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성령의 임하심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에 너희는 생명을 위해 짐을 지고 예루살렘 성문으로 들어오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성령의 임재 = 하나님의 영광

 

성령이 임재하시는 곳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다.

 

충만히 임하는 곳에는 더욱 충만한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신다.

 

 

①그 후에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 이는 구름이 회막 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함이었으며(출 40:34-35)

 

 

오늘날 우리가 섬기는 교회에, 예배 시간에 여호와의 영광=거룩한 기운이

 

충만해야 한다. 그러므로 설교자와 기도, 찬양 등 예배 인도자는 토요일에

 

경건하게 준비해야 하며, 주일 아침에도 일찍 나와서 기도로 준비해야 한다.

 

예배 시작 직전에도 서로 얘기 나누다가 어수선하게 강단에 올라가면

 

예배에 영광이 조금도 임하지 않는다. 적어도 30분전에, 예배 인도자들은

 

여호와의 영광을 사모하며 간절한 기도로 예배를 준비해야 한다.

70-80년대는, 예배 시작 전에 은혜를 사모하는 성도들이 많았는데,

 

이제는 점점 그런 아름다운 전통들이 소리 없이 사라져 가고 있다. 

 

우리 교회에 여호와의 영광이 점점 사라진다면

 

그것은 유럽처럼 교회가 경로당이나 문화회관으로 변해 가는 것이다.

 

②십자가를 지는 곳에 하나님의 영광(=성령의 임재)이 나타난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요 12:23).

 

이것은 십자가를 지실 때요, 한 알의 밀알처럼 땅에 떨어져 죽을 때이다.

 

손양원 목사님은 신사참배 반대 옥고, 뒤이은 두 아들의 순교,

 

뒤이은 당신마저 순교의 삶을 사셨는데, 하나님의 영광을 모를 때는

 

그것이 한없는 고난으로만 보인다. 물론 고난이 있지만,

 

동시에 거기에는 놀랍고 감동적인 하나님의 영광이 있었다.

 

 

그것은 베드로가 변화산에서 보았던 흰옷의 영광(흰것이 아니라 영광이

 

포인트다)이요, 스데반이 순교할 때 체험했던 영광이다.

 

그것은 세상이 주는 것 보다 비교할 수 없이 더 아름답고 좋은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신다고 약속하셨다(눅 11:13).

 

성령이 있는 곳에는 놀라운 하나님의 영광이 있고,

 

거기엔 참 만족과 행복이 있다.

 

물질이나 성공이 나에게 더 절실한 것이었다면,

 

예수님은 구하는 자에게 성공(↔성령)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성령을 구하지 않고, 대신에 성공이나 물질을 더욱 먼저 구했다.

 

그래서 교회는 점점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시고 계몽회관으로 변해가고 있다.

 

성도들은 발목에나 겨우 찰랑거리는 생명수를 맛보고 있다.

 

주여, 우리가 성령을 구하게 하소서!

 

우리 삶과 교회에 여호와의 영광이 임하소서♥

 

◑5. 성령충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성령충만 받는다’be filled with는 표현은 성경에 직접적으로 자주 등장한다.

 

아래 원문자(①~⑫)는 신약성경에 나오는 ‘성령충만받다’의 예를 보여준다.

 

오순절 사건 이후 12회 나옴.

 

▶다같이 모인 자리에서 성령충만 받다

 

①“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행 2:4).

 

성령의 각인에게 충만히 임한 것뿐만 아니라, 그 집안에도 충만히 임하셨다;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2:2).

 

그 곳은 성도들이 다 같이 모인 장소였다(2:1).

 

성도들이 다함께 모여 기도하면 성령님이 충만히 임하시는 역사가 일어난다.

 

모인 사람들이 1:13-15에 나오는데, 가룟 유다 빼고는 다 모였다.

 

(물론 이미 죽었음). 다 한자리에 모이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미!

▶오순절날 방언은 ‘언어 방언’ or ‘방언 통변’

 

이 때 성령충만을 받은 사람은 거기에 참석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모두’가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16개국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을

 

방문해서 깜짝 놀란 것은 자기 지방의 방언dialect으로 알아듣게 됨이었다.

이를 두고 과거에는 ‘언어방언’(외국어방언, 알아듣는 방언)과

 

‘천사방언’(못 알아듣는 방언)으로 억지로 구분해 왔다.

 

그러나 최근엔 행 2장 오순절에 <‘방언 통변’의 은사가 임한 것>으로 본다.

 

그래서 16개국 출신 사람들이 각자 자기 지방 방언으로 알아들은 것이다.★

 

상당히 설득력 있는 해석이다.

 

진짜 ‘언어방언’이었다면 성경에 언어 방언의 다른 용례가 나올 터인데,

 

그것이 나오지 않는 것으로 볼 때 이 해석이 맞다.  

 

▶성령의 재충만

 

② “아나니아가 그에게 안수하여 가로되 형제 사울아...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행 9:17)

 

이런 아나니아의 간구와 축원이 응답되어 바울이 성령 충만을 받았다.

 

그 이유는, 바울은 즉시 눈을 떴으며, 각 회당에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전파했다(9:20)는 열매를 봐서 그렇다.

 

③그 후 구브로 섬에서 바울은 다시 <성령의 재충만>을 받았다.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행 13:9)

 

성령충만은 한 번 받지만, 계속 재충만을 받아야 한다.

행 2장에서 오순절날 제자들은 성령 충만을 받았지만,

 

④행 4:31에서 제자들은 기도할 때 다시 성령의 재충만을 받았다.

 

⑤베드로 역시 행 4:8에서 다시 성령의 재충만을 받았다.

 

⑥행 13:52에도 제자들은 성령의 재충만을 받았다.

⑦엡 5:18에는,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했는데,

 

원래는 “계속 재충만을 받으라”는 번역이 더욱 정확하다.

 

Keep on being filled...

 

▶성령충만=찬송충만=기도충만=감사충만

 

엡 5:18-21은 한 문장이다. 본동사는 ‘성령충만 받으라’이고,

 

나머지는 분사인데, 그 분사들은 ‘화답하며(말하며), 노래하며, 찬송하며,

 

감사하며, 복종하며’ 등이다. 이렇게 볼 때, 성령충만=말씀충만=찬송충만=

 

감사충만=순종충만 이란 등식이 성립된다.

 

이런 식으로 볼 때, 논리적으로 한 계단 더 비약해서

 

소위 부흥사들이 가르친 바

 

‘성령충만=기도충만=전도충만=사랑충만=봉사충만=기쁨충만’

 

도 성립된다고 본다. 

 ▶집사들, 봉사자들을 뽑는 조건-성령충만

 

⑧행 6:3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⑨행 6:5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 택하여 세우니”

⑩행 7:55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⑪행 11:24 “바나바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더라”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도, 집사, 교회 지도자들은 모두 성령충만을 받았다.

 

또한 계속 재충만 받았다. 베드로, 바울, 스데반, 바나바, 빌립 등.

 

오늘도 하나님은 성령충만을 받고 계속적으로 재충만 받는 사람들을 택하여

 

세우신다. 

▶예수님의 성령충만       

 

⑫ 예수님 역시 요단강에서 수세를 받으신 이후에 성령으로 충만해지셨다

 

(눅 4:1). 나머지 공생애 사역을 성령충만으로 진행해 나가셨다.  

  

▶성령충만과 표적(외적 능력)

 

성령충만하면, 기적적인 표적이 반드시 동반되어야 하는가?

 

위의 12개의 케이스를 놓고 볼 때,

 

표적은 필수required라기 보다는 선택option이라고 본다.

 

물론 내가 표적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필요할 때마다 선택적으로 나타내 보여주신다.  

 

♣우스개로, 성령충만한 사람과 차력사(借力:힘을 차용하다, 빌리다)의 차이는

 

무엇일까? 앞서 말했지만, ‘성령충만을 받는다’고 할 때 우리말 번역은

 

능동태가 되는데 이 때 주체는 인간이 된다.

 

그것은 인간이 받고 싶으면 언제든지 받을 수 있는 것처럼 오해하기 쉽다.

  

그러나 성경에 나오는 원어적인 성령충만은 항상 수동태be filled로 나온다.

 

(성령세례도 마찬가지).

 

그것은 주어와 주체가 항상 성령님이요, 하나님이란 뜻이다.

 

사람은 거저 성령님께 이끌림을 받을 뿐이다.

 

능력의 주체는 항상 하나님께 있으므로, 인간은 스스로 자신을 감춘다.

 

그리고 사역의 목적이 항상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전도’에 있다.

 

표적을 드러내 보이는데 있지 않다는 뜻!

 

이에 반해, 차력사는 능력을 빌린다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표적과 자기를 드러내고 과시하는 사람이다.

 

자기에게 특별한, 보통 사람과 차별성이 있는 능력 있음을 보여주는 사람이다.

 

사람은 자칫 잘못하면 성령충만을 사모하다가 차력사로 둔갑하는 경우가 있다.

 

성령충만을 사모하되, 신기한 능력을 사모하는 차력사 되기를 사모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과거에 기도원에 이런 ‘차력사 지망생’들이 들끓었다.

 

요즘은 자연 소멸된 것 같다.

 

표적은 거저 성령충만한 사람에게 자연스럽게 동반된다.

 

그러나 모든 케이스에 100% 확실히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성령충만 하지만, 외적 능력이 안 나타나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다.

 

(이 말은 성령충만한 표적을 무시하는 뜻이 결코 아님)

 

 

▶성령충만 : 복음을 증거하는 능력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여기에 ‘성령충만’이란 말은 직접적으로 없지만,

 

이 말씀이 행 2장에서 성취되었다고 볼 때, ‘성령충만’으로 볼 수 있다.

 

성령이 임하다=내려오다=기름부음받다=성령충만받다 라고 볼 때도 그렇다.

 

복음을 증거하고, 실제로 전도를 하는 일은,

 

언제나 시작하기는 싫지만 후에는 항상 기쁨이 따른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라”(요일 1:3-4).

 

 

행 1:8은 ‘동시 개념’으로 본다(다 아는 사실이지만).

 

유대와 땅 끝에서 <동시에> 증인이 되어야 한다.

 

혹자는 교회에서 해외 선교만 하고, 동네 전도는 안 하느냐고 질문한다.

 

혹자는 국내 전도는 하는데, 해외 선교는 아예 안 한다.

 

국내 전도도 잘 감당하기 힘든데 어떻게 외국까지 하겠느냐는 논리다.

 

그러나 성령이 임하시면=성령의 충만을 받으면,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을

 

‘동시에’ 전도하게 된다. 성령충만은 복음을 전하라고 주신 것이지,

 

차력사가 되라고 주시지는 않는다♥

 

◑참고;

 

성령이 임하심=내려오심=부으심=성령세례받음=성령충만받음=성령받음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① 예루살렘에서  ‘임하다=성령세례=성령충만’ 으로 표현되었다.

 

동일한 사건을 두고 약간씩 표현을 달리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행 1:8)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행 1:5)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행 2:4)

 

동일한 한 사건을 두고 임하다, 성령세례받다, 성령충만받다 등으로 달리 표현했다. 그것은 세 동사가 본질적으로 모두 같다는 뜻이다. 

 

②내려오심 = 부어주심이다.

 

베드로가 이 말 할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행 10:44)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주심>을 인하여 놀라니(행 10:45)   

베드로는 행 2장의 예루살렘에서 우리에게 주신 것과 <같은> 성령을

 

이방인에게도 주셨다고 했다(행 11:17).

 

이렇게 볼 때 행 10장의 내려오심은 = 성령세례받음 (행2장) 이다.

 

Renewal Theology 中 성령론

Blog
About Us
Message
Site Ma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