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의 방언은 어떤 종류의 방언인가?
그러면 우리는 은사주의적 체험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수많은 은사주의자는 방언이 자신들의 삶을 윤택하게 했다고 증언한다. 예를 들어 보자
“방언이 무슨 쓸모가 있는가?” 나는 이 질문에 단지 이렇게 대답할 수 있을 뿐이다. “파랑새가 무슨 쓸모가 있는가? 석양이 무슨 쓸모가 있는가?” 한 마디로 순전하고 완전한 감정의 고조, 말할 수 없는 기쁨, 그와 더불어 건강과 평안과 안식, 그리고 부담과 긴장으로부터의 해방이 있다.이런 예도 있다. 방언으로 기도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20년쯤 젊어진 기분이었고 사람들도 내게 그렇게 보인다고 했다……나는 강건해지고 있고 기쁨과 용기와 평안과 하나님의 임재 의식을 느끼고 있다. 그리고 나는 공교롭게도 이것을 필요로 하는 연약한 성품의 소유자다.
이런 간증들은 방언에 대한 강력한 상품광고가 되고 있다. 방언이 정말로 건강과 행복을 줄 수 있고 사람을 더 젊어 보이게 할 수 있다면, 방언의 잠재적 시장은 무한하다.
반면 그런 주장들을 뒷받침할 증거는 미심쩍다. 오늘날 방언을 말하는 이들이 방언을 하지 않는 신자들보다 그리스도를 위해 더 거룩하고 더 일관된 삶을 산다고 그 누구 진지하게 주장할 수 있을까? 최근에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나 파산에 이른 삶을 산 것으로 드러난 그 모든 은사주의 지도자는 또 어떤가? 은사주의 교회들이 전반적으로 은사를 옹호하지 않고 성경을 믿는 교회들보다 영적으로 더 강하고 더 튼튼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가 있는가? 실제로는 진정으로 영적 성장과 성경적 이해에 초점을 맞추는 은사주의 교회를 발견하려면 한참을 열심히 찾아봐야 한다. 만일 은사주의 운동이 더 영적인 그리스도인이나 신학적으로 더 나은 지식을 가진 신자를 배출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결국 어떤 열매를 맺고 있는가? 방언 운동에서 빠져 나오기 전까지는 진정한 평안, 만족, 능력, 기쁨을 체험하지 못했다고 증언하는, 이전에 방언을 하던 만은 사람은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왜 은사 체험은 처음의 황홀한 체험에서 나오는 감정적 흥분을 되풀이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면서 결국 환멸로 끝나는 경우가 그토록 많은가?
틀림없이 방언을 하는 많은 사람은 방언이 어느 정도 유익하게 느껴진다고 말한다. 그러나 위에서 인용한 증언들의 경우와 같이 대게 그들은 방언이 그들을 더 나은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는 데 어떻게 도움이 되는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방언이 그들을 어떻게 느끼거나 보이게 하는 지를 말한다. 하지만 겉모습이나 감정이 나아지는 것은 전혀 신약적인 은사의 결과가 아니었다.
오순절주의자들과 은사주의자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이 성경적인 방언의 은사라는 자신들의 주장을 실증하지 못한다는 점에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아는 한 오순절주의자나 은사주의자가 실제로 확인 가능하고 통역 가능한 언어로 말을 한 확실히 입증된 사례는 없다. 언어학자 윌리엄 새머린은 이렇게 썼다. “소위 이종언어[실제언어]발화 현상의 사례들이 실재한다면 은사주의들의 주장은 극히 의심스럽다. 연구자는 그런 주장을 검증하려는 시도를 할 때마다 이야기가 크게 왜곡되었더나 소위 ‘증인들’이 언어학적 관점에서 볼 때 자격이 없거나 믿을 만하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은사주의 옹호자들은 이런 현상들이 신약 성경의 은사들과 똑같은 현상이라는 자신들의 억측 외에는 아무런 증거도 제시하지 못했다.”
그러면 그런 현상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여러 가지 가능성이 있다. 첫째, 방언은 사탄이나 귀신이 일으키는 현상일 수도 있다. 은사주의 운동을 비판하는 일부 사람들은 모든 방언을 마귀의 역사로 치부하려고 한다. 나는 그럴 생각까지는 없지만 사탄이 성령의 은사로 통하는 형상들의 배후 세력일 경우는 비일비재하다고 확신한다. 결국 사탄은 모든 거짓 종교의 배후에 있으며(고전10:20) 진리를 흉내 내는 일에는 전문가다(고후11:12-15). 오늘날 교회 안에서 많은 사람이 사탄의 거짓말에 쉽게 속는다.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딤전4:1).
과거에 방언을 말했던 벤 버드는 자신의 비상한 능력 중에 일부가 ‘심령적이고 아마도 사탄적인 능력’이었다고 믿는다.
나는 방언으로 기도하는 동안 눈을 감고 교인들을 위하여 기도하며 여러 번 심방을 다녀 보았다. 그럴 때 나는 눈을 뜨고 있는 것처럼 행동할 수 있었다. 나는 주위에서의 일어나는 모든 일을 인식했다. 그러나 내 눈은 감겨 있었다. 나는 마치 묘하면서도 무척 생생한 꿈을 꾸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몸은 거의 잠들었지만 정신은 말똥말똥했다. 그러나 모든 은사가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꼭 기억하라.
무아지경의 언어는 거짓 종교에서 일반적인 현상이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최신판에는 이방 종교의 숭배 의식에서 나타나는 방언 현상에 대한 유용한 글이 실려 있다. 이 글은 아프리카 동부에 귀신에 사로잡혀 스와힐리어나 영어로 유창하게 말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준다. 그런데 그들은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이 두 언어를 알아듣지도 못한다고 한다. 아프리카의 통가(Thonga)족은 줄루(Zulu)어를 전혀 모르는데도 그들 사이에서 귀신을 쫓아 낼 때 보통 줄루어로 노래를 부른다. 귀신을 쫓아내는 사람은 ‘방언의 기적’으로 줄루어를 말할 수 있게 된다고 한다.
오늘날 무아지경의 언어는 회교도, 에스키모, 티벳의 승려들 사이에서도 발견된다. 버지니아 대학교 의과 대학 초심리학 연구소에서는 주술을 행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방언 현상의 사례들을 보고하고 있다.
이러한 사례들은 이교도와 이단과 주술 숭배자들 사이에서 오늘까지 지속되고 있는 장구한 방언 전통의 겨우 몇 가지 예에 불과하다. 방언이 사탄의 영향을 받아 나타날 가능성은 매우 심각한 문제이며 은사주의자들도 신지한 숙고 없이 그냥 무시해선 안 될 문제이다.
또 다른 가능성은 방언이 학습된 행동일 가능성이다. 오늘날의 대부분의 방언은 이 범주에 들어간다고 나는 확신한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찰스 헌터와 프랜시스 헌터 같은 은사주의 지도자들은 사람들에게 방언의 은사를 받는 법에 대해 가르치는 세미나를 연다. 그런 방언을 어떻게 학습된 행동이 아닌 것으로 간주할 수 있는가? 헌터 부부는 사람들을 소리를 지르며 기도하고 찬양하게 함으로써 그들에게 감정적인 흥분을 일으킨다. 헌터 부부는 자극을 고조시키기 위해 표본이 되는 몇 마디 음절을 제시한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그 ‘우스운 몇 마디소리’를 따라하도록 부추긴다. 그러나 자연발생적인 은사는 결코 그런 식으로 역사하지 않는다. 더구나 그런 식의 방언은 ‘초자연적’이라는 말의 의미를 아무리 잡아 늘려도 결코 ‘초자연적’체험은 아니다. 그것은 기적이 아니다. 거의 누구나 배울 수 있는 것이다. 방언을 말하는 수많은 사람이 똑같은 말과 소리를 사용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들은 모두 본질적으로 똑같은 방법으로 말한다. 그런 방언은 충분히 들어본 사람이면 누구나 따라할 수 있다.
존 킬달(John Kildahl)은 『방언의 심리학』(The Psychology of Speaking in Tongues)이라는 저서에서 여러 증거에 대한 많은 연구 끝에 방언은 학습된 능력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임상 심리학자인 킬달과 그의 동료인 정신과 의사 폴 퀠벤(Paul Qualben)은 미국 루터 교회(American Lutheran Church)와 미국 국립정신보건원(National Institute of Mental Health)의 의뢰를 받아 방언에 대한 장기적인 연구를 수행했다. 연구를 모두 마친 뒤 그들은 방언이 ‘학습된 현상’에 불과하다는 굳은 확신에 이르렀다.
오타와 칼튼 대학(Carleton University)에서 수행된 보다 최근의 연구는 최소한의 교육과 시범만 있으면 거의 누구나 방언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한 번도 방언으로 말해 본 적 없고 다른 사람이 방언하는 소리를 들어본 적도 없는 60명의 피 실험자가 실험에 참여했다. 연구자들은 방언을 담은 오디오 테이프와 비디오 테이프를 보여주며 두 차례 짧게 방언 훈련을 시킨 뒤에 모든 피실험자에게 30초 동안 방언을 말해 볼 것을 요청했다. 그러자 실험에 참여한 모든 피 실험자가 테스트 시간 30초 내내 무난히 방언을 했고 그 중에서 70퍼센트는 방언을 유창하게 할 수 있었다.
과거에 방언을 했었던 우리 교회의 한 사람은 내게 이렇게 털어놓았다. “전 방언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한 번 보여드리죠.” 그러더니 그는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내가 그에게서 들은 소리는 다른 사람들에게서 들었던 다른 방언들과 똑같았다. 그런데도 은사주의자는 각각 자신만의 ‘개인적인’기도의 언어를 받게 되어 있다는 주장이 끊임없이 나온다.
나는 새 신자에게 방언을 가르친다는 어떤 열성적인 은사주의자에 대한 소문을 들은 적이 있다. 갓 태어난 그리스도인이 방언의 은사를 받도록 도우려고 그가 그토록 부지런히 애를 쓸 필요를 느꼈다는 사실이 내게는 참으로 상식 밖의 일로 여겨졌다. 왜 우리가 성령께 은사를 받는 법을 배워야 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사주의운동에는 방언하는 범을 기꺼이 ‘가르쳐줄’ 사람들이 가득하다.
이 책을 쓰기 위해 자료를 찾아보던 도중에 나는 어느 은수주의적인 텔레비전 토크쇼를 보게 되었다. 한 사람이 자신에게 영적인 문제가 있다고 고백하나 또 다른 은사주의자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매일 방언을 사용했습니까? 매일 당신의 언어로 말했습니까?”
“아니요, 사실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 사람은 그렇게 고백했다.
그러자 상대편이 이렇게 대답했다. “그게 당신의 문제입니다. 매일 방언을 해야 합니다. 어떻게 시작하든 상관없어요. 그냥 바로 시작하세요. 일단 방언을 시작하고 나면 성령님이 계속 방언을 하게 해 주실 겁니다.”
이 대화는 다음 몇 가지 점을 시사한다. 첫째로 만일 성령이 누군가에게 방언의 은사를 주셨다면 왜 그 사람은 방언을 시작하려고 애써야 하는가?
은사주의 운동 안에서는 다른 사람들이 가진 것과 똑같은 은사와 능력을 누리고자 행하고 가져야 한다는 엄청난 집단적 압력이 존재한다. 영적인 문제에 대한 ‘해답’은 방언이다 은사주의자들에게 왜 방언이 그들 사이의 최대공약수이자 영성과 정통성과 영적 성숙의 보편적 기준이 되었는지를 이해하기란 어렵지 않다. 그러나 그런 기준은 잘못된 기준이다.
킬달과 퀠벤은 이렇게 썼다.
우리의 연구는 방언을 말하는 사람들의 주관적으로 실재하는 유익이 소리를 내는 실제적 체험보다 지도자와 집단 내 다른 구성원들에 의한 인정에 의존한다는 결정적인 증거를 제시했다. 방언을 하는 사람이 그 집단의 지도자와의 관계를 끊거나 그 집단에 의해 왕따를 당했다는 느낌을 받게 되면 방언 체험도 더 이상 그렇게 주관적으로 의미 있는 것이 되지 못했다.
그들은 또한 그들의 연구 대상이 된 사람들 사이에서 환멸감이 만연해 있었다고 보고했다. 방언을 말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는 행동이 학습된 행동이라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거기에는 어떤 초자연적인 요소도 존재하지 않았다. 곧 그들은 자신들이 늘 겪어 왔던 것과 똑같은 문제들과 골칫거리에 직면해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칼달과 퀠벤에 따르면 방언을 하기 시작할 때 더 진지한 자세로 임한 사람일수록 방언을 중단할 때 더 큰 환멸을 느꼈다.
방언이 발생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가능성은 이미 앞에서 제시한 바 있다. 방언은 심리적으로 유도될 수도 있다. 방언의 가장 기묘한 사례들 가운데 일부는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심리적 이상 현상으로 설명된다. 방언을 말하는 사람은 운동 근육 자동증(motor automatism)상태에 들어가는데 이는 임상적으로 의식적 환경으로부터의 극단적인 내적 분리로 설명된다. 운동 근육 자동증은 거의 모든 수의근(voluntary muscle)을 의식적 통제에서 분리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록 콘서트에 열광하는 어린 십대 소녀들을 보여주는 뉴스 방송을 본 적이 있는가? 흥분과 감격, 열정과 굉음 속에서 그들은 말 그대로 자신들의 성대와 근육에 대한 의지적 통제를 포기한다. 그리고 발작적으로 바닥에 쓰러진다.
대부분의 사람은 한 번쯤 약간의 소외감이나 우울함이나 현기증을 느끼는 순간을 체험한다. 적절한 상황만 조성되면 특히 대단이 격렬한 감정이 수반되는 상황에서, 사람은 더 이상 의식적으로 통제가 안 되는 상태에 쉽게 빠질 수 있다. 그 결과 그런 상태에서 방언이 나올 수도 있다.
대부분의 사람이 방언 체험의 황홀경을 느끼는 상태는 최면 상태와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킬달과 퀠벤은 자신들의 연구를 근거로 이렇게 진술했다. “최면을 걸 수 있는 상태는 방언 체험의 필수 조건을 구성한다. 사람이 최면을 걸 수 있는 상태가 되면 적절한 조건 아래서는 방언도 말할 수 있다.
방언을 말하는 이들에 대한 광범위한 연구 끝에 킬달과 퀠벤은 복종적이고 타인의 영향을 받으며 한 지도자에게 의존적인 사람들이 방언을 말할 확률이 가장 높다고 결론지었다. 윌리엄 새머린도 다음과 같이 같은 말로 그들의 견해에 동의했다. “특정한 부류의 사람들은 방언을 사용하는 종교에 매력을 느낀다.” 분명히 방언을 말하는 모든 사람이 이 범주에 들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은 아니어도 많은 사람이 이 범주에 속한다.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은사주의 프로그램을 거의 아무것이 나 보라. 청중들은 강단에서 나오는 어떤 말에도, 심지어 낯설고 이상한 가르침에도 고개를 끄덕이며 아멘으로 화답한다. 그들은 암시의 능력에 쉽게 복종하고 무슨 암시를 받았든지 그대로 행동에 옮긴다. 감정이 고조되고 압력이 올라가면 어떤 일이든 벌어질 수 있다.
방언을 말하는 각 사람을 분석해서 그 사람이 하는 행동의 분명한 원인을 알아 낼 방법은 없다. 그러나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대로 현대의 은사주의자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방언에 대한 가능한 설명 방법은 많이 있다. 기독교 심리학(Christian Association for Psychological Studies) 회원인 맨젤 패티슨(E. Mansell Pattision)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분석 결과는 방언을 초래하는 매우 자연스런 기제를 입증하는 것이다. 심리적 현상으로서의 방언은 만들어 내기도 쉽고 이해하기도 쉽니다.
나는 신경과 및 정신과 환자들에 대한 임상 체험을 통해 나 자신의 소견을 덧붙일 수 있다. 뇌졸중, 뇌종양 등에서 비롯되는 특정 종류의 뇌질환의 경우 환자는 자동적이고 물리적인 언어 반복의 패턴 속에서 혼란에 빠지는 상태가 된다. 이런 ‘실어증’ 환자들을 연구해 보면 방언에서 발생하는 현상과 똑같은 언어의 해체 현상을 볼 수 있다. 이와 유사한 언어 해체 현상은 정신분열증적인 사고 및 언어 패턴에서도 나타나는데 이는 구조적으로 방언과 동일한 것이다. 이러한 자료는 최 손상에 의해서든, 정신병에 의해서든, 또는 의지적 통제에 대한 수동적 포기에 의해서든 의식적이고 의도적인 언어 통제가 방해를 받을 때마다 똑 같은 언어적 상동증(무의미한 말이나 운동, 행위를 지속적으로 반복하는 증상-역주)이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앞에서 살펴 본 것처럼 방언을 받으려는 사람들은 노골적으로 ‘의지적 통제에 대한 수동적 포기’ 상태로 들어가도록 교육을 받을 때가 많다. 그들은 긴장을 풀고 자기 목소리에 대한 통제를 포기하라는 말을 듣는다. 그리고 몇 마디 음절을 그냥 되는대로 되풀이하라는 조언을 받는다. 그들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선 안된다.
메스터스 신학교의 전 학장 찰스 스미스(Charles Smith)는 자신의 저서에서 현대의 방언 현상에 대한 가능한 설명 방법을 제시하는 데 한 장 전체를 할애했다. 그는 방언이 ‘운동 근육 자동증’, ‘무아지경’, ‘최면’, ‘정신적인 카타르시스’, ‘집단적 심리구조’, ‘기억자극’ 등을 통해 생겨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요점은, 방언을 설명할 수 있는 방식은 여러 가지라는 것이다. 우리는 1세기 고린도 교회에서 그랬던 것처럼 오늘 날에도 방언은 성령과 관계 없이 여러 거짓된 형태로 존재한다는 결론을 피할 수 없다.
방언은 왜 그토록 인기가 있는가?
오늘날에는 모든 교파의 그리스도인이 계속해서 방언을 말하고 새로운 사람들이 매일 방언 체험을 찾는다. 은사주의적 설교자들과 저술가들은 이것이 성령의 역사이며 말세에 교회 위에 임한 광범위하고 새로운 능력의 폭발이라고 주장한다.
과연 그럴까? 오늘날의 방언은 성경적인 방언이 아니다. 방언을 하는 사람들은 성경에 묘사된 방언의 은사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많은 이가 방언을 그토록 열렬히 추구하는가? 한 가지 기본적인 원인은 영적인 굶주림이다. 사람들은 방언이 놀라운 영적 체험을 할 수 있는 한 방법이라는 말을 듣는다. 사람들은 방언을 하지 않으면 무언가를 놓치게 될까봐 두려워한다. 그들은 ‘더 많은 것’을 원한다.
또한 많은 사람은 영적으로 자신을 표현하는데 굶주려 있다. 그들은 오랫동안 교회에 다녔지만 진정으로 교회에 소속감은 느끼지는 못했다. 그들은 특별히 영적이거나 거룩한 사람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그리고 그들은 방언을 말하는 이들이 거룩하고 영적인 사람으로 여겨진다는 말을 듣기 때문에 방언을 시도한다.
방언이 확산되는 또 다른 기본적인 원인은 다른 사람과의 인정과 안도감에 대한 욕구이다. 사람들은 ‘집단 안에’소속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이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는 못 가진 사람들 사이에 포함된다는 생각만 해도 인상을 찌푸린다. 어떤 이들에게는 은사주의 운동 안에 포함되는 것이 대단히 만족스런 일이다. 그것은 “나는 은사주의자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일종의 자아실현이다. 그것은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중요한 존재 같고 무엇인가에 속해 있는 것 같고 다른 사람들이 갖지 못한 무엇인가를 갖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해 준다.
또 다른 설명은, 은사주의 운동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속화되고 기계화 되고 학문적이고 차갑고 무관심한 사회에 대한 반작용이라는 것이다. 방언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초자연적인 세계와 직접적으로 접촉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여기에는 그들이 체험할 수 있는 구체적인 무엇인가가 있다. 그것은 무미건조하거나 학문적이지 않으며 실제적으로 느껴진다!
아마도 방언이 오늘날 이렇게 엄청난 힘으로 폭발한 핵심적인 원인은, 너무나 많은 교회에 만연해 있는 차갑고 생기 없는 기독교에 대한 대안의 필요성일 것이다. 은사주의 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움직임과 흥분과 온기와 사랑을 찾고 있는 이들일 경우가 많다. 그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의 삶에 지금 당장 이곳에 실제로 역사하신다고 믿기를 원한다. 죽은 정통신앙은 결코 그들을 만족시킬 수 없다. 바로 그 때문에 많은 사람은 은사주의 운동에서 만족을 찾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은사주의 및 오순절 성도들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다 우리는 그들의 구원관에 대해서는 우려하지만 그들이 성경을 믿고 성경을 권위 있는 책으로 제시하는 데 대해 감사할 수 있다. 또한 우리는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 그분의 희생적인 죽으심과 육체적 부활, 행위가 아닌 믿음에 의한 구원, 그리스도께 순종하며 살아야 할 필요성을 믿으며 뜨겁게 이웃을 사랑하며 열심히 믿음을 선포하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다.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할 지도 모른다. “왜 그들을 비판하십니까?” 우리가 그들을 비판하는 이유는 우리의 형제 자매가 진리 안에서 행하고 있는지에 관심을 갖는 것이 성경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에게는 그덧이 별로 애정 어린 행동으로 보이지 않겠지만, 성경은 우리가 “사랑 가운데 진리를 말”해야 한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엡4:15, 쉬운성경). 참된 사랑은 진리에 따라야 한다.

He is a cross pendant.
He is engraved with a unique Number.
He will mail it out from Jerusalem.
He will be sent to your Side.
Emmanuel
Bible Verses About Welcoming ImmigrantsEmbracing the StrangerAs we journey through life, we often encounter individuals who are not of our nationa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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