해 살펴보도록 하자. 

1. 은폐적 효과 

마가복음 4장 10-12은 예수님께서 왜 비유로 말씀하셔는가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구절이다. 비평학자들은 이 헬라어 본문을 영어로 번역하면서 "ινα"를 "so that"으로 해석했는데 이로써 의미가 'ινα'에서는 ‘의도적’으로 비유를 사용하시어 그 가르치고자 하시는 바 진리를 은폐시킴으로써 청중들로 하여금 그 진리를 깨닫지 못하도록 계획하셨다는 뜻이지만, 반대로 'so that'은 예수님께서 비유로 가르치셨기 때문에 ‘결과로’ 청중들이 진리를 깨닫지 못했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어떠하든지 예수의 비유는 결과적으론 모두 은폐적 효과를 가지셨던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복음주의 학자들은 예수님이 ‘외인들’에게 모든 것을 비유로 이야기 하신 한 가지 목적은 감추기 위한 것이라고 간주한다.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외인들에게 감추려고 하신 것은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라는 것이다. 

예수님 당시 그를 반대하던 유대인들은 예수님과 예수님의 메시지에서 허점을 찾으려고 매우 애를 쓰고 있었다. 특히 하나님 나라가 임하셨다는 메시지는 쉽게 오해를 받을 수 있었고 반대자들이 오용할 수 있었으므로 비유를 사용하여 자기를 반대하는 유대인들이 잘못된 고소를 하기 어렵게 하셨다는 것이다. 사실 사두개인들은 예수님이 그들의 성직체계에 위험을 준다고 여겨 적개심을 강하게 드러냈다. 예수님께서 사두개인들의 교리(막 12:18~27)와 성전 관리권을 남용한 것(막 11:15~19)을 책망하신 것이 대표적인 이유였다. 또한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위선에 대한 책망(마 23:13~36)과 독단적인(눅 18:9~14) 종교 지도권에 예수님이 위험을 주는 것으로 인식해서 직접 충돌(막 7:1~13)을 일으키게 되기도 했다. 빌라도 역시 많은 군중들의 주의를 끌고 헌신된 무리들을 이끄는 예수에 대해 대단히 의심을 품었을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의 왕국에 대해 로마왕국과의 연관성에 대해서도 의문을 품었을 뿐만 아니라, 메시야에 대한 칭호가 로마와의 전투에 공로를 세운 정치적 군사적 인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도 예수에 대한 의심은 상당한 수준에 올라 있었을 것이라 여겨진다. 

이런 연유에 예수님은 비유를 사용하심으로 예수의 결점을 찾아 폭력 선동 혐의로써 고소하려 하는 자들에게 그의 가르치심을 더욱 난해히 하셔서 고소할 틈을 주지 않으신 것이다. 즉 예수님이 비유를 사용하심으로 그의 대적에게는 주님의 메시지가 감추어졌던 것이다. 

2. 계시적 효과 

예수께서 비유로 가르치신 목적은 또한 계시적 효과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비평학자들은 예수님의 비유가 본래는 감추려는 것이 아니고 나타내려는 것이 그 목적이었지만, 마가복음이 기록될 즈음에 어떤 비유들은 그 의미가 손실되었거나 또는 알기 힘들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알레고리의 기능이 의미를 감추는 것 또는 알기 어렵게 만드는 것이므로 마가가 예수님의 비유를 알레고리로 취급했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사용하신 말씀이 진리를 감추어 어떤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고, 따라서 회개하여 죄 사함을 얻지 못하는 의미를 갖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한 비평학자는 ‘외인들’이 예수님의 모든 비유를 이해하는 데서 제외된 것이 아니라(막12:12; 눅15:1~2), 다만 하나님 나라를 취급한 비유들을 이해하는 데서만 제거된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즉 예수님이 모든 비유 중 삼분의 이에 해당하는 비유를 제자들에게 설명했고, ‘외인들’에게는 아주 소수의 비유만 설명했다고 본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를 취급한 비유는 예수님이 ‘외인들’에게는 설명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실제로 이러한 견해는 주장하는데 상당히 애로사항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바로 마가복음 4:10~12에서 ‘모든 것’(τα παντα)이 ‘외인들’에게 비유로 교훈되었기 때문에 그들이 보아도 알지 못했다고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이는 곧 그들이 못 듣거나 무지해서 하나님 나라의 비밀에서 제한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하진 않기 때문이다. 즉 예수의 비유는 비유를 들은 모든 사람들에게 진리를 가르치신 후에 그 진리를 더욱 명확하게 밝히기 위해서 예증으로 비유를 사용하신 것이라고 여겨진다. 

복음주의 학자들은 또 마태복음 13:35과 마가복음 4:11을 연관 지어서 보면 예수님께서 하신 비유의 목적이 계시임을 명백히 알 수 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비유는 곧 하나님 나라를 계시하시는 것인데, 예수님의 비유는 예수님 자신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이미 하나님 나라가 임한 것임을 나타내는 데 사용하는 양식이란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자신이 이 세상에 오신 것으로 하나님 나라가 임하신 것을 비유로 말씀하신 것은 곧 예언의 성취를 의미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심으로 임하기 시작할 것을 구약(시편 78:2)에서 예언했고 그 예언이 성취됐으므로 마태복음 13:34~35에서 구약을 인용하여 이미 전해오던 것이 실현된 것이라고 계시하신 것이다. 곧 마가복음 4:11의 ‘비밀’이라는 말은 하나님 나라에 관한 특별하고 현실적인 지식을 뜻하며, 그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심으로 하나님 나라의 임함이 계시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근본적 지식, 곧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 시작한 것을 이해하는 지식이 예수님의 비유를 이해하는 가장 큰 조건이란 것이다. 이 지식이 곧 예수님의 비유를 드러나지 않는 비밀로 두는가? 아니면 드러나는 의미를 깨닫는가 하는 데에 중요한 전제임을 말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결과적으로 보면 예수님의 비유는 계시와 은폐의 두 가지 성향을 동시에 지녔다고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해석하는 이의 의도에 따라 그 결과는 확연히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찾아낼 수 있어야 하겠다. 물론 무한하신 하나님의 메시지를 유한한 인간이 다 안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지만 오류와 선을 넘지 않는 그 안에서 주님의 메시지에 대한 고찰을 해 나가야 할 것이다.

Ⅳ. 비유해석의 원리 

1. 비유해석 원리의 기본적인 이해 

① 예수님의 역사적인 맥락-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 맥락에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겨자씨의 비유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그리고 세리의 비유 등은 모두 예수 시대의 맥락에서는 의미가 통하며 또 논지를 충분히 입증할 만하다. 

②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전체적인 문맥- 비유는 현대의 해방신학적(라틴아메리카 또는 중남미의 특정한 역사·사회적 상황을 배경으로 하여 출현한 혁신적 신학체계), 실존주의적(20세기 전반(前半)에 합리주의와 실증주의 사상에 대한 반동으로서 독일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철학 사상. ※합리주의: 비합리적 ·우연적인 것을 배척하고, 이성적(理性的) ·논리적 ·필연적인 것을 중시하는 태도 ※실증주의: 철학의 방법이 과학의 방법과 다른 것이 아님을 주장하는 철학적인 입장), 다른 사상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의 맥락에서 해석해야 한다. 

③ 문학적인 양식과 비유의 역동성- 다양한 비유들의 다양한 역동성에 민감해야 한다. 예를들면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땅 속의 씨와 하나님 나라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의 다양한 반응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는 어떤 주제에 대한 다양한 초점들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 표1: 하나님의 나라의 주제를 중심으로 비유를 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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