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찮아지는 크리스마스
2009-12-14 11:50:05 이근호
산다는 것, 그것은 살아남는 것이 아니다. 살아남는 것을 억지로 ‘살았다’는 것으로 우기려면 대충 고생의 잔주름들을 정리하고 난 다음의 일이다. 연말은, 한 해 동안의 손익을 따져보기 위해 자투리로 남겨둔 기간이다. 그 시작점에 크리스마스가 자리 잡았다.
누가 태어났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쳐있는 자신에게 박수를 보내고 “한 해 동안 수고 있어!”라고 본인을 격려하는 특혜를 허락하는 시간이다. 따라서 자연적으로 크리스마스의 주인공은 각자 자신들 뿐이다. 여기에 아기 예수의 탄생과 무슨 연관이 있단 말인가!
아기 예수와 연관 있는 것이 아니라 몽환적인 서양 전설에 편성해서 들뜬 분위기가 국내까지 밀려오고 이것이 지난 한 해 동안 지배해온 단호한 질서에 대한 반발로 이어져 차곡차곡 쌓아놓은 장난감을 한꺼번에 뭉개고 흩으려는 아이의 욕구와 연관 있다. 이 장난기 발동이 무질서가 주는 자유 속에서 진행된다. 일탈, 탈선, 외침, 몽롱함, 비틀거림, 수작, 만취, 내질러버림, 무절제에 대한 체험 학습을 시도하게 된다.
아기 예수님의 용서라는 무제한적인 묵인을 배경으로 하여 그 날에는 그 어떤 분출도 메사야 탄생의 축하 소리에 묻혀서 묻거나 따지지 아니할 것이라는 일방적 자유 선포의 날이 되어버렸다. “천사야, 아기 예수를 찾아내어 경배하라. 우리는 그 덕분에 일탈의 시간을 즐기리라!”를 외친다. 이 시기가 지나면 다시 살아남아야 하니까.
우리 집 근처(대구시 동구 지묘동)에 있는 ‘아미사’라는 절에서는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합니다”라는 글을 그림을 전봇대 사이에다 높이 걸어놓았다. 교회나 절이나 다 같이 이 시대에 사이좋게 살아남자는 이야기다. 사람들이 원하는 절, 사람들이 원하는 교회로서 그 존재성을 같이 인정받자는 이야기다.
중들은 아기 예수님께서 죽기 위해 태어났다는 사실을 모른다. 교회도 마찬가지고, 밤새 유흥가를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누비고 흥에 취하는 자들도 이 사실을 모른다. 산다는 것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삶의 방석으로 여기고 그 위에서 자신을 얹어놓고 지내는 것이다.
아기 예수님은 초장부터 죽음이 위협적으로 덮쳐졌다. 예수님의 가족은 아직 죽을 때가 아니라서 천사에 의해서 애굽으로 도피했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죽기 위해 갈릴리로 나타나 나사렛 사람으로 일생을 보내셨다. 이 세상은 활주로다. 천국이라는 창공 속으로 날기 위해 워밍업 해야 하는 활주로다. 살아남는 것이 능사가 아니었다.
“내년에 좀 더 잘 살아보자”는 식으로 자신에게 격려하는 날이 크리스마스가 아니다. 도리어 “죽음의 방석을 그새 빼놓고 설쳐댔구나”를 후회하는 시점이어야 한다. 이런 후회와 반성을 훼방하는 것은 자극적인 크리스마스 분위기다. 따라서 크리스마스가 귀찮아진다.
몰아서 한 착한 일로 한 해 동안의 악함도 상쇄되는 편리함도 얄미워진다. 용서해주는 우아함도 가증스럽다. 차라리 원래대로, 하던 행세대로 사는 것이 가장 크리스마스답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이 땅에서 죄 있는 육신의 모습으로 보내셨기 때문이다. (롬 8:3) 성도는 늘 고요해야 한다. 그래야 성도의 내부는 늘 고요한 크리스마스가 된다.
He is a cross pendant.
He is engraved with a unique Number.
He will mail it out from Jerusalem.
He will be sent to your Side.
Emmanuel
Bible Verses About Welcoming ImmigrantsEmbracing the StrangerAs we journey through life, we often encounter individuals who are not of our nationality......
Who We AreWhat We EelieveWhat We Do
2025 by iamachristian.org,Inc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