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건부 신관-이기적 신앙
신자가 선한 일을 많이 하면 하나님께서 당연히 기뻐하신다. 그러나 그 선한 일에 비례해서 축복을 내리지는 않는다. 믿는 자가 믿지 않는 자보다 특별히 복을 받을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들보다 훨씬 복을 많이 받고 있거나 받아야 된다고 생각하는 이기적인 신관과는 다르다. 그럼에도 성경에는 그렇게 오해될 수 있는 구절들이 심심찮게 등장한다. 그럴 때는 항상 앞뒤 문맥과 성경 전체의 하나님의 구속사적 관점에서 해석을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문자적인 해석의 오류에 빠진다.
그런 오해를 받을 수 있는 것으로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 23:5)라는 다윗의 고백을 들 수 있다. 과연 그러한지 구체적으로 하나씩 따져보자. 분명히 "원수의 목전(UIin-눈앞)"이라고 했다. 다윗의 앞에는 위험과 환난이 도사리고 있었으며 대적이 둘러싸고 있는 형국이지, 대적을 무찔러 망하게 만들고 그가 흥하게 되었다는 뜻이 아니다. "내게 상을 베푸시고"에서 상은 축복과 보상을 뜻하는 '상(ßU)'이 아니라 음식을 먹는 테이블을 뜻하는 '상(ßE)'을 뜻하는데, 상에 넘치도록 음식을 차려 주었으니 잘 먹고 잘 살게 해주었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 앞에 베풀어진 상이란 항상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와 진정한 교제를 의미한다. 환난과 어려움에 처해 하나님이 나를 외면하는가 의심하고 불안했지만, 어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보호해주셔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이 되었다는 뜻이지, 신자가 복을 불신자보다 더 받았다는 뜻은 어디에도 없다. 이를 뒷받침하는 것이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시고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는 구절이다. 성경에서 기름 부음이란 항상 성령의 임재를 뜻하는데, 성령의 간섭 가운데 하나님과 동행하는 믿음의 삶에 은혜가 넘쳤다는 영적인 의미다. 불신자는 현실적 형통을 잔의 밑바닥에 깔릴 정도밖에 못 받았는데 신자는 넘치도록 받았다는 뜻이 아니다.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에게 계속해서 제기하는 질문은 '왜 신자가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도 하나님을 모르는 자는 형통하는 데 반해 신자는 오히려 괴로움을 당해야 하는가?'이다. 시편을 읽어보면 그런 표현들이 수도 없이 등장한다.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10: 1). "악인은 그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 그 마음에 이르기를 나는 요동치 아니하며 대대로 환난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나이다"(시 10: 4, 6).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영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언제까지 숨기시겠나이까?"(시 13: 1).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치 아니하오나 응답지 아니하시나이다"(시 22: 1, 2).
급기야는 선지자 가운데 한 사람이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나님과 직접 토론을 벌인다.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에게 두 가지 질문을 들고나선다. 첫째 신자가 기도해도 구해주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악이 성행하도록 가만두고 보시는가 하는 문제와, 둘째 더 나아가 악인이 의인을 핍박하고 이익을 취해도 잠잠하시는가 하는 것이다. 그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은 인간의 기대에 전혀 부응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 반대이다. 신자가 기대하는 대답은 첫째 질문에 대해서는 '다 뜻이 있어 그러니 참고 기다리라'는 정도일 것이고, 둘째는 또 '때가 되면 내가 저들을 벌을 주고 너희들을 상을 줄 것이니 아무 염려 말라'고 위로를 주셔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이 두 가지 질문과 하나님의 대답을 성경대로 간략하게 옮겨 보자.
선지자의 질문 1: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를 인하여 외쳐도 주께서 구원치 아니하시나이다 어찌하여 나로 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목도하게 하시나이까 대저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공의가 아주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공의가 굽게 행함이니이다"(합 1:2¡4).
하나님의 대답 1: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열국을 보고 또 보고 놀라고 또 놀랄지어다 너희 생전에 내가 한 일을 행할 것이라 혹이 너희에게 고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리라 보라 내가 사납고 성급한 백성 곧 땅의 넓은 곳으로 다니며 자기의 소유 아닌 거할 곳들을 점령하는 갈대아 사람을 일으켰나니¡| Aß·≪¡| 열왕을 멸시하며 방백을 치소하며 모든 견고한 성을 비웃고 흉벽을 쌓아 그것을 취할 것이라"(합 1:5, 6, 10).
세상에 악인이 형통하고 신자는 환난 가운데 있는 것이 어찌 된 사정이냐고 물었는데, 그에 대한 답변은 하지 않고 하시는 말씀이 더 큰 악인이 설칠 것이며 그에게 아무도 당할 자가 없을 것이라고 하신다. 그리고는 "그들은 그 힘으로 자기 신으로 삼는 자"(합 1:11)이기 때문이라는 한 가지 알 듯 모를 듯한 이유만을 드신다. 하나님이 악인을 통제할 힘이 없거나 죄악을 제거할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들은 단지 자기 힘만을 믿는 자들로 하나님은 없다고 하니까 하나님과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관심은 하나님을 아는 자에게 집중되어 있다. 그러나 그 관심이 신자가 세상에서 형통하는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아는 것이 바로 신자의 복이고 또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 불신자의 화이기 때문이다. 이런 하나님의 뜻을 두 번째 논쟁에서 더 확실히 알 수 있다.
선지자의 질문 2: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참아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참아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궤휼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되 잠잠하시나이까… 중략…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합 1: 13, 2: 1).
하나님의 대답 2: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 2: 2¡4).
무슨 하나님의 대답이 이러한가? 너희를 삼키는 까닭은 말할 수 없고 또 너희가 알 필요도 없지만 하나님의 공의는 절대 굽어지지 아니하고 다만 실현될 때가 따로 있으니 믿음으로 살라고 한다.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은 현실에서 너희가 살고 죽는 모습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때와 방법으로 반드시 실현된다. 그러나 무조건 참아내기만 하면 하나님의 때에 신자를 형통케 해주는 모습으로 그 의가 나타나야만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아는 백성이 이 땅에서 참으로 승리하는 것은 현실의 형통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사는 것인데, 그것은 신자의 형편과 상관없이 오직 하나님의 의가 실현되는 것만을 기뻐하는 것이다. 이것은 내가 너희를 죽이든지 살리든지 너희가 관여할 바가 아니라는 일방적 선언이 아니며 독재자 하나님이 아니다. 신자를 하나님의 온전한 의가 실현되는 일에 초대한 것이며 신자는 그 하나님의 의를 함께 이뤄나가는 자로 부름받은 것이다.) 바로 이 구절에서 마르틴 루터가 카톨릭이 선행과 회개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이 잘못임을 깨닫고, 종교 개혁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이 논쟁을 마친 하박국 선지자가 결론적으로 하나님 앞에 고백하는 내용이 어떻게 바뀌는가 보자.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인하여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내 뼈에 썩이는 것이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비록 내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합 3: 16¡19). 신자는 검소하게 살아야 하고 또 신자에게 일어난 모든 일이 하나님이 하신 일이니까 비록 기근과 흉작으로 인하여 소출과 열매가 없더라도 무조건 기뻐해야겠다는 단순한 뜻이 아니다. 열매와 소출이 없는 까닭은 갈대아 사람을 일으켜서 그들이 이스라엘을 점령하고 약탈하고 지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에서의 가장 강력한 군대가 곧 쳐들어온다는 것을 알기에 뼈가 썩고 처소가 떨릴 정도로 선지자는 무서워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가 기뻐할 수 있는 오직 한 가지 이유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말씀대로 하나님과 깊은 교제에 이를 수 있었고,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때와 방법대로 이뤄진다는 것을 확신하기에 기뻐하는 것이다. "자기 힘으로 자기 신(ae)을 삼는 자"들인 갈대아 사람은 다른 나라를 정복하여, 자기 나라를 왕성케 하는 데 반해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고 고백하는 신자는 완전히 다 뺏기고 망하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품안에 있는 것만으로 승리하고 기뻐할 수 있는 것이다.
도대체 기독교의 어디에서 이기적인 신관을 발견할 수 있다는 말인가? 오늘날의 대부분의 신자도 하박국 선지자처럼 잘못 알고 똑같은 기도와 의문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오지만, 하나님의 대답은 하박국 선지자에게나 우리에게나 항상 동일하다. 이 갈등을 가지고 씨름하여 분명한 응답을 받은 자만이 믿음으로 살 수 있지, 교회에 나온다고 다 믿음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He is a cross pendant.
He is engraved with a unique Number.
He will mail it out from Jerusalem.
He will be sent to your Side.
Emmanuel
Bible Verses About Welcoming ImmigrantsEmbracing the StrangerAs we journey through life, we often encounter individuals who are not of our nationa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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