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선교와 교세확장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에 너희는 생명을 위해 짐을 지고 예루살렘 성문으로 들어오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유럽 선교와 교세확장>중세기 초기에는 선교의 열정이 있었다. 남쪽으로 밀려오는 북방의 민족을 복음으로 막으면서 하나님의 나라가 성장하는 역사가 있었다. 그리고 선교사를 파송하였으니 596년 교황 그레고리가 그의 친구이자 수도사인 어거스틴(Augustin)을 영국의 앵글로색슨족을 복음화 하기 위하여 로마에서 선교사로 파송하였다.그레고리가 아직도 교황이 되기 전에 하루는 노예시장에서 용모가 수려한 소년 포로를 발견하고 그들의 출신국가의 임금이 누군가 물었다. 그들은 앵글인(Angles)이라고 대답하고 임금 이름은 엘라(Ella)라고 대답하였다. 그레고리는 '앵글'을 엥겔(Angel)로 해석하고 '엘라'를 할렐루야(Hallelujah)로 받아들이고 로마의 감독에게 찾아가서 자신을 영국의 선교사로 파송하여 줄 것을 간청하였다. 그러나 그의 간청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 후 그가 교황이 되자 그 자신이 가지 못한 대신 후계 수도원장인 어거스틴을 파송하기에 이르렀다. 캔터왕 에델버트(Ethelbert)의 처는 프랑크 왕의 공주로서 기독교를 믿고 있었다. 캔터베리 지방은 이때부터 오랫동안 영국 기독교의 본산이 되었다.9개월의 선교활동에 1만 명이 개종하였고 어거스틴은 성 마틴(St. Martin)교회에 캔터베리(Canterbury) 본부를 설치하였다. 여기에서 영국의 종교생활과 밀접한 연관을 맺어온 대성당이 육성된 것이다. 604년 멜리투스(Mellitus)는 성 바울 교회를 설립하고 초대 로마 감독이 되었다. 이때가 597년 11월 16일이었다. 604년 그가 죽을 때 왕은 비문에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겨 그의 업적을 찬양하였다. "여기에 로마의 감독 그레고리에 의하여 파송된 캔터베리의 대주교 어거스틴이 누워있다. 그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에델버트 왕과 영국을 우상 숭배로부터 그리스도의 신앙으로 돌아오게 했다."영국 초대교회의 중추인 두 인물이 있다. 비다(Beada)와 케드몬(Caedmon)이다. 비다는 영국의 학문의 시조라고 불려지고 있다. 일생을 수도원에서 조용한 생활을 하며 보냈다. 배운바가 많고, 천문, 물리, 음악, 의학 등에 통달한 사람인데 그의 업적 중 가장 중요한 저술은 '영국 교회'인데 영어로 기록한 가장 오래된 책이다. 캐드몬은 영국에서 가장 오랜 시인으로서 그의 요크 왕국의 윗트비 수도원의 종으로 지내면서 늙기까지 시를 썼다. 그 시는 천지창조로 시작되어서 그리스도의 전 생애와 미래의 심판에까지 미치었다. 영국국민의 문학은 이 종교시로 시작이 되었다.영국에서 일어난 성공적 선교의 결과는 대륙에서도 볼 수 있었다. 아일랜드와 아이오나 섬은 유럽선교의 중심지가 되어 많은 선교사들을 파송하였다. 게르만 민족의 선교를 위하여 아일랜드로부터 많은 선교사들이 파송되었다. 고울지방의 선교를 위하여 콜럼바너스(Columbanus)의 일행이 떠났고 프리지아(Frisia) 선교를 위하여 윌리브로드(Willibrord)가 활약하였다. 이들을 이어 가장 뛰어난 선교업적을 남긴 선교사는 윈프리드였다. 그는 로마에 가서 그레고리 2세를 만났고 그 후부터 로마교회의 충성된 종이 되어서 로마의 예전과 법도를 배우고 719년 게르마인에게 전도할 사명을 띄고 프랑크인의 왕국으로 들어갔다.그는 먼저 튜링겐과 헷센 지방에 전도하고 영국으로부터 남녀 수도자를 초청하여 전도에 협력케 하였다. 732년 교황은 그를 게르만 지방의 대 감독으로 임명하고 감독 임면의 권한을 주었다. 감독은 독신 생활을 지키게 하고 수도원에서는 베네딕트의 규칙을 행하게 하고 모두 엄격하게 로마의 법도를 따르게 하였다. 지금까지 이곳에 있었던 교회에는 아직 조직 훈련의 실적이 없었고 교직자의 수준이 낮았으므로 보니파큐스는 자기를 반대한 사람들과 싸우지 않을수 없었다. 그러나 프랑크왕 피핀이 그를 도왔음으로 안과 밖으로 위대한 업적을 성취하고 프랑크 왕국 교회의 최초의 대회를 여는데 이르렀다. 이 대회에서 대 감독의 거주지는 마인츠로 정해졌다.그는 또 많은 수도원을 세우고 이와 관련하여 학교를 개설하고 이를 선교의 중심지로 삼았다. 738년 로마 여행을 마친 다음 바바리아 지방에 교회를 세우고 네 교구로 나누어 각각 감독을 임명하고 그 다음에 또 다른 지방에도 교회를 세워 라인강 동부에서 다뉴브강 북쪽으로 이르는 광범한 지역을 복음화 시킬 뿐만 아니라 로마 교황에게 귀속하였다. 744년 제자인 스트롬(Strum)을 도와서 풀다에 수도원을 세워 일꾼을 양성하였다. 풀다의 베네딕트 수도원은 후에 독일 중서부 전역에서 성직자 양성 및 학문연구의 중심지가 되었다. 746년 마인츠의(Mainz) 대 감독이 되자 독일에서 가장 모범적인 선교활동의 본거지로 삼았다. 윈프리드의 활동 상황은 그가 남긴 서신들에서 명료하게 소개되어있다.그의 지도력은 흩어진 지역 교회들을 연합시켜 일사불란한 행정체제 아래 모은 조직력에서 나타났다. 눈부신 선교 업적은 그의 탁월한 선교전략에서 설명되고 있다. 그는 먼저 왕과 지역의 유력자들에게 먼저 전도하여 전 부족의 일시 개종에 힘을 썼다. 그의 선교전략의 특이점은 여자 전도자를 남자 전도자 못지 않게 활용하였다. 가정에 파묻혀 노출이 극히 제한된 중세의 여인들을 접촉하는 최선의 길은 수도원에서 훈련된 수녀들을 수도원 밖으로 나가게 하여 전도하는 일이었다.밖으로는 적극적으로 전도하고 안으로는 수도원 생활에 엄격한 베네딕트 규칙을 적용하여 규율 있는 생활을 하게 하여 성직자의 기강을 높였다. 그는 또 영국 본토에서 몰려온 많은 전도자들을 훈련시켜 일하며 전도하게 하는 일을 잘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