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하나님에게 용서를 구하는 것은 자기 가치를 계속 지속시키기 위함이다. 용서 후에는 자기 가치를 잃어버리게 된다면 구태여 용서받을 이유가 없다고 여기게 마련이다. 어떤 이가 아내에게 잘못한 일이 있어 용서를 구하는 장면을 생각해보자. 이 남자가 노리는 바는 용서 후에 현재 자신의 가치가 여전하기를 원하는 바이다. 만약에 용서는 받았지만 교도소에서 제 처벌을 다 받게 되고 사회적으로 매장이 되어버렸다면 이는 용서를 구태여 구한 효력이 없는 셈이 된다. 용서 후에도 당해야 할 것을 다 당했다면 용서의 실익이 없다고 보게 된다.
그래도 아내의 용서를 꼭 필요로 하는 것일까? 그럴 이유가 있을까? 참되게 용서를 구하는 마음이란 비록 아내가 용서를 거절하더라도 자신으로서는 섭섭해 하지 않아야 한다는 인식을 갖고 있어야 한다. 아내 앞에서 자신은 그 어떤 가치를 새삼 헤아리고 계산한 입장이 아닌 것이다. 심지어 아내가, 자신이 아내한테 한 행위보다 그동안 악독한 짓을 해왔음이 새삼스레 밝혀지더라도 그것을 빌미로 상호 용서 없이 사는 것을 정당하게 여겨서도 아니 된다. 왜냐하면 용서 유발자가 따로 계시기 때문에 상대방을 보고 취소할 수가 없는 것이다. 상대방을 보되 예수님을 의식해서 상대방에서 용서를 구해야 한다. 상대방의 접수 여하와 상관없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예수님 중심으로 일어나는 일인데 이로 인해 그 어느 누구도 타인을 용서할 입장에 있지 않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된다. 따라서 사람보고 용서를 구하지 말자가 아니라 도리어 그 반대다. 그 누구를 보고서도 미안하고 용서를 구하는 마음이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용서 안 받아야 상관없는 자신이 이미 주님으로부터 용서받았기에 그 용서는 나의 독보적인 가치 사수를 위한 용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누구에게도 용서를 구한다는 것은 “저에게는 저 자신을 지킬 만한 그런 가치가 남아 있지 않습니다.”는 선언을 하는 바가 된다.
재판장에서 판사가 피고에게 언도를 내리면서도 내심 용서를 구하여야 하고, 언도 받은 피고도, 자신의 번거로운 일에 개입해서 언도내리는 힘든 업무를 수행케 한 그 판사에게 미안함과 동시에 용서를 구해야 한다. 비록 서로가 용서가 성립되는 그런 관계는 아니지만, 우리의 용서 여부 이전에 이미 따로 예수님이 용서가 활동하고 있음을 그런 식으로 증거되어야 한다.
용서의 통용, 예수님의 용서만 가치 있게 남고 다른 가치는 일체 용납하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단언 같은 것이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 3:36)
따라서 성도는 자신의 가치성에 근거해야 타인을 용서해서는 아니되기에 평소에 자신마저 주님의 판단에 맡기는 것처럼, 타인이 나에게 요구하는 대로 “당신이 나의 가치를 계속 보장해주시고 인정해 주세요”라는 요구에 응하지 않고 주님께 그 사람의 운명을 예수님께 맡겨버린 행위를 행사한 것에 대해서 그 타인에게 양해를 구해야 한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마 6:12-13)
이로서 서로가 주님 십자가 피 앞에서 다들 무(無)-가치한 존재임을 표해야 한다.
He is a cross pendant.
He is engraved with a unique Number.
He will mail it out from Jerusalem.
He will be sent to your Side.
Emmanuel
Bible Verses About Welcoming ImmigrantsEmbracing the StrangerAs we journey through life, we often encounter individuals who are not of our nationa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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