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목회학 원론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에 너희는 생명을 위해 짐을 지고 예루살렘 성문으로 들어오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제3장 목회의 대상으로서의 인간의 영혼

 

목회는 인간의 영혼을 돌보아 주는 일이다. 그런데 목회가 관심의 대상으로 삼는 인간의 영혼은 인간 속에 있는 영적인 것뿐만 아니라, 성서가 말하는 대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게 마련인 몸과 “영혼(Seele)"과 정신이 하나가 된 인격적인 전인(全人)으로서의 영혼인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존재라는 인식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바탕을 두고 있다. 바로 그런 점에서 목회는 하나님을 위한 전인(全人)의 성화(聖化)를 과제로 삼는다.

 

1. 서론

 

1) 목회는 인간의 영혼을 돌보아주는 일이다.

인간의 영혼이라고 할 때, 영혼의 개념은 물론, 이 영혼이 돌보아 진다고 하는 점에서 그것이 갖는 뜻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해야 한다. 우리가 목회라는 입장에서 인간의 영혼을 문제시할 때, 우리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생물학적인 또는 심리학적인 측면에서의 자연 과학적 인간학(naturwissnschaftliche Anthropologie)도 아니며, 그렇다고 해서 유물론적인 이상주의적인 측면에서의 철학적 인간학(philosophische Anthropologie)도 아니며 오직 순수한 신학적 인간학(theologische Anthropologie)을 말한다.

 

2) 영혼의 개념

창 2:7을 중심으로 하여 신학적 인간학이 말하는 영혼의 개념을 파악하려고 한다. 루터는 “야웨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만드시고 그의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셨다. 그랬더니 사람이 살아있는 영혼이 되었다”. 여기서는 바로 사람은 몸과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영혼의 사람을 현재의 모습이 되게 했다는 단순하고 본질적인 사실이 부각되어 있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바로 이것이다. 즉 한 육이 만들어졌는데 그것은 아직도 “살아있는 영혼(lebendige Seele)”으로서의 인간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좀 더 특별한 하나님의 작업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었다는 작업을 말한다. 이제야 비로소 그는 살아있는 인간이 된 것이다. 루터의 번역대로 ”살아있는 영혼“이 된 것이다. 인간은 실제로 계획된 대로의 영혼을 지닌 인간으로서 살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인간은 이제 육과 영이 이미 주어진 대로의 하나님의 전인(全人)으로서의 삶을 누리게 된 것이다.

 

2. 본론

 

1) 인간의 영과 육이 하나로 통일된 존재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영과 육의 구별과 이 둘이 하나로 통일된 존재라는 점은 모두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다. 영혼은 육과 대립되는 독자적인 주권적인 실체이다. 영혼은 단순한 육의 기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육도 역시 인간의 본질을 형성하는 부분이지 결코 종속물이 아니다. 즉 부속품도 아니며, 기생(寄生)하는 것도 아니고 영혼을 감싸고 있는 감옥도 아니다. 영과 육은 똑같이 서로 의존하는 관계이다. 인간의 본질은 모든 특성과 본능이 하나님의 행위에 의하여 사람에게 생가를 불어 넣으셔서 만드신 존재이다.

 

2) 살아있는 영혼으로 만들어 주신 하나님의 생기는 곧 하나님의 행위에 의한 것이다.

하나님의 행위란 곧 “하나님이 그에게 생기를 불어넣으셨다”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행위를 통하여 인간은 육과 영을 함께 지닌 존재가 된 것이다. 하나님의 행위는 인간에게 영을 불어넣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을 통해서만 인간이 된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창조주이시며, 인간은 창조함을 받은 피조물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빌림 받은 삶”을 살아간다. 이것을 가리켜 인간의 ‘피조성’(被造性, Geschopflichkeit)이라 한다.

 

3) 인간만이 유일한 피조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은 다른 피조물들과 함께 커다란 피조물의 공동체 즉 ‘자연’(Natur)속에 함께 몸답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은 피조물이라는 점에서 다른 동물들과 다를 바 없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러나 인간은 창조주의 손길을 통하여 하나님의 ‘생기’를 받은 특별한 존재이다. “......주께서 저희 호흡을 취하신 즉, 저희가 죽어, 본 흙으로 돌아가나이다. 주의 영을 보내어 저희를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시 104:29-30)라고 하신 것처럼 인간도 성서적으로 보면 육과 영혼을 함께 지니고 있는 하나의 “육”(Fleish)인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동물과 다른 존재로 창조되었다. 오직 인간만이 하나님의 생기를 받은 것이다(창 2:7).

 

a. 하나님의 형상

형상이란 우리의 노력의 바탕이 되는 이상이나 내가 지켜야할 법이나 내가 완성해야할 목표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선 존재이다. 즉 형상이란 내가 나로서 존재하는 신분이며, 이 신분과 일치된 나의 태도인 것이다. 이러한 신분과 태도는 결코 자연적, 생물학적, 역사적 또는 심리학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지는 신분이요, 태도이며 원상태(原狀態)이다. 이것은 하나의 실재이며 인간이 현재의 인간으로 만들어진 실재이다. 또한 신분이나 태도가 가진 내용이란 하나님으로부터 창조함을 받은 존재이며, 하나님을 닮은 성품을 받은 것이며, 인간이 하나님을 대면하여 하나님을 이해하고 그에게 복종할 수 있는 인격을 지닌 존재 곧 “나”가 된 것이다.

 

b.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와 악용

우리는 이러한 인간의 특성과 하나님과 그 자신에 대하여 아는 지식을 가리켜 ‘자유’라고 부른다. 이 말은 자유가 있으므로 우리 스스로 작은 하나님이 되어 뜻하는 대로 무어이든지 행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자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의 피조물에 불과하다.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하여 자유를 갖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하여 자유가 주어졌기 때문이다. 만일, 인간이 자유를 남용하고 악용한다고 한다면, 그는 그 자유를 잃을 것이며, 그를 이러한 악용에서 생기는 곤경에서 구해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새롭게 개입해야할 운명에 처한 것이다. 이것은 또 하나의 새로운 창조가 필요한 것이다. “제2아담”이신 예수그리스도가 육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타락한 인간을 다시 창조하셔야 할 것이다.

 

c.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된 인간

하나님은 그의 말씀으로 인간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의 창조는 결코 기계적인 생산이 아니다. 또한 유출(流出)도 아니다. 단순한 고안이나 상상이 아니다. 그의 창조는 바로 그의 말씀이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하여 인간을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말씀을 위하여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도록 창조되었음을 알게 된다.

 

d. 하나님 앞에 선 책임적인 인격

제3용어인 "Pneuma"(영, 靈)란 말은 곧 영(Geist)이란 뜻이다. 이 "Pneuma"란 하나님이 부르심에 대한 존재를 뜻하며 그 부르심 속에서 하나님 앞에 책임을 지는 인간의 위치를 뜻하는 말이다. 그러나 영혼(Seele)이란 말은 하나님의 부르심과 그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 일어나는 피조물로서의 위치를 가리키는 말이다. 성서에서 보면 인간의 실존을 이처럼 세 가지 양상으로 나누어 설명한 구절을 많이 볼 수 있다(비교, 살전 5:23, 고전 2:14). 여기서는 인간의 “Seele”적 존재와 "Pneuma"적 존재를 구분하여 전자는 하나님의 말씀과는 전혀 관계없이 사는 하나님의 "Pneuma"에 의해서 이끌려 살아가지 못하는 단순한 육적 생활을 영위할 뿐이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Seele”란 말이 하나님의 말씀 속에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으로 "Pneuma"와 같이 쓰여진 곳도 있다. 마 16:24-26 가운데 인간 영혼(Seele)의 무한한 가치를 말씀하시면서 “Seele”가 전체의 삶을 하나님 앞에서 ‘책임적으로’ 살아가고 나아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성실하게 응답하지 못하면 생명을 잃게 되고 영원한 멸망을 받을 것임을 아는 인간을 뜻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성서적 및 그에 바탕을 둔 신학적 인간학이 있는데 이것은 인간존재를 육과 영혼, 외적 존재와 내적 존재의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하는 점에서는 자연적, 생물학적, 심리적, 인간학과 견해를 같이하지만 전자는 여기에 머물지 않고 인간이 내적, 외적, 존재 및 영혼, 육의 복합체로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살고 있느냐 없느냐 하는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점에서 후자와는 달리 새로운 특이한 입장을 견지한다. 성서적 신학적 인간학은 인간의 본성을 구별하기는 하나 전혀 다른 구별 즉, 인간이 전체적인 삶으로 맞이해야 하는 하나님의 말씀과 영이라는 위대한 능력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인간의 본성을 놓고 영혼과 육, 영과 본능, 신적인 영역과 악마의 영역으로 구별해 놓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인간 존재라 할 때, 그것은 인간의 본성이 이중성과 모순성뿐만 아니라 항상 피조물을 부러 세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행위를 바탕으로 인간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말한다.

자연과학적인 인간이해는 인간을 인간 스스로에서부터 이해하고 설명하려 든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연관도 없이 영혼과 육을 구별하고 동시에 그런 인격적 구조의 자동적인 통일을 주장하는데 깊이 뿌리를 박고 있는 수수께끼와도 같은 인간 본성이란 현상을 설명할 수 없다고 본다. 인간은 ‘피조성’이라는 한계성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인간 스스로의 인간이해는 불가능한 것이다.

 

4)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

 

a. 단절된 관계의 회복

본래의 형상을 잃어버린 인간은 다시 회복될 수 없는 운명에 빠져버린 것이다. 인간은 스스로 다시 회복될 수 없는 상태에 놓여 있으며, 하나님을 등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인간은 스스로 지은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고 스스로 자신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능력까지도 상실되었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이러한 인간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함께 한다는 사실을 지적해 주고 있다. 은혜는 그를 새로운 인간으로 만들어 준다. 그러므로 인간은 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부름 받은 존재로서 서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또한 그의 고통도 종식될 것이며 그는 그리스도안에서 다시 한번 부름 받은 것이다.

 

b. 인간인식 곧 은혜의 인식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만이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에게 그 은혜를 인식할 수 있게 한다. 즉 죄인인 내가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사실, 내가 그 앞에 서 있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서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는 사실을 스스로 생각해 내어 아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알게 된 것이 자신 사색도 아니며, 꿈도 아니며, 인간의 상상도 아니며, 그것은 오직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의 인식인 것이다. 예수그리스도는 육을 입고 오심으로 인하여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참된 본래적인 형상”(골 1:15)이 되셨다. 이러한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분이기에 그는 제2아담이 되셨고 하나님은 우리가 자유를 악용하는 것을 보시고 우리를 그의 형상을 따라 새롭게 창조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서적 신학적 인간학은 항상 그리고 철두철미한 “그리스도론적 인간학”(Christologische Anthropologie)인 것이다.

 

3. 결론

 

1) 목회는 인간의 참된 이해를 바탕으로 가능해 진다.

인간이 목회의 대상이기 때문에 이런 인간을 다룰 수밖에 없다. 이런 인간을 자세히 다룬 이유는 그 인간의 바탕, 본질, 성취에 따라 목회가 결정되고 실행되는 것이며 목회의 대상으로 분명하게 부각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목회는 참된 인간이해를 바탕으로만 가능한 것이다. 즉 인간을 바르게 안다는 것이 곧 목회학의 출발점이다. 인간이야말로 하나님의 창조와 부르심의 위대함, 그리고 심각한 인간의 타락, 타락한 인간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 그것은 바로 우리들 항상 새롭게 경악시켜 갈 것이다. 만일 목회활동이 이러한 경악 속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바른 목회활동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2) 이러한 진정한 목회이해는 성서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진정한 인간이해는 오직 성서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으며 그것은 동시에 신앙의 눈으로 본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이해되는 것이다. 진정한 목회는 성서를 통하여 목회의 대상인 인간이해가 이루어져야 한다. 인간은 말씀을 통해서 창조되었고 말씀을 위하여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목회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에게 열려질 때에야 비로소 이루어 질 수 있는 것이다.

 

a. 말씀선포

인간을 돌보는 일은 곧 말씀을 인간에게 먹여준다는 뜻이다. 말씀선포는 곧 목회의 알파요, 오메가인 것이다. 말씀 선포는 곧 대중을 상대로 하는 동시에 개개인을 상대로 하는 것이다.

 

b. 목회대화

목회대화는 하나님의 말씀이 죄인들을 위한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임을 내용으로 한다. 그러므로 목회가 하는 선포의 내용은 바로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죄의 용서’인 것이다. 목회에서는 해방을 주시는 하나님은혜가 강조되는 것이어야 한다. 목회대화는 ‘투쟁적 대화’요, 목회자는 하나님나라를 위한 그리고 인간의 문제해결을 위한 투쟁자가 된다.

 

c. 목회의 과제

목회학은 이런 대화를 바르게 이끌어 가는 것을 설명해 주어야 할 과제가 있다. 그러므로 목회의 과제는 인간의 육적 영적 본질과 용서의 말씀이 죄와 죽음과 투쟁을 벌리는 전장을 진지하게 염려해 주는 일이다. 그런 점에서 목회학의 과제는 인간생활을 중심한 ‘심리학과 병리학’과의 대립되는 관계이다.

 

3) 그리스도의 용서의 영역으로 복귀하는 성화

인간이 죄와 죽음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의 용서의 영역으로 복귀하는 일을 성화란 개념으로 파악한 바 있다. 성화란 인간이 죄를 용서받음으로서 실존 전체가 하나님의 요구에 마주 서는 삶이 된다는 뜻이다. 즉 인간은 성화를 통하여 죄 가운데 잊지 않는 하나님의 소유가 된다. 인간의 죄를 용서하심으로써 죄의 결과로부터의 해방은 물론 새로운 생명체가 된다. 이 새로운 생명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죄에 대해 투쟁을 위하여 불러주신 계명(Gebot)을 받아들이는 삶이다. 이렇게 목회란 하나님의 명령을 선포하고 그 명령에 인간을 복종케 하는 일을 뜻한다. 결국 목회학은 회개와 하나님의 명령을 통해 이루어지며 목회대화를 통하여 인간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일을 본질로 한다. 그러므로 진정한 목회는 목회의 대상인 인간을 참되게 인식하는 데서 그 본질을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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