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용
관용
디도서 3:1-2
관용 관용하는 그 배후의 마음가짐은 “안됐다. 측은하다, 어리석다, 실수하고 있다, 가련하다”이다. 세상은 끝났음에 불구하고 여전히 미완성된 채 불확실성이 남아 있다고 여기는 것은 세상을 대하는 자세가 바보 같습니다.
권력자란 그들의 원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더 센 권력에 의해서 다루어지는 자들입니다. 따라서 권력자들에게도
관용하는 자세를 보여야 합니다.
세상이 어떻게 시작해서 어떻게 끝난 자도 모르는 자와 사소한 세상 일로 인하여 다투거나 신경 쓸 필요는 없습니다. 성도의 이러한 마음 자세는 성도 자신이 사실상 이미 죽은 자라는 사실을 유일하게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더는 자기를 위해 사는 생애로서는 이미 끝난 겁니다.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후 5:15)
마치 학교 졸업생이 자기가 다닌 학교에 가서 거기에 있는 선생님이나 후배들과 굳이 싸울 이유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인생 자체를 ‘공부’라고 봅니다. 문제는 그 공부가 죽기 위한 공부가 아니라 살기 위해 요령부리는 공부라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아무리 길게 인생을 살고 넉넉하게 살아도 세상을 아직 졸업하지 않았기에 공포심이 여전히 활개칩시다. 이점을 주님께서 아시고 이 세상에 들어오신 겁니다.
골로새서 2:2-3에 보면,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을 학교라고 본다면 이 학교는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알게 하기 위하여 허락된 공간입니다. 여기에는 권력자도 있습니다.
그들의 관심사는 ‘그리스도의 비밀’이 아닙니다. 그저 이 세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그들과의 만남에는 엄격한 경계선이 형성됩니다. 같을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알려주어도 모르니 그저
관용뿐입니다. 졸업생의 입장에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