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의 능력
아들의 능력
히브리서 7:20-22 보증받은 언약
사람 살아가는데 굳이 언약이니 맹세가 필요할까요? 돈만 있으면 되는 것 아닙니까? 이왕에에 살아 있는 존재를 계속 살리는 데 있어서는 돈이 필요하지만 아예 죽은 존재를 살리는데는 돈이나 세상 능력으로는 소용없습니다.
더구나 하나님 믿는다고 사는 것도 아닙니다. 근원적으로 인간 자신이 이미 죽어 있으며 죽은 존재가 하나님에게 “살려 달라”고 매달리는 것조차 하나님에게 거부당할 호소에 불과합니다.
“한 촌에 들어가시니 문둥병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소리를 높여 가로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궁휼히 여기소서 하거늘”(눅 17:12-13)
열명의 문둥병자들이 예수님으로부터 병 나음을 얻었지만 그 중 한 사람만 예수님의 병고침이 예수님의 영광을 위함임을 알고 예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그 아홉은 어디 갔느냐?”고 묻고 있습니다.(눅 17:17)
인간들은 자신들이 어느 정도로 심각한 지경에 있는지를 모릅니다. 대충 자신의 가치를 지키는 식으로 타인과의 관계를 유지하면 된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마저 사정없이 죽음에 넘기십니다. 이것은 인간들이 고대하는 바, 즉 자신의 가치도 지켜지는 상태로 천국에도 살려는 모든 시도가 하나님에게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내는 겁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단절을 나타냅니다. ‘언약의 보증’이란 출애굽 때의 경우에는 ‘유월절의 어린양’으로 나타났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천사가 유념해서 보는 것은 죽음의 천사가 들어갈 그 집 문에 피가 발려 있는가 여부입니다.
다른 것은 필요치 않습니다. 다른 것은 소용없습니다. 오늘날도 예외가 아닙니다. 인간들이 모든 일들이 어떤 식으로 피의 가치에 합치되는 지를 보십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모든 행함은 자신을 구원하는 보증이나 맹세가 되지 못함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는 인간의 모든 행함의 의미가 이미 확정된 예수님의 피 앞에서 어떤 식으로 삭제되는지를 경험해야 합니다.
그래서 엄중한 예수님의 죽음 이외의 것은 궁극적으로 버린 의미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