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모든 언어는 십자가 속에서 마침표를 찍는다.

인간의 모든 언어는 십자가 속에서 마침표를 찍는다.

태어나자 마자 부모님의 짐으로 두 분 등골 휘게 하더니, 장성해서는 스스로의 짐이 되어 삶이 무겁다. 치매 걸리면 새끼들에게 짐이 되겠지.......


 


이쯤해서 떠오르는 성경말씀이 있다.


 


마태복음 11장 28절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왜, 하필 그 많은 말씀 중에 위의 말씀이 생각났을까? 성경말씀이 기억났으니 성령께서 도우신 걸까........


 


대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첫째, 짐이라는 단어가 동일하게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연상작용!


둘째, 위 말씀이 '나'를 인정해 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너희를 쉬게 하리라! 목마른 자가 물을 생각하고 배고픈 자가 밥에서 벗어날 수 없듯이 말이다.


 


그럼, 성경말씀이 생각나는 것도 뇌의 기억작용 중 하나에 불과할까? 십자가 복음을 듣고 수긍하고 동의하는 것도 뇌 작용인가?


그럼 성령은 대체 어디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어떤 행동이 내가 하는 것인지, 성령이 하시는 것인지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


 


추측컨대, 많은 사람들이 나와 같은 질문을 하고 있으리라. 그 질문에 적절히 대답하기 위해 주로 사용하는 방법은 성경말씀을 "재해석"하는 방법인데, 어렵지 않다. 위 문장에서 수고, 무거운, 짐, 다, 내게로, 오라, 너희, 쉬게 하리라라는 단어를 톡톡 토막내는 것이다. 전체를 상대하면 어려우니까, 아주 작게 만들어 놓고 차근차근 분석한다. 분석 후에는 전체 문장의 취지에 맞게 재조립!


 


그런데, 좀 수상한 것은 수고라는 단어를 분석할 때 또 어떤 단어를 사용한다는 점이다. 수고라는 이미지를 세상 속에 밀어넣으려고 하면 또 다른 언어가 필요하고 불려나온 단어에 대해서는 별도의 추가 설명이 필요하다. 결국 언어 속에서 빠져나올 수 없게 된다. 성경의 정확한 의미를 파헤치겠다고 나서는 순간 우리는 인간의 언어에 포위되고 만다. 성경말씀을 인간언어라는 접점에서 출발한 결과이다. 성경말씀과 인간언어의 교집합을 해석의 첫단추로 삼는 순간 어느 누구도 언어라는 그물에서 빠져나갈 수 없다.


 


달걀이 있다. 그 안에 흰자와 노른자가 이야기를 하고 있다. 물론 요리사는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이다. 달걀 안에서만 통용되는 것이다. 요리사가 달걀 요리를 하려고 할 때, 그들의 이야기를 참고할 필요가 있을까?


 


말씀이 육체가 되어 오셨을 때, 그 육체 자체가 하나님의 언어이다. 달걀 속으로 밀려들어온 요리사의 언어다. 달걀속에서 아무리 분석하고 짜맞추어 봤쟈, 달라질 것이 없다. 달걀 속에서 진리라고 인정받던 것도 그 앞에서는 무용지물이다.


 


그렇다면, 지금 하나님의 언어(예수님의 육체)가 세상이라는 달걀 속에서 "짐"이라고 말씀하셨다. 흰자와 노른자가가 해석한다. '아, 이건 흰자에게 유리한 말씀이다. 아니다, 이건 노른자를 위한 말씀이다'........


 


어느 누구도 그 말씀이 달걀을 깨리라는 생각을 할 수 없다. 왜일까? 달걀 밖의 세상은 한 번도 달걀 언어 속에 포섭된 적이 없으므로......


 


기억이 인간을 만들어내고 시간과 추억을 조작한다. 기억은 언어망 사이를 오고 간다. 나를 나타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언어라는 복도위를 걸어가야 한다. 언어는 중간 중간에 위치한 익숙한 방으로 들어가기 위한 모두의 통로의 셈이다.


 


예수님의 육체로 된 하나님의 말씀은 이제 그 복도위에 불을 지른다. 방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뛰쳐나와야 할 상황이다. 인간 언어를 그물이라고 한다면 그 위에서 낫을 들고 계신 셈이다. 그물 자체, 복도 자체를 폭파하고 있는 육체이다. 그러므로 그물과 복도는 그 위의 충격을 주고 있는, 다시 말해 기존 언어질서를 공격하고 있는 그 주체의 움직임을 해석할 것이 아니라, 반드시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삼는다. 그물은 그물을 끊어버리는 칼이나 불로 연결될 수 없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짐과 쉼은 예수님의 육체와 관계가 있다. 보다 정확하게는 그 육체와의 죽음과 직결된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건네고 계신 상대방은 인간이 아니다. 그러므로 인간 쪽의 어떠한 반응도 고려하신 것이 아니다.


 


마태복음 11장 27절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마태복음 11장 28절의 말씀을 하신 분이 27절도 말씀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27절을 보자. 인간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 온통 아들 이야기 뿐이다. 아들말고는 세상에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선포다. 그 아들이 말한다. 힘들면 나에게 오라고, 쉬게 할 것이라고......


 


도대체 어떻게 쉼에 도달할 수 있을까? 예수의 존재 자체, 하나님 말씀 자체가 인간에게는 짐이요 수고이다. 예수님의 등장으로 인간은 그 주관적 평가야 어찌되었던 수고하고 짐진 자일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쉼이란 오직 아들에게만 독점되어 있기 때문이며, 그 아들은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은 자 외에는 아는 자가 없기 때문이다. 즉, 아들이 알려주고 싶은 사람에게만 허락되는 쉼이기 때문이다.


 


결국 예수께서 말씀하신 짐과 쉼은 참 하나님으로부터의 인간의 추방을 그려내고 있다.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언어가 하나님으로부터의 추방을 이미지화 할 수 없음을 그려낸다. 짐과 쉼은 반대말이 아니다. 예수 앞에서는 동일어이다. 그 어떤 언어도 예수 앞에서는 동일어이다.


 


인간의 언어는 모두 한 단어 속으로 압축된다. 인간의 모든 언어는 예수 육체를 공격하는 죄이다. 그리고 그 죄가 하나님의 말씀이신 예수님의 육체 속에서 피라는 용서를 통해 "사랑"이라는 단어로 굴절되어 나온다. 인간의 언어가 죄라는 창끝에 모아지고 예수의 육체를 공격할 때 사랑이라는 언어가 비로소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모든 언어는 예수님의 십자가 속에서 마침표를 찍는다. 

The Cross Pendant

He is a cross pendant.
He is engraved with a unique Number.
He will mail it out from Jerusalem.
He will be sent to your Side.
Emmanu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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