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이라는 최면

믿음이라는 최면

최면이라는 것이 있다. 최면은 최면을 거는 권위자와 그의 말을 받아들이기로 허락한 피최면자 사이에서 일어난다. 최면은 거부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최면은 기꺼운 허락을 필요 요건으로 한다. 피최면자는 내면화된 권위자의 명령을 신체 운동으로 확인해 나가면서 강화시킨다. 처음에는 당연한 손가락의 움직임에서 스스럼 없이 옷을 벗기까지 권위자는 피최면자를 정복해 나간다.


 


우리가 만든 관념은 모두 권위자가 최면을 위해 사용한 명령들이다. 태어난 것은 몸이지 [나]라는 관념이 아니다. 나라는 관념은 권위자인 부모, 선생님, 친구, 종교지도자 등과의 [관계]에서 내 몸을 인정받고 수용되는 쪽으로 계산한 결과물이다. 예컨대, 나는 조용하고 사색적인 것이 좋아서 어두운 방에서 혼자 깊은 생각에 빠져 있는데, 엄마는 애들은 밖에 나가서 실컷 뛰어놀면서 자라야 한다면서 성화다.


 


그런 환경이 지속되면 내 몸은 엄마에게 인정받는 쪽으로 [나]를 구성한다. 아직 고집하고 주장해야 할 내가 없는 유아기 때의 이러한 상처와 적응은 본질을 왜곡하여 존재(몸)에게 유리한 쪽으로 일정한 패턴을 구성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성격]이다. 즉, 성격은 원래 그 사람의 본질이라기 보다는 그 몸이 다른 사람들과 맺어온 관계의 부산물인 셈이다.


 


그렇다면, 일단 자아가 확고히 형성되면 본질에 집중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일단 자아가 형성되면 그 자아가 스스로 법이 된다. 로마서 2:14의 말씀처럼, 스스로가 자신에게 율법이 되는 구조다. 즉, 나는 나로써 나를 형성해 나가고자 한다. 그런데 문제는 원래 있던 것은 나라는 관념이 아니라, 몸이었으므로, 눈에 보이는 타자를 통해서 나를 구성하고자 나서고, 그 결과물을 모아서 다시 나라고 규정하는 순환이 생긴다.


 


타자 역시 몸과 타자의 자아로 구성되어 있으나, 몸의 장벽으로 인하여 나는 타자의 나를 경험할 수 없다. 타자의 나를 경험하기 위해서 [언어]를 사용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그림자일 뿐 실체가 아니라서 괜한 오해만 더 생긴다. 오해를 풀기 위해 말을 많이 할수록 오해가 더 쌓이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타자의 모든 것을 존재로서 느낄 수 밖에 없다. 즉, 감각기관으로서의 몸을 나라고 인식한 채 평생을 살아간다. 입력된 감각 정보에 눈치 빠르게 시의적절한 운동을 출력해 나가는 것이 나의 실체이다. 즉 나는 액체처럼 환경에 따라 변형되고 흘러내린다.


 


이렇게 흘러내리는 액체가 주장하는 복음이 과연 참 복음일 수 있을까? 늘상 다른 복음 그러니까 저주를 양산해 낼 수 밖에 없는 공장일 뿐 아닐까? 흐느적 거리면서 고정된 실체를 찾아 나서는 상태가 바로 [어리석음]의 상태이다. 추방된 이후로 자신을 인정해주고 위로해 줄 실존을 찾는 것이 액체 인간의 운명이다.


 


액체 인간을 가두워 둘 수 있는 유일한 댐이 바로 십자가 지신 예수님의 몸이다. 예수님의 몸으로 흘러들어온 액체는 [나]의 죽음을 맛본다. 정확히 [나]라고 스스로를 칭할 수 있는 분이 십자가 지신 예수님 뿐이라는 사실에 경악한다. 나는 나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저 육으로서의 단백질이며 호르몬 작용이었던 것이다. "나는 구원받았습니다."라는 말은 실상 뇌 호르몬이 구원받았다는 것이었다. "나는 믿습니다."라는 말은 권위자가 심어준 최면 효과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갈라디아서 3장에서는 믿음이 오시기까지 세상을 죄 아래로 갇아두었다고 간략히 정리하고 있다. 그렇다. 믿음은 인간의 심리 상태가 아니라, 어떤 인물이었던 것이다. 믿음이 세상을 방문해 주신다는 것은 그 동안 세상에서 유통되었던 믿음은 믿음 아니었음을 확정하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2:20이 나에게 또 다시 율법으로 작용할 줄 누가 알았을까? 성령이 아니라면 누가 이것을 책망할까? 갈라디아서 2:22을 암송하고 있는 것 역시 계속 예수의 몸에 생채기를 내고 있는 폭력적 운동출력인 것을, 인간 언어의 장난임을 하나님의 어린양의 죽음이 아니고서는 생매장할 수 없다.


 


내가 스스로에게 율법이 되어 몽학선생까지 자란 후 믿음으로 오신 분을 살해하기까지 세상은 나에게 결혼하라 하고 장사하라 하면서 즐기라고 한다. 십자가 조차 어떤 신학의 장난감이라고 한다. 그런 인간에게 저주보다 합당한 대우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짜 몸을 이끌고 죽기까지 복종하신 하나님의 아들을 사랑이라고 부르는데 주저할 필요가 있을까? 그의 피가 떨어진 헛깨비들을 성령은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쓰고 성도라고 읽는다. 


 


최면이야기가 나온 김에 한 가지 더 하고 싶은 말은, 의식과 무의식을 구분하고 무의식 속에서 참된 자아를 만날 수 있다는 시도이다. 의식과 무의식이란 없다. 그냥 자신의 생각을 쑤셔넣기 위해 이름 상자가 필요했을 뿐이다. 의식과 무의식 전체를 통합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아주 좋은 단어를 추천한다. 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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