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평) 눈 먼 자의 도시

(영화평) 눈 먼 자의 도시


(영화평) 눈먼 자의 도시 (Blindness)



주제 사라마구의 원작 소설(해냄 출판사)을 페르난도 메이렐레스 감독이 영화로 만들었다.



[줄거리]



복잡한 대도시의 네거리.


신호가 왔음에도 맨 앞에 있는 차가 출발을 하지 않는다. 졸지에 일본인 운전사가 앞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 뒤에 그가 접촉한 모든 이들, 친절을 가장한 차 절도범, 치료를 했던 안과의사 등등 모든 사람들이 실명을 해버린다. 그들이 보고 있는 것은 ‘백색의 바다’ 뿐이다.



하얀 스크린 외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질병이 삽식 간에 그 도시에 번진다. 행정 당국은 크게 당황하고 안과 질환의 전문가 집단 내부에서도 원인 모를 실명 사태가 일어난다. 당국은 군을 동원해서 실명한 자들을 따로 격리시킨다.



이때부터 실명한 자들은 생소한 장님의 생활을 해야 한다. 전에는 각자 독특한 직업에 종사하더라도 이제는 장님이라는 점 외에는 모든 차이와 차별이 인정되지 못한다. 남과 여, 노인과 아이의 차이도 무시된다. 그동안 남의 눈 병을 치료하면서 단란한 가정을 갖고 있었던 주인공 가정도 당국의 명령에 따라 수용소에 갇히게 된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여자 주인공인 안과 전문의의 아내(줄리안 무어)는 실명을 하지 않고 있다. 그녀는 남편을 돌보아주기 위해 당국을 속이고 남편의 곁에서 그 수용소 생활을 같이 하게 된다. 이로서 그녀는 유일하게 ‘보는 자’이다.



이제 남은 것은 수용소 내에서 어떻게 집단생활을 평화롭게 하면서 목숨을 부지하느냐 하는 문제뿐이다. 세 병동으로 짜인 수용소에서 제 3의 병동이 다른 병동에 대해서 절대적 권력을 행사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들의 우두머리에게는 유일하게 권총이 있기 때문이다. 골고루 주어지던 시 당국의 급식이 수용소 자체에서 일어난 새로운 질서 개편으로 인하여 제 3병동의 두목이 다 장악하게 된다. 하지만 여전히 그도 눈이 멀어있기는 마찬가지다.



하지만 전직 바텐더였던 그가 권력을 원활하게 펼칠 수 있은 것은 그의 곁에 애초부터 장님이었던 사나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즉 어두움의 세계에 대해 다른 사람에 비해서 그만큼 숙달되어 자였던 것이다. 실명의 세계에서는 장님 되었던 자가 월등히 유리하다. 거기에다 권총까지 갖고 있는 자와 합세했으니 이는 곧 생명 여탈권을 의미하는 것이다.



숙달될 장님과 권총의 힘으로 그들은 모든 양식을 독점해서 다른 병동, 다른 사람들에게는 고가의 귀금속을 받고 되팔아먹는다. 결국 사람들이 내놓은 보석마저 고갈되자 급기에 여자를 상납하기를 요구한다. 여자를 내놓지 아니하면 그 병동에는 급식을 팔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아내를 가진 남편과 아내들은 심적인 갈등을 일으킨다. 사랑하는 아내를 폭력자에게 빼앗길 수 없다고 주장하는 남편들과, 거기에 비해서 양식을 구해서 조금이라도 목숨을 부지할 수만 있다면 그까짓 윤리 도덕은 나중 문제라는 여성들의 주장이 맞서지만 결국 남편들도 양식 앞에서는 무력하다.



유일하게 눈을 뜬 의사의 아내는 가위를 들고 들어가서 한참 여자를 탐하고 있는 두목의 목을 찔려 죽여 버리고 그 와중에서 불이 나면서 살아남은 자들은 모두들 황급히 수용소 마당으로 나온다. 평소에 나왔다가는 군인들이 총을 맞게 되지만 왠지 조용하다. 의사가 아내가 육중한 수용소 문을 열고 보니 이미 그 도시의 모든 인간들이 어느 누구랄 것이 없이 장님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더 이상 수용에 수용이 불가했던 것이다. 수용소 안이나 수용소 밖이나 보이는 자는 오직 의사의 아내뿐이었다.



도시는 더럽게 황폐해졌다. 먹을 것을 찾아서 사람들은 더듬거리면서 슈퍼마켓을 강탈하고 있었다. 아무도 손대지 못한 음식 창고를 발견한 의사 아내는 수용소에서 가깝게 지내는 몇몇을 데리고 옛날에 살았던 자기 집을 찾아들어간다. 그리고 정성껏 그들의 손발이 되어 수발해준다.



서로가 서로를 못보고 있는 시간을 함께 보내고 있기에 상대방이 흑인이든 백인이든 노인이든 젊은이든 그런 조건을 따지지 않고 그들의 서로의 마음만 점검하면서 하나가 되어 간다. 마음만 따뜻하다면 다른 조건들은 상관없었다. 이 진리를 찾기까지 그들은 눈이 멀어지는 경험을 한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맨 처음 장님이 되었던 그 일본인 남자가 눈이 보이기 시작했다. 모두들 절망에 빠져 있다가 일본인 남자가 시력이 회복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드디어 희망이라는 것을 갖게 된다. 나도 언젠가는 세상을 다시 보며 살날이 올 것이라고…



[평가]



감독은 강력한 메시지를 모호하지 않으려 했다. 그것은 바로 모든 이가 눈이 감겨 사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세상을 제대로 보고 자가 행사해야 할 의미와 사명에 관한 것이다. 본인 아니게 유일한 희망으로 남게 된 여자 주인공은, 처음에는 자기 남편만 편하게 하면 된다고 생각해서 수용소에 잠입했지만 막상 남편을 행복하기 위해서는 다른 장님들에게 대해서도 동일한 봉사를 수행해야 한다는 점을 알게 된다.



즉 섬겨야 할 자를 정하는데 있어 막상 당해보니 자신이 선택할 사항이 아니라는 것이고 상황이 도리어 자신을 선택했다는 사실에 직면한다. 하지만 자기 혼자서 수많은 장님들을 다 수발하기에 너무 힘들기에 그녀는 차라리 자신마저 장님이 되어 섬김 받음과 섬김 해줌의 관계 자체에서 해소되어버릴 것을 원한다.



하지만 그녀의 봉사는 단순히 장님들의 일상생활의 어려움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사람의 집단에서 필히 발생하는 권력의 횡포마저 결정적으로 제거시키는 일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즉 감독은 외치고 싶은 것이다. 권력자들이 지배하기 위한 권력을 창출하는 일을 하고 일반 대중들이 생존이라는 점을 들어서 거기에 순복하는 현실들은 모두 자신들이 영적 장님이기에 발생되는 사태라는 것이다. 참으로 그 중에 영적으로 제대로 세상을 보는 자가 있다면 그 권력 창출의 무모함과 억지를 근원적으로 제거해 버리고 자유를 향하여 탈출할 것을 계시할 것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눈 먼 자들에게 있어 눈 뜬 자는 공연히 시기와 질투의 대상일 뿐이다. 다수의 대중들이 원하는 것은 자신들도 눈 뜬 자와 같이 눈 뜨고 싶은 것이다. 더 이상 눈 뜬 유일한 여성 지도자에게 억매이기 싫은 것이다. 하지만 세상 모든 이가 다 장님이 되었다는 소식은 곧 그들로 하여금 눈 뜰 수 있다는 희망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에 직면하여 절망적인 미래만 그리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영화는 마지막에 기적을 만들어 낸다. 맨 처음 영문도 모르는 채 장님이 되었던 그 자가 다시 세상을 보게 되므로 말미암아 드디어 그 남자에게 일어날 기적이 언젠가는 자기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는 희망이 온 누리에 퍼지게 된 것이다. 마치 예수님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다는 소식은 곧 자신의 부활로 이어질 수 있다는 소망을 들뜨게 하는 것과 유사하다.(고전 15:20-22)



(평가)



복음적 입장에서 볼 때, 이 영화는 마치 기독교 교리와 연관된 상징과 비유들의 나열처럼 보인다. 요한복음 9:39-41에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다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고 되어 있다.



즉 소경된 자이기에 자신의 누리고 있는 행복과 사랑과 희생과 봉사와 소망의 가치를 모르고 권력과 재물로 사람의 가치를 평하는 천지가 되었다는 것이다. 참으로 영적으로 눈이 열진 자의 입장에서 보면, 그런 가치들은 그저 ‘뭔가 보인다. 는 이 극히 단순한 행복과 다행함과는 족히 비할 바가 못 되는 것이다.



그 증거가 영화 마지막 근처 장면에서 하늘에서 소나기가 쏟아지니 모든 거리의 장님들은 그 장대비를 맞으면서 은혜에 잠겨 감격해서 어쩔 줄 모른다. 눈을 뜨고 살 때에 아무런 의미가 없었던 대수롭지 않는 작은 일 속에 그토록 고귀하고 숭고한 행복이 덩어리째 담겨 있었던 것을 그들이 미처 몰랐던 것이다. 그만큼 영적으로 소경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다.



하지만 이 영화는 끝까지 절망을 그려내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비복음적인 색채를 비쳐낸다. 참으로 신의 심판을 궁극적으로 믿는 자라면 손에 만져지는 당장의 무서운 저주의 형벌보다는 차라리 용서를 구하게 된다. 즉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기를 요구했던 제자들의 요청을 예수님의 거부하시고 스데반 집사의 마지막 말은 성경은 귀하게 담아 낸다.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행 7:60)



신앙은 오기가 아니라 낯섬이다.


The Cross Pendant

He is a cross pendant.
He is engraved with a unique Number.
He will mail it out from Jerusalem.
He will be sent to your Side.
Emmanu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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