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교와 기독교의 구원관의 차이점 무엇인가?
16세기 종교 개혁의 중대한 논쟁 가운데 하나가 구원론이다. 구원론 중에서도 특별히 칭의와 성화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느냐에 대한 논쟁이 가열되었다. 로마 가톨릭에 의해서 왜곡된 구원의 진리를 종교개혁자들이 재발견함으로 말미암아 개신교가 출범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서 우리가 먼저 살펴보아야 할 것은 중세 로마 가톨릭의 구원론이 종교개혁자들의 견해와 어떻게 다른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로마 가톨릭에서는 행위를 강조함으로 행위 구원의 성격이 짙고, 개신교는 전적인 은혜로 구원 얻는 것을 강조한다는 식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두 입장을 이렇게 단순 비교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이런 단순한 태도는 로마 가톨릭의 가르침이 분명히 포함하고 있는 구원에 있어 은혜를 강조하는 측면을 무시한 정당하지 못한 평가이다. 로마 가톨릭도 은혜를 강조한다. 종교개혁 당시 개혁자들과 로마 가톨릭의 신학자들은 양측 다 각각 자신들이 초대교회 전통과 가르침을 충실하게 따르고 계승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그들은 초대교회의 권위 있는 가르침에 호소하였다. 특별히 바울의 가르침, 로마 가톨릭에서 아주 대표적으로 권위 있는 초대 교부로 인정하는 사람인 어거스틴의 가르침에 의존했던 것이다.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는 모두 자신들의 신학의 바탕이 성경적, 사도 적 초대 교부적인 전통을 그대로 승계하고 있다고 주장해야 자신들의 정통성이 입증된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 모두 특별히 어거스틴의 말에 많이 의존하고 호소하였다.
어거스틴의 구원론의 기본적인 입장은 무엇인가?
어거스틴는 구원의 전 과정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이루어진다고 주장했다. Augustine: “The whole prosess of salvation is by God's Grace.” 구원의 전 과정이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진다는 어거스틴 구원론의 기본적인 입장을 가톨릭 신학자들도, 개혁자들도 서로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과연 이 양자의 주장이 타당성이 있는가? 먼저 종교개혁자들의 이러한 주장이 어떤 면에서 타당성이 있는지 살펴보자.
종교개혁자들의 입장
1) 죄에 대한 교리(The doctrine of sin)
먼저 종교개혁자 루터는 어거스틴의 어떤 입장을 따르고 있는가? 종교개혁 당시 루터는 대표적인 중세의 신학자, 휴머니스트, 로마 가톨릭 신학자, 인문주의자인 에라스무스와 자유의지 논쟁을 벌였다. 에라스무스는 가톨릭 신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의 가르침과 전통을 따라서 우리에게는 자유의지가 완전히 손상되지 않고 어느 정도 남아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그는 우리가 예수를 믿을 수 있고 하나님을 선택할 수 있고, 회개할 수 있고 하나님의 명령을 지킬 수 있다고 했다. 만약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다면 복음의 모든 요구를 인간이 수행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루터는 에라스무스와의 논쟁 가운데서 씌어 진 ‘자유의지의 속박’(“Bondage of Will”)에서 루터는 인간에게 자유의지, 육신을 넘어서 영적인 것을 생각하는 자유의지가 없다고 주장했다. 타락한 인간은 자유의지가 있는 것 같지만 그것은 오직 죄의 범주, 육신의 범주에만 국한되어 있다. 우리가 육신의 일을 추구할 때는 무한한 자유를 누리지만 육신의 범주를 넘어서 영적인 것을 추구하고 생각할 때는 자유가 없다고 보았던 것이다. 루터는 인간은 결국 죄의 속박 가운데서 육신적, 세상적인 것을 좇는 데만 자유롭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한마디로 인간은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에서 “Bondage of Will”이다.
이런 루터의 입장이 어거스틴과 어떤 연계성이 있는가? 루터의 주장에서 우리는 어거스틴과 어떤 공통점을 발견 할 수 있는가? 어거스틴은 펠라기우스와 논쟁하면서 자신의 신학을 발전시켰다. 펠라기우스는 에라스무스와 비슷하게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다고 주장했다. 펠라기우스는 전적인 타락과 원죄를 부인한다는 점에서 에라스무스와 약간 다르다. 에라스무스는 원죄를 인정하며 자유의지가 부분적으로 손상되었다는 점을 인정했다. 어거스틴은 펠라기우스와의 논쟁에서 유명한 말을 남겼는데: 그것은 “Posse non Peccare(possible not to sin)”이다. 이 말은 인간은 타락하기 전에는 죄를 안 지을 수 있는 자유의 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타락하고 난 뒤에는 죄를 안 지을 수 있는 자유의지와 특권을 상실하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이런 점에서 어거스틴의 죄악론(the doctrine of sin)의 기본적인 입장을 루터(칼빈도)가 그대로 따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들은 자유의지가 손상됨으로 말미암아 죄에서 돌이켜서 복음을 듣고 믿기로 스스로 선택할 수도 없다는 어거스틴의 기본적인 입장을 따랐던 것이다.
2) 은혜의 교리(The doctrine of grace: prevenient grace / cooperating grace)
두 번째로 종교개혁자들은 어거스틴의 죄악론과 연계해서 어거스틴의 은혜론도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 어거스틴 죄악론의 당연한 논리적인 귀결은 무엇인가?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선택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선재적으로 역사하셔야 한다. 먼저 우리를 불러 주셔야만 우리가 비로소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믿을 수 있다는 것이다. 어거스틴는 하나님의 선재적인 은혜(prevenient grace)의 강조한다. 즉 우리 안에 자유의 능력을 상실되었기 때문에 선재적 은혜가 먼저 역사해서 나의 자유로운 선택에 함께 하는 것이다. 루터와 종교개혁자들은 어거스틴의 이런 개념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가톨릭 신학자들의 입장
그렇다면 로마 가톨릭의 주장은 어떤가? 이들도 어거스틴의 입장을 따르고 있다고 스스로 주장하고 있는데 어떤 면에서 일리가 있는가?
1) 믿음(Faith) +사랑( Love)
어거스틴은 항상 믿음을 이야기할 때 바울이 갈 5:6(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 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에서 강조하여 말한 것처럼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faith working by love)으로 말미암아 구원 얻는다고 하였다. 이 말은 실제적으로 내 안에 변화를 일으키는 믿음만이 우리에게 변화를 일으킨다는 뜻이다. 어거스틴은 루터나 칼빈처럼 칭의를 법정적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이 점이 종교개혁자들과 다르다. 어거스틴은 법정적 칭의 개념을 언급하기는 하지만 법정적, 신분적으로 뿐만 아니라 실제적으로 의롭게 된다고 보았다. 참된 믿음은 항상 사랑으로 역사하기 때문에 사랑의 열매가 있어야 나의 믿음이 참 믿음으로 입증이 되고, 이렇게 살아있는 믿음, 사랑의 열매를 산출하는 믿음만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믿음이라고 어거스틴은 주장하였다. 어거스틴의 이런 입장은 로마 가톨릭 신학자들의 주장에 그대로 나타난다. 상당히 일리가 있지 않은가? 로마 가톨릭은 단지 법정적인 의미로만 칭의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변화(made righteous)로 이해한다. 이렇게 되면 칭의는 계속적이고 변화되어야 한다. 개신교는 칭의를 단회적인 것으로 보는 반면 로마 가톨릭의 칭의 개념은 계속적이다.
2) 공로사상(The concept of merit)
로마 가톨릭은 공로사상을 주장한다. 어거스틴의 가르침에 의하면 우리의 신앙생활의 전 과정에 있어서 처음과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만이 중요하지만 그 중간에는 인간의 행위와 반응, 책임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런데 어거스틴의 입장에 의하면 여기서 말하는 행위는 인간의 자력에 의한 산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행위인 것이다. 육신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행위이기 때문에 이것도 하나님의 은혜라고 보았다. 여기서 더 나아가 하나님 은혜로 우리는 행위의 열매를 얻는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의 열매에 상급을 주신다는 생각을 하였다. 이것도 상당히 일리가 있다. 성경적 근거도 있다. 여기까지는 상당히 건전하고 성경적이다.
그런데 이후 1000년 동안 로마 가톨릭에서 공로사상이 발전하면서 어거스틴의 입장이 로마 가톨릭에 의해서 왜곡 발전되었다. 로마 가톨릭은 종교개혁의 시기에 들어오면 참담한 공로사상이 교회를 지배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두 가지 측면에서 로마 가톨릭 신학자들이 어거스틴 구원론의 입장을 계승하고 있다는 그들의 주장이 나름대로 타당성이 있음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로마 카톨릭은 오직 은혜로만 구원 얻는다는 어거스틴의 입장을 명제적으로는 따르고 있지만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인간의 공로사상이 들어 있다.
3) 구원 = 전가되는 은혜(imputed grace) + 주입되는 은혜(infused grace)로 주장한다.
로마 가톨릭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한다. 전가되는 은혜는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법적으로 전가된 의미로 본다. 그 반면에 주입되는 은혜는 실제적으로 우리를 변화시키는 은혜라는 것이다. 전자는 믿음으로 주어지고 후자는 우리 안에 실제적인 변화를 일으킴으로 말미암아 거룩함(선행, 인격)의 열매로 나타난다. 로마 가톨릭은 인간의 선한 행위를 강조하지만 이것은 인간의 육신의 산물이 아니라 주입되는 은혜(infused grace)의 산물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의 주장 역시 행위 구원으로만 볼 수는 없는 것이다. 이들의 구원관은 한 마디로 “믿음+거룩”이다. 이들은 이 두 가지가 필수적으로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뭐가 잘못되었는가?
그러나 우리의 믿음은 우리의 거룩함이 아니라 예수님의 거룩함에 의존하는 것이다. 이것이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참된 믿음은, 살아있는 믿음은 거룩함의 열매를 반드시 맺어야 한다고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다. 거룩함의 열매가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이렇게 보면 우리 개신교의 구원관에도 믿음뿐만 아니라 거룩함이 아주 중요하다. 거룩함은 선택요소가 아니라 필수 요소이다. 이렇게 보면 로마 가톨릭과 우리의 입장이 같은 것 아닌가? 그런데 왜 이렇게 큰 분쟁과 논쟁이 일어났는가?
로마 가톨릭의 논리적인 구조에 의하면 거룩함이 일차적으로 더 우선적으로 구원의 조건으로 이해되기 쉽다. 중세 교회에서는 이런 오해가 공로사상, 연옥사상, 마리아 사상과 같은 오류들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즉 로마 카톨릭은 인간의 거룩함이라는 믿음의 필수 요소가 실제 교인들의 삶 속에서 마치 구원의 조건처럼 오해되고 있다는 점을 우리는 지적해야 한다.
그러나 개혁주의자들은 이 거룩함이 조건이 아니라 필수적이지만 그것은 일차적으로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결과로 이해한다. 거룩함이 참된 믿음에 반드시 있어야 하지만 그것은 조건이 아니라 열매인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확실히 해야 한다.
거룩함을 조건으로 보느냐, 열매로 보느냐가 말 한마디 차이 같지만 이는 엄청나게 심각한, 실제적인 차이를 낳을 수 있다.

He is a cross pendant.
He is engraved with a unique Number.
He will mail it out from Jerusalem.
He will be sent to your Side.
Emmanuel
Bible Verses About Welcoming ImmigrantsEmbracing the StrangerAs we journey through life, we often encounter individuals who are not of our nationa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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