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언의 은사는 오늘날에도 유효한가?
존 맥아더
성경적인 방언의 은사
방언은 성경의 세책인 마가복음(16:17), 사도행전(2, 10, 19장), 고린도전서(12-14장)에 언급되어 있다. 이 책의 8장에서(무질서한 은사주의, 부흥과개혁사) 우리는 사도행전의 본문들을 살펴보면서 사도행전은 일차적으로 역사적인 이야기이며 사도행전이 이야기하는 비상하고 기적적인 사건들은 교회 시대 전체의 규범적 패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했다. 또한 논란이 되고 있는 마가복음 16장 17절 본문은 단순히 방언을 하나의 사도적 표적으로 언급한다.(4장을보라.) 따라서 교회에서 방언의 역할에 대해 말해 주는 유일한 성경본문은 고린도전서 12-14장이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방언의 은사를 남용하는 것을 꾸짖기 위해 이 본문을 기록했다는 사실에 주목하라. 바울이 말한 대부분의 내용은 방언의 사용을 규제하는 것이었다.
고린도 전서 12장에서 바울은 은사는 어떻게 임하며 하나님은 교회 안에서 어떻게 은사를 정하셨는가 하는 문제 등 영적인 은사에 대해 일반적으로 논했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방언과 방언통역 은사의 올바른 사용에 대한 지침을 제시했다. 이 두 장의 가운데 위치한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바울은 은사를 사용하는 올바른 동기인 사랑에 대해 논했다. 보통 문맥과 동떨어진 채 다루어지는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의 송가라고만 일컬어져 왔다. 이 장은 부인할 수 없을 만큼 최상의문학적 성과이며 참된 사랑이라는 주제를 심오하고 아름답게 다루고 있다. 그러나 이 장은 무엇보다 방언의 질적 저하에 대한 바울의 논의에서 중요한 핵심이라는 점을 기억하는 것이 유익하다.
고린도전서 13장 1-3절에서 바울은 사랑의 탁월성을 주장한다. 1절은 기적의 언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분명히 진술하고 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성령의 은사를 이기적으로 사랑 없이 사용하고 있다고 책망하고 있었다. 고린도 교인들은 아가페(agape)사랑의 특징을 이루는 자기희생적 관심으로 서로를 섬기는 일보다는 자기를 높이거나 황홀한 체험을 즐기는 일에 더 관심이 많았다. 바울은 이 장을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라는 말로 시작한다. “방언(tongues)”이라는 말은 글로싸(glossa)라는 헬라어에서 나온 말이다. 이 말은 혀를 뜻하는 영어 단어 ‘텅(tongue)'처럼 신체 기관을 지칭할 수도 있고 언어를 지칭할 수도 있다. 바울도 개인적으로 방언을 말했다는 점에 주목하라.(고전14:18). 바울은 방언 자체를 비난한 것이 아니다. 다만 방언의 은사가 하나님이 의도한 방식 외에 다른 방식으로 사용되면 그것은 유치원 교실에서 리듬 악기를 합주하는 소리처럼 잡음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방언은 하늘의 언어인가?
바울이 말한 “천사의 말”이란 무슨 뜻인가? 많은 사람은 바울이 방언의 은사에 일종의 천사적인 언어 내지 하늘의 언어가 포함된다는 주장을 했다고 믿는다. 실제로 대부분의 은사주의자는 방언의 은사를 개인적인 기도의 언어, 하나님만이 아시는 하늘의 언어, 천상의 말, 또는 일종의 초자연적인 언어라고 믿는다. 그러나 본문 자체에서 그런 견해를 뒷받침할 근거는 없다. 바울은 뒤에 이어지는 구절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 하나의 가정적 상황을 설정하면서 모든 비밀과 지식을 알고 (바울조차 말 그대로 그런 주장을 할 수는 없었다.) 모든 소유를 가난한 자들에게 주며 자기 몸까지 불사르도록 내어주는 문제에 대해 말한다. 바울은 이론적으로 말해서 그 모든 것이 사실일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고 주장한다. 사랑의 필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바울은 예를 극단적 한계까지 확장하려 했다.
더구나 성경에는 천사들이 하늘의 언어를 사용한다는 증거가 없다. 천사들은 성경에 나타날 때마다 인간이 쓰는 보통의 언어로 의사소통한다.(예컨대, 눅1:11-20, 26-37; 2:8-14.)
성경 어디에서도 방언의 은사가 인간의 언어와는 다른 것이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또한 고린도전서 12-14장에 묘사된 진짜 방언이 실질적으로 오순절에 임한, 사도행전 2장에 묘사된 기적의 언어와 다르다는 어떤 암시도 없다. 두 군데 모두에 나오는 헬라어는 글로싸다. 사도행전에서 제자들이 알려진 언어로 말을 했다는 점이 분명하다. 그 때 예루살렘에 있던 안 믿는 유대인들은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했다(2:6). 누가는 계속해서 제자들이 말한 여러 방언이 속한 약 열 다섯 개의 서로 다른 나라와 지역을 열거한다(8-11절).
더욱 사투리를 뜻하는 영어 단어 ‘다이얼렉트(dialect)'의 어원인 헬라어 디알렉토스(dialektos)도 사도행전 2장 6,8절에서 언어를 지칭하는 말로 사용된다. 오순절에 성령 강림을 목도한 불신자들은 하나님의 메시지가 자기들의 지역 방언으로 선포되는 것을 들었다. 그러한 묘사를 무아지경 속에서 하는 말에 적용할 수는 없다.
많은 은사주의자는 흠정역(King james Version)이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미지의 언어(unknown tongue)"라는 표현을 반복적으로 사용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런 표현은 이 세상의 언어가 아닌 언어를 묘사하는 것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그러나 ”미지의(unknown)"라는 말은 번역자들이 덧붙인 말이고 헬라어 원문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래서 흠정역에서는 이 단어를 이탤릭체로 표기하고 있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13장 1절은 바울이 의미 없는 무아지경의 말이나 일종의 하늘의 언어 내지 천사의 언어를 옹호하고 있음을 입증하는데 사용될 수 없다.
더 나아가 바울은 누군가 교회에서 방언을 말하면 누군가는 통역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4:13, 27). 만일 바울이 ‘개인적인’기도의 언어나 자연발생적인 천상의 소리에서 비롯된 무아지경의 말을 염두에 두었다면 그런 명령은 시의적절한 말이 아닐 것이다. “통역”으로 옮겨진 헬라어는 헤르메뉴오(hermeneuo)인데 이는 ‘번역(translation)’을 뜻한다. (이 단어는 요한복음 9장과 7절과 히브리서 7장 2절에서도 그런 뜻으로 사용된다.) 통역의 은사는 한 사람이 전혀 배운 적 없는 언어를 번역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그 메시지로 덕을 세우는 초자연적인 능력이다(고전14:5). 그런데 무아지경의 말이나 뜻 모를 말을 번역할 수는 없다.
바울이 인간의 언어를 염두에 두었다는 또 다른 증거는 방언이 믿지 않는 이사라엘 백성에게 표적으로 주어졌다는, 고린도전서14장 21-22절에 나오는 바울의 진술이다. “율법에 기록된 바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방언을 말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지라도 그들이 여전히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바울은 여기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나님이 이방인의 언어로 계시를 말씀하실 것임을 전하는 예언인 이사야서 28장 11-12절을 인용하고 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불신에 대한 하나의 책망이었다. 그런 책망이 의미 있는 표적이 되려면 그것은 일종의 천사의 말이 아니라 반드시 이방인의 외국어야야 했다.
가짜방언
분명히 참된 성경적 방언은 뜻 없는 말이 아니라 언어다. 그러나 오순절 및 은사주의 운동에서 방언으로 통하는 것은 진짜 언어가 아니다. 글로쏠랄리아(glossolalia)라고 자주 일컬어지는 오늘날의 방언은 성경적인 방언의 은사와 같은 것이 아니다. 토론토 대학교 언어학 교수 윌리엄 새머린(William Samarin)은 이렇게 말했다.
지난 5년 동안 나는 이탈리아, 네덜란드, 자마이카, 캐나다, 미국 등지에서 열린 집회에 참석해 왔다. 나는 구 오순절 교인과 신 오순절교인을 다 관찰해 왔고 대규모 공개 집회는 물론 개인 가정의 작은 모임에도 참석해 보았다. 뉴욕 브롱크스의 푸에르토리코 사람들, 에팔래치아 산맥의 뱀을 다루는 백인들, 로스엔젤레스의 러시아계 사람들 등 다양한 문화적 배경도 보았다. ……… 방언은 실제로 어떤 면에서는 언어와 비슷하지만 그것은 말하는 사람이(무의식적으로) 방언을 언어처럼 보이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피상적인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방언은 근본적으로 언어가 아니다.
윌리엄 새머린은 방언데 대한 연구를 해 온 많은 사람 가운데 하나다. 그러한 연구들은 우리가 오늘날 듣는 방언은 언어가 아니라는 점에 모두 동의한다. 오늘날의 방언이 언어가 아니라면, 그것은 성경적인 방언의 은사가 아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7장) 1세기 고린도와 그 주변 지역에 존재한 신비종교는 무아지경의 말과 황홀경 비슷한 체험을 광범위하게 이용했다. 일부 고린도 교인들은 무아지경에서 나오는 가짜 방언을 사용함으로써 방언의 은사를 더럽힌 것으로 보인다. 그들이 했던 말은 오늘날의 이른바 방언과 매우 유사했다. 바울은 그런 관행은 방언 은사의 전반적인 요점을 교묘하게 회피하는 것이라고 그들에게 말해줌으로써 그들의 생각을 바로잡으려 했다. 그들이 방언을 그런 식으로 사용하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대의에 이로운 것이 아니라 해가 된다는 것이었다.
고린도 교회의 방언 남용
고린도전서 14장 2절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 대해 그들이 “방언의 은사”를 사람들에게 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말하기 위해 사용한다고 비판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라.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바울의 말은 방언이 ‘기도의 언어’로 사용돼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바울은 통역하는 사람도 없이 방언을 말하는 일은 무익하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반어법을 쓰고 있다. 왜냐하면 방언으로 어떤 말을 했다면 하나님만이 아실 것이기 때문이다. 영적인 은사는 하나님의 유익이나 은사를 받은 개인의 유익을 위해서 사용하도록 허락된 것이 결코 아니었다.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4장 10절에서 그 점을 분명히 밝혔다.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더욱이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 4절에서 이렇게 덧붙였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여기서도 바울은 자기 교회를 위해 방언을 사용하는 일을 칭찬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은사의 목적을 어기고 사랑의 원칙도 무시해 가며 방언은사를 사용하고 있었던 사람들을 책망했다.(“[사랑은]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고전13:5). 14장 4절에서 “덕을 세우다”라는 말은 원래 “~을 세우다”라는 뜻이다. 이 단어는 문맥에 따라 긍정적인 뜻을 전달할 수도 있고 부정적인 뜻을 전달할 수도 있다. 고린도 교인들은 이기적인 의미에서 자신을 세우려고 방언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동기는 건전한 것이 아니라 자기중심적이었다. 방언에 대한 그들의 열망은 다른 신자들 앞에서 가장 볼 만하고 눈에 띄는 은사를 사용하려는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바울의 요점은, 그런 과시를 통해 유익을 얻는 사람은 방언을 말하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없으며 방언을 말하는 사람이 방언에서 얻는 주된 가치는 자신의 자아를 세우는 일이라는 점이었다. 고린도전서 10장 24절에서 바울은 이미 이 원칙을 분명히 밝혔다.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그 밖에도 방언은 또 다른 문제를 초했다. 방언은 고린도 교회에서 사용되기는 했지만 방언이 전달하고자 한 메시지를 분명히 밝히기보다는 오히려 모호하게 만들었다. 고린도전서 14장 16-17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썼다.“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알지 못하는 처지 에 있는 자가 네가 무슨 말을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하리요 너는 감사를 잘하였으나 그러나 다른 사람은 덕 세움을 받지 못하리라.” 다시 말해 고린도교회에서 방언을 말한 이들은 이기적으로 변해서, 교회안의 나머지 사람들을 무시하고, 방언의 은사로 전달돼야 하는 메시지를 모호하게 만들며, 오로지 자신의 자아를 만족시키고 남에게 과시하고 자신의 영성을 서로에게 입증하기 위해서만 방언을 했다는 것이다.
이 모든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우리는 고린도전서 12장 31절에서 나오는 바울의 분명한 명령에 대해 의아하게 여길 수도 있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이 구절에 대한 통상적인 해석방식은 몇 가지 심각한 해석상의 문제를 제기한다. 바울은 은사의 분배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고 눈에 띄는 은사들을 선호하는 고린도 교인들을 책망하기 위해 편지를 쓰면서 왜 그들에게 “더욱 큰”은사를 구하라고 명령할까? 그런 말은 그저 그들에게 지위 다툼을 계속하라고 부추기는 것에 불과하지 않을까?
그러나 이 구절은 전혀 명령이 아니다. 이 구절의 영어 번역은 바울의 본의에 대해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여기서 원문에 사용된 동사 형태는 직설법(사실의 진술)도 될 수 있고, 명령법(명령)도 될 수 있다. 새국제 성경(NIV)은 직설법을 대안적 독법으로 제시하여 이 구절을 이렇게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열렬히 사모하고 있다(But you are eagerly desiring the greater gifts)." 앨버트 반스(Alvert Barnes)는 직설법의 관점을 택하면서 19세기 중엽의 많은 주석가(도드리지 로크 맥나이트등)도 자신과 똑같은 관점을 취했다고 지적한다. 반스는 아람어 신약성경에서는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번역했다고 말한다. “너희는 가장 좋은 은사를 사모하니 내가 더 탁월한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다시 말해 바울은 사실상 이렇게 말한 셈이다. “그러나 너희는 눈에 띄는 은사를 질투심으로 담아내고 있다.” 그것은 일종의 책망이며 그렇게 해석해야 바울이 다음에 한 말이 더 잘 이해된다.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바울은 그들에게 특정한 은사를 구하라고 권면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띄는 은사를 구하는 그들을 책망하고 있다. 바울이 말하는 ‘가장 좋은 길’은 그가 계속해서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설명하고 있는 사랑의 길이다.
고린도 교인들은 이기적으로 가장 눈에 띄고 가장 화려하며 가장 선망 받는 은사를 구하고 있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칭찬을 탐했다. 그들은 사람들의 갈채를 열망했다. 그리고 남들에게 ‘영적인’사람으로 보이기를 원했다. 그래서 그들은 분명히 가짜 방언을 사용하는 극단까지 치달았다. 고리도 교인들의 방언 남용은 그들의 교회를 위협하고 있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바로 그와 똑같은 문제가 오늘날 교회를 위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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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 is engraved with a unique Numb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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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 will be sent to your Si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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