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종교에는 나름대로의 도덕률 내지 계명이 있고, 그것을 잘 지켜 죄를 짓지 않으면 나중에 심판을 면하고 내세에 복을 받는다는 것이 일반인이 율법에 관해 갖는 공통적인 견해다. 이런 권선징악적인 심판의 하나님을 믿는 것을 율법주의적 신관이라고 하고, 그런 믿음을 가지고 사는 것을 율법주의적인 삶이라고 한다. 기독교의 율법은 그 성격이 전혀 다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언제 주셨는가?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열 가지 재앙과 홍해의 기적으로 구원해내신 후에,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 광야 여정길의 시내 산에서 주셨다. 이미 하나님을 알고 구원을 얻은 백성에게 하나님을 아는 자답게 살아 하나님의 복을 누리라고 준 것이지 그 율법을 지켜야 천당을 가고 지키지 않으면 지옥을 간다는 뜻으로 주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이유를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네가 호렙 산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섰던 날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나를 위하여 백성을 모으라 내가 그들에게 내 말을 들려서 그들로 세상에 사는 날 동안 나 경외함을 배우게 하며 그 자녀에게 가르치게 하려 하노라 하시매… 여호와께서 그 언약을 너희에게 반포하시고 너희로 지키라 명하셨으니 곧 십계명이며 두 돌판에 친히 쓰신 것이라 그때에 여호와께서 내게 명하사 너희에게 규례와 법도를 교훈하게 하셨나니 이는 너희로 건너가서 얻을 땅에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신 4:10, 13, 14). 첫째 하나님 경외함을 배우게 하며, 둘째 그 자녀에게도 그 경외함을 가르치게 하며, 셋째 건너가서 얻을 땅에서 행하게 하려 한 것이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에 대해 제대로 알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물론 성경 곳곳에 이스라엘 백성이 율법을 지키면 복을 받고, 어기면 화를 당한다고 경고하셨지만 어디까지나 가나안 땅에서 복을 누리느냐 못 누리느냐의 문제이지 사후의 영원한 운명이 결정되는 문제는 아니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것 자체가 복이고 그것을 어기는 것 자체가 화다. 율법은 심판을 내리는 잣대가 아니라 복을 주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의 표시다. 우상숭배와 죄악에 찌든 백성들이 사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 하나님 자녀답게 사는 것이 얼마나 축복 된 삶인가를 천하에 보여, 열방이 이스라엘을 통하여 복을 받게 하라고 주신 것이 율법이다. 심판이 겁이 나 율법을 지키려 노력하는 일반 종교의 권선징악적 율법관이 문자적 율법주의라 한다면, 하나님 뜻대로 따르는 것이 축복임을 알아 기쁨으로 그렇게 사는 기독교의 그것은 진정한 율법주의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 자기들의 삶이 다른 민족에게 본이 되어야 함에도 그 땅 거민들의 삶을 자기들의 모범으로 삼아버렸다. 그들에게는 이미 얻은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었고 대신 현실에서 어떻게 풍성하게 살 것인가 만이 당면과제였다. 자기들은 선택된 백성으로 율법까지 받았기에 하나님이 자기들을 버릴 리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만약에 이들이 율법을 자기들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하는 기준으로 받았다면 그렇게 쉽게 타락하지는 않았을 것이며 문자 그대로 율법주의적 삶을 살았을 것이다. 이들은 율법주의적인 삶과는 정반대의 삶을 살았다. "그 두령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며 그 제사장은 삯을 위하여 교훈하며 그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치면서 오히려 여호와를 의뢰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지 아니하냐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미 3:11). 설사 죄를 지어도 자기들에게만은 심판이 없다고 믿었기에 하나님의 사후 심판을 두려워하는 삶을 산 것이 아니다.
이런 잘못된 선민의식(Zionism)은 예수님 당대에까지 이르렀고, 그 대표적인 예가 예수님의 꾸중을 들은 바리새인들이다. 이제 율법은 단지 형식과 껍데기만 남아 종교 지도자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고 치부하는 수준으로 전락해버렸다. 율법은 사람들로 죄 문제로 괴로워하고 심판을 받을까 두렵게 하는 짐조차 되지 못하고 종교적·영적 우월의식을 증거해주는 역할밖에 못했다. 바리새인들만큼 율법의 규정을 엄밀하게 따르며 산 자들이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율법주의적 삶은 영원한 심판에 대한 두려움과 죄를 지은 것에 대한 죄책감으로부터 구원받기 위해, 율법의 엄격한 기준과 잣대를 적용한 그런 의미가 아니었다. 다른 사람을 심판하고 정죄하여 자신들의 의를 자랑하고 자기들의 영광을 위해서 자기들이야말로 율법의 규정을 가장 잘 준수하는 것처럼 살았던 것뿐이다. 하나님을 아는 백성이 이 땅에서 진정 복된 삶을 누릴 수 있는 완전한 길인 율법이 맛을 잃은 소금처럼 되었다. 율법도 그러했고 율법을 받은 백성도 진정한 율법주의적 삶과는 완전히 담을 쌓아 버렸다. 이들의 삶은 형식적 율법주의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 오신 예수님은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 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17¡20)고 하셨다. 예수님이 폐하신 것은 제사 절차법이지 제사법의 배경에 있는 정결의 정신과 도덕법은 오히려 더 강화했으면 했지 폐한 것은 아니다. 신자들의 삶이 바리새인들이 형식적으로 율법을 지켜 사는 정도보다 선하지 못하면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구원을 얻은 자가 복을 누리고 살기 위해 율법대로 살아야 하며 나아가 그렇게 사는 도덕적 삶 자체가 신자에게 축복이 된다는 뜻의 진정한 율법주의로 돌아가야 한다고 촉구한 것이다.
죄가 중심 문제가 되어 있지 않는 종교란 생명력이 없는 종교다. 죄가 중심이 된다고 해서 신자들에게 멍에를 메우자는 것이 아니다. 도덕률이 구원의 기준이 되면 그것은 멍에가 된다. 인간은 어느 누구도 아무리 낮은 수준의 도덕률이라도 평생을 두고 완전하게 지켜낼 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도덕적인 삶을 포기하고 아무렇게나 방탕하게 살아도 된다는 것은 더구나 아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죄의 문제를 먼저 해결해 주지 못하고 율법만을 강요하면 어떤 종교라도 짐이 될 수밖에 없다. 죄의 용서가 없는 사랑은 헛것이며 죄의 대가를 치르지 않는 용서 또한 없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치르신 죄의 대가로 우리에게 완전한 용서가 임했다는 것을 믿을 때만, 문자적 율법주의의 짐과 멍에가 벗어지고 진정한 의미의 율법주의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예수를 믿고 난 후에는 율법을 지키려는 노력이 갖는 의미와 방법이 달라진다. 이전에는 죄의 형벌이 있을까 두려운 마음으로 부담을 가졌지만 예수를 믿은 후에는 기쁨으로 자원하여 율법대로 산다. 이제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고 사랑을 입은 자로서 거룩과 영원을 사모하고 신의 성품에 참예하며 영광의 빛에 들어가기를 소원하는 자로서 진정한 기쁨으로 선한 삶을 열망하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아직도 내 속에 남아 있는 죄의 본성이 가끔 시험과 유혹에 빠지게 만들기도 해, 내 의지적인 노력만으로 그 선을 달성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선을 사모할수록 더욱 내 속에 남아 있는 죄성에 대한 미움은 증대되게 마련이다. 예수에게 가까이 갈수록 죄의 본성이 얼마나 추하며 그 권세가 얼마나 센지 내 힘만으로 이길 수 없음을 실감하게 되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그 선을 이겨낸다. 그래서 바울 사도가 "오호라 곤고한 자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라고 신자가 된 후에도 남은 죄성을 한탄했지만, 바로 이어지는 구절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롬 7: 25)고 복음의 은혜와 권능에 감사했다. 바울은 율법의 멍에를 한탄한 것이 아니라 그의 속에 아직도 남아 있는 죄성을 저주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을 붙든 것이다. 이 땅에 살고 있는 신자라면 완전한 천국의 영광을 보기 전에는 누구나 바울이 했던 것과 동일한 고백을 할 수밖에 없다.

He is a cross pendant.
He is engraved with a unique Number.
He will mail it out from Jerusalem.
He will be sent to your Side.
Emmanuel
Bible Verses About Welcoming ImmigrantsEmbracing the StrangerAs we journey through life, we often encounter individuals who are not of our nationa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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