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생애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에 너희는 생명을 위해 짐을 지고 예루살렘 성문으로 들어오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바울의 생애

 

A. 바울의 출생과 성장

바울은 세례요한, 예수와 동시대에 태어났으며 그가 태어난 세계는 급속한 변화와 확장의 시대라고 볼 수 있다.실재적으로 바울의 출생은 사도행전 21장 39절과 22장 3절에 나타나는 누가의 보도를 통해 보면 길리기아 지방의 수도인 다소에서 태어났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그는 사도행전 22장 3절의 보도를 볼 것 같으면 율법교사인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율법을 엄하게 교육받았다고 되어있다. 이것이 진정한 것인지는 아직 해결된 바가 없지만 예루살렘과 연관시키려는 누가의 의도라고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누가는 바울의 어린 시절부터 예루살렘과 관계를 갖게 함으로써 예루살렘측과 바울측의 화해에 긍정적인 역할을 하도록 시도하고 있다.결국 확실하게 바울의 배경을 알 수 있는 것은 바울 스스로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는 것이다. 빌립보 3장 5절에서 6절에 바울은 자신의 정체를 세밀히 밝히고 있다. 바울은 자신을 "팔일 만에 할례를 받았고, 이스라엘 족속이며 베냐민의 지파이고 히브리인중의 히브리인이며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며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자" 라고 소개하고 있다.

B. 다메섹에서의 소명

바울이 새로운 소명에 눈을 뜨게 되는 계기를 다메섹 사건이라 부르고 있다. 연대적으로는 약 32년경에 이루어진 일로 볼 수 있다.사도행전은 바울의 다메섹 사건을 상당히 드라마적으로 서술하고 있고 누가는 바울의 소명보다는 기적적인 사건만을 강조하고 있다.다메섹에서 바울은 주의 현현을 경험하고 보지 못하게 되어 제자 아나니아에 의해 치료를 받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제자들과 사귀게 된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소명을 받게 된다. 이것은 누가의 신학적 의도를 감안하여 읽어야 한다. 누가는 바울의 소명을 예루살렘과 연결시킴으로써 예루살렘교회와 바울 교회와의 견해차를 해소해 보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이러한 사도행전적인 바울의 묘사는 갈라디아서에 나타난 것과는 상충된다. 갈라디아서 1 장에서 바울은 자신의 다메섹사건을 해석하면서 그 사건은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속에 나타내신 " 사건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다메섹 사건을 소명과 연결시키고 있는 것이다.그와 바울은 자신의 복음과 사도권은 하나님으로 부터 직접 소명으로 받은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이러한 바울의 진술을 토대로 볼 때 다메섹 사건을 회심이라기 보다는 소명에 강조점을 두는 것이다. 왜냐하면 바울이 세계선교에 나서게 된 것은 복음에 대한 소명을 통해서이기 때문이다.

C. 예루살렘 회의

초대 기독교 역사에서 예루살렘회의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예루살렘회의에 대한 기독은 사도행전 15장 1절 - 29절과 갈라디아서 2장 1절 - 10절에 나오는데 갈라디아서는 바울이 그의 변증의 목적에 맞게 그 사건을 해석하였으며 사도행전은 누가의 신학적의도에 따라서 바울의 보고와는 상당한 차이점을 보여주고 있다.예루살렘 회의가 개최된 시기는 대체적으로 주후 48년경으로 보고 있다. 그 회의가 있게 된 주된 이슈는 할례와 토라에 관한 것이었다. 이러한 이슈에 대한 입장은 대개 세가지로 분류될 수 있었다.그 첫째는 바울의 반대파로 대표되는 보수적 유대 그리스도인들이다. 이들은 이방인도 할례와 토라의 범주안에 들어와야 된다는 강한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유대교와 기독교의 경계선을 구태여 그을 필요가 없다고 보는 파들이었다.둘째로는 예루살렘 지도부인데 그들은 게바로 대표되는데 실제적으로 야고보가 실세를 장악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들은 바울교회에서 문제들은 일으킨 흔적들이 보인다. 그러면서 바울보다는 보수파에 상당히 기울었다.세번째 그룹은 바울과 바나바이다. 이들은 형식적으로는 안디옥교회의 대표로서 파견되었지만 실상 이방인 선교의 실권을 쥐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들은 결코 할례와 토라를 이방인에게 지울 수 없다는 강경한 입장을 취했고 전략적으로 첼라인 디도를 데리고 들어가서 그를 할례받지 않게 함으로 공인을 얻으려고 했다.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보도하는 바에 다르면 이 회의에서 보수파는 대패했고 예루살렘축과 바울축이 손을 잡게 되었다.

D. 바울의 선교여행

바울은 자신의 서신서에서는 구체적인 선교 일정에 대해서 밝히지 않고 있다. 단지 우리는 사도행전을 통해서 여정을 복원할 수 있을 따름이다.제 1 차 시기에는 약 47년경으로 바울과 바나바가 함께 동역을 하게 된다. 이 1 차 전도여행에서는 요한 마가의 선교여행에 동참하여 그의 거취가 바울과 바나바 사이의 문제를 유발시킨다.여러 이유 때문에도 2차 여행(약 49년)부터는 바울과 바나바가 갈라서게 된다.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구브로를 향하고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향하게 된다. 갈라디아서에서는 바울이 의도적으로 헬라인 디도에게 할례를 행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바울 일행은 우회하여 드로아에 내려가게 되는데 마게도냐 사람의 환상을 보게 된다. 마게도냐의 첫관문인 빌립보에 이르러 유럽의 첫교회를 개척하는 사역을 이룩한다. 3차 여행(약 52년경)은 안디옥에서 출발하여 갈라디아와 브루리가 지역을 순방하며 교회를 굳게 하고 에베소에 들러서는 두란노 서원에서 가르치면서 2년 동안을 목회를 한다.

 

이 기간은 연대적으로 52년 부터 55년까지로 볼 수 있다. 드로아를 거쳐, 앗소, 미둘레네, 기오, 사모, 밀레도를 경유하여 고스, 로도, 바다라를 거쳐 두로에 상류한다. 돌레마이를 거쳐 가이샤라를 경유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거기서 체포된다. 이 때가 약 56년 봄 쯤으로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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