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성경해석 쓸모있니?

그 성경해석 쓸모있니?

산업혁명은 대량생산 대량소비 사회를 가능케 했다. 초기 산업자본주의사회의 이러한 대량구조의 원동력은 다름아닌 인간의 노동력이었다. 인간은 노동력을 제공함으로써 존재의 이유를 찾았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서로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이렇게 묻기 시작했다.


 


"너, 뭐 좀 할 줄 아니?"


 


인간의 쓸모있음이 인간의 가치를 가로채 버린 것이다.


 


그런데, 모든 인간의 마음 바탕에는 한 가지 믿음이 있다. 인간은 그 자체가 수단이 아닌 목적이어야 한다는 믿음이다. 무엇을 할 줄 알기에 인간이 아니라,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그 자체로 존엄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존엄한 인간은 최대한 자유로와야 하고 모두 평등해야한다.


 


여기서 심한 모순이 등장한다. 대량생산의 노동력 제공자로서, 대량소비의 주체로서 무엇인가 할 줄 알아야만 한다는 '수단성'과 그렇지 못하더라도 인간이기에 존중받아야 한다는 목적성과의 괴리가 심각해 지는 것이다. 수단인 인간상을 추종하는 사회의 단면은 전문가, 자격증, 지식검색 등의 단어에서 쉽게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목적인 인간상은 각종 복지제도와 소비를 부추기는 광고문구에 가득하다. 그래서 현대인은 수단성과 목적성 사이에서 오락가락 방황한다. 그 방황의 종착점이 바로 재물이다.


 


재물이 인간의 해결책이 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자본주의 사회에 쓸모있으면서도 동시에 존엄한 목적으로서의 인간이 되기 위해 자아는 분열을 감행한다. 재물은 인간이 제공하는 노동력의 결과물이다. 동시에 그 결과물인 재물이 많을 수록 인간은 이 사회에서 존중받고 중요한 인물이라고 평가된다. 즉 목적성까지 충족시키는 것이다. 인간이 수단임과 동시에 목적으로써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재물이 도와준다. 분열된 자아는 재물때문에 하나로 통합된다. 재물에게 종속되면 되는 것이다. 재물은 사람을 사람답게 미치도록 한다.


 


재물이 사람을 미치도록 하는 구조는 기계의 등장으로 더욱 확고해졌다. 현대자본주의를 지탱하기에 인간의 노동력은 턱없이 부족하다. 기계는 노동력을 대체하기 시작한 이후 꾸준한 성공을 거두웠다. 기계의 등장에는 많은 전문가가 필요하다. 전문가를 양성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 그 전문가를 채용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돈이 필요하다. 그들이 쓰는 연구개발비는 가히 천문학적이다. 결국 기계는 자본의 피조물이다. 재물은 기계를 잉태하여 인간을 더욱 재물에게 종속케 한다. 왜냐하면, 기계와 비교할 때 자신의 쓸모있음이 쓰레기로 전락한 인간에게 재물은 기계를 지배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기 때문이다. 돈이 있어야 기계를 사들이고 사용할 것이 아닌가.


 


기계와 경쟁하는 기능인으로서의 인간에게 더이상 승산은 없다. 차라리 자기목적성에 사활을 거는 편이 훨씬 유리하다. 이 대목에서 등장하는 것이 바로 종교이다. 종교는 인간이 인간 자체로서 의미있다고 한다. 그 중 성경의 여러 구절은 매우 유혹적이다. 집약하면 이렇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하나님의 형상!


 


기계와의 싸움에서 패배가 확실하니까 결국 재물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할 판! 하지만 재물은 쉽게 얻어지지 않고 점점 자신의 존재가치는 땅으로 바닥으로 지하까지 추락한다. 이 때 들려오는 감미로운 노래가락!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하나님의 형상! 이 얼마나 인간의 가치를 드높이는 명언인가. 하나님의 형상만큼 인간의 가치를 고양하는 것이 또 있을까.


 


기독교인들 또한 인간이기에 이러한 인간의 처지를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세상은 기독교인들에게 이렇게 묻는다.


"너 뭐 할 줄 아니?"       


기독교인들이 대답한다.  "나, 성경해석 할 줄 안다."


세상이 또 묻는다.  "그 성경해석 쓸모 있니?"  


기독교인들이 다시 대답한다.  "응, 인간을 인간답게 한다."


 


결국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성경해석이 현대 교회의 정수이다. 교회는 인간의 외로움을 달래 줄 논리를 성경에서 흡혈한다. 기계에 밀리고 다른 돈있는 자에게 밀리고 계속 밀린 인간이 신(목적 자체)이라는 좌표를 성경에서 부여받을 수 있도록 말이다.


 


과연, 성경은 인간에게 이런 의미를 부여하고 있을까?


안타깝게도 인간은 처음부터 흙이었다. 아담이라는 이름자체가 의미를 소멸한 채 등장한다. 아무것도 아님! 그냥 흙!


흙은 토기장이를 만나야 그 의미를 부여받는다. 토기장이가 그 흙의 용도를 결정한다. 흙은 토기장이에게 그 어떤 것도 요구할 권리가 없다.


 


성경은 단 사람이 독점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토기장이가 바로 그 분이시다. 그래서 성경은 아주 노골적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적고 있다. 이 성경은 바로 예수님 자신을 증거하기 위한 책이라고 말이다. 인간은 바로 그 증거물로서 초대되거나 추방될 뿐, 스스로 자신의 목적을 찾아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떻게 예수님께 호출될까? 어떻게 추방될까? 그 초대와 추방의 기준은 무엇일까?


예수님께서 사도바울을 어떻게 자신에게로 초대했는지 살펴보면 오늘날 성도 또한 그런 방식으로만 부르고 계시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사도바울을 초대하실 때 그 초대장에 이렇게 쓰셨다.


 


"나, 예수를 핍박하는 사울!"


 


그렇다. 예수께서 어떤 인간을 대하실 때, 그 인간은 바로 나, 예수를 핍박하는 자로서만 부르신다. 즉, 십자가 현장에서만 부르신다. 십자가만인 초대와 추방의 유일한 잣대이다. 지금 내가 들고 있는 그 창날과 예수님 자신의 상처를 맞추어 보신다. 지금 내 옷에 묻어있는 피자국이 예수님 자신의 피와 동일한 것인지 정밀 분석하신다. 예수의 얼굴에 묻어있는 침이 바로 나의 것이라며 구강세포를 확인하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 있는 그 창자국은 내 손에 들려진 창과 일치한다. 그 몸에서 튀어나온 피가 내 옷을 흠뻑 적신 그 피 맞다. 인간은 하나님을 살해한 자 맞다. 그 증거물 앞에서 아무런 변명도 통할 리 없다. 오히려 내 혀가 나의 죄를 직고할 뿐이다.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만 연발할 뿐이다. 침묵만이 아우성칠 뿐이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이 말씀은 현대 자본주의를 살고 있는 성도의 가슴을 후벼 파낸다. 결코 내가 재물을 벗어날 수 없음과 동시에 이미 하나님을 멀리 버렸다는 사실만을 확연히 인식시켜 줄 뿐이다. 스스로 존재의 목적이기를 간절히 바랬던 인간은 이제 재물이라는 주인 앞에서 종처럼 살게 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 사는 자들은 예수라는 머리가 제공해 주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내 것 찾을 겨를 없이 쫓기듯 산다.


 


그렇게 쫓기다 보면 바람이 분다. 누군가와 함께, 한 공간에, 한 영역 안에 놓여져 있음을 상기시키는 바람이 분다.


'그 성경해석 쓸모있니'라고 외치고 있는 첨탑위에도 여전히 바람이 분다. 

The Cross Pendant

He is a cross pendant.
He is engraved with a unique Number.
He will mail it out from Jerusalem.
He will be sent to your Side.
Emmanu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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