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목회학 원론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에 너희는 생명을 위해 짐을 지고 예루살렘 성문으로 들어오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제2장 교회훈련으로서의 목회

 

목회란 하나님은 개개인을 결단코 포기하시지 않는 분이라는 믿음 안에서 각 개개인들을 설교와 성례전 즉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끌어 주고 교회의 한 지체가 되게 하며. 교회 안에 삶을 보존시켜 주는 수단이다. 그러므로 목회는 교회를 형성하고 생존하게 하며 개개인을 영적인 타락과 부패에서 건져내어 삶을 보존시켜 주는 성화와 훈련의 행위이다.1. 교회훈련에 대한 고찰

 

하나님의 말씀으로 바탕으로 삼고 있는 목회의 목적과 본질을 분명히 파악하기 위하여 먼저 교회훈련의 개념과 실상을 검토해 보아야 한다. 이를 위해 뢰에(Lohe)와 휠마르(Vilmar)를 다른 한편으로는 이들과 반대되는 입장을 취하는 경건주의(Pietismus)를 포함하여 우리 교회의 디딤돌인 교부들까지 고찰해 보아야 한다.

 

1) 개혁교회(die reformierte Kirche)의 창시자들

 

칼빈은 슈트라스부르크(Straburg)에 체재하는 동안 부처로부터 배운 말씀과 성례전으로 뭉쳐 있는 교회는 순수하고 생동력을 갖출 수 있도록 훈련되어야 한다고 믿었다(기독교강요 제4권, 1559). 교회 훈련은 바로 그리스도의 구원의 교리이기 때문에 교회에 있어서 훈련은 커다란 동경의 대상이 된다. 훈련은 몸의 지체로 하여금 서로서로 묶어져 살도록 역할을 하며 각자의 위치를 올바르게 설정해 준다.

 

2) 교회훈련의 정의

 

교회훈련은 개개인들에 대한 인격적 권면과 같다는 말이다. 이것은 칼빈이 말한 그리스도의 가르침 그리고 설교(성례전을 포함한)라고 생각한다. 칼빈은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설교와 성례전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것이 곧 교회의 정신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훈련이 “교회의 연륜 깊고, 정상적인 수단”이라고 생각하는 뢰에의 주장 역시 칼빈의 주장에 버금간다. 물론 그것만으로 충분하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훈련에는 개개인을 향한 권면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함을 강조하는 것뿐이다. 칼빈은 이러한 개개인을 향한 권면이 결핍되어 있으면 교회는 즉각 파멸되고 만다고 주장한다. 교인들간의 전체적인 조화뿐만 아니라, 그것이 말씀에 깊이 뿌리박고 있지 않으면 개개인을 향한 권면, 즉 목회가 존재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려 있다. 칼빈은 당시 교회가 이러한 훈련이 결핍되어 있음을 직감하고 절실한 구원의 손길을 호소한 것이다.

 

a. 교회는 가시적 질서요, 가능한 한 순수성을 지닌 공동체

 

교회는 가시적 질서요, 가능한 한 순수성을 지닌 공동체라는 사실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칼빈의 주장을 눈여겨보면서 우리는 직선으로 행진하는 군중들의 모습을 선연하게 그려볼 수 있다. 교회가 실제로 말씀과 은혜의 공동체라는 사실을 간과하거나 잊어서는 안 된다. 목회 즉 교회훈련이 말씀을 대체할 수는 없다. 목회는 말씀의 일깨움을 받으며, 그 말씀을 뒷받침하고 효율적으로 작용하게 만들어 주며, 각 개개인이 스스로 말씀아래 서서 그 말씀에 복종함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수 있도록 말씀을 강조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교회는 결코 이러한 가시적인 행진이나 훈련을 바탕으로 하는 가시적인 질서를 배경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미 부르셨고 또 항상 새롭게 불러모으신다는 사실에 뿌리를 두어야 한다.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로 자의에 따라 선택했다는 사실에 그 존재 이유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만이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교회의 머릿돌이 되신다.

 

루터는 칼빈보다 더 강경하게 그리고 쯔빙글리보다도 더 강경하게 그리고 이 둘 보다도 훨씬 더 일방적으로 하나님만이 교회를 세우신다는 입장을 강조하고 있다. 말씀과 신앙만이 교회의 바탕이요, 유일한 내용이라고 한다. 그러나 칼빈은 교회의 바탕을 말하는 가운데 그와 마찬가지로 강경하고 분명한 어조로 교회는 “신앙을 통해서만” 항상 새로워질 수 있다고 했다. 말씀과 설교를 통한 신앙만이 구제적으로 사람들을 불러모아 신앙을 지니고 살게하는 가시적조직 또는 기관으로서의 교회의 원천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루터는 철두철미한 교회의 불가시성 즉 하나님의 말씀이 태영광선처럼 하늘로부터 아래로 꿰뚫고 들어오며 바로 그런 현실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칼빈은 참된 교회에 대하여 말씀과 은혜를 바탕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b. 교회를 대표하는 공동체

 

설교자와 성례전이 집행이 구체적으로 확인되고 수립되어야 한다. 교회가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고 세례를 베풀며 하나님의 백성을 먹이고 마시게 하는 성만찬을 드는 이 모든 행위가 다시금 반복된다는 사실은 곧 교회가 존재한다는 말임과 동시에 말씀이 역사하고 인간이 그로부터 부름을 받는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그러나 반드시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통하여 설정된 설교와 상례전의 확증과 어떤 규범을 갖추어야한다.

 

3) 교회훈련의 위치

 

교회훈련이란 말씀과 성례전으로부터 출발하는 능력이 교회의 각 지체들에게 구체적으로 역사 한다는 사실을 교회가 깨달아 알게 하는 행위이다. 말씀과 성례전으로 이루어지는 삶이 구체적으로 시작되는 것을 모른 채 단순히 말씀과 성례전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을 바라보며 유유자적할 수는 없다. 말씀과 성례전이 어떻게 삶으로 이어지는 가를 눈여겨보지 않은 채 말씀과 성례전이 존속한다는 사실만을 바라다 볼 수 없으며 교회의 지체들이 교회란 공동체와는 떨어져 살고, 구체적인 삶의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도 방관만 할 수 없는 일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의 삶이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에서 교회훈련을 시켜야 한다.

 

a.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 7장

 언제나를 막론하고 신자들의 모임이며 동시에 그들 가운데서 복음이 순수하게 선포되고 거룩한 성례전이 복음의 가르침에 따라 집전되는 그리스도의 교회는 하나이며 그 교회는 계속하여 존속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b. 칼빈

  a) 정당한 신앙고백을 할 것b) 그에 상응하는 행동을 할 것c) 이러한 행동을 하면서 설교는 물론 성만찬을 통하여 항상 새롭게 강건해질 것 등이다.

 

c. 마틴 루터

 하나님은 은혜가 풍부한 분이다. 첫째로, 쓰여진 말씀을 통하여 죄의 용서를 세계 속에 선포하며 둘째로는 세례를 통하여, 셋째로는 제단의 성스러운 성례전을 통하여, 넷째로는 열쇠의 힘을 통하여 그리고 형제의 상호교제와 위로를 통하여 이룩하신다고 했다.

 

4) 교회훈련(목회)의 역할

 

a. 카톨릭교회

 

a) 목회를 본질적으로 고해의 형태로 이해하고 이것을 제도화 시켜 놓았다.b) 목회에 있어서 가장 중심적인 역할이 성례전이며, 이 성례전은 미사제물과 대등한 중요성을 지니며, 설교는 성례전이 아니라는 점에서 크게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c) 카톨릭의 목회는 교회 자체로 말미암아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d) 이러한 목회의 역할은 개신교회가 말하는 교회훈련과 그 성격이 다르다. 참된 회개 즉 진정한 구원의 행위는 절대적으로 말씀과 성만찬의 성례전을 바탕으로 한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b. 칼빈

 

복음설교를 “교회의 혼”이라 하고 교회훈련을 몸의 지체가 함께 모여 공동의 삶을 이어가게 하는 “고리”와 같은 것으로 지칭한 사실을 기억한다.

 

c. 루터

 

슈발칼트 신조에서 열쇠는 잘 알고 있는 죄 뿐만 아니라 하나님만이 아시는 즉 모르고 진 비밀에 쌓인 죄까지도 매고 풀 수 있도록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부여한 직책이요 능력이라고 말한 사실도 기억한다. 동시에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에서 교회를 정의할 때, 열쇠의 위력이 말씀과 성례전에 버금가는 강력한 요소로 언급되어 있지 않은 사실도 알고 있는데 여기서는 교회의 가장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말씀과 성례전 속에 열쇠의 능력이 당연히 포함되어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d. 뢰에와 휠마르

 

목회는 설교에서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이들은 교회에서 개인을 상대로 한 대화를 제외시키려는 의도보다는 오히려 교회 전체에 전달된 말씀을 강조하고 강화하려는 목적에서 한 말이다.5) 열쇠의 직분인 교회훈련

 

a. 루터

 

루터는 열쇠의 직분이 교회훈련이 독자적으로 존립할 수 없다고 본다. 목회 자체가 결단코 설교나 성만찬과 대등한 위치와 가치를 점할 수는 없다. 목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선포할 때 들려지는 곳에서 비로소 이루어지며 그것은 동시에 열쇠가 없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없다는 표징인 것이다.

 

b. 칼빈

 

기독교강요 3장(1536)의 “거짓 성례전의 고해에 관하여”라는 항목에서 회개는 철두철미하게 개인적인 성례전적 행위이며 동시에 그것 자체가 죄의 용서를 이루어낸다는 주장에 강력하게 반격을 가하고 있다. “그는 의사이다. 그에게 우리의 상처를 보이자. 그는 상해를 입었고 찔림을 당했다. 그에게 평화를 위하여 기도하자. 그는 마음을 찾으시며 모든 생각을 이미 다 알고 계신다. 그의 앞에 우리의 마음을 모두 쏟아 놓자. 그가 죄인을 부르고 계신다. 지체말고 그에게 가까이 가자”

 

c. 종교개혁자들

 

목회적인 교회훈련이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한 어느 모로든지 구체적인 형태를 떠는 한 질서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루터는 이것을 “죄와 악한 양심을 누르고 도움과 위로”를 베푸는 것이라고 규정하며 칼빈은 교회훈련의 목적을 분명하게 악을 행하는 자는 교회에서 추방하고 선한 지체들은 멸망에서 건져주며 죄인들을 부끄러움과 후회 속에 몰아쳐 넣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여기서 칼빈은 어느 정도의 한계성을 제시한다고 본다. 그는 교회훈련이 항상 세심하게 그리고 한계를 명확히 지키면서 이루어져야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 말씀과 성례전을 완전히 기능화 시킴으로서 위태로운 궁핍과 부패를 치료해주는 역할로서가 아닌, 교회의 일탈을 방지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6) 목회의 성격

 

목회의 성격을 논함에 있어서 교회 내지는 회개훈련의 위력에 대하여 확대하는 것을 삼가야 한다고 본다. 교회훈련과 목회가 같은 성격의 것이라고 할 때 목회는 결코 죄를 용서하거나 거부할 권한이 없음을 분명히 못박아야 하며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에 인도하는 것으로 만족을 삼아야 할 것이다. 믿거나 아니면 마음이 강팍해지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대면할 때 생기는 일이다. 불링거(Billinger)가 기초한 “제2헬베틱 신앙고백서”에도 나타나 있다. 거기에 이렇게 쓰여 있다. “주님께서 사도들에게 주신 천국열쇠를 두고 많은 설왕설래가 있어 왔다. 사람들은 그 열쇠를 가지고 칼, 창, 검, 왕관을 연금하여 몸과 혼을 다스림은 물론 가장 위대한 하나님나라까지를 좌지우지 하려든다. 우리는 이에 대하여 철두철미하게 우리 주님의 말씀 위에 서서 교회의 종으로 부름을 받은 자들은 모두가 천국열쇠를 소유하고 있으며 복음을 전할 때마다 이 열쇠의 능력을 발휘한다고 말하려 한다”. 죄를 용서하거나 마음을 강팍하게 하는 능력은 오직 말씀 자체에 있을 뿐이다. 설교자는 다만 이 말씀을 전달하는 자일뿐이다. 설교자는 설교를 통하여 열쇠의 위력을 발휘할 뿐이다. 교회훈련은 이것과는 다르다. 교회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교회를 섬기는 종으로서의 기능을 행사할 뿐이다. 비록 이것이 위축을 당하고 있기는 하지만 시대와 공공생활의 환경에 몸담고 있는 교회를 교화시키기 위해서는 교회훈련을 실천해야할 의무가 있다.

 

3. 결론

 

1) 교회훈련

 

종교개혁자들의 경우 말씀과 성례전을 중심으로 모이는 그리스도의 교회는 고대와 중세기 교회의 언어를 사용하는 ‘교회훈련’을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이것이 무언가 모자라는 우연적인 것으로 생각지 않고 어떤 상황에서도 모자람이 없는 필연적인 성격을 가진 것으로 보았다. 교회훈련이 없는 곳에는 진정한 교회도 없는 것이다. 교회가 왕이신 그리스도께 복종하는 백성으로서 말씀과 성례전을 바탕으로 하여 형성된 것이 교회훈련이라고 하면 교회가 갖는 외적인 형태 즉 교회의 모습을 바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2) 개인별 대화

 

개인별 대화의 형태로 계속하여 탐구되고 연구되는 과정을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하다는 점이다. 이러한 개인별 대화는 교회가 설정한 질서를 개개인이 책임적으로 수호한다는 데 초점을 두고 있다. 말씀을 전파하는 설교자는 그가 진정으로 죄를 용서할 능력을 갖추고 있고 그러한 처신을 할 수 있는 복종의 자세가 마련되어 있는지를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3) 목회의 개념

 

‘목회’라는 개념을 ‘교회훈련(Kirchenzucht)’이란 개념으로 정의하고 해석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교회훈련이라는 개념은 상당히 포괄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물론 목회가 전적으로 교회훈련이란 각도에서 이해되어야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교회훈련은 목회가 의미 있게 수행되는데 필요한 여건을 제공해 준다. 목사와 교인사이에 대화가 이루어지고 구원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과 그에 속한 것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목회라고 보기 쉽다. 그러나 방금 전에 내린 정의대로 하면 이런 식의 대화가 목회의 정당한 성격을 대변해 주지 못한다. 종교개혁자들이 말하는 목회의 바탕은 바로 교회훈련이다. 목회를 현대심리학이나 일반상식을 바탕으로 하는 ‘영혼치료’와 혼동해서도 안 된다. 목회는 ‘영혼’이 무엇이며, ‘돌본다’는 말이 영혼의 경우 무엇을 뜻하는 가를 분명하게 드러내야 한다.4) 목회훈련

 

목회훈련이라고 말할 때, ‘훈련’(Zucht)이란 개념을 얼핏 보아 목회의 개념과 무관한 듯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 말이 실은 ‘학교(Schule)’라는 뜻의 'disciplina'에서 왔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목회는 가르치고 배우는 일을 말한다. 그러나 학생을 가르치고 그들의 영혼을 돌보아 주는 선생은 바로 성서이다. 이것이 처음부터 좀 도덕화된 의미의 ‘훈련(Zucht, discipline)’이란 의미로 쓰이게 된 것이다. 종교개혁자들은 훈련에 관한 가르침(disciplina)이 성서를 바탕으로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사사롭게 그리고 공중을 향한 선포를 통하여 개인들을 부르셨다는 말을 규명하면서 항상 성서를 말한 사실을 기억한다.5) 목회의 내용

 

목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특수한 형태로 전달하는 것을 내용으로 함을 뜻한다. 그러므로 목회는 다름이 아닌 사죄를 선포하고 하나님을 위해 인간을 성화(聖化, Heligung)시키는 일과 관계되어 있다. 그러나 카톨릭 교회와는 달리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목회는 결코 성례전적 성격을 지닐 수 없다. 여기서 다시 한번 우리는 목회가 카톨릭 교회적인 성격을 지닐 수 없다. 여기서 다시 한번 우리는 목회가 카톨릭 교회적인 고해성사의 성례전을 다시 수입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죄를 용서하거나 용서하지 않는 자격은 목사가 아닌 하나님만이 가지고 있으며 그의 말씀의 능력으로 이 일을 하신다. 그런 점에서 목회는 이 하나님의 말씀을 인도하는데 따라 섬기는 것이요 설교와 성만찬을 통하여 그 말씀을 전달해 주는 역할을 한다.6) 목회의 영역

 

결국 목회는 ‘교회’(Gemeinde)라는 영역 안에서 이루어진다. 말씀에서 출발하여 말씀으로 되돌아간다. 목회는 또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를 전제로 하며 동시에 목적으로 삼는다. 그 목회는 임명을 받은 자의 선포행위로 이루어지며 그것은 곧 목회자의 필수적인 의무인 것이다. 그러나 목회는 교회 안의 지체들끼리도 이루어 질 수 있다. 왜냐하면 직책을 맡은 자의 경우라 하더라도 교회란 몸의 직책만이 아닌 한 지체로서도 목회의 전제가 충분히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그것을 형제 된 입장에서 다른 형제에게 실천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한 목회가 모든 지체들에 의해서 자발적으로 이루어지고 받아들여진다는 사실은 교회의 표징들 가운데 궁극적인 전제가 되는 것은 역시 하나님의 영이요, 이 영만이 말씀을 생동력있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갖는 목표는 역시 하나님의 나라와 이 땅에 있는 그의 교회를 위하여 사람들을 얻어 들이는 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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