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언도 그치고
고린도전서 13장 8절에서 바울은 매우 흥미롭고 거의 놀랍기까지 한 말을 했다.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라는 표현에서 “떨어지다”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부패하다’, 또는 ‘폐지되다’라는 뜻이다. 바울은 사랑이 천하무적이라거나 거절당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 것이 아니다. 그는 사랑은 영원하며 그 효력이 영원히 지속되며 결코 과거의 유물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방언은 “그치고”말 것이다. 고린도 전서 13장 8절에 사용된 헬라어 동사 파우오(pauo)는 ‘영원히 그치다.’는 뜻이다. 이 단어는 방언이 일단 그치면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이 구절이 오늘날의 은사주의 운동에 대해 제기하는 문제는 이것이다. 만일 방언이 언젠가는 그치게 되어 있다면 그 일은 이미 일어난 일인가 아니면 미래에 일어날 일인가? 은사주의자들은 어떤 은사도 아직 중단되지 않았으므로 방언의 중단은 미래에 일어날 일이라고 주장한다. 반면 대부분의 비은사주의자는 방언은 이미 그쳤고 사도 시대와 함께 사라졌다고 주장한다.
누구 말이 옳은가?
나는 역사적, 신학적, 성경적으로 방언은 사도 시대에 끝났다고 확신한다. 사도 시대가 끝났을 때 방언도 함께 끝났다. 오늘날의 은사주의 운동은 성경적 방언의 부활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고린도 교회에서의 가짜 방언의 관행과 비슷한 하나의 일탈이다.
방언이 중단되었다는 증거는 무엇인가? 첫째, 방언은 기적적, 계시적 은사였다. 그런데 우리가 반복해서 살펴 본대로 기적과 계시의 시대는 사도들과 더불어 끝났다. 신약 성경에 기록된 마지막 기적은 대략 서기 58년경에 일어난 멜리데 섬에서의 신유사건이다.(행28:7-20). 서기 58년부터 요한이 계시록을 완성한 96년까지 아무런 기적도 기록되지 않았다. 방언이나 신유 같은 기적적인 은사는 초기 서신인 고린도전서에만 언급되어 있다. 후대의 두 서신인 에베소서와 로마서는 둘 다 성령의 은사에 대해 길게 논하고 있지만 기적적인 은사에 대해서는 어떤 언급도 하지 않는다. 그 시기에 이르면 기적은 이미 과거지사로 간주되고 이다(히2:3-4). 사도적 권위와 사도적 메시지는 더 이상의 확증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1세기가 끝나기 전에 이미 신약 성경 전체가 기록되어 교회 곳곳에 퍼져가고 있었다. 계시적 은사는 이제 더 이상 어떤 목적에도 기여하지 못했다. 사도 시대가 사도 요한의 죽음과 함께 끝나자 사도들의 신분을 증명해준 표적들은 현실에서 사라졌다(참조 고전12:12).
둘째, 앞에서 살펴본 대로 방언은 믿지 않는 이스라엘 미족에게 표적으로 사용하기 위한 은사였다. 방언은 하나님이 이방인을 포함하는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였음을 뜻했다. 하나님은 이제 모든 민족에게 모든 언어로 말씀하시기를 원하셨다. 막힌 담은 무너졌다. 그래서 방언의 은사는 불순종한 한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를 상징할 뿐만 아니라 온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을 상징했다.
그러므로 방언은 옛 언약에서 새 언약으로 변화의 징표였다. 교회의 성립과 더불어 하나님의 백성에게 새날이 밝았다. 하나님은 모든 언어로 말씀하시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과도기가 지나가자 표적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다. 파머 로버트슨(O. Palmer Robertson)은 그 결과를 다음과 같이 적절히 설명했다.
방언은 기독교가 유대교의 요람에서 시작되었지만 유대교적인 특성을 갖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을 보여 주는 데 크게 기여했다.………[옛 언약에서 새 언약으로의]이행은 이미 이루어졌으므로 이행기의 표적은 교회 안에서 아무런 지속적인 가치를 갖지 못한다. 오늘날에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이라는 단일 민족에서부터 모든 민족에게로 움직이고 계신다는 것을 보여 줄 표적이 전혀 필요 없다. 그러한 움직임은 이미 성취된 사실이 되었다. 교회를 세우는 사도들의 직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특히 과도기적인 은사인 방언은 하나님의 구약 백성과 신약 백성에 대한 언약적인 표적으로서의 기능을 이미 성취했다. 방언은 이미 그 역할을 다 했으므로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서 더 이상의 기능은 없다.
더구나 방언의 은사는 다른 은사들보다 열등했다. 방언은 주로 표적으로 주어진 은사이므로(고전14:22) 적절하게 교회에 덕을 세울 수가 없었다. 방언은 또한 자기 자신을 세우는데 악용되기 십상이었다(14:4).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해 모이는 집단이지 자기 민족에게나 개인적인 체험 추구를 위해 모이는 집단이 아니다. 그러므로 방언은 교회에서 제한된 효용성밖에 갖지 못했고 그래서 영구적인 은사로 주어진 것이 결코 아니었다.
역사도 방언이 그쳤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다시 말하지만 방언이 신약 성경의 최초의 책들에만 언급되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이후 최소한 열두 편의 서신서를 썼지만 다시는 방언을 언급하지 않았다. 베드로도 방언을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고 야고보도 방언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요한도 방언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고 유다도 마찬가지였다. 방언은 새로운 복음의 메시지가 전파되고 있었을 때 사도행전과 고린도전서에 간략하게만 나타났다. 그러나 교회가 세워지고 난 뒤 방언은 사라졌다. 방언은 중단되었다. 신약 성경에서 후대에 기록된 책들은 다시는 방언을 언급하지 않는다. 사도 시대 이후에도 그 누구도 방언을 언급하지 않았다. 클리언 로저스(Clon Rogers)는 이렇게 말했다. “사도 교부들(Apostolic Fathers)에게서는 그 어디에서도 방언의 은사가 언급되거나 암시되어 있지 않으며 심지어 발견되지도 않는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크리소스토무스(Chrysostom)와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e)-동방 교회와 서방교회의 가장 위대한 신학자들-는 방언을 사라진 것으로 생각했다. 크리소스토무스는 자기 시대에는 방언이 이미 사라졌다고 단정적으로 말했다. 4세기에 저작 활동을 한 그는 방언을 애매모호한 관행으로 묘사하면서 자신은 이 은사의 특징에 대해 확신조차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시인했다. 그는 이렇게 썼다. “그러한 애매모호함이 생겨나는 까닭은 성경에 언급된 사실에 대한 우리의 무지와 방언의 중단 때문이다. 즉 방언은 과거에는 발생했지만 지금은 더 이상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방언에 대해 사도 시대에 맞춰진 표적이라고 썼다.
최초의 교회 시대에는 “성령이 믿는 자들에게 임했고 그들은 방언으로 말했다.” 그것은 그들이 배운 적이 없는 말이었다. “성령이 그들에게 할 말을 주셨기 때문이다.” 이 은사는 그 시대에 맞춰진 표적이었다. 하나님의 복음이 장차 모든 언어를 통해 온 땅에 퍼질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모든 언어로 성령의 전조가 나타나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현상은 하나의 전조로 성취된 이후 사라졌다. 오늘날 우리는 사람들이 성령을 받도록 그들에게 안수할 때 그들이 방언으로 말하기를 기대하는가?[이 수사적 질문에 대해 아우구스티투스는 분명히 부정적인 대답을 기대했다.] ……… 오늘날 성령의 임재에 대한 증거가 이런 기적들을 통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면, 그 증거는 무엇을 통해 주어지며 사람은 무엇을 통해 자신이 성령을 받았음을 알게 되는가? 그 사람에게 자신의 마음을 잘 살펴보게 하라. 만일 그가 형제를 사랑한다면 성령이 그의 안에 거하시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또한 이렇게 썼다.
형제들이여, 그렇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세례 받고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오늘날 모든 민족의 언어로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어떻게 우리가 그 사람도 성령을 받았다고 믿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우리 마음이 이런 믿음 없는 생각에 유혹받는 일이 있어서는 결코 안된다………왜 아무도 모든 민족의 방언으로 말하지 않는가? 교회 자체가 이제 모든 민족의 언어로 말하기 때문이다. 전에는 교회가 한 민족 안에 있어서 그 속에서 모든 사람의 언어로 말했다. 그 때는 교회가 모든 사람의 언어로 말함으로써 앞으로 일어날 일, 즉 교회가 열방 가운데서 성장함으로써 모든 사람의 언어로 말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상징했다.
교회 시대의 첫 5백 년 동안 자신들이 방언을 한다고 주장한 사람들은 이단으로 낙인찍힌 몬타누스의 추종자들밖에 없었다(3장을 보라).
그 다음으로 기독교 내에서 중요한 방언 운동이 발생한 시기는 17세기 말이었다. 프랑스 남부의 세벤(Cevennes)지방에서 전투를 벌이던 신교들의 한 무리가 에언을 하고 환상을 체험하고 방언을 말하기 시작했다. 세베놀의 예언자들이라고 불리기도 한 이 집단은 영적인 유산이 아닌 정치적, 군사적 활동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들의 예언은 대부분 성취되지 않았다. 이들은 가톨릭에 대해 광적으로 적대적이었고 가톨릭교회에 맞서 무력 사용을 옹호했다. 그 결과 많은 이가 가톨릭의 박해를 받아 죽음을 당했다.
그들의 정반대편에서는 종교 개혁자들의 이신칭의에 대한 가르침에 반대한 로마 가톨릭 지지자들의 집단인 얀센주의자들(Jansenists)도 18세기에 자신들이 방언을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방언의 한 형태를 실행한 또 다른 집단은 18세기 중엽에 번성한 미국 내 퀘이커교(Quaker)의 한 분파인 셰이커교도(Shakers)였다. 이 분파의 창시자인 마더 앤 리(Mother Ann Lee)는 자신을 여자 예수 그리스도로 여겼다. 근는 스스로 일흔두 가지 언어로 말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셰이커교도들은 결혼한 사이에서도 성관계를 맺는 것은 죄악이라고 믿었다. 그들은 무아지경과 흡사한 상태에서 춤추고 노래하면서 방언을 했다.
다음으로 19세기 초에 스코틀랜드의 장로교 목사 에드워즈 어빙(Edward Irving)과 그의 교회 신도들이 방언과 예언을 말했다. 어빙파(Irvingite) 예언자들은 종종 서로 상반되는 예언을 했다. 그들의 예언은 성취되지 않았고 그들의 집회는 극단적인 난폭 해위로 특징지어졌다. 이 운동은, 예언자들 가운데 일부가 가짜 예언을 한 사실을 시인하고 다른 일부는 심지어 악한 영에게서 은사를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더더욱 의심을 받게 되었다. 이 집단은 결국 가톨릭 사도 교회(Catholic Apostolic Church)가 되어 로마 가톨릭의 몇 몇 교리를 수용하고 열두 사도 직분을 만들어 내며 많은 거짓된 교리를 가르쳤다.
이 모든 자칭 방언 현상은 이단적이거나 광신적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비정통적인 집단들과 동일시되었다. 그들과 같은 시대에 살았던 성경적으로 정통적인 신자들은 그 모든 집단을 정상에서 벗어난 사람들이라고 판단했다. 진리에 관심이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분명히 그렇게 판단해야 마땅하다. 따라서 우리는 사도 시대가 끝날 때부터 20세기 초까지 신약적인 방언 은사가 진짜로 나타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결론을 지을 수 있다. 성령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방언은 끝났다.(고전13:8)
신약학자 토머스 에드거(Thomas R. Edgar)는 이렇게 말한다.
이러한 은사들과 표적들은 중단되었기 때문에 자신의 타당성을 입증해야 하는 증명의 책임은 전적으로 은사주의자들에게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오랫동안 비 은사주의자가 기적적인 표적의 은사는 중지되었다는 논란의 여지가 없는 성경적 증거를 제시해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비 은사주의자들은 이 사실을 입증할 아무런 책임이 없다. 그 사실은 이미 역사를 통해 입증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은사 주의자들은 이 표적의 은사들이 교회 시대 동안 다시 부활할 것이며 오늘날의 현상이 곧 그러한 부활이라는 것을 성경적으로 입증해야 한다. 다시 말해 그들은 자신들의 경험이 거의 1,900년 동안 나타나지 않은 은사가 다시 나타났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마지막 성령세례?
방언의 은사는 20세기에 다시 시작되었는가? 오순절주의자들과 은사주의자들은 이 문제를 두 가지 방식 중에 한 가지로 다룬다. 어떤 이들은 방언 은사가 결코 중단된 적이 없고 단지 쇠퇴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방언을 말한다고 주장한 집단들은 오늘날의 오순절 운동과 은사주의 운동의 선조였다고 주장한다.그런 입장을 취하는 과정에서 그들은 이단적 전통에 서게 된다.
반면 많은 은사주의자가 방언이 사도 시대 이후 중단되었음을 인정하지만 오늘날 은사의 출현은 일종의 마지막 성령 세례이며 말세를 위한 성령의 은사라고 믿는다.
이 두 번째 관점을 취하는 오순절주의자들과 은사주의자들의 핵심 본문은 요엘서 2장 28절이다.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요엘서 2장 19-32절에 따르면 마지막 여호와의 날이 이르기 전에 하늘과 당에 이적-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 나타나면서 성령이 부어질 것이다.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같이 변하려니와”(31절). 이것은 분명히 다가올 천년 왕국에 대한 예언이며 그 이전의 어떤 일을 가리키는 것일 리가 없다. 이 요엘서 구절의 문맥을 보면 그와 같은 해석이 유일하게 가능성 있는 해석임을 알 수 있다.
예컨대 요엘 2장 20절은 말세에 이스라엘을 공격할 “북쪽군대”의 패배를 언급하고 있다. 또 요엘서 2장 27절은 이스라엘을 다시 하나님께 돌아오게 할 큰 부흥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것은 대환난의 또 다른 특징이며 아직 성취되지 않은 일이다. 요엘서 3장(2, 12, 14절)은 아마겟돈 전쟁 이후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적 천년 왕국의 수립과 관련해서 일어날 사건인 열방의 심판을 묘사하고 있다. 3장에서 요엘은 계속해서 천년 왕국을 아름답게 묘사한다(18절). 명백히 요엘서 2장은 천년왕국에 대한 예언으로 오순절에나 그 이후 어느 때에도 완전히 성취되지 않았다. 그것은 아직은 미래에 속한 한 시대를 언급하는 것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아직 베드로가 오순절에 요엘서 2장 28-32절을 인용할 때(행2:17-21) 무슨 뜻으로 이 구절을 인용했는가 하는 문제가 남아 있다. 어떤 성경학자들은 베드로가 오순절을 요엘서 2장 28절의 성취로 보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오순절에는 하늘과 땅에 아무런 이적이 나타나지 않았다. 피도 불도 연기 기둥도 없었다.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같이 변하고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지도 않았다. 요엘서의 예언은 완전히 성취되지 않았다. 오순절은 부분적 성취일 뿐이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예언의 궁극적 성취에 대한 예고편이었다. 이와 비교할 만한 예는 변화산 사건이다. 변화 산에서 주님의 영광은 천년왕국 내내 충만하게 나타나게 될 모습으로 잠시 나타난다.
베드로는 단지 오순절에 모인 사람들이 성령께서 천년 왕국 시대에 나타내실 능력을 미리 조금 맛보고 있다고 말한 것이다. 그들이 예루살렘에서 소수의 무리 가운데서 본 광경은 언젠가 성령께서 전 세계적인 규모로 행하실 일의 전조였다.
19세기 탁월한 성경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인 조지 피터스(George N. H. Peters)는 이렇게 썼다. “오순절의 성령 세례는 성령이 다가올 시대에 행하실 일을 증언하고 있는, 미래의 예언 성취에 대한 보증이다.” 오순절에 시작된 기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다가 올 지상 왕국을 알리는, 수평선 위에 떠오른 빛이다.
어떤 은사주의 자들은 요엘서 2장 23절의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영적인 의미로 해석한다. 그들은 이른 비가 성령이 임하신 오순절을 가리키며 늦은 비는 20세기의 성령 세례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구약성경 전체에서 “이른 비”는 가을비를 가리키며 “늦은 비”는 봄비를 가리킨다. 요엘은 사실 천년왕국 시대에도 이 두 비가 “예전과” 같이 올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23절). 그의 요점은 하나님이 천년왕국 시대에 곡식을 풍성하게 자라게 하실 것이라는 점이었다. 요엘서 2장 24-26절은 그 점을 매우 분명하게 보여준다. “마당에는 밀이 가득하고 독에는 새 포도주와 기름이 넘치리로다 내가 전에 너희에게 보낸 큰 군대 곧 메뚜기와 느치와 황충과 팥충이가 먹은 햇수대로 너희에게 갚아 주리니 너희는 먹되 풍족히 먹고 너희에게 놀라운 일을 행하신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 것이라 내 백성이 영원히 수치를 당하지 아니 하리로다.”
따라서 “이른 비와 늦은 비”는 오순절이나 20세기나 성령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오순절주의자들과 은사주의자들은 요엘서 2장 28절을 방언 은사가 두 번째로 부어졌다고 말하기 위한 근거로 사용할 수 없다. 첫째로, 요엘은 방언을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둘째로, 오순절 성령강림은 요엘의 예언에 대한 궁극적 성취가 아니었다.
토머스 에드거는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견해를 제시한다.
교회의 기적의 은사들이 다시 나타나거나 교회 시대가 거의 끝날 무렵에 신자들이 기적을 행할 것이라는 성경적 증거는 없다. 그러나 말세에 기적을 행하고 예언을 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는 거짓 선지자들이 있을 것이라는 증거는 충분히 많이 있다(참조. 마7:22-23; 24:11, 24; 살후2:9-12).
그래서 우리는 경계심을 늦추지 않는 것이 좋다.

He is a cross pendant.
He is engraved with a unique Number.
He will mail it out from Jerusalem.
He will be sent to your Side.
Emmanuel
Bible Verses About Welcoming ImmigrantsEmbracing the StrangerAs we journey through life, we often encounter individuals who are not of our nationa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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