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교육의 전도제자화 훈련을 통한 교회성장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에 너희는 생명을 위해 짐을 지고 예루살렘 성문으로 들어오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 서론
요즘 세미나에서나 특강에서 ‘교회교육 이대로 좋은가’에 대한 주제는 생소한 것이 아니다. 이제는 교회교육의 문제점을 망원경이 아니라 현미경을 놓고 분석하듯이 구체적으로 원인을 파악하고 분석하며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왜 교회교육은 갈수록 침체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가? 교회교육을 살리기 위해 불철주야 목숨을 걸고 현장에서 뛰는 사역자, 교육자들의 수고만큼 부흥의 불길이 지연되고 있는가? 여러 가지로 대안을 제시할 수 있겠지만, 그 중에 교회교육에서 전도제자화 훈련이 대안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1. 연구의 목적 및 범위
한국의 교회교육의 대안 중의 하나는 전도제자화 훈련이다. 그러면 왜 교회교육의 대안으로 전도제자화 훈련인가? 그 이유는 첫째 한국교회의 양적성장이 멈추고 수평이동만 하는 것은 개인전도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남한 인구의 25%가 그리스도인인데 사회의 영향력이 없는 것은 제자도의 부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도와 제자훈련을 통한 교회교육의 생명력을 불어넣어야 한다.
연구의 범위는 전도제자화 훈련을 하되, 청장년 중심으로 훈련을 제한한다. 본인은 그 동안 한국대학생선교회(C.C.C.)의 본부사역 중의 하나인 새생명훈련원(LNTC=New Life Training Center) 에서 전도제자화 훈련간사로 있었다. 본인이 사역했던 내용을 근거로 섬기던 교회(제일장로교회)의 사역에 적용해 보고자 한다.
2. 한국교회 제자훈련의 배경
지금은 제자훈련이 선교단체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교회에서 적용하는 보편적인 교육시스템으로 갖추어졌다. 선교단체에서 처음으로 도입해서 제자훈련을 캠퍼스에서 실시할때는 전통적인 교회에서는 교회론에 문제가 많다고 해서 색안경을 끼고 본 것이 사실이다. 기성교회가 그동안 감당하지 못한 영역을 감당하기 때문에 교회 밖에 또하나의 신앙적인 체제 즉 교회 밖의 운동(Outside Church Movement)이 구축된다는 두려움 때문에 교회는 선교단체를 늘 경계의 대상으로 삼아왔다. 이태웅, 『두란노목회자료큰백과 18권 복음전도와 선교』, 소논문 “교회와 선교단체, 뿌리와 줄기”. (서울: 두란노, 1997), p.759. 조이선교회역임, 한국해외선교회 선교훈련원 원장.
또한 경계의 이유 중의 하나는 60년대후반에서 70년대 후반까지 학생선교단체의 태동과 성장의 시기였고 온갖 시련을 통과해야 했던 고통의 시기였다. 그 시련 중의 하나는 제자훈련을 교회에 접목하면서부터 교회와 선교단체의 갈등이 증폭되기 시작한 것이다. 여러 가지 문제가 있겠지만, 선교단체는 기성교회에 대한 비판을 쏟아붓을 때, 전통적인 교회는 대체적으로 수용을 거부한 것이 사실이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제자훈련의 명목하에 자행되는 것은 만인제자장설을 외치면서 목회자와 평신도의 구별이 없애고, 평신도 지도력이 점점더 커지는 것을 우려해기 때문이다. 핸드릭 크래머는 그의 책 『평신도신학』에서 말하기를 평신도는 교회에서 아무 하는 것 없이 예배 출석만 잘하면 되고 개인적인 신앙생활만 하면 될 것이지 다른 소명은 없다고 지적했다. 핸드릭 크리머, 『평신도신학』, 유동식역.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8) 핸드릭크러머는 네델란드의 세계적 에큐메니칼 운동 지도자요 선교사이다. 그는 평신도운동은 성경에 근거하 본질에 속하는 문제이고, 평신도운동을 통한 교회혁신의 방향을 역설하고 있다.
사실 70년-80년대에 권위주의적인 사고로 교권을 휘둘릴 때 만인제자장설을 주장하는 것은 기성교회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사건이었다. 어찌되었든 기성교회의 편견과 비판에도 불구하고 해산의 고통을 인내하면서 제자훈련을 감당한 결과 지금은 잉태의 기쁨을 누리고 있다. 제자훈련은 한국의 전통적인 교회교육에 있어서 혁신을 일으켰고, 교육의 양질의 성장을 가져오는데 큰 힘을 실어 주었다.
II. 전도 및 제자훈련
1. 제자훈련의 필요성과 목적
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으로 태어나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지만 그가 그리스도의 제자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사람을 통한 훈련이 필요하다. 네이게이토 선교회의 윌터 헨릭슨이 쓴 유명한 책 『제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Disciples are made not born)』바로 이와 같은 그리스도의 제자에게 있어서 훈련의 필요성을 잘 표현하고 있다. 훈련받지 않은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어떤 형태로든지간에 훈련을 받지 않은 사람을 통해서는 하나님의 나라의 사역이 이루어지기가 어렵다. 그래서 교회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다 포용하는 공동체이면서 동시에 충성된 사람들을 훈련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이태웅, 『두란노목회자료큰백과 18권 복음전도와 선교』, 소논문 “교회와 선교단체, 뿌리와 줄기”. (서울: 두란노, 1997), p.759.
2. 제자훈련의 용어의 정의
1)제자의 어원적인 정의 김원태역, 『세계제자훈련협회, 완벽제자훈련시리즈 I』(서울: 베델성서간행사, 1987). pp. 319-320.
제자(disciple)라는 말은 여러 가지 뜻으로 사용되었다. 신약성경에 ‘제자’라는 말은 헬라어로 paideuo라는 말로서(아이들) 훈육하다, 훈련하다, 가르침을 받다, 배우게 하다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구약성경에서도 히브리어에 Yisser/musar는 ‘훈계하다’, ‘바로잡다’, ‘훈련하다’의 뜻을 가지고 있다(신 8: 5-6; 잠 4: 13-14)
오늘날의 ‘제자’란 실제적으로 그리스도인을 가리킨다. 마태복음 28:19-20에서는 제자는 그리스도에게 세례 받은 자이며, 그의 계명에 순종하는 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 교회는 제자도에 대해서 가르치지 않을려 하고 있다. 이것은 신자가 많으나 제자는 적다는 말로 해석할 수 있다.
2)훈련의 어원적인 정의
훈련은 헬라어로 ‘파이데이아’(Faiscia) (1)교훈, 훈육 (2)교육, 단련 (3)교정, 징벌의 뜻을 가지고 있다. 히브리어에서는 (1)부양하다 기르다 (1)보살피다. 먹이다 (3)아이를 돌보거나 보살피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세계제자훈련협회, 완벽제자훈련시리즈 I, 김원태 역( 서울: 베델성서간행사, 1987). p. 319-320.
3. 교회교육과 제자훈련 관계
교회교육과 제자훈련은 필수불가분의 관계이다. 기독교교육의 목적이 그리스도의 제자다운 제자를 양육한다는 측면에서 제자훈련은 교회교육의 지렛대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전 제자들에게 부탁하신 지상명령(至上命令)을 살펴보면 교회교육과 제자훈련의 관계를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니라”(마28:19-20).
이 구절은 제자훈련을 하는 사람들에게 아주 귀한 말씀이다. 여기서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제자삼으라”는명령을 하셨으므로 이 명령은 곧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신 “제자훈련의 사명”으로 생각된다.
또 한편 이 구절은 기독교교육을 전공하는 사람들에게도 중요한 말씀이다. 이 말씀은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명령을 곧 모든 기독교교사 “교육의 사명”으로 받아들인다. 각자가 나름대로 이 구절의 중요성을 강조하지만 이 둘은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 결국 주님이 명령하신 것은 제자로 삼아 가르치라는 것인데 이 말은 제자훈련과 교회교육을 동시에 명하신 것이다.
이에 사도바울은 교회교육과 제자훈련을 조화있게 사역을 펼친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골 1:28-29). 이 구절은 사도 바울의 사역의 특성을 보여 주고 있다. 여기서 기독교 교육을 전공하는 사람들은 교육의 내용, 목적, 방법, 교육에 있어서 교육자와 성령의 역할을 발견한다. 뿐만 아니라 제자훈련을 하는 사람들은 이 구절에서 제자훈련의 목적, 원리 등을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교회교육에 있어서 제자훈련은 그리스도의 장성한 믿음의 분량에 이르도록 도와주는 매개체인 것인다. 방선기, 『두란노목회자료큰백과 17권 교회교육과 제자훈련』소논문 “교육의 관점에서 본 제자훈련”(서울: 두란노, 1997), pp. 715-716. 방선기목사는 이랜드 사목이며, 직정사역연구소 소장임.
4. 한국교회 제자훈련의 문제점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제자훈련에 대한 편견과 선입관을 갖는 것을 볼 수 있다. 정성구 박사는 제자훈련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는데, 여기에다가 제자훈련에 대한 편견이 있음을 지적하고 싶다. 위의 책, 정성구, 소논문 “전통적인 목회구조에서 제자훈련을 본다” , pp. 796-797.
첫째, 제자훈련이 철저히 일대일의 제자화를 꾀한다고는 하나 실제 내용에 있어서는 핵심을 일으키듯 대량생산으로 확대하려는 욕심이 앞서고 있다느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마치 대중전도운동이 소수를 무시하고 숫자만을 강조하는 것과 비슷한 형국이 되어버린 셈이다. 물론 제자훈련의 결과로서 평신도를 깨우고 성경진리를 깨달음으로써 전도열을 고취시켜 부흥의 속도가 빨라진것도 사실이지만, 속마음에는 잃어비린 한 마리 양보다는 아흔 아홉을 예상하고 계산된 방법이라면 문제가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제자훈련이 양(量)에 목숨을 걸지 않고 질(質)에 전력을 쏟아붓는다. 무엇보다도 잃어버린 한 마리 양에 관심을 갖는다. 제자훈련을 잘못 이해하거나 적용하는 사람들이 교회성장의 하나의 수단을 목적화시키는 오류를 범하기 때문이다.
둘째, 제자훈련의 가장 큰 문제는 제자를 사유화(私有化)했다는 것이다. 즉 제자운동의 정신은 예수님의 제자를 만들어 그리스도를 닮은 제자를 양육하는 것인데 목회자의 전유물로 생각하고 있다. 이 문제 또한 제자훈련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다. 제자훈련은 철저히 목회자 중심이 아니라 그리스도 중심이다. 제자훈련이 목회자에게 관심과 애정을 모르려고 했을때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 온전히 그리스도에게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셋째, 목회자가 제자훈련의 일선에서 뛰게 될 때 그 그룹에 참여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소외그룹이 되기 쉬을 뿐 아니라 편애한다는 인상을 줄 수도 있다. 그러나 무슨일이든지 처음에는 비끄덕거리고 부작용이 있을 수 있다. 구더기 무서워서 장은 못담그겠는가? 예상될 장벽이 계층의 벽이라면 이 계층의 벽을 깨뜨리는 담대함이 있어야 된다.
넷째, 제자훈련받는 사람들이 비판적 인식에 눈뜨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비판적 인식이 두려워서 제자훈련을 중단할 수는 없으나 일단 자기 스스로 성경을 연구하기 시작하면 매사에 자기중심적 생각하고 분석해서 설교를 ‘아멘’으로 받는 순수성이 결여된다는 사실이다. 전통적인 교회의 목회자들은 성도들이 배우는 것에 대해서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것같다. 지식의 머리가 커진면 목회사역에 장애물이 생기기 때문에 억제의 수단으로 제자훈련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는 목회자도 있다. 어찌 평신도가 목회자의 목회의 도구인가? 모든 성도가 하나님앞에 평등하며 만인 제사장이 아닌가? 목회자도 평신도 모두 하나님의 동역자이므로 소유의식을 버리고 몸된 교회를 세워나아가는데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된다.
5. 교회교육의 대안으로서 제자훈련
1)예수님의 제자훈련
로버트 콜만은 그의 책『주님의 전도계획』에서 예수님의 제자훈련을 어떻게 하셨는가를 여덟가지로 제시하고 있다. 이 책의 내용을 근거로 제자훈련에있어서 예수님의 제자훈련 모델을 제시하고자 한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로버트 콜만, 『주님의 전도계획』, 황성철역. (서울: 생명의말씀사, 1992).
첫째, 사람들을 선택하셨다(마 4:19). 사람들이 그의 방법이었다. 주님의 관심은 군중을 이끌 프로그램에 있지 않았고, 그 군중이 따를 사람들에게 있었다(눅 6:13). 그의 선택은 배우기를 열망하는 사람들 가운데 잠재적인 가능성을 보신 것이다. 12제자는 세상의 기준에 의하면 참으로 “무식하고 무지”했지만(행 4:13), 그래도 배움의 자세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비록 판단에 실수가 많았고 영적인 일들을 이해하는 데에 더디기는 했지만, 그들은 정직한 사람들이었으며, 그들이 필요를 기꺼이 고백하는 사람들이었다. 주님은 많은 군중들이 따라다녔지만, 소수에게 집중하셨다. 예수님은 문자 그대로 자신의 전사역을 그들에게 걸으셨다. 세상은 그를 향하여 무관심할 수 있으나 그래도 그의 전략을 패퇴(敗頹) 시킬 수 없었다. 따라서 잠재적 가능성인 평신도를 훈련시켜서 그리스도에게 헌신된 소수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위하여 세상을 흔들어 놓은 것이다. 승리는 결코 많은 군중들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는다.
둘째, 예수님은 선택된 사람들과 동거(同居)하셨다(마 28:20). 그들과 함께 공생애 기간을 보내셨다. 그가 그 자신의 학교이며 교육 과정이었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이 다가올수록 선택된 제자들에게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그들을 훈련하는데 전력투구 하였다. 여러 가지의 사건을 통해서 원리들을 가르치시고 참된 진리를 깨닫게 하셨다. 오늘날의 제자훈련이 동거하면서 할수는 없겠지만, 선택된 사람들을 최대한의 시간을 들여서 그들을 훈련하는데 집중해야 된다. 해산의 수고 없이 열매를 거둘려고 하는 것은 씨도 뿌리지 않고 추수를 할려고 하는 어리석음과 같다. 그러므로 헌신된 사람들의 필요에 민감하고(영적, 육체적, 정신적 등등) 삶을 통하여 모범을 보여줌으로써 그리스도를 따르는 기쁨을 보여주어야 한다.
셋째, 헌신(순종)을 요구하셨다(마 11:29). 예수님은 그가 함께 한 사람들이 그를 순종할 것을 기대하셨다. 그들이 영리해야 된다는 요구도 없었다. 단지 충성스럽기만 하면 되었다. 이 충성은 그들이 세상에 알려지는 분별의 표시가 되었다. 그들은 그의 “제자들”이라고 불리었는데, 그 의미는 주님의 “생도들” 내지 “학생들” 이다. 상당한 기간이 지나서 그들은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어지기 시작했는데(행 11:26), 그것은 필연적이었다. 왜냐하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순종의 제자들이 지도자들의 인격을 어김없이 닮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이와같이 충성스러운 사람을 보는 것이 드물다. 그 충성스러움이 목회자의 전유물이 아니라 하나님앞에서의 충성스러움이 바로 그것이다.
넷째, 그는 자신을 분여(分與)해 주셨다(요 3:16). 그의 생애는 나누어 주시는-아버지께서 그에게 주신 것을 주시는 그런 생애였다(요 15:15; 17:4, 8, 14). 그는 그의 모든 것-아무 것도 남김없이 심지어는 그 자신의 생명까지도 주셨다. 사랑은 그와 같은 것이다. 사랑은 항상 사랑 자체를 준다. 사랑을 나누어 주지 않을 때 이미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이 생명을 받았으므로 불신자들에게 이 생명을 나누는 일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다섯째, 그는 제자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가 시범을 주셨다(요 13:15).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이 하나님과 그리고 사람과 함께 사는 그의 방법을 배우도록 하셨다. 기도의 삶을 가르쳐주셨고, 낮아지심을 몸소 행함으로 실천하셨으며, 소외되고 억눌린 자를 돌아보셨다. 따라서 우리의 제자들은 우리의 삶을 닮아가므로 우리의 삶에 하나님앞에 붙들림바되며 제자들도 우리와 같은 삶을 살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하며, 생활방식을 전수할 수 있어야 한다.
여섯째, 그는 제자들에게 사역을 위임(委任)하셨다(눅 9: 1-2). 예수님은 항상 그의 사역에서 제자들이 그의 일을 인계받아서 구 속의 복음을 가지고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는 그 때를 위하여 조금씩 준비하셨다. 이 계획은 그들이 그와 행동하면서 점진적으로 명확하게 되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둘씩 둘씩 짝지어 보내시고(막 6:7), 70인을 파송하기도 하셨다. 그럴때마다 주님은 지시사항을 전달하시고 그들에게 위임을 하셨다.
일곱째, 그는 점검을 계속하셨다(막 8:17). 예수님은 제자들이 전도 여행을 마친 뒤에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보고도 들으며 사역의 축복을 그들과 함께 나누는 것을 습관으로 삼으셨다. 열 두 제자가 파송되었다 돌아왔을 때, 그들이 “예수께 모여” “자기들이 행한 것”을 고했던 것이다(막 6: 30). 이러한 모임은 사전에 계획되었으며, 따라서 제자들의 첫 번 단독 여행은 그들이 주님으로부터 받은 훈련을 계속하는 과정중 현장 실습에 불과한 것이었다. 전도여행은 한 번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반복적으로 적용할 수 있도록 하셨다.
여덞째, 그는 제자들이 재생산할 것을 기대하셨다(요 15:16). 예수님은 제자들이 세상에서 볼러낸 교회 안에서 그리고 교회를 통해서 그의 형상을 생산하게 하였다. 성령 안에서의 그의 사역은 제자들의 인생 안에서 여러 배로 재생산할 것을 요구하셨다. 그리스도의 사역은 재생산을 통해서 지상명령 성취가 전략적으로 이루어지기를 기대하신 것이다. 이 전략에 의해서라면 세계 복음화는 제자들의 충성과 시간의 문제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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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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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한국의 교회교육의 대안 중의 하나는 전도제자화 훈련이라고 언급한바 있다. 그러면 ‘왜 교회교육의 대안으로 전도제자화 훈련인가’라고 했을때 그 이유는 첫째 한국교회의 양적성장이 멈추고 수평이동만 하는 것은 개인전도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남한 인구의 25%가 그리스도인인데 사회의 영향력이 없는 것은 제자도의 부재이기 때문이라고 제시했다. 따라서 전도와 제자훈련을 통한 교회교육의 생명력을 불어 넣어야 한다.
지금은 영적인 대 추수기이므로 전도의 비상사태를 선포해야 한다. 따라서 훈련된 그리스도인이 절실히 필요한 때이다. 왜냐하면 훈련된 제자만이 제자 낳는 제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제자는 결코 태어나지 않는다. 훈련되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의 불신세력을 향한 영향력은 극히 미약한 실정이다. 인구 증가율, 타종교의 확장율에 비해 그리스도인의 영향력은 너무나 미약한게 사실이다. 그러나 이대로 무너질 수 없다. 이대로 주저앉을 수 없다. 복음의 횃불을 높이들고 세상을 향해 나아가야 된다.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의 영광이 온 세상에 가득할 때까지 복음의 깃발을 높이들고 전진해야 할 것이다.
교회교육을 통한 지역 교회가 지역사회를 복음화시키기 위해서는 전도제자화 훈련을 통해서 잠재적인 가능성이 있는 평신도를 훈련시키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전략중의 하나이다. 이 전략의 목적은 충성스러운 평신도를 전도▪제자화시켜 지역과 계층 그리고 직장복음화를 가속화시켜 지상 명령을 돕는 것이 목적이다. 그 적용으로 제일장로교회에서 새생명훈련원을 접목함으로써 교회의 부흥에 기폭제가 되며, 잠자는 평신도를 깨워 역동적인 하나님의 나라가 공동체와 삶의 전 영역에 이루어지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작년에 교회성장의 혁신적인 보고서가 나왓다. 그것은 건강한 교회에 꼭 필요한 여덟가지 질적 특성을 위한 지침서이다. 전세계 성장하는 30대 교회를 자료로 분석한 결과 질(質)은 양(量)을 좌우하는 열쇠(Key)가 된다는 것이다. 크리스티안A. 슈바르츠의 자연적인 교회성장 교회 성장(Natural Church Delvelopment)의 보고서는 훈련된 평신도의 중요성을 임상학적으로 잘 표현해준 데이터라고 볼 수 있다. 여기에서 교회의 성장 환경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 ‘변화된 한 사람’이 성장 환경이라는 것이다. ‘변화된 한 사람’은 교회의 체질을 바꾸고 생명의 번식처럼 역동적인 공동체를 형성하는 도화선이 되는 것이다. 크리스티안A. 슈바르츠, 『자연적 교회성장』.(서울:도서출판 NCD), 1999.
유명한 사회학자 로버트 벨라는 한 사회 혹은 집단을 변혁시키는 것은 2%의 헌신된 사람들만 있으면 가능하다고 말한다. 기독교야말로 그 시초부터 소수의 영적 운동가들로 시작하여 주변 공동체(사회와 국가, 세계)를 변혁시킨 역사적인 실례일 것이다. 역사학자 아놀드토인비는 바울에 대해서 평가하기를 ‘오늘의 바울을 실고 가는 배는 내일의 구라파(유럽)를 싣고 가는 배였다’라고 극찬하고 있다.
따라서 교회교육에 있어서 제자훈련의 핵은 훈련된 그리스도인이다. 이들이 교회교육의 못자리판이다. 그러므로 훈련된 그리스도인들이 교회 성장의 성장환경 즉 ‘변화된 한 사람’으로 성장할 경우 교회교육의 생명력을 불어넣을 수 있고, 거기에따른 영적인 파장은 공동체와 지역사회를 변화시키는 주체로 설 것이다.
“제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지는 것이다.”
- 월터 핸릭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