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세보다 우월하신 그리스도-히브리서 3장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의 우월성에 대한 세번째 논증으로 들어가, 그리스도께서 모세보다 뛰어나심을 다룬다. 물론, 모세는 유대 민족에게 위대한 영웅이었는데 바울이 모세에 대한 그리스도의 우월성을 입증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믿음이 유대주의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 된다. 그리스도께서 제공하신 것이 훨씬 더 위대할 것이었는데도 이 사람들이 어떻게 유대주의로 되돌아갈 수 있었을까?
1. 직책에 있어서 더 위대하신 그리스도(3:1-2)
모세가 비록 제사장의 기능과(시 99:6) 심지어는 왕의 기능을 담당하였지만(신 33:4-7), 본래는 선지자였다(신 18:15-19/행 3:22). 모세는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았으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보내심을 받은 “사도“ 또는 “보내심을 받은 자“였다(요 3:17/요 5:36-38/요 6:57/요 17:3/요 17:8/요 17:21/요 17:23/요 17:25).
그리스도는 또한 대제사장이셨는데 이는 모세가 결코 종사해 본 일이 없었던 직책이다. 더구나 그리스도의 직분은 이스라엘의 지상적 소명이 아닌 “천상적 소명“과 관련이 있다. 모세는 이 땅의 백성을 위해 사역하였으며, 이들의 소명과 약속들은 이 땅에 속한 것이었다. 그리스도는 이 땅의 나그네요 순례자들인 하늘나라 백성의 사도요 대제사장이시다.
모세는 율법의 선지자인 반면에 그리스도는 은혜의 사도라고 부언할 수 있다(요 1:17 참조). 모세는 죄를 범하였으나 그리스도는 죄 없는 삶을 사셨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라“(주의해서 관찰하라)는 말을 듣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2. 사역에 있어서 더 위대하신 그리스도(3:3-6)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충성했던 것처럼(민 12:7) 그리스도께서도 그러하셨다고 분명히 밝히신다(3:2). 그러나, 이들의 사역도 바로 이 지점에서 나눠진다. 모세는 종으로서였으나 그리스도는 아들이시다. 모세는 집 안에서 섬겼으나 그리스도는 집 전체를 관장하신다. “집“은 물론 성전이나 성막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을 말하는 것이다.
모세는 하나님의 구약의 전인 이스라엘 안에서 종으로 있었으나, 그리스도는오늘날 하나님의 집인 교회의 전반을 관장하는 아들이시다(히 3:6/히 10:21/벧전 2:5/벧전 4:17/엡 2:19 참조). “집“이 “백성“을 뜻하는 데에 대한 한 예를 들자면, 사무엘하 7장 11절에서 하나님께서 “다윗으로 한 집을 이루고... “라고 약속하셨는데, 그것은 그의 가계와 그의 보좌를 영원히 세울 것에 대한 약속이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지상의 전인 반면, 교회는 하나님의 하늘의 전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전이 언제나 믿음으로 결정지어 진다는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구약의 백성들은 오늘날의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 두 언약 하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서로 연결시켰던 것도 바로 이 믿음의 연속성이다. 갈라디아서 3장 7절에서 참된 신자들을 “아브라함의 아들들“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그가 “믿음의 조상“이기 때문인 것이다.
모세와 그리스도 사이의 대조에 있어서 두 가지 다른 문제들이 남아 있다. 첫째로, 모세는 종인 반면에 그리스도는 아들이시다. 이 말은 구약에서의 사역이 속박과 노예 상태에 대한 것인 반면, 새 언약 하의 그리스도의 사역은 해방과 기쁨에 대한 것임을 암시한다. 구약의 율법은 “종의 멍에“로 언급된다(갈 5:1/갈 2:4/갈 4:1- 참조). 우리가 하나님의 전에서 믿음으로 누리는 아들됨의 축복된 특권들이 옛 언약 하에서는 알려지지 않았다.
둘째로, 모세는 모형과 그림자로 섬겼으나, 그리스도는 이러한 것들의 성취로 나타나신다(3:5- “장래의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안에서 우리는 참된 밝은 빛을 가지나, 모세 안에서는 우리가 그림자 안에 있게 된다. 바울의 편지를 읽는 사람들이 유대주의로 돌아간다는 것은 성취를 모형과 그림자로 바꾼다는 것을 뜻했다!"
3. 안식을 주시는 데 있어 더 위대하신 그리스도(3:7-19)
4장에서 안식이라는 말이 12회 사용되었는데, 반드시 같은 뜻으로 쓰이고 있지는 않다. 우리는 다음 장에서 이를 상세히 연구할 것이지만, 이 지점에서는 그 기본적인 개념을 소개해야 할 것이다. 저자는 영적인 진리를 예증하기 위하여 이스라엘 민족을 사용한다(고전 10:1-13 참조).
유대인들이 애굽에서 종되었던 것은 마치 죄인들이 세상에서 종된 것과 같으며, 하나님께서 어린 양의 피로써 이스라엘을 구속하셨던 것은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를 구원하신 것과도 같다. 하나님께서는 축복의 땅을 유대인에게 약속하셨고, 자기 백성들에게 복된 삶을 약속해 오셨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이스라엘은 불신앙으로 반역하였으며, 하나님을 따르기를 거절하였다(민 14장).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여호수아와 갈렙만을 제외한회중 전체를 심판하셨다. 이 두 사람은 하나님을 의지하며 백성의 결의를 반대한 이들이었다. 유대인들은 40년 동안 광야에서 방황해야 했는데, 이는 정탐군들이 그 땅에 갔던 하루를 1년으로 계산한 연수였다! 달리 말하자면, 이 민족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다(신 12:9/수 1:13-15).
여기서 저자는 그의 독자들에게 경고를 한다. 이 편지를 읽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함을 받았으며 세상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었다. 이제 이스라엘처럼 이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약속하신 복된 삶으로 들어가지 않고 되돌아가려는 유혹을 받았다. 3장과 4장에는 세 가지 다른 안식이 나오는데, 다음 장에서 이를 상세히 다룰 것이다.
-구원의 안식 4장 3, 10절
-시련 가운데서의 승리의 안식-가나안으로 상징된다:4장 11절
-미래의 영원한 안식-하늘의 안식:4장 9절
여기에 나오는 권면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의지하여 약속된 안식으로 들어가라는 것이다. 가나안은 하늘나라의 표상이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가나안은 축복과 투쟁, 진보와 승리의 생활에 대한 표상인 바, 우리가 그리스도께 굴복하여 그를 믿고 의지할 때 그 안에서 소유하게 되는 것이다. 시험과 시련의 한복판에서조차 우리가 소유하게 되는 것이 바로 현재의 안식이다. 이 안식은 모세나 여호수아(4:8)가 줄 수 없는 것이었다.
바울은 시편 95편을 인용하여 이스라엘의 완악한 마음을 독자들에게 상기시킨다. 이스라엘이 진행하기가 힘들 때 어떻게 하나님을 힐난하고 시험하였는지를 잘 알기 위해서는 출애굽기 17장을 읽어 보라. 믿는 자들이 오늘날 이런 일을 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히브리서의 근본적인 주제를 보게 되는데, “상황이 어려울 때 낙심하지 말고 원수들을 정복하며 온전한 데로 나아가자“는 것이다. 요단강을 건너가서 가나안이라는 우리의 기업을 주장하자!
12절에 나오는 이 경고를 신자들에게도 적용할 수 있을까? 물론 할 수 있다! 불신앙도 그리스도인이 빠지기 쉬운 죄의 하나인데, 이것은 악한 마음에서 생겨난다.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을 믿는 일이 있으면, 우리의 의지와 생활을 그에게 굴복시켜서 매일 인도하심을 받으며 봉사의 삶을 살게 되는 또 다른 일이 있다.
좌절과 불신앙의 “광야에서 방황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여전히 너무도 많다. 이들은 애굽에서 구원은 받았으나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의 기업을 주장하며 가나안으로 횡단해 들어간 일은 없었다. 유대인들은 피로써 값주고 산 바되었고 구름으로 가리움을 받았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이 광야에서 죽었다! 이것은“구원을 잃게되는 문제“인가? 물론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결핍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인생과 축복을 잃게 되는 문제인 것이다.
무엇이 이같은 불신앙의 악한 마음을 일으키는가? 첫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는 것(7, 15절)이며, 둘째는 죄에게 속도록 자신을 방치해 두는 것(13절)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첫째로 우리는 말씀에서 떠나가며(2:1-4) 다음으로는 말씀을 의심한다(3:18-19), 우리는 우리를 돕기를 원하는 사람들의 권면을 거절하며(3:13) 말씀에 대해 둔감하게 될 때까지 고집부리며 계속해서 불순종한다(5:11-6:20 , 서론 참조).
믿는 자의 삶에서 죄란 실로 거짓된 것이다. 작은 것에서 시작하나 점점 더커지게 된다. 어떤 점에서는 하나님을 의심하는 일이 불신앙의 악한 마음으로까지 이끌어 갈 수 있지만, 자신의 신념에 따라 전진해 가며 그 신념을 굳게 붙들고 있는 사람들은 진실로 그들이 구원받았음과(3:6/3:14) 하나님의 징계와, 마치 이스라엘이 그러했듯 이 생에서의 심판조차도 즐겨 받는 것을 입증해 보여 준다. 불신앙이란 심각한 일이다."
▣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안식-히브리서 4장
본 장은 앞의 3장 11절에서 시작된 “안식“에 관한 주제를 계속해서 다루고 있는데, 사실상 이 “안식“(rest)이라는 말은 이 부분에서 다섯 가지의 다른 의미로 사용되었다.
-하나님의 안식일:창세기 2장 2절/ 히브리서 4장 4, 10절
-가나안-40년간 광야에서 방황하던 끝에 맞이한 이스라엘의 안식:3장 11절 등
-신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현재의 구원의 안식:4장 3, 10절
-승리한 정복자의 현재의 안식 4장 11절
-미래의 영원한 안식 4장 9절
하나님의 안식일의 안식은 우리가 현재 소유한 구원의 안식 곧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완성하신 사역으로 말미암은 안식과, 장차 있을 영광된 “영원한 안식“의 모형이다. 이스라엘의 가나안 안식은 그리스도인이 믿음으로 행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기업을 주장할 때 갖는 전투와 축복의 생활을 모형으로 보여 주는 것이다. 본 장에는 안식의 생활에 관한 네 가지 권면이 나온다.
1.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4:1-8)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안식을 주기로 약속하셨으나, 불신앙으로 인한 불순종 때문에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다. 하나님은 오늘날도 자기의 백성을 위하여 안식을 주신다고 약속하셨는데, 외관상으로는 불가능한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승리를 주시며, 시련의 한복판에서도 평화를 주신다는 약속이다.
우리의 신령한 가나안에서의 “안식의 생활“을 가리켜 6장 1절에서는 “완전(또는 성숙)한 데 나아감“으로, 11절에서는 “소망의 풍성함“, 12절에서는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음“으로 일컫는다. 당시 히브리서의 독자들이 시험의 때를 통과하고 있었다는 사실(10:32-39/12:3-14/13:13)과, 옛날의 이스라엘처럼 옛 생활로 “돌아가자“고 유혹받는 일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하나님은 이들에게 승리의 안식을 약속하셨으나 이들은 거기에 미치지 못할 위험에 처해 있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말씀을 주셨으나 “믿음을 화합지“ 않았으며(4:2) 그들의 생활에 적용하지도 않았다. 하나님의 말씀이 신자의 생활에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다시 한번 보게 된다.
저자의 논증은 이렇게 전개된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안식을 약속하셨으나(4:1), 이스라엘은 그 안식에 들어가는 데에 실패하였다(4:6). 하나님의 약속이 여전히 서 있는 것은, 여호수아가 비록 그들을 국가적 안식으로는 인도하였지만(수 23:1) 그들에게 이같은 신령한 안식을 주지는 못했기 때문이다(히 4:8). 또 다른 예로서, 수 세기가 지난 후 시편 95편에서 다윗도 이 같은 안식을 말한 적이 결코 없었다.
결론은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는 것이다(4:9). 그는 이러한 안식을 하나님의 안식일에의 쉼과 연관시키는데(4:4, 10), 그것은 지쳐버린 후의 쉼이 아니라 만족한 상태에서의 안식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을 창조하신 후 지치지 않으셨다. 창세기 2장 2절에서의 안식은 완성과 만족을 말해 주고 있다. 이것은 “영혼의 안식“이며, 또한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1장 29절에서 “약속하시는 믿음의 안식“이다.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 마태복음 11장 28절의 쉼은 구원이며 선물이다.
승리의 안식은 우리의 헌신과 순종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라는 구절은 하나님의 경고이다. 왜냐하면 그의 자녀들 중에서 이러한 승리의 생활로 들어가지 못하는 자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2. 그러므로 우리가 힘쓸지니(4:9-13)
여기서 “힘쓰다“라는 말은 “부지런하다“는 의미로서, “이러한 안식에 들어가기 위해 부지런할지니“의 뜻이다. “부지런하다“는 말은 “흘러 떠내려감“의 정반대이다(2:1-3).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있어서 부주의하거나 게으른 상태로 성숙에 이른 사람은 아무도 없다. 베드로후서 1장 4-12절과 3장 11-18절을 자세히 보면 베드로는 신자들에게 부지런하라고 세 번이나 권면한다. 만일 우리가 부지런하지 않으면 이스라엘의 실패를 반복하게 될 것이며, 약속된 안식과 기업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이것은 구원이 아니며,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의 승리임을 다시 주목하자).
이러한 안식에 들어가는 비결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이다! 히브리서 4장 12절은 온갖 영적인 상황에 대한 해결을 제시해 준다. 만일 우리가 말씀이 우리를 심판하며 우리의 마음을 드러내도록 허용한다면 그 축복을 기업으로 받기에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이스라엘은 말씀에 대적했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 하지 않았으므로(시 55편) 그들은 40년간 광야에서 좌절하며 방황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은 검이다(계 1:6/계 2:12-16/계 19:13). 그리하여 그 검은 마음을 찌른다(행 5:33/행 7:54- 이스라엘이 재차 말씀에 순복하기를 거절함). 너무도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삼가는 데에 실패함으로 인하여, 축복을 빼앗긴다. 영적으로 성숙하려면 부지런해야 하는데,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신실하게 적용하는 방법이다."
3.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자(4:14)
이 말은 “우리의 구원을 굳게 붙들자“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믿는 도리“란 말은 실로 “동일한 내용의 신앙고백“인 바, 4장 14절에서와 같이 3장 1절, 10장 23절, 11장 13절에서도 사용되고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그의 믿음을 증거하는 것과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그의 신실함, 그리고 약속된 상급을 얻는 것과 관련이 있다(10:34-35 참조).
광야에서 방황한 유대인들은 구름 아래 있었고 애굽으로부터 구속함을 받았지만 간증이 될 만한 것을 잃었었다. 이들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 얼마나 보잘 것없는 증거자들이었던가! 하나님은 그들을 인도해 내셨으나 이들을 이끌어 들일수는 없으셨다! 그들의 불신앙이 그들에게서 하나님의 축복을 빼앗아갔다.
이 일은 바울이 11장에서 위대한 “믿음의 거성“을 그의 독자들에게 상기시키고 있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 이 사람들은 모두 다 역경과 시련에 직면했으나 그것들을 극복하고 선한 간증을 남겼다. 히브리서 11장 13절은 이 모든 사람들이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였던 것을 “증거하였다“고(4:14 과 같은 단어임) 말한다. 에녹은 하늘로 들리워가기 전에 좋은 증거를 받았다(11:5).
그 장 맨 끝에 가서 그는 다음과 같은 말로 지금까지의 말을 종합한다.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며...“ 믿음이 있는 곳에는 좋은 증거가 있고(11:2) 불신앙이 있는 곳에는 증거가 없다.
믿음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구약시대의 이스라엘은 들으려 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믿음이 없었다.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은 3장 7, 15절과 4장 7절에서 반복되는 경고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삼가는 그리스도인은 좋은 신앙고백을 유지할 것이며, 세상에서 그의 증거를 잃지 않을 것이다."
4.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갈 것이니라(4:15-16)
이 구절들은 신자들이 그의 구원을 잃을 수 없다는 것에 대한 증거이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유혹과 연약함을 아시는 대제사장이 계시며, 그분은 우리가 결코 당하지 않는 시험들을 참으셨다. 시험의 때가 오면 우리는 그리스도만이 주실수 있는 도움을 받고자 은혜의 보좌 앞으로 돌이킬 필요가 있다.바울은 마지막 장들에서 본 주제를 더욱 세밀하게 다룬다. 그러나, 그가 여기서 이 권면을 첨부하고 있는 것은 독자들이 낙담하여 “계속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계속 전진하는 데 필요한 것이 우리에게는 없어!“라고 말하지 못하게하기 위함이다. 물론 당신은 이런 말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떤 신자도 요단강을 건너가 원수를 정복하기에 충분한 힘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자비로우시며 “때를 맞추어 돕는 은혜“를 주시는 대제사장이 계신다.
저자가 이 시점에서 “보좌“를 언급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구절은 출애굽기 25장 17-22절에 나오는 황금으로 된 시은소와 관계가 있다. 법궤는 금으로 입힌 나무로 된 상자인데, 모세는 이 궤의 맨 위에다가 양쪽 끝에 그룹이 있는 황금 “시은소“를 두었다. 이 시은소가 하나님의 보좌였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영광 중에 좌정하셔서 이스라엘 민족을 다스리셨던 곳이다. 그러나 구약의 시은소는 은혜의 보좌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 민족은 율법의 멍에 아래있었기 때문이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요 1:17). 그리스도는 우리의 시은소이시다(요일 2:2-“화목제물“). 우리가 그리스도께 나아올 때는 심판의 보좌가 아닌 은혜의 보좌로 나오는 것이며, 그는 우리를 만나시고, 말씀하시며, 우리에게 힘을 주신다.
본 장을 다시 읽으면 우리가 구원을 잃으리라는 그런 경고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보다는 우리가 말씀과 기도 가운데 살 수 있도록 격려하기 위함이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신령한 가나안으로 인도하셔서 안식과 축복을 받게 하기 위함인 것이다."

He is a cross pendant.
He is engraved with a unique Number.
He will mail it out from Jerusalem.
He will be sent to your Side.
Emmanuel
Bible Verses About Welcoming ImmigrantsEmbracing the StrangerAs we journey through life, we often encounter individuals who are not of our nationa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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