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심오한 것은 피부다.
2011년 3월 11일 금요일 오전 11:22:48 김대식
자아는 어디에 있는가? 무엇이 자아를 만드는가? 자아는 무엇으로 구성 되어 있는가? 에
대해 대부분이 뇌가 만들고 뇌가 주체를 형성한다고 밝히고 있는데
어떤 누가 뇌가 자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피부에 자아 곧 주체가 있다고 했다.
피부 껍데기에 무슨 ? 자아가 있다는 말인가?
그런데 그냥 지나칠수가 없는 말이라서 한번 생각해 봤다.
피부란 일종의 경계선이다. 안 과 밖의 금긋기를 실행한다.
이 피부를 벗겨버리면 경계선이 사라진다. 물론 숨겨진 속살들은 이 피부를 다시 재생산하지만 방금 벗겨진 그 피부를 급히 만들수가 없어서 곧 살아있는 속살들은 세균이 침투하여서 금방 죽게 된다.
그것은 또한 안과 밖을 나누이는 선을 없애 버렸기에 밖의 공격으로 인해 이제 더 이상의 숨겨진 안 이라는 개념은 사라지게 된다.
그래서 누구 말 마따나 피부야 말로 가장 심오하다 특이하다 라고 했다.
(남자는 여자를 보고 0.3초 만에 외모에 뿅간다. 본능에 충실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그 자체적인 외모에다가 화장 까지 더 외모를 꾸며버리면 장악 당해 빼도박도 못한다. 0.1초로 더 단축되는갑따. 이런 유혹을 무슨 수로 뿌리치랴? 죽음 보다 더 독한 것이 여자인데? 다말이 시아버지 유다를 저 며느리 다말입니다 라고 알려주면 우찌 불륜의 스캔들이 발생하겠는가? 더 못 알아먹도록 외모에 덧 입혀야 뿅 간다. 가면이라는 외모를 덧 씌우기 한다. 이런 얼굴성은 권력이다. 새세계의 정치성이다.)
어떤 다큐를 봤는데 이 피부라는 것이 안에 감추어진 살아있는 세포들이 자기 기능을 다하고 죽어서 밀려서 밀려서 제일 바깥으로 밀려난 죽은 세포들로써 구성된 것이 피부다.
그렇다고 이 죽은 것을 버릴수가 없다. 버렸다가는 안의 것이 다 죽는다. 보호막이니까
사람은 조그마한 상처가 피부를 끍혀서 홈이 페이면 약을 바르던가 좀더 크게 찢어지면 병원에서 치료받아 바늘로 꾸매면 봉합이 가능하다.
그러나 동물의 왕국 같은 프로그램을 보면 아무리 사납고 무서운 맹수라도
피부가 조금이라서 끍혀서 상처가 나면 그 이후로는 종친 죽은 존재가 된다.
세균과 파리 모기가 계속 파고들기 때문에 곧 죽은 목숨이 된다. 봉합이 불가능하다.
외부에서 공급해주는 약을 사람이 발라주면 고침받게 되고
그렇지 않으면 죽게 되는 장면을 본적이 있다.
그래서 이 무시해야 마땅한 이 껍데기 피부야 말로 가장 심오하고 특이하다는 말이 이해가 된다.
가장 약하디 약한 죽은것과 같이 취급당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정작 무시해 버리면 외부의 세균은 순식간에 안의 내부를 다 정복해 버리기 때문이다.
자 이것을 통해서 경계선이라는 특이성을 살펴 보고자 한다.
이스라엘은 기능으로써 주어진 은사다.(여호와의 이름이 담겨진 그릇이다.)
이 은사 라는 특이성은 이스라엘을 경계선에 배치 시켰다.
즉 여호와의 세계와 악마의 세계의 경계선에 말이다.(미끼다 미끼)이 두 세계에서 중간에 낑긴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방식이다.
가장 약하고 약한 미약하고 소수의 적은 숫자이며 이미 죽은 것으로 결성된
생명이 단절된 죽은태, 짤린 고자와 같다. 이것을 생명이라고 우기는 자들에게 들이댄다.
(신 7:7, 개역)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그런데 이스라엘 당사자는 정작 모른다. 알아도 소용 없다.
금방 환경(사건)이 바뀌면 재배치 되기 때문에 이전 것은 소용없다.
그것이 바로 사건이 주체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사건이라는 주체는 꼭 가장 미약하고 숫자가 적은 무시할만한 꺼리를 앞장세운다.(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 향유를 부은 마리아, 성전에서 고개도 못 드는 세리, 안과 밖을 가로지르는 경계선으로써 말이다. 미끼, 잃어버린 자)
즉 경계선이다. 이것을 거룩이라고 한다. 거룩이란 안 과 밖을 가로지르는 그 무시할만한 죽은자와 같은 껍데기에 자신의 기능을 부여한 것을 말한다.
(보시기에 좋았더라 라는 창조사건은 나누이는 것으로 기뻐하신다. 기능완수요 마음에 흡족한 안식이다.)
그래서 두 세계가 뚜렷이 갈라진다. 거룩 완성이다.
이것이 구약에서는 할례언약에서의 할례와 다윗언약에서의 외모로 나타난 것을 볼수 있었다.
할례 라는 남성 성기의 끝을 끊어냄으로써 육의 단절로써의 기능에 놓이게 된다.
정말 특이하다. 단순한 성인의식의 할례가 아니라.
죽은자 에게서 난 족보 라는 육의 족보의 단절성을 띤 족보를 말해야 할 기능을 부여받은 의미이다.
그래서 난지 8일 만에 할례를 행한 그 무리 속에서 등장한 자들이다.
즉 도저히 등장 할 수 없는 존재들이 등장했다는 것이다.
나타날 수, 태어날 수 없는 존재들이다는 뜻이다.
혹시나 거룩한 전쟁을 펼치는 그 경계선을 긋는 전쟁에서 할례하지 않은 자가 있을까봐
전쟁 직전에 할례를 행한다.
할례를 행하면 전쟁을 이길수 있는 요소가 인간 쪽에서는 있을 수 없는 단절의 단절이다.
다리 쩔뚝 쩔뚝 거리면서 볼상 싸나운 웃싸스러운 꼴을 하면 무슨 전쟁이 되는가?
적어도 전쟁이라면 힘의 우의를 예상 못하는 가운데서 벌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한 쪽은 어린아이 이고, 다른쪽은 골리앗 거인이라면 게임이 되는가?
이것이 외모 곧 피부다. 이미 나누어진 상태이기에 도출 시킨다.
바리새인이 예수님께 묻는다.
주여 당신은 참되시나니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습니다
자 그러면 세금을 가이사에게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틀립니까?
(막 12:13, 개역) 『저희가 예수의 말씀을 책잡으려 하여 바리새인과 헤롯당 중에서 사람을 보내매』
(막 12:14, 개역)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아무라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오직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심이니이다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눅 20:12, 개역) 『다시 세번째 종을 보내니 이도 상하게 하고 내어 쫓은지라』
(눅 20:13, 개역) 『포도원 주인이 가로되 어찌할꼬 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혹 그는 공경하리라 하였더니』
(눅 20:14, 개역) 『농부들이 그를 보고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이는 상속자니 죽이고 그 유업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자 하고』
(눅 20:15, 개역) 『포도원 밖에 내어 쫓아 죽였느니라 그런즉 포도원 주인이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겠느뇨』
(눅 20:16, 개역)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하시니 사람들이 듣고 가로되 그렇게 되지 말아지이다 하거늘』
(눅 20:17, 개역)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그러면 기록된 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함이 어찜이뇨』
(눅 20:18, 개역) 『무릇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라』
(눅 20:19, 개역)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이 예수의 이 비유는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즉시 잡고자 하되 백성을 두려워하더라』
(눅 20:20, 개역) 『이에 저희가 엿보다가 예수를 총독의 치리와 권세 아래 붙이려 하여 정탐들을 보내어 그들로 스스로 의인인 체하며 예수의 말을 책잡게 하니』
(눅 20:21, 개역) 『그들이 물어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바로 말씀하시고 가르치시며 사람을 외모로 취치 아니하시고 오직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나이다』
(눅 20:22, 개역) 『우리가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하니』
표면이라는 외모 즉 피부는 현실적인 문제이다.
외모야 말로 이 세상의 기준이다.
자아와 주체는 온통 이 외모에 모든 신경을 써도록 되어 있다.
외모는 권력이다 라는 모 화장품 광고처럼
광고 자체가 외모 즉 표면에 사활을 건다.
이 표면이야 말로 전쟁의 가장 격전지 전투장이다.
이 자신들의 힘과 권력과 자아가 모두 집결 되어 있는 현실문제로써의 표면에
예수님을 두고자 바리새인은 질문 한다.
뻔한 답이다. 그래서 올무를 놓았다. 올무(경계선)야 말로 가장 심오한 것이 아닌가?
그런데 예수님의 답변은 인간들이 쳐 놓은 외모(표면,올무)에 걸려들지 않는다.
오히려 그 표면에 더욱더 가중된 외모에 외모를 덧입혀 버린다.
마치 이스라엘이 경계선에서 밑도 끝도 없는 여호와의 전쟁을 벌려서 지쳐있는 표면에
싸움을 종식 시키는 것이 아니라.
싸움에 더 불을 붙이듯이 석유를 때려 붓는 식이다.
즉 엘리야가 저들의 제사를 비꼬면서 그래 소리쳐가 들리겠나?
더 큰 힘을 추구해야지? 더 센 법을 지켜야지?
좀 더 크게 불러야지?
라고 내가 잘못들었나? 안듣기나? 아이고 내가 잘못들었내~~~~~~~~~~~~~~~
모기소리네 개미소리네 라고 비아냥 거리고서는
장작에 석유기름은커녕 물 뿌리고 불 붙도록 하기는커녕 도저히 붙을 수 없는
표면 즉 죽은 뼈, 마른 뼈로 만들고서는 기도를 하니 여호와의 불이 붙은 사건 말이다.
사건 자체가 주체로써 피부화 되었고, 특이화 된 것이다.
그러니 사건의 종식이 아닌 더욱더 확대증식으로써 구체화 된다.
바리새인이 쳐 놓은 올무를 도리어 어떤 누구도 벗어날 수 없도록 저들에게 올무를 겹겹이 쳐 버리는 올무의 사건화 또는 사건의 피부화? 올무화? 표면화?
어딜 감히 인간이 예수님을 시험할려고 해? 내 때는 인간이 시험 할 수 있었던 것은 자복하는 심령인 상한심령 뿐이였어 !!
그래서 바리새인 곧 모든 인간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밖는 세 가지 죄 몫의 하나로써 구색을 표면으로 갖춘다. 법과 힘을 갖춘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외모는 도리어 표면을 십자가의 저주와 죽으심으로 갖춘다. 마치 일부러 장작나무에 물 뿌리듯이 도저히 제단불이 붙을 수 없는, 아니 없도록, 아예 없도록, 다시는 살아나서 저 입 주둥이를 나불대지 못하도록, 부활 자체가 있을 수 없도록, 하나님의 저주 속으로 뛰어들고 인간들은 그 심판을 퍼붓는다.
법과 힘을 제거 하는 십자가로 돌진하기 위해, 법과 힘을 쥔 하나님이 된 인간을 이용한다.
이 표면적으로 나타난 구체적인 시각적 외모로써 드러난 사건을 생생하게 또렷히 완성하시고서는
이제는 이 외모만 십자가만 계속 계속 가시화 시킨다.
이제 남은 역사는 이 십자가 사건만 표면화 된다.
또렷하고 생생한 십자가의 가시화에 모든 세계가 동원이 된다.
가장 심오한 것은 아무도 해석할 수 없는 해석불가능한
거부할래야 거부할 수 없는 경계선 곧 기준이 되는 십자가만이 특이하고 기묘한 것으로써
두 세계를 이미 나누어 버린 그 결과를 표출 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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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얼굴성
2011년 3월 12일 토요일 오후 12:43:20 김대식
피는 생명이다. 피 채 먹지 말라고 했다.
(창 9:4, 개역)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채 먹지 말 것이니라』
(레 3:17, 개역) 『너희는 기름과 피를 먹지 말라 이는 너희 모든 처소에서 대대로 영원한 규례니라』
(레 7:26, 개역) 『너희의 사는 모든 곳에서 무슨 피든지 새나 짐승의 피를 먹지말라』
(레 7:27, 개역) 『무슨 피든지 먹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은 다 자기 벡성 중에서 끊쳐지리라』
(레 17:10, 개역) 『무릇 이스라엘 집 사람이나 그들 중에 우거하는 타국인 중에 어떤 피든지 먹는 자가 있으면 내가 그 피 먹는 사람에게 진노하여그를 백성 중에서 끊으리니』
(레 17:12, 개역) 『그러므로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너희 중에 아무도 피를 먹지 말며 너희 중에 우거하는 타국인이라도 피를 먹지 말라 하였나니』
(레 17:13, 개역) 『무릇 이스라엘 자손이나 그들 중에 우거하는 타국인이 먹을 만한 짐승이나 새를 사냥하여 잡거든 그 피를 흘리고 흙으로 덮을지니라』
(레 17:14, 개역) 『모든 생물은 그 피가 생명과 일체라 그러므로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어느 육체의 피든지 먹지 말라 하였나니 모든 육체의 생명은 그 피인즉 무릇 피를 먹는 자는 끊쳐지리라』
(레 19:26, 개역) 『너희는 무엇이든지 피채 먹지 말며 복술을 하지 말며 술수를 행치 말며』
(신 12:16, 개역) 『오직 그 피는 먹지 말고 물 같이 땅에 쏟을 것이며』
(신 12:23, 개역) 『오직 크게 삼가서 그 피는 먹지 말라 피는 그 생명인즉 네가 그 생명을 고기와 아울러 먹지 못하리니』
(신 12:25, 개역) 『너는 피를 먹지 말라 네가 이같이 여호와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일을 행하면 너와 네 후손이 복을 누리리라』
(신 15:23, 개역) 『오직 피는 먹지 말고 물 같이 땅에 쏟을 지니라』
(요 6:53,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요 6:54, 개역)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요 6:56, 개역)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그런데 예수님은 이 율법을 가로질러서 탈해방하여 자유케 하실려고 피를 먹고 마시라 라고 하신다.
어떻게 이럴수가 있는가?
피는 생명이다. 그래서 피와 결부가 된 생명을 취하지 말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미 인간은 피를 땅에 쏟았고 타인의 생명을 취해 놓고서는 율법을 지킨다고 했다.
그것이 전통이 되어 버렸다. 역사가 되어버렸기에 자손이라고 표현한다.
(마 23:29, 개역)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가로되』
(마 23:30, 개역)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면 우리는 저희가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데 참예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마 23:31, 개역)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됨을 스스로 증거함이로다』
(마 23:32, 개역) 『너희가 너희 조상의 양을 채우라』
(마 23:33, 개역)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피라는 생명이 녹으면 즉 흘러서 흐름을 타면
뼈가 된다.
사실 녹는다 라는 표현과 흘러내린다 라는 표현 보다 가장 적절한 것은 [자기부정을 하면] 이다. [상한심령이 되면] 이다.
그런데 좀 어렵기 때문에 철학적 표현으로 옮겨보면 탈주, 또는 가로지르기, 분절, 분리(거룩이다 라는 의미이다.), 또는 잉여 곧 은혜, 또는 탈물질적놀이,해학,익살,장난,아무것도 아닌, 죽은자와 방불한 [없음], 잃어버림. 등등으로 이해 될 수가 있다.
피라는 생명이 흘러 녹으면 생명이 흐름이 된다. 그 생명은 자기 혼자만 생명으로만 고정화 시키지 않고 탈주 자기부인하여서 다른 차이나는 것에 생명을 부어주고 자신은 죽는다.
이 피가 녹으면 뼈가 된다.
(마치 물이 얼어버리면 전혀 성질이 다른 딱딱한 얼음인 고체가 된다. 액체가 탈주하여 고체가 되고 다시 녹아서 증발하면 눈에 보이지 않는 숨어버린 기체가 된다. 이 흐름의 반복이 된 셈이다.)
이 뼈가 녹으면(흘러 흘러 흐름을 타면) 말랑말랑한 살과 근육이 된다.
이 살들로 구성이 된 세포나 근육 등등이 죽으면 제일 바깥에 피부를 형성한다.
즉 이 피부(외모)는 내부(중심)를 반영하는 투시가 된 탈주로써 표면 표피화이다..
마치 오늘 글을 쓴 나무의 열매 처럼 말이다.
그래서 피부 라는 얼굴성은 내부의 상태를 말해준다.
얼굴에 이미 모든 신체의 상태와 마음의 상태를 반영해 준다.
기쁘면 얼굴에 기쁘다 라는 것이 감출 수 없도록 표출 표면화 된다.
기분이 나쁘면 얼굴에 그대로 표면화 된다.
몸이 아프면 그 아픈 찡그림이 그대로 얼굴에 표현된다.
결국 얼굴이란 스크린이다. 영화다 영화.
숨은 내면의 기호를 영화는 욕망으로써 드러낸다.
아픈 욕망, 화난 욕망, 기쁜 욕망, 감사의 욕망
즉 그 어떤 소욕도 얼굴에 그대로 스크린 화면처럼 드러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여지껏 주님의 피를 먹고 마셔왔다.
아침 점심 저녁 모조리 다 주님의 살과 피요, 해와 달과 별 모두다 주님의 피를 비춰왔다.
모든 것이 주님의 피로 구성이 된 것이다.
그런데 마치 안 먹었던 것처럼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고 하니
아무도 먹지를 마시지를 못한다.
분명 조금전까지만 해도 먹고 마셨는데
왜 지금은 발뺌 할까?
방금 전 까지도 마음대로 살았고, 성깔대로 살아와 놓고서는
누가 표면적으로 표출하고 표현화 시킨 문자라는 명령어를 들었을때에
자기 언어랑 맞지 않는다고 갑자기 급선회 한다. 마치 부자청년처럼 등돌린다.
율법 지켰다메? 지켜놓고 가난한자에게 왜 주지 못하고 갑자기 넘어설수 없는 불가능한 벽이 쏟아나서 우뚝 가로막아 서는 것일까?
율법 지켰다면 가난한자에게 전재산을 바칠수 있다는 것은 전혀 별개의 것이나 낯선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가난한자에게 전 재산을 바치는 그 불가능성을 왜 장난치시는 것일까?
뻔히 지키지 못할 것을 알면서 말이다.
주님의 관심사는 율법 이다. 가난한자에게 바치는 행위가 아니다.
율법은 예수님의 고유의 전유물인데 자꾸 인간들이 지켰다고 하니
과연 지킨 것 맞는지의 확인 작업이다.
(선악은 예수님만 알도록 되어 있다. 인간은 괜히 알아버렸다.)
자 이렇게 되면 그 어떤 것도 인간은 자기 쪽으로 끌어당길수 없다.
도리어 율법을 해석 또는 지킬 것이 아니라. 도리어 율법으로 나오는 저주를 받아야 한다.
율법으로 해석 당하니 너는 근심하고 돌아설자 라는 뜻으로 해석이 된다.
예수님을 곧 율법의 완성이신 사랑을 너 부자청년은 근심하고 등 돌리는 사랑의 거부자로 해석 당해야 할 판국에 놓여진 것이다.
우리는 모두 열매를 내지 못해 들통이 아는 저주 받은 무화과 나무임을 들통나야 하는 자인데
지금 분위기 파악도 못하고 율법 지켰다고 육을 자랑하고 그 육에서 보충할 결핍채우기를
예수님 까지 이용해서 뭐가 부족합니까 말씀만 하시면 지키겠습니다 라고 나온다.
율법이라는 올무에 제대로 걸려들었다.
근심이라는 얼굴 피부 외모에 나타난 표면화는
이렇게 이질적으로 예수님과 전혀 일치성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율법과의 간격 차이를 좁혀 볼려는 인간의 헛된 우상성(선악:행함책)을 까발리는 것이다.
차라리 주여 주님의 얼굴을 보니 기쁩니다.
그 주님의 얼굴성은 심판성이다. 그 심판이 옳았습니다.
내가 아무리 착한짖 말씀실천 이웃사랑행하기를 펼쳐도
예수님의 얼굴에 가시면류관이 씌여지는 그 찢겨지는 표면을 막을길이 없다는 것이다.
구멍뚫기 홈페임 미끄러뜨리기가 곧 구원의 뿔이다.
그 얼굴은 마치 유대인이 가장 혐오해 하는 뱀과 마귀와 같은 얼굴이다.
유대인 자신들의 뱀과 마귀와 같은 얼굴성을 예수님에게 뒤짚어 씌운 모습이다.
그리고 저런 마귀를 물리쳤다고 자신들은 천사와 같은 얼굴로 하고 있다.
예수님이 바로 이런 우리의 악마와 같은 얼굴을 가리고 가면을 쓴 것에 대해서
근심하신다. 인간을 지으심에 후회 하신다. 예루살렘을 보고 우신다.
그러나 주님은 그 얼굴을 찢으셔야 한다. 발가벗기신다. 가면을 탈주 하신다.
자기부인으로써 곧 상한심령 되기 로써
그것이 바로 십자가이다.
생명 아닌 것들을 생명이라고 내 세운 것에서
오로지 유일한 생명인 피를 십자가에서 뿌리셨다.
다 이루셨다.
오로지 십자가에 대한 감사와 영광과 존귀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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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외모를 보시는 예수님
2011년 3월 12일 토요일 오후 2:33:33 김대식
[
(고전 1:27, 개역)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고전 1:28, 개역)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고전 1:29, 개역)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주님은 외모를 보시지 않는다? 아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외모를 보신다. 그 중심이 외모인 피부 곧 얼굴에 그대로 표출 표면화 시키신다.
(마 22:16, 개역) 『자기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라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이니이다』
(막 12:14, 개역)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아무라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오직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심이니이다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눅 20:21, 개역) 『그들이 물어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바로 말씀하시고 가르치시며 사람을 외모로 취치 아니하시고 오직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나이다』
(마 22:20, 개역)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뉘 것이냐』
(마 22:21, 개역) 『가로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가라사대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인간의 외모는 인간의 것이다, 주님이 심은 외모는 주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바리새인은 외모를 보지 않고 중심을 본다는 하나님의 뜻과 자신을 일치시는데 있어서
모든 대중들로부터 인정 받았다.
그러니 너 예수도 인정하라 라는 뜻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중심과 외모를 거부한다. 도리어 그 중심이 악마이며 우상임을 표면화 시키는 외모로 새롭게 만들어 버린다. 인정은커녕 영원히 거부해 버린다.
얼굴은 곧 피부(외모)는 가면이다. 가면을 벗기면 중심이 드러난다.
아무리 가면을 모든 인간들에게 인정받는 멋들어진 가면을 써도
그 가면 벗겨보면 중심이 확 드러난다.
바리새인의 얼굴이 악마의 외모였는줄은 예수님이 오시기 까지는 도저히 알수 없었다.
겹겹이 중첩된 가면이니 아무리 벗겨본들 중심은 드러나지 않는다.(율법에 갇혔기에)
믿는 도끼에 늘 발등 찍히고 산 것이다.
다윗은 외모가 삐어 낫다.
(삼상 16:7, 개역)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그러나 정작 아름다운 외모로 뽑아버렸다. 그것이 중심이다. 사랑받으면 무조건 이뻐진다.
중심에 신랑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사울왕은 백성들의 눈높이인 아름다운 외모로 뽑힌다. 그러나 주님은 악신을 심어버린다. 미운 놈은 뭘 해도 밉다.
(삼상 16:8, 개역) 『이새가 아비나답을 불러 사무엘의 앞을 지나게 하매 사무엘이 가로되 이도 여호와께서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삼상 16:9, 개역) 『이새가 삼마로 지나게 하매 사무엘이 가로되 이도 여호와께서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삼상 16:10, 개역) 『이새가 그 아들 일곱으로 다 사무엘 앞을 지나게 하나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들을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하고』
(삼상 16:11, 개역) 『또 이새에게 이르되 네 아들들이 다 여기 있느냐 이새가 가로되 아직 말째가 남았는데 그가 양을 지키나이다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보내어 그를 데려오라 그가 여기 오기까지는 우리가 식사 자리에 앉지 아니하겠노라』
(삼상 16:12, 개역) 『이에 보내어 그를 데려오매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
(삼상 16:13, 개역) 『사무엘이 기름 뿔을 취하여 그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사무엘이 떠나서 라마로 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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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 is a cross pendant.
He is engraved with a unique Number.
He will mail it out from Jerusalem.
He will be sent to your Side.
Emmanuel
Bible Verses About Welcoming ImmigrantsEmbracing the StrangerAs we journey through life, we often encounter individuals who are not of our nationa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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