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정치학(요약)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에 너희는 생명을 위해 짐을 지고 예루살렘 성문으로 들어오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예수의 정치학(존 하워드 요더, IVP)을 읽고나서

1. 저자 요더에 대해서

요더는 1927년 철저한 메노나이트 신앙을 배경으로 하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후 그는 철저하게 메노나이트의 신앙을 가졌었다. 스위스 바젤대학교에서 메노나이트 역사와 신학을 공부했고 이후 미국 고센 신학교와 메노나이트 연합 성경 신학교에서 가르쳤다. 하지만 메노나이트 외에 많은 연합운동에도 참여했으며 다양한 배경의 신학교에서 가르쳤다. 그는 이런 삶을 살아온 그는 메노나이트 교회의 신학이 결코 분파적이지도 탈세상적이지도 않으며 오히려 예수가 행하신 하나님 나라 사역의 방식이었음을 변호하고자 많은 노력을 했었다. 이 책은 그 노력의 결실이다.

2. 이 책의 역사적 의의

이 책은 1972년에 출판되어 큰 반향을 일으켰다. 2000년 4월 미국의 ‘크리스챠니티 투데이’지는 이 책을 20세기 미국 신학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신학서 100권 가운데 5번째 책으로 선정했었다.

요더에 의하면, 예수님의 삶과 그의 가르침이 철저하게 평화의 길이었고 사랑을 행하는 것이었다. 힘과 무력대신에 십자가의 길을 걸음으로서 오히려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더욱 큰 영향력을 끼쳤다. 예수님과 같이 모든 그리스도인은 이와 동일하게 행함으로 말미암아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게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고 한다.

3. 본문 개괄

1장 메시야적 윤리의 가능성

예수가 과연 윤리와 상관이 있는가? 혹은 신약성경이 그러한가? 아마도 이 책이 나왔을 때에는 상관이 없는 쪽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을 것이다. 때문에 이 책은 이런 질문으로 시작한다. 하지만 요더 자신은 곧바로 큰 장벽에 부딪히고 마는데, 바로 신학과 윤리학의 큰 간격을 보았기 때문이다. 요더는 신학과 윤리학을 동시에 상대해야 했다. 당시의 보편적인 가설들은 다음과 같았다.

① 예수의 윤리는 중간기를 위한 윤리이다.

② 예수가 관심을 가진 것은 오로지 농촌 식의 ‘이웃 사촌형 사회관계’뿐이었다. 즉 소규모 집단을 위한 지침밖에 없었고 복잡한 조직이나 거시적인 사회체계는 염두에 두지 않았다는 것이다.

③ 예수의 제자들은 소수의 증인들로 존재하는 것 외에는 사회적 책임을 이행한다는 개념이 없었다.

④ 예수의 메시지는 본질적으로 역사와 무관하다.

⑤ 예수의 십자가는 속죄와 칭의의 법적인 선물이며 그의 죽음은 윤리적으로는 무의미하다.

따라서 만일 예수에게서 윤리를 찾을 수 없다면 사람들은 어디서 윤리를 찾는가? 그들은 자신들의 삶에서 현실을 탐구하고 윤리를 찾는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기독교윤리는 무엇인가? 기독교 윤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기독교의 진리는 무엇인가?

이상과 같은 제 의견들을 상정하고 요더는 반론을 제기할 준비를 한다. 그는 예수의 사역은 그의 제자들에게 정치적 선택을 회피하라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선택을 제시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성경해석을 통해 논증해 나갈 것이며 특히 누가복음을 먼저 시작할 것이다. 왜냐하면 누가복음이야말로 신학자들에게 복음이 가장 탈 정치적이며 로마의 체제에 덜 위협적인 종교가 될 것임을 주장하는 내용으로 되어있다고 이해되어지기 때문이다. 요더는 적들의 심장(누가복음)을 첫 번째 전장으로 삼았던 것이다.

2장 도래하는 하나님 나라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 손으로 보내셨도다(눅 1:51)

요더는 이 ‘마리아의 찬가’를 마카비적 저항 정신을 표현한 것으로 본다. 이제 막 마리아의 몸에 들어와서 이제 태어날 자가 사회변혁의 주체가 되리라는 것이다. 마리아의 송가뿐만 아니라 세례 요한의 사역 역시 정치적 성격이 강하였으며 그의 죽음 역시 정치적 이유를 배제할 수 없다고 말한다.

예수의 사역 역시 세례 요한의 사역의 연장선상에서 이해가 되는데,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시편2:7절에서 따온 부분은 ‘왕의 즉위’를 의미한다.

사단이 예수를 시험한 것으로 첫 번째는 경제적인 선택의 문제이다. ‘배불리 먹이라 그러면 네가 왕이 될 것이다.’ 둘째는 사단에게 절함으로 정치권력에 대한 일종의 협상을 하도록 한다. 세 번째는 성벽 밖에서의 투신을 함으로서 결과적으로 이적을 보여줌으로 왕적 권위를 차지하도록 유혹하는 것이다. 내(독자)가 이해한 바로는 아마도 ‘전태일과 같은 효과를 노려라’는 유혹을 예수가 받은 것으로 요더가 주장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이와 같은 논리로 요더는 누가복음 거의 전체를 훑는다. 마지막으로 십자가 위의 명패에 ‘유대인의 왕’이라는 것을 설명하는 것으로 끝맺음을 한다.

요더는 예수가 새 공동체를 창조함으로써 기존 사회를 위협한 사람이었고 그가 진 십자가로 대변되는 새로운 삶의 방식과 윤리로 우리를 초대하신 분으로 보여준다.

3장 희년의 의미

요더는 희년은 1) 땅의 휴경 2) 빚탕감 3)노예 해방 4) 가족 재산의 환원 등의 요구를 하는 의미가 있는 것으로 전제를 한 후 복음서 안에서 희년에 대한 암시를 찾는다. 땅의 휴경은 특별히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고 그 이유는 이미 시행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눅12:29-31

(29)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30)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될 줄을 아시느니라

(31)오직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위의 구절을 요더는 희년을 실천함에 있어서 망설이지 말아야 하는 권고구절로 해석을 한다. 또한 요더는 주기도문의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를 사해 준 것처럼 우리의 빚을 사해 주옵소서”에서 동사 (aphiemi)와 명사 빚(opheilema)에 주목하며 돈을 빚진 사람들의 빚을 탕감해 주라는 희년의 명령으로 해석한다. 그래서 주기도문은 진정한 의미의 ‘희년 기도’라고 한다.

‘용서하지 않는 종의 비유’(마 18:23-35)를 끌어오면서 이 또한 희년의 명령을 지키는 일에 관한 교훈으로 받아들인다. S.W.Baron의 책을 빌려 헤롯대왕의 때에 그가 만든 세금의 짐으로 인해 많은 이들이 빚을 졌으며 종으로 팔려가는 이들이 많았다고 하면서 예수는 바로 이런 현실에서 희년에 대한 교훈을 했다고 본다. 유대땅에서 희년의 법 때문에 로마행정체제 아래에서는 따로 이상한 법이 만들어졌는데 바로 ‘prosboul'이라는 것이다. 이는 유대인들은 희년 때문에 빚을 받을 수 없게 될 때에 채권을 로마인 행정관에게 위임하는 것이다. 요더는 예수가 바로 이 prosboul을 반대한 인물로 본다.

평지설교의 내용도 빚과 관련된 내용이 중심적인 것으로 본다. 바로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주라!는 명령인 것이다. 마태복음 5장에서는 반대로 채무자에게는 ‘희년의 면제를 바라지 말고 즉각 갚아라!’는 명령으로 보았다. 불의한 청지기 비유 역시 마찬가지이다.

네 번째 희년의 의미로 재산의 재분배에 대한 명령을 한 것으로 여긴다.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라”(눅 12:30-33)

이상이 요더의 개략적인 논리이다. 요더는 이 장의 마지막에 ‘주후 26년이 희년의 해’인 것을 한번 더 언급하고 마치는 데, 내가 보기에는 ‘희년의 해’에 좀 더 분량을 할애했으면 이해하기가 좀 더 쉬웠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있다. 이 장에 딸려있는 후기를 읽어보면 눅6장에 나오는 ‘은혜의 해’에 대한 트로크메의 주장 - 이것은 희년을 뜻한다 - 을 소개하며 눅6장이 공생애 사역의 시작을 알리는 선언장으로서의 역할을 하며 이는 예수의 사역이 곧 희년을 실천하기위한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어쩌면 후기의 한 페이지가 본문의 전체를 개관하게 하는 것처럼 보인다.

4.장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싸우시리로다.

이 장에서는 구약의 전쟁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하여 언급한다. 흔히 재세례파 혹은 평화주의자에게 손쉬운 반대논거를 들자면 구약의 “싸우시는 하나님”에 대한 것을 언급하는 것이다. 하지만 요더는 바로 이 논거를 가지고 자신의 주장을 위한 논증의 자료로 삼는다. 첫 번째로 요더는 구약을 읽을 때에 현대적 물음이 아닌 예수 시대의 청중들의 관점에서 묻고 이해해야 한다고 한다. 당연한 듯이 들리는 이 말에는 좀 더 깊고 실랄한 뜻이 담겨져 있는데, ‘그들은 자신의 이야기, 곧 자기들이 누구였는가 하는 물음에 빛을 비추어 줄 수 있는 자기들의 이야기를 성경을 읽었다.’는 것이다. 즉 자기 정체성에 관한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서의 책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질문을 던지고 보았을 때에 구약성경,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전쟁의 설화들에서 보고 느낄수 있는 것은 ‘야웨 하나님을 이스라엘 백성이 아무런 행동을 취할 필요도 없게 그의 백성을 친히 구원하는 분으로 그리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비폭력 저항, 평화적 항거’가 구약의 전쟁 이야기에서조차 지지를 받고 있는 것으로 이해되도록 해 준다.

5장 비폭력적 저항의 가능성

이번 장에서 요더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 민족은 비폭력적 저항에 대하여 현대인처럼 생소하거나 너무나 이상적이어서 비현실적이거나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외친 나름의 ‘정치적 방법’에 대하여 전혀 몰이해한 상태가 아니라는 것이다.

요더는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 민족이 가지고 있었던 비폭력적 저항의 양태를 보여주기 위해 몇 가지 역사적 사건을 소개한다. 첫째로 유대총독 빌라도가 가이사의 상을 예루살렘에 가지고 들어왔을 때 이스라엘 민중이 어떻게 저항했는지 그리고 또 결과적으로 성공했는지 보여준다. 둘째로 첫 번째 로마 왕이었던 가이사 칼리굴라가 자신의 형상을 예루살렘에 세우도록 한 것에 대하여 유대인이 보여준 비폭력적 저항을 보여준다.

6장 시산표(검증하는 표)

여기서 요더는 예수의 비폭력적 저항이 제자들 그리고 초대교회, 나아가서 오고 오는 시대에까지 효력이 있는가? 라는 질문을 던진다. 즉 예수의 독특한 정치윤리에 관한 방식이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것인지에 관한 질문이다.

우선 요더는 신약의 저자들이 예수의 고난에 동참함이라는 주제부터 언급한다. 신약의 저자들은 예수의 다른 어떤 면모를 본받음이 아니라 바로 십자가의 고난에 대한 순종이란 틀에서 예수를 따랐다.

그런데 현대에 와서 전통적 신학의 눈으로 바라본 예수는 이런 신약의 저자들의 관점과는 많이 달라져 있다. 그것들을 정리하자면,

a. 예수는 죄로 인해 죽어야만 했는데 그것은 필연적인 것이므로 죽음에 이르는 과정(정치윤리적 의미)은 의미가 없다.

b. 복음서의 인간적 예수가 서신서에서 우주적 예수로 바뀌었다. (내가 이해한 바로는 실제적 현실적 예수가 종교적 형이상학적 예수로 바뀌었다.)

c. 리차드 니버의 분석으로, 성자의 윤리는 성부의 윤리(창조의 의미-곧 세계 질서를 인정함. )와 성령의 윤리(기독교 문화 체계)로 수정 보완되어야 한다. (내가 이해한 바로는 예수의 윤리는 변하고 진보해야 한다.)

d. 역사의 예수와 역사적 예수는 다르다.(내가 이해한 바로는 그러므로, 현대인이 접하는 예수는 역사의 예수가 아니라 역사적 예수이므로, 현대 철학자, 신학자들이 만든 예수만이 우리에게 의미가 있다. 따라서 역사의 예수를 고찰하고 따르고자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요더는 현대에 와서 이해되고 있는 예수상을 나열하고 난 다음 ‘이는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예수가 아니다.’라고 못 박는다. 그리고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예수는 ‘니케아 신경과 칼케돈 신경’에서 볼수 있다고 한다. 즉 ‘예수는 참사람과 참하나님이시다.’

또한 요더는 비교적 정통의 부류로 속하는 몇몇 무리 - 종교개혁의 전통, 청교도적 전통 - 와 더불어 (르네상스의 영향인) 자연법적 시도 또는 정적주의나 종파주의적 태도, 이 모두가 예수의 인성과 신성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한다.

요더가 부족하다고 하는 부분은 어떤 부분인가? ‘예수에 의해 새롭게 형성되는 사회적 책임의 모양’, ‘도덕적 선택을 뒷받침해 줄 사고의 유형에 대한 안내’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현대에 와서 그리스도인은 다음과 같은 선택을 하라고 강요당하고 있다.)

1. 역사의 예수와 교리의 예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2. 선지자적 입장과 체제 긍정적 입장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3. 하나님의 통치를 외적인 대변혁 아니면 주관적이고 내면적인 것 둘 중 하나로 생각하라고 한다.

4. 정치(세상정치)와 분파주의(수도원운동같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5. 개인(경건운동 같은)과 사회(사회참여운동같은)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

요더는 각각의 주제아래 위의 명제들을 논박하지만 마지막으로 한번 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역사의 운동이란 인격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십자가를 지는 절대적 ‘아가페’와 통상 폭력이 필요한 것으로 여겨지는 현실적인 효력 사이에서, 부활은 그 중 어느 하나만을 선택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

7장 그리스도의 제자와 예수의 길

이 장에서는 예수의 길과 그의 제자의 길 즉 초대교회의 길은 서로 달랐다는 설에 대한 반박을 한다. 즉 예수의 길과 초대교회의 길은 같은 것이다. 초대교회는 변질된 것이 아닌 것을 논증한다. 제자도와 본받음이란 키워드로 성경본문을 추려내되 복음서에서 예수의 목소리를 서신서에서 제자들의 목소리를 담아내 둘 사이에 간극이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특히 제자도와 본받음이란 키워드로 인해 비폭력무저항의 정치적 성격을 보여주는 것을 놓치지 않는 면밀함을 보여준다.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골2:15)

요약부분에서 요더는 십자가의 개념이 현대에 와서 ‘자아의 내적 체험’ 혹은 ‘내적 참담함, 교만과 자기의지의 포기’라는 방향으로 변질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십자가는 구체적인 사회적 의미의 영역이며, 종된 섬김이 주인 행세하는 삶을 대신하고 용서가 적대감을 흡수하는 그런 의미에서 예수와 같이 되는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많은 성경구절을 인용하는 이번 장은 십자가가 진정 무슨 뜻이며 제자의 길이 참으로 어떤 모습을 가져야하는 것인지 보여준다. 제자도와 본받음을 탁발승 수도원식이든지, 내면의 질서의 개념에서 벗어나서 현실과 삶의 영역에서 우리가 행해야 함을 보여준다.

8장 그리스도와 권세

예수의 가르침이 규범적 의미를 갖는다는 주장의 반대논증으로

① 그의 가르침은 철저히 개인적이다.

② 그는 역사가 머지 않아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③ 그의 가르침은 애초부터 책망하기위한 의도였다.

이런 논증을 이용해 그동안 교회는 개인에 대한 호소가 특징적 자리를 잡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벌코프나 바르트에 의해 그렇지 않음이 주장되어 왔다.

골1:15-17에서 “함께 섰느니라”는 말씀은 체계화되었다는 뜻으로 권세와 구조들도 하나님의 선한 창조세계의 일부임을 알 수 있다.

현재 권세에 대한 진단으로

① 이 모든 구조는 하나님이 지으셨다.

② 권세들은 반역했고 타락했다.

③ 타락했지만 권세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섭리적 주권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으며, 이들을 하나님은 선하게 사용하신다.

바울이 말한 이 권세를 요더는 ‘구조’라는 말로 바꾸고 좀더 다듬은 말로 다시 표현한다.

① 이 모든 구조는 창조 세계의 일부이다.

② 이 구조들은 우리를 섬기는 일에 실패했다.

③ 우리는 이 구조 안에서 길을 잃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구조 속에서 구속을 기다렸다.

이렇게 권세와 구조에 대한 이해를 구한 후 벌코프의 말을 인용해 교회의 입장을 설명한다.

‘.......교회의 내적인 삶 자체가 공중의 권세잡은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각종 지혜의 선포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요더는 계속해서 세계교회 협의회의 말을 빌려 주장한다.

‘책임 있는 사회’라는 문구가 나온 1948년이래 이 문구는 ‘교회로 회복된 사회가 되게하라’는 뜻이 되었다.

사회적 책임을 경건한 개인이 더 나은 기준을 따라 사회를 다스리게끔하는 방법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인식해야 할 것은 ‘복음이 다른 구조들을 바꾸어 나가기 위해 필요로 하는 우선적인 사회구조는 기독교 공동체라는 구조라는 사실이다.

어떤 특정한 권세의 구조적 반역이 너무나 고질적이어서 그 상황에서 책임있게 행동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그 권세와 공모하거나 그에 결탁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9장 혁명적 복종

골3장, 엡5장, 베전2-3장에서 나타나는 규례들을 예수의 가르침이 아닌 사회에서 빌려온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하여 요더는 이런 가정규례들에 대한 순종의 가르침은 전혀 세상것(특별히 스토아철학)과는 다른 것이며 오히려 전적인 자발적인 복종이라는 측면에서 예수의 가르침에 상응하는 것으로 말한다. 이런 가르침이 필요했던 이유를 알면 ‘자발적인’ 복종에 대한 말을 이해할 수 있다. 요더는 이것을 그리스도안에서 해방되었고 자유를 누리던 사람들이 그 자유로움 안에서 오히려 자발적인 복종을 선택하기를 바랐던 것이라고 한다.

10장 모든 영혼은 복종하라 로마서13장과 국가의 권세

피상적인 현대적 이해 즉 단순한 국가권력의 인정이라는 맥락을 거부하고 요더는 다음과 같이 본문을 이해하기를 원한다.

① 로마서의 구조상 12장과 13장 전체를 하나의 문학적 단위로 본다. 이 문학단위의 키워드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이다.

② 신약이 요구하는 복종은 존재하는 어떤 권세라도 그것을 인정하며 어떤 구조의 주구너이 지배하든 그것을 수용하는 것이다.

③ 로마의 성도에게 주어진 가르침은 그들이 정부에 아무런 여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현실에서 그 정부에 복종하라는 것이다.

④ 그리스도인들이 복종하도록 요구받은 역할들 중 칼을 들어야 하는 기능은 사법적이며 치안적 기능들이다.

⑤ 본문은 정부가 행하거나 시민에게 요구하는 일이면 무엇이든 다 선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11장 믿음으로 말미암은 은혜의 칭의

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후5:17)

위의 구절을 요더는 ‘누구라도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창조계가 새로워진다“로 이해한다.

바울에게 덧 씌어진 ‘칭의’는 새롭게 이해되어져야 하며, 새로운 공동체를 세움과 관련하여 이해되어져야 한다. 갈라디아서에서 말하는 이 칭의는 에베소서에서 말하는 ‘화평을 이루는 것’, ‘막힌 담을 허는 것’과 동일하다.

‘오히려 은혜의 칭의는 이 사람과 저 사람을, 가까운 사람과 먼 사람을 하나로 묶는 것이다.’(마르쿠스 바르트)

칭의는 ‘사태를 바로잡는’하나의 행위이다. 바르취는 로마서는 한번도 교회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유대인과 헬라인’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이는 아직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이 새로운 공동체의 자격을 얻는데에 몇가지 문제가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12 어린양의 전쟁

이 장에서 요더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역사에 대한 이해와 역사를 위한 우리의 행위의 전략이다.

일반적으로 세속적인 역사의 이해에 있어서 전제적인 가정은 다음과 같다.

1. 사회는 통제가능한 것이다.

2. 바람직한 목표를 세울 수 있는 충분한 정보를 확보할 수 있다.

3. 이런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의 효율성은 자체로 하나의 도덕적 척도가 된다.

그러나 이런 세속적인 이해의 전제는 자세히 바라보면 부정된다. 라인홀드 니버의 역설 ‘사람들이 역사를 통제하려고 들면 역사는 그들이 이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움직였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위의 가정들은 부정된다. 그러면 우리가 바람직한 목표를 설정하는 자격조차 없다는 말이 된다. 요한계시록을 살펴보면 이런 결론이 나온다. 하나님의 백성의 순종과 하나님의 목적의 승리는 원인과 결과의 관계가 아니라 십자가와 부활의 관계다.

예수는 하나님의 원수 사랑에 너무나도 신실하신 나머지 그가 택할 수도 있었던 모든 효율성을 포기하셨다. 예수는 사태의 결과를 올바르게 만들 수 있는 일체의 능력에 대한 규범적 관심을 완전히 배제해 버렸다. 예수는 주권의 포기하셨다. 역사를 올바른 길로 가게 만들기 위해 효율적으로 행동해야 할 의무를 포기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승리란 부활을 통해 오는 것이지 효율적인 다스림이나 생존의 보장을 통해 오는 것이 아니다.

<느낌>

독자 본인은 이 책을 읽으면서 다가오는 충격을 이기지 못해 이 책을 읽다가 여러번 책을 놓고 쉬어야 했다. 신학동기 여러분의 힘으로 북리뷰를 할 책임과 동기를 부여받아 이렇게 적을 수 있었지만 실로 북리뷰라 할 수 없는 수준임을 안다. 이 책의 한마디 한마디가 너무나 의미가 있는 말이기에 요약하기란 애초 불가능해 보인다.

처음 이 책을 보았을 때에는 ‘비폭력저항’이라는 단순한 행위의 논리적 근거를 제시하는 것으로 알았다. 하지만 이 책을 읽기 시작하자 ‘교회론’이라는 것을 알았고 그 교회가 실로 이 세상과 동떨어진 단체가 아닌 이 세상과의 긴장과 영향력을 주고받는 관계에 있음을 알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러한 관계의 실재가 아니라 실재하는 방법인 ‘어떻게’이다.

요더는 실로 종교개혁가라 할 만하다. 지금까지 우리는 경건주의 노선에 있어왔다. 경건주의의 특징중에 하나가 개인주의이다. 본인은 숱하게 개인주의의 위험에 대해 경고했고 개교회주의에 대하여 경계하는 목소리를 내었지만 이렇게 요더처럼 철저하게 성경적이며 학문적이며 교리적인 체계로 개인주의를 무너뜨리고 교회공동체주의를 세우지는 못했다.

교회 공동체는 그 존재 자체로 세상을 침노하는 무서운 정치집단이다.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이 ‘예수의 정치학’이 되었다.

교회 공동체가 세상을 적대하는 방법은 비폭력일 뿐 아니라 이것은 가장 기초적일 뿐이다. 소극적 방어인 불참, 자발적 순종, 목숨까지 내어줌이라는 방법들이다.

이 책을 3-4번 읽었지만 아직도 완전히 소화하지 못했으며 그 충격을 삭히지 못하고 있다. 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이 안개 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동안 궁금했던 숱한 질문들 예를 들면

‘왜 하나님은 악인의 행위를 허용하는가?’ 라는 질문들에 대하여 새롭고도 더욱 더 확신있는 대답을 여기서 얻었다.

오늘날 한국교회에 나타나는 엄연한 조로증, 개교회주의, 비도덕적인 행위들, 성장의 멈춤, 비양심적인 교인들, 이런 양상에 대하여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여기서 답을 얻었다.

아직 완전한 해답을 안 것은 아니지만 분명한 것은 이 책을 읽기 전보다 더욱 더 확신있고 분명한 일관성을 유지한 채 그 길을 걸어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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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 is a cross penda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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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 will be sent to your Side.
Emmanu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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