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처음부터 묵시의 틀을 안고 세상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이시고 처음과 나중이시다.
즉, 하나님은 처음도 없고 나중도 없는 영원한 분이다.
창세기1장에 등장하는 처음의 '빛'과 그것으로부터 '빛과 어두움'을 나뉘고 '저녁과 아침'으로 마무리 된다.
하나님은 이것을 칭하여 '첫째날'이라고 명하셨다.
(창 1:3)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창 1:4)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창 1:5)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하나님은 시간적으로 육일동안 창조사역을 하시고 일곱째날에 안식하심으로 창조사역도 마무리하셨다.
그리고 이 일곱째날을 복 주시고 거룩하게 하심으로 안식하셨다
(창 2:3)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그런데 6일 창조사역에서 묵시를 안고 있는 첫째날에 세상창조의 완성을 이미 본다.
물론 둘째날부터 여섯날째까지 하나님의 창조사역이 남아 있지만 첫째날의 묵시성안에 모두 흡수된다.
그리고 이 첫째날은 일곱째날을 겨냥해서 시작된다.
즉 안식이다.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묵시의 틀 안에 짜여진 하나님의 모든 창조사역이 하나님의 ‘안식’으로 완성을 본다.
묵시의 틀 안에 이미 염두해 두었던 새 하늘과 새 땅의 세계가 ‘안식’으로 표현될 뿐이다.
이것을 뒷받침하는 것이 창조사역과 이스라엘 민족안에 사용된 '저녁과 아침'이란 시간이다.
(창 1:5)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지금 통용되고 있는 아침과 저녁개념은 로마력에서 유래된 것이다.
즉 자정(밤) 12시를 기점으로 24시간이란 하루를 채우기 위해 시계추는 태양과 달의 자연현상을 중심으로 시계의 태엽은 돌아간다.
그러나 창조 때는 하루란 개념은 유대력을 통해서 보면 달리 설정된다.
'저녁 6시를 기점으로 시작해서 하루가 시작되어 24시간이란 하루를 채운다.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이 유대력기원은 창조사역뿐만 아니라 모세오경의 출애굽기의 유월절사건에도 적용됨을 간접적으로 볼 수 있다.
(출 12:6) 이달 십사 일까지 간직하였다가 해질 때에 이스라엘 회중이 그 양을 잡고
(출 12:7) 그 피로 양을 먹을 집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출 12:8) 그 밤에 그 고기를 불에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아울러 먹되
'해질 때에 이스라엘 회중이 그 양을 잡고'
'해질 때' 즉 일몰이 되는 '저녁'은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하루의 시작점을 알리는 묵시의 실체를 드러내는 신호탄이다.
모든 우주가 집중해야만 하는 하나님이 설정한 묵시성을 안고 있는 시간대다.
이 시간대만큼은 모든 만물이 숨죽여야 하는 때다.
이 시간대를 무시하거나 경홀히 여기는 자는 어둠이지만 순종하는 자는 빛이다.
그러니까 창조의 첫째날에 등장한 '어둠'과 '빛'은 유월절의 한 마리 양 안에 들어있는 피조의 두 세계를 표상한다.
유월절 시작을 알리는 ‘저녁’에 하나님이 명한 일 년 된 흠 없는 어린양을 잡고 하나님이 지시한 절차대로 먹고 하나님의 구원의 때를 기다려야 한다.
하나님이 이 예식을 지시한 이유는 온 애굽전체(인류)를 덮고 있는 ‘어둠’ 때문이다.
애굽과 이스라엘 민족이 공히 해결할 수 없는 ‘죄’ 즉 ‘부정’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죄’문제를 일몰로 발생된 ‘저녁’에 유월절의 어린 양으로 그 실체의 의미를 한층 고조시켰다.
‘죄’와 ‘부정’에 대해 예외일 수 없는 이스라엘 가정에는 ‘빛’이 임하였고 애굽 가정에는 저주와 죽음의 ‘어둠’이 임했다.
즉, ‘저녁’이 무엇인지 유월절의 묵시적 실체를 통해 이스라엘 민족에게 보여 주셨다.
이 ‘저녁’은 ‘죄’로 저주와 통곡과 심판의 밤이었다.
(출 12:30) 그 밤에 바로와 그 모든 신하와 모든 애굽 사람이 일어나고 애굽에 큰 호곡이 있었으니 이는 그 나라에 사망치 아니한 집이 하나도 없었음이었더라
그 어떤 자도 피할 수 없는 묵시를 위한 ‘저녁’이다.
(출 12:42) 이 밤은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심을 인하여 여호와 앞에 지킬 것이니 이는 여호와의 밤이라 이스라엘 자손이 다 대대로 지킬 것이니라
이 밤은 이스라엘민족이 오고 오는 세대에 기억해야 될 ‘여호와의 밤’이었다.
죽음의 소리가 진동한 ‘저녁’ 후 이스라엘 민족은 ‘아침’에 자신의 집에 임한 구원을 확인한다.
(출 12:22) 너희는 우슬초 묶음을 취하여 그릇에 담은 피에 적시어서 그 피를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뿌리고 아침까지 한 사람도 자기 집 문밖에 나가지 말라
(출 12:27) 너희는 이르기를 이는 여호와의 유월절 제사라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을 치실 때에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자손의 집을 넘으사 우리의 집을 구원하셨느니라 하라...
‘저녁’과 ‘아침’은 첫째 날의 ‘빛’을 위하여 ‘죽음’과 ‘구원’을 드러내는 묵시를 안은 하나님의 창조였다.
이 창조사역이 즉, ‘죽음(어둠=지옥)’이든 ‘구원(빛=천국)’이든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
(창 1:4)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창 1:12) ...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창 1:18) ...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이 부분을 주님께서 복음서에서 비유적으로 말씀하셨다.
(요 12:35,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두움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두움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바를 알지 못하느니라』
(요 12:36, 개역)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떠나가서 숨으시니라』
즉, ‘빛’이 있는 자는 빛의 아들로 빛이 없는 자는 어두움의 자식으로 등장한다.
여기서 ‘빛’은 예수님이시다.
하나님의 창조사역에서 첫째날의 ‘빛이 있으라’에서 ‘빛’은 장차 세상에 ‘빛’의 광채로 임하실 주님을 말씀한다.
(요 12:46, 개역)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이 ‘빛’이 6일 창조사역의 핵심키워드고 일곱째날을 하나님께서 복주시고 거룩하게 하신 의미를 파악하는 열쇠가 된다.
하나님께서 일곱째날에 복주시고 거룩케 하시고 안식하신 것은 첫째날의 ‘빛’의 실체와 사역의 완성을 염두해 두고 하신 조치였다.
(눅 6:5, 개역) 『또 가라사대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더라』
묵시의 틀을 안고 창조된 6일 창조는 첫째날의 ‘빛’을 위해서 둘째, 셋째, 넷째, 다섯째, 여섯째가 덤(여분; 제 값어치 이외에 무상으로 더 얹어주는 것)으로 창조되고 결국은 안식일의 참 주인(묵시세계의 실체)안에서 안식하신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첫째 날의 ‘저녁과 아침’은 둘째~여섯째날까지 반복하다가 일곱째날에 와서 갑자기 사라진다.
즉, 일곱째날에 와서 ‘저녁과 아침’은 안식으로 들어가신 하나님께 더 이상 의미가 없어진다.
‘저녁과 아침’이란 시간개념이 일곱째날인 안식에 불필요 대상이 되어 버렸다.
이 이유를 사도요한이 밧모섬에서 주님께 묵시받은 내용을 계시록에 잘 기록하고 있다.
(계 21:22) 성 안에 성전을 내가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계 21:23)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췸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어린 양이 그 등이 되심이라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췸이’이 하나님의 영광이신 ‘어린 양이 그 등(its lamp [is] the Lamb)’이 창세기 1장의 넷째날 창조된 ‘해와 달의 비침’을 대신 한다.
창세기 1장의 ‘빛’을 위한 피조체들이 ‘빛’ 안에서 그 의미가 사라져 버렸다.
즉, 첫째날의 ‘빛’은 6일동안 창조된 모든 피조체를 ‘빛’을 위한 ‘덤’으로 만들어진 것이고 마지막 일곱째날에 와서 안식의 세계로 들어가신 하나님의 의도가 무엇인지 묵시의 실체인 ‘어린 양’이 등장으로 밝혀진다.
그러니까 이 최종실체(빛=묵시의 실체)가 첫째날에도 완전하지만 일곱째날에 그 의미를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것을 염두해두고 시작부터 서서히 이스라엘 민족 공동체의 제사제도를 통해 ‘저녁과 아침’ 이란 묵시성을 지닌 창조의 비밀을 반복적으로 보여주셨다.
상기에서도 언급했지만 ‘저녁과 아침’은 지금 사용되고 있는 로마력이 아닌 묵시의 세계를 보여주고자 마련된 하나님의 의도된 창조개념이다.
즉, 이스라엘 민족의 제사제도 속에 드러난 ‘빛’을 위해 창조된 하나님의 ‘저녁과 아침’이다.
그 중의 하나가 상기에 언급된 유월절 사건이었고 그리고 레위기의 부정한 자에 대한 정결법를 통해 드러난 ‘저녁과 아침’이다.
(레 11:24, 개역) 『이런 유는 너희를 부정케 하나니 누구든지 이것들의 주검을 만지면 저녁까지 부정할 것이며』
(레 15:6, 개역) 『유출병 있는 자의 앉았던 자리에 앉는 자는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며 저녁까지 부정하리라』
(레 15:19, 개역) 『어떤 여인이 유출을 하되 그 유출이 피면 칠 일 동안 불결하니 무릇 그를 만지는 자는 저녁까지 부정할 것이요』
이스라엘 민족의 태동은 묵시를 안고 창조된 창세기 1장을 기반으로 하여 만들어진 특별하고 독특한 민족이다.
그러므로 이 민족은 창세기 1장의 묵시성을 그들의 삶속에 고스란히 드러낼 의무와 책임을 부여받았다.
만일 이 민족이 창세기 1장 첫째날의 묵시성의 창조내용을 공동체안에서 드러내지 못하면 하나님 앞에 ‘부정한 자’로 전락한다.
이런 측면에서 이스라엘 민족은 ‘저녁’과 ‘아침’이란 묵시성을 안은 시간개념을 자연적 개념이 아닌 묵시성을 띈 개념으로 드러내어야 한다.
비록 그들이 모세를 통해 주어진 하나님의 율법안에 여러 예식 즉, 율례와 규례와 제사 등을 부주의하거나 고의적으로 범할 때 그것은 곧 창세기 1장의 첫째날의 묵시성을 간과한 자가 되어 그들은 ‘부정한 자’ 곧 ‘죄인’이 되는 것이다.
이 ‘부정한 자’ 가 이스라엘 민족의 하루의 일몰의 끝남과 시작점인 ‘저녁’까지 부정하게 된다.
그런데 이 ‘부정한 자’는 ‘저녁’을 시작점으로 다시 ‘정한 자’가 된다.
즉 ‘깨끗한 자’가 된다.
그럼 이 ‘저녁’이란 시간을 전후로 이스라엘 민족은 ‘부정과 정함’을 복합적으로 경험하게 된다.
왜 이런 현상일 생길까?
그것은 묵시성을 안고 창조된 첫째날의 ‘빛’의 사역과 역할 때문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첫째날의 이 ‘빛’은 이스라엘 민족 안에 묵시적 의미를 담기 위해 하나님의 창조사역에 개입된 것이다.
즉 원래 없었던 민족을 묵시의 개입으로 창조되어 그 민족 안에 담고 있는 묵시적 사역과 의미가 무엇인지 드러내기 위해서 부름받은 민족이 이스라엘(야곱)이다.
이 ‘빛’의 개입으로 만들어진 이스라엘 민족은 그들 중심부에 놓여있는 회막(성소)을 통해 자신들을 창조한 묵시적 ‘빛’의 의미가 무엇인지 ‘저녁부터 아침까지’ 회막에서 일하는 제사장 아론의 역할과 사역으로 이스라엘 민족 내의 ‘부정한 자’가 ‘정한 자’가 되는 이유를 간헐적으로 미약하나마 알게 된다.
(레 24:3, 개역) 『아론은 회막 안 증거궤 장 밖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여호와 앞에 항상 등잔불을 정리할지니 너희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라』
(레 24:4) 그가 여호와 앞에서 순결한 등대 위의 등잔들을 끊이지 않고 정리할지니라
그런데 이 회막(장막)는 신약으로 넘어오면 묵시적 실체를 드러내는 비유로 사용되었음을 알게 된다.
(히 9:9)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의지하여 드리는 예물과 제사가 섬기는 자로 그 양심상으로 온전케 할 수 없나니
왜냐하면 ‘저녁과 아침까지’ 회막(장막)에서 제사장 아론이 하는 역할과 사역은 이스라엘 민족의 ‘부정한 육체’만 깨끗케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계다.
그러니까 창세기 1장의 첫째날의 ‘빛’의 묵시성을 회막이란 제도로 그 온전하고 완전한 의미를 드러내는데 역부족하다.
‘부정한 자’가 ‘저녁’에 제사장의 역할과 사역으로 육체적으로 ‘깨끗한 자 즉 정한 자’가 될 수 있지만 첫째 날의 ‘빛’이 안고 있는 묵시성을 온전하게 드러내지 못한다.
첫째 날의 ‘빛’은 ‘부정한 자’의 부정을 회막에서 제사장의 역할을 통해 육체적으로 깨끗케 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었다.
그 이유는 ‘빛’이 안고 있는 묵시의 실체 때문이다.
인간이 오해할 수 있는 것은 첫째 날의 ‘빛’은 창조에 속한 피조체가 아니다.
물론 첫째 날의 ‘빛이 있으라’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빛’이 있음으로 인해 창조에 속했다고 볼 수 있겠지만 그 ‘빛’이 안고 있는 묵시성의 실체와 역할 때문에 하나님의 창조사역에 개입된 것이다.
즉 하나님만 아시는 묵시성으로 창조세계에 ‘빛’으로 개입된 것이다.
엄연히 말해서 이 ‘빛’은 창조의 피조체가 아닌 피조세계를 ‘덤’으로 만들기 위한 ‘주체’로서 하나님의 창조사역에 관여한 것이다.
다시 회막(장막)의 제사장의 역할과 사역으로 넘어와서 정리하자면 ‘저녁과 아침까지’ 아론의 사명에 따라 이스라엘 민족의 육체적 ‘부정’을 ‘정함’으로 전환시키는 그림자로서만 ‘빛’이 안고 있는 묵시성을 간헐적으로 보여준 곳이다.
이 ‘빛’이 묵시적 실체임을 다음 성경에서 말해주고 있다.
(히 9:11)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not of this creation)’ 것으로 그리스도께서 창조에 속한 아론의 방식이 아닌 별다른 회막(장막)의 묵시적 실체로 섬기셨다.
그리고 창조에 속한 염소와 송아지의 피가 아닌 ‘자신의 피’로서 하늘에 속한 성소에 단번에 들어가시고 다시 ‘피’의 영으로 곧 성령으로 몸도 마음도 ‘부정한 자’에게 은혜와 진리로 찾아오신 것이다.
(히 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첫째 날의 ‘빛’이 십자가의 피로 그 묵시성을 온 우주에 밝히 드러내시고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피조체를 다시 창조에 속하지 않는 ‘빛’의 세계로 집어 넣으셨다.
(골 1:20, 개역)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이제 ‘부정한 자’이든 ‘죄인’이든 창세로부터 태어난 모든 인간은 묵시적 실체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 핑계할 수 없는 존재가 된다.
(롬 1:20, 개역)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이제 남은 것은 한가지다.
즉, 첫째날 ‘빛’이 한 지점을 향해 ‘심히 기뻐하였던’ 일곱째 날의 복과 거룩으로 안식하는 것이다.
‘이 안식의 날’은 이미 주 예수 안에 모두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 안식의 날’은 안식의 ‘주인’이신 주님이 모든 사람의 눈앞에 밝히 드러나심으로 그 대미를 장식하게 된다.
(행 1:10)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행 1:11)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히 4:9, 개역)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그리고 ‘밤’도 이제는 필요 없게 된다.
(계 21:25) 성문들을 낮에 도무지 닫지 아니하리니 거기는 밤이 없음이라
그곳에는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빛’이신 주님과 함께 영원히 거할 뿐이다.
이제 일곱째 날의 ‘안식’은 그 완성의 의미를 ‘빛’이신 주님으로 말미암아 찾게 되고 영원히 왕을 노래한다.
‘저녁과 아침’은 ‘빛’이신 주님으로 인해 제 사명이 끝나고 다윗의 뿌리이신 ‘영원한 왕’과 그 ‘신부’만 남아 하나님을 경배하게 된다.
(빌 4:20, 개역)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께 세세 무궁토록 영광을 돌릴지어다 아멘』
He is a cross pendant.
He is engraved with a unique Number.
He will mail it out from Jerusalem.
He will be sent to your Side.
Emmanuel
Bible Verses About Welcoming ImmigrantsEmbracing the StrangerAs we journey through life, we often encounter individuals who are not of our nationa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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