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신학이란 무엇인가?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에 너희는 생명을 위해 짐을 지고 예루살렘 성문으로 들어오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신학이란 무엇인가?

 

1. 신학의 정의와 주제

1) 정의와 용어의 발전

신학(theology)은 신(theos)과 말(logos)이라는 두 헬라어의 결합이다. 즉 신을 논리적이고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것을 뜻한다.

a) 판넨베르크 : '인간의 인식론적 노력'

b) 클레멘스(2세기 후반) : 이교도의 신화(mythologia)와 대조하며, '기독교의 하나님에 대한 이론'이라는 의미로 사용함.

c) 그리스-로마시대의 다신교 상황에서 기독교 '신학'은 주변의 문화-종교적 상황 속에서 변증적인 역할을 수행해야 했다. 그런 의미에서 신학은 '하나님에 대한 논증, 그의 구원 사업과 섭리에 관한 설명, 그에 대한 신앙적인 요청을 수행하는 작업'을 의미했다.

d) 중세를 거치면서 신학은 주제별로 체계화가 이루어지며 이론적으로 정립되고 학문적으로 발전했다. 기독론, 삼위일체론, 교회론, 성령론, 구원론, 종말론과 같은 교의(dogma)가 체계화되었다.

e) 12세기 이후 유럽에서 대학들이 생겨나면서 신학은 새로운 의미를 가지게 된다. 오래된 대학들은 대체로 네 분야를 가지고 있었는데, 교양, 의학, 법학, 신학이다. 여기서 신학(theologia)는 초기에 하나님에 대한 이론에서 기독교 전체 교리를 의미하는 포괄적인 뜻으로 사용되었다.(토마스 아퀴나스, '신학대전', 13세기)

f) 종교개혁자들은 신학을 단순히 학문적으로만 여기지 않았는데, 그들은 삶과 유리된 중세의 교회와 신학을 비판했다. 성서에 대한 강조로 성서해석이 활기를 띠었고, 신학을 학문의 한 영역으로 생각하지 않고 실천의 영역, 삶의 영역, 역사의 영역에서 다루려는 실천지향적 성격을 가졌다.

g) 18세기 계몽주의 이후에는 신학에 대한 이해가 많이 달라진다. 계몽주의는 학문 전반, 사회의 구조, 자연과학의 발전 등 다양한 측면에서 큰 시대적 변화를 야기했는데, 이로 인해 신학 분과에 대한 중요성도 떨어졌다. 대학보다는 신학교(seminary)로 이동되며 신학교가 신학 연구를 위한 장이 되었다. (예, 연세대학 안에 신학과 vs 신학교 안에 신학과)

고로 '신학'은 긴 역사만큼이나 다양하고 복합적인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2) 어려운 주제

'신학'은 여전히 규정하기 어려운 주제이다. 첫째, 신학의 대상(object)과 관련이 있다. 동물학에서는 동물이, 천체물리학에서는 천체가, 철학에서는 진리가 인간의 인식 '대상'이 된다. 하지만 신학에서 '신'은 단순히 인간의 인식 '대상'이 아니라 항상 살아있는 존재로서 스스로 '주체'(subject)가 된다. 이로 인해 신학은 '신'이라는 대상의 모호함과 함께, 신이라는 대상이 객체가 아니라 주체가 될 수 있다는 문제를 가진다.

둘째, 신학은 학문성과 신앙의 고백적 측면을 동시에 가진다. 학문성이라 할 때, 이는 다루는 주제에 대한 진술의 타당성을 위해 객관성을 가져야 한다. 하지만 동시에 신학은 신에 대한 종교적 고백을 포함하는데, 종교적 고백이란 주관적인 신앙의 차원을 포함한다. 이런 갈등은 신학과 다른 분야의 관계성 속에서 좀 더 살펴볼 수 있다.

2. 신학과 다른 분야의 관계

1) 신학과 신앙

신학과 신앙의 관계에 연관해서 두 가지 견해가 있어 왔다. 첫째는, 신학은 신앙을 가진 사람을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둘째는, 신학을 신앙과 상관없이 할 수 있다고 보는 견해이다. 이는 기독교 신학이 가지는 학문적 성격에 초점을 두는 견해라 할 수 있다. 그러면 신학과 신앙의 관계는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가? 바람직한 관계는 위에 언급한 두 가지 측면을 다 가진다. '신앙이 없는 신학은 건조해지고, 신학이 없는 신앙은 자기-주관성에 빠진다.' 어떤 이들은 신앙은 보수적으로 유지하고 신학은 개방적으로 한다는 말을 한다. 그러나 신앙이라는 자기 고백이 진실된 것이라면, 신학을 지적 정직성을 가지고 수행한다면, 신앙과 신학이 분리될 수 없다.

2) 신학과 교회

기독교 신학은 교회 공동체와 분리될 수 없다. 신학이 교회와 분리되면 추상적이 되고 사변적이 된다. 신학은 순수이론 작업으로 머물 수 없고 항상 교회 공동체를 위한 신학이며 역사 속에서의 실천과 연결된 신학이어야 한다. 하지만 이 말이 신학이 교회에 종속된다거나, 신학의 타당성이 교회 내에만 제한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3) 신학과 타종교

기독교를 '하나의 종교'라 말할 수 있는가, 아니면 '유일한 종교'인가? 기독교는 계시와 종교를 구별하면서, 기독교의 진리 진술의 토대인 계시를 일반적인 '종교'라는 개념과 구별하기도 한다. 하지만 기독교의 테두리를 벗어나면 기독교는 하나의 종교로 간주되며, 타종교와 비교되기도 하고, 경쟁적 관계에 놓이기도 한다.(예, 대한민국 종교 현황조사)

우리는 기독교 신앙의 '절대성'(absoluteness)을 포기할 수 없다. '예수'를 메시아로 고백하는 절대성이 기독교의 동질성(identity)과 독특성(uniqueness)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사실 기독교에는 '계시'라는 포기할 수 없는 부분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역사상 나타난 종교현상과 인간의 가지는 종교적 경험에는 기독교와 타종교 사이에 유사한 면이 많이 있다. 기독교를 하나의 종교라는 일반적인 범주, 즉 '신학'을 다른 종교의 신학들 중에서 '기독교 신학'이라는 객관적 관점에서 연구할 수 있는 시각도 가져야 한다. 이러할 때 기독교의 독단을 피할 수 있다. 오히려 타종교에 대한 이해와 연구를 통해 기독교 신앙을 보다 폭넓게 볼 수 있는 시야를 가져야 한다. 한국과 같은 다종교 문화사회나 다종교 국가에서는 타종교에 대한 이해와 대화가 필수적이다. 때에 따라 타종교와 선한 연대를 해야 할 수도 있고, 타종교와 대화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대화를 위해서는 타종교에 대한 기본적인 연구가 필요하고, 존중의 자세도 있어야 한다.

4) 신학과 타학문

신학은 하나님과 신앙에 대한 체계적이고 논리적 연구이다. 따라서 신학적 주제에 대해 신학적 방법론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다. 물론 신학적 주제에 대해 타학문의 방법론을 무리하게 적용하는 것은 삼가야 한다. 하지만 신학은 타학문과 분리될 때 학문적으로 고립될 것이며, 객관성을 상실하고 독단에 빠질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과 사회를 더 잘 이해할 때 신학의 지평이 넓어지고 우리가 속한 '상황'(context)에 대한 이해가 균형을 이루게 된다. 상황에 대한 이해 없이 신학이 제대로 실천될 수 없다. 신학은 성서(text)와 상황(context)의 상호성을 고려해야 한다. 특히 신학과 중요한 관계에 있는 타학문은 크게 세 영역으로 볼 수 있다.

 

(1) 신학과 자연과학

과학이 성서과 교회의 가르침과 상반되는 것으로 간주되어 대립되는 분야로 인식되기도 하였다. 과학의 결과들이 전통적인 교회의 가르침과 충돌이 되거나 조화가 어려운 부분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신학은 과학의 결과물을 무시해서는 안 되고 과학 제 분야의 연구 성과에 대해 잘 살펴보아야 한다.

신학이 자신의 이론과 관점으로 이 세계의 모든 것을 설명하는 것은 위험하다. 중세 이후 근대에 이르기까지 성서를 자연과학의 다양한 분야에 직접적으로 적용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이런 시도는 성서에 대한 적절한 이해도 아니거니와 오히려 기독교의 공신력과 타당성을 훼손했다. 예를 들면, 지구의 역사가 6000년이라거나, 생물의 다양한 종과 발전을 받아들이지 않거나, 지옥은 땅 밑에 있다거나, 하나님을 공간적으로 하늘에 존재하는 것으로 주장하거나, 천국이 우주 공간의 한 모퉁이에 있다는 주장 등은 전혀 설득력을 가지지 못하는 주장들이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 중에 상당수는 이런 주장이 기독교를 수호하는 행위라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기독교를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만듦으로 기독교의 신뢰성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행위이다.

신학이 과학과의 대화에 더 힘을 기울여야 한다. 우리는 휴대전화와 인터넷을 사용하고, 의학의 혜택을 얻기 위해 병원에 간다. 과학은 이미 하나의 실체(reality)가 되었다. 이를 피할 수는 없다. 신학이 이런 과학의 연구 결과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보자. 생명복제가 일상화되었고, 애완동물의 복제는 실제로 일어나는 우리 주위의 이야기가 되었다. 그런데 신학이 '복제는 무조건 사이보그이고 죄다',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이다'라는 말만 되풀이 해서 되겠는가? 신학은 과학이 지구, 우주, 그리고 자연과 생명체에 대해 수행한 다양한 연구와 결과에 귀 기울여야 한다. 따라서 신학과 과학의 관계는 '긴장과 수정'의 관계이며, 이를 거쳐 상호 보완적이 되어야 한다.

 

(2) 신학과 인문-사회과학

신학이 보다 직접적으로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인문-사회과학의 분야는 인간, 인간의 내면세계, 그리고 인간의 공동체 생활이 직접적으로 다루어지는 분야이다. a)철학은 인간에 대한 이해와 사상적 표현을 위한 용어와 개념도 상당 부분 공유할 수 있다. b)심리학은 인간의 내면 세계에 대한 연구에서 상담심리와 사회심리 등으로 여러 응용분야를 개척했다. c)또한 인간의 삶에 대한 가장 뛰어난 통찰을 보여주는 문학도 중요하다. 문학은 다양한 방법으로 인간 실존에 대한 이해를 보여주고, 무한한 상상력을 제공한다. d)교육학도 무시할 수 없는데, 기독교의 가르침이 교육적 측면을 가지기 때문에 방법론적 부분을 공유할 수 있다. e)기독교와 사회의 관계는 밀접하다. 기독교 신앙은 그 사회속에서 실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고로 사회-경제에 대한 이해와 이데올로기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3) 신학과 역사학

역사의식이 없는 신앙은 방향성이 없다. 19세기 서구 제국주의와 세계 1,2차 대전을 거치면서 '역사의식' 없는 교회와 신학이 얼마나 위험한지도 증명되었다. 기독교는 '역사' 앞에서 실제로 어떻게 판단하고 행동해야 할 지 모를 때가 많았다. 독일교회와 신학이 히틀러를 지지한다거나, 일제치하에서 한국 교회가 신사참배에 참여한다거나, 근래에 유신시대에 독재정권에 대해 예언자적 목소리를 내지 못한 한국 교회를 생각해 보라. 기독교인 대부분은 자기에게 주어진 지역 교회를 섬기기에 급급하다. 전체 기독교가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 이 역사 속에서 교회는 구체적으로 어떤 결정을 해야 하는지,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 참여하기 위해 교회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관심이 없는 경우가 많다. 역사의식 없는 공간적인 신앙은 위험하다. 하나님의 나라도 이 역사와 연관해서 이루어가야 할 실체이다. 보편사와 구속사가 분리되어 두 역사가 있는 것이 아니다. 역사에 대한 인식, 다양한 역사관에 대한 이해를 통한 역사적 통찰, 그리고 기독교의 구속사관에 대한 끊임없는 재해석은 신학이 결코 놓쳐서는 안 되는 부분이다.

3. 신학의 제 분야

18세기 계몽주의를 거치면서 학문의 제 분야가 독립하여 분리된다. 이 시기를 거치면서 신학의 영역들이 독립하면서 세분화된다. 성서신학, 역사신학, 조직신학, 실천신학이라는 크게 네 영역으로 나눈다. 여기에 기독교윤리, 기독교교육, 선교학 등이 추가되었다. 그럼, 전통적인 분류에 따라 대표적인 네 영역에 대한 가볍게 소개해 보자.

1) 성서신학

성서신학은 성서를 보다 직접적인 연구 과제로 삼는데, 이는 다시 구약신학과 신약신학으로 나누어진다. 먼저, 언어와 본문에 대한 연구가 기본이 된다. 구약은 히브리어(다니엘서와 에스라서 일부는 아람어)로, 신약은 헬라어로 기록되었다. 성서가 처음 필사된 원문이 없으므로 우리가 가진 사본들을 통해 지금의 성서가 존재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신학도는 성서의 본문을 원어로 읽고 이해할 뿐 아니라 석의에 대한 능력이 필요하다. 둘째, 성서의 전승과 시대적 상황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일반적으로 저자와 집필 시기와 상황, 그리고 사회-경제적 배경을 이해하는 것은 본문 이해에 매우 중요하다. 따라서 성서 이해를 위해 저작 상황과 시대적 배경에 대한 연구가 행해져야 한다. 셋째, 성서 각 권에 대한 신학적 특징을 알아야 한다. 성서 기자는 과거로부터 전해져오던 구전, 동시대인들로부터 들은 사실, 그리고 다른 기록된 자료를 사용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자료에 대한 평가가 중요하다. 자료에 대한 평가는 저자의 의도(신학)와 연관된다.

2) 역사신학

역사신학은 교회의 형성과 발전을 다루는 교회사와 교회가 믿어온 신조와 교의를 다루는 교리사로 나누어진다. 과거의 역사를 통해 현재를 이해하고 미래를 준비한다. 이 역사를 통해 우리는 현재의 역사와 교회를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역사적인 종교이다. 기독교는 구체적인 역사적 정황 속에서 태동되었고, 역사 안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 기독교 진리가 드러났다. 계시도 빈 공간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다. 계시도 역사적 정황 속에서 노출되고 구체화되었다. 나아가 기독교는 창조라는 하나의 시점에서부터 하나님의 나라라는 뚜렷한 종말을 가지고 있다. 즉 창조와 종말 사이의 이 과정을 하나님의 다스림이라는 섭리로 이해한다. 따라서 기독교는 창조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철저히 역사적인 방향성을 가진 종교이다.

3) 조직신학

조직신학은 성서신학 등에서 연구된 다양한 발견과 결과들을 체계화하는 작업이다. 조직신학은 상반되어 보이는 다양한 해석들과 각 부분들을 조화 있게 해주고, 나아가 성서를 보는 관점 혹은 틀을 제공한다. 조직신학은 이런 다양한 결과를 성서 전체의 틀 위에서 조화 있게 만드는 작업을 한다. 이런 의미에서 조직신학은 a)학문통합적인 성격을 가진다. 또한 조직신학은 b)변증적인 역할을 가진다. 조직신학은 성서, 교회, 기독교 전체에 대해 기독교 진리를 수호하고 그 타당성을 변증할 의무를 가진다. 기독교의 진리를 체계화하고 제시할 과제를 가진다. 이런 의미에서 중요한 교리의 제정, 기독교의 신앙고백, 기독교의 주요한 각 주제들을 언제나 새롭게 해석하는 책임을 가진다. c)조직신학은 기독교와 각 시대의 관계를 설정해 주어야 한다. 이는 현대사회에서 기독교의 의미를 제시하는 일이다. 즉 현대사회 속에서 기독교의 역할이 무엇이며, 기독교인의 삶은 어떤 의미가 있는지 등에 대해 답한다. 지금도 타종교와의 갈등, 국가주의의 압제, 무신성의 시대가 주는 도전, 그 외에 다양한 이념적 도전 등이 있는데, 조직신학은 이런 이념과 사조 속에서 오늘의 교회와 기독교가 나아갈 길을 제시한다.

4) 실천신학

실천신학은 기독교 신앙을 교회 현장 안에서 구체적으로 실현하기 위한 역할을 한다. 실천신학은 유럽과 북미가 좀 다른 흐름을 가지고 있다. 물론 이를 단정 지울 수는 없고 하나의 경향성을 말하는 것이다. 유럽에서의 실천신학은 신학이 어떻게 현장성을 가지는지에 대해 관심을 가진다. 어떻게 사회-역사의 장에서 신학이 실천되는지 살피는 것이다.(사회학이나 기독교윤리적 차원) 북미에서는 교회의 영역 안에서 보다 실제적인 것에 관심을 가진다.(예배, 교회 성장, 교인들을 돌보는 문제, 상담과 치유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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