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과 법의 관계성

몸과 법의 관계성

오늘 본문은 두 개입니다. 하나는 요한복음 12장 1절부터 8절까지(A)이고, 또 다른 하나는 마태복음 5장 17절부터 20절(B)입니다.


(A)에서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마르다와 가룟유다가 대칭을 이루고 있고, (B)에서는 천국에 있는 자들(큰 자, 작은 자 불문)과 서리관(바리새인) 묶음이 율법을 중심으로 대칭을 이루고 있습니다.


(A)에 등장하는 법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가난한 자를 구제하라"는 것입니다. 부족국가의 구성원들은 가난을 현대 자본주의의 구성원과는 다르게 인식했습니다. 개인 책임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책임으로 간주하고 자신의 부유함 역시 하나님의 은혜이기에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공동체 전체로 흘려보내는 역할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하나님께 칭찬받을 일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역시 이러한 구제가 사회의 법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A)와 (B)를 자연스럽게 연결하려면, (A) 본문의 예수님께서 가룟유다를 칭찬하시면서 구제의 법을 완성하라고 명령하시는 겁니다. 뒤 이어 (B)를 읽으면 그 어떤 율법의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않고 모두 성취될 것이며, 아무리 작은 율법도 모두 지키는 자가 바로 천국에서 큰 자라고 칭찬받는다고 결론납니다. 가룟유다는 천국에서 큰 자가 되는 것이지요. 구제하라는 율법까지 신경쓰고 있는 자이니까요.


그런데 사도요한은 가룟유다를 도적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가룟유다는 타박하시면서 마르다의 행위가 자신의 장사를 위한 일이라며 두둔하시고 계십니다. 다른 성경예서는 매우 칭찬하시지요. 즉, 율법을 신경썼던(속으로 돈에 관심을 가졌다고 하지만 표면적으로는) 가룟유다는 덜렁 예수님의 반대편에 위치하게 되는 겁니다.


(B) 본문을 통해 율법에 대한 행위의 정도를 단계별로 나눌 수 있습니다.


가장 낮은 단계는 천국못가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단계입니다. 그 위의 단계는 천국은 가지만 천국에서는 작다고 평가받는 단계이고, 가장 높은 단계는 천국에서조차 크다고 평가받는 단계입니다. 천국조차 율법에 대한 인간의 태도에 따라, 혹은 그 지킴과 못지킴의 양적 수준에 따라 서열화가 되는 듯한 인상을 받습니다.


하지만 오늘 두 개의 본문은 인간의 행위로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님에 의해서 연결됩니다. 옛언약과 새 언약 사이를 관통하고 있는 몸과 법의 관계를 보여주기 위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다시 한번 목격됩니다.


몸과 법이 분리된 인간에게 있어서 법은 이미 깨어진 유리조각의 파편처럼 부수어진 상태로 왜곡 조작됩니다. 오늘 B본문(마태복음)에 등장하는 율법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반드시 성취되고 그 자체로 선하고 천국과 지옥을 구별하는 기준 역할을 하는 진리 그 자체입니다. 그 말씀과 비교해서 인간은 너무도 작고 보잘 것 없고 악하고 악합니다. 그러므로 그 지고지순한 하나님의 법을 그 악하디 악한 인간쪽에서 한 번 지켜보겠다고 나서는 것 자체가 법의 파괴이며 조작인 것입니다. 즉, 죄인 것입니다. 사도바울의 말씀처럼 법은 죄를 깨닫기 위해 주어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자기 자신속으로 하나님의 법을 끌어들여올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렇게 왜곡된 법이 인간의 몸에 투사되면 죄가 꿈틀거리면서 요구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행위"라는 것입니다. 지금 법을 해석하고 있는 그 주체자의 몸으로 직접 법의 요구(하라는 것은 하고, 하지 말라는 것은 하지않는 행위)에 부응하면 하나님의 거룩 앞에서도 맞설 수 있는 "자기 의"로 무장할 수 있다는 노림수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법을 지켜낸 대단한 몸이기에 하나님의 거룩 앞에서도 그 생존을 주장할 수 있다는 논리이지요.


그러나 내 몸이 있는 이상, 즉 인간이 살아있는 이상은 법을 객체, 대상으로 삼게 됩니다. 악한 주체가 선한 대상을 해석하려고 할 때 필연적으로 죄가 튀어나오게 됩니다. 법과 분리되어 있는 몸은 결국 죄만 양산하는 기계 신세로 전락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그 어떤 몸도 법과 일체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노출되는 순간, 인간은 죽을 수 밖에 없고, 죽는 순간 몸이 사라져 버리기에 법만 남게되는 것입니다. 즉, 인간의 몸은 하나님의 율법 앞에서 죽을 수 밖에 없음만을 증명하는 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새 언약을 주신 다고 하시면서, 그 법은 몸과 분리되지 않는다고 하십니다.(예레미야 31장 33절)


몸과 법이 분리되어 있는 상태를 전제로 죄를 깨닫게 하던 옛언약은 이미 이스라엘에 의해 파기되었습니다. 그래서 몸과 법이 일치되어 법 자체가 되어버린 몸이 새 언약으로 등장합니다. 사실 파기된 옛언약은 법과 몸의 분리상태는 항상 실패할 수 밖에 없음을 보여주기 위해, 즉 새언약이 이미 준비되어 있음을 알려주기 위한 사전광고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 새 언약은 법이 마음에 새겨져 그 몸 안에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이 만나는 방식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발생시키는 어떤 사건을 통해 따로 준비하신 어떤 몸 안에서 하나님이 하나님 백성의 하나님으로 자리매김을 하는 방식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으로 되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 몸 안에서 하나님의 법과 육체는 분리되지 않습니다. 일체가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몸이 일체가 되었으니, 그 몸은 법을 지키고, 안 지키고의 문제가 발생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 몸이 말하고 행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가 되는 것입니다. 말씀 자체가 한 인간의 몸으로 되어 사람들과 함께 먹고, 자고, 말하고, 함께 걸은 것입니다.


이제 다시 본문 B(마태복음)로 돌아와 봅시다.


예수님께서는 이 본문에서 바로 자신이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않는 하나님의 율법의 완성자이며, 새 언약의 담당자로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즉, 천국에서 작은 자, 큰 자 그리고 천국에 못가는 바리새인의 의를 새언약의 담당자가 직접 분류하고 계신 것이지요.


천국은 몸과 법이 분리되어 있지 않은 영역입니다. 몸과 법이 일치된 곳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 안 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몸과 법이 분리되지 않기에 율법을 좀 더 많이 지켰다, 적게 지켰다가 아예 원천 봉쇄되어 있습니다. 법을 좀더 많이 지켰다, 적게 지켰다라는 단계는 바로 천국못가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수준입니다. 이러한 방식으로는 결단코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내 몸을 주체삼고 법을 대상 삼아 해석하고 메뉴얼화해서 행동으로 옮기는 방식으로는 그 어떤 몸도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그렇게 하는 순간 법은 깨어지고 왜곡되어 악한 몸에 적합한 허울좋은 가죽 옷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천국에서 크고 작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천국에서의 크고 작음이 구별된다면 그 구별의 이유는 천국으로 불려들어온 자들의 어떠함은 아닐 것입니다.몸과 법이 일치되어 있는 영역에서 자신만의 몸뚱아리에서 뿜어져나오는 행위란 아예 없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천국에서 크고 작음의 구별을 하실 분이 따로 계시다는 의미입니다. 누구는 작은 자이고, 누구는 큰 자라는 은혜를 덧입혀주실 예수님의 결정권이 지배하는 곳이 바로 천국이다는 말씀입니다. 즉, 천국은 예수님에 의해 다스려지는 곳이기에 그 크고 작음의 원인을 인간에게서 찾지 말라는 의미인 것이죠.


여기서 오늘 A본문(요한복음)을 다시 읽어봅시다. 마르다는 예수님이라는 영역, 천국에 포섭된 자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예수님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은 것은 그가 비싼 향유를 예수님께 바쳤다는 그 행위 때문이 아니지요? 마르다는 단지 지금 자신 앞에 계신 그 분이 바로 몸과 법이 일치된 유일한 분이심을 드러내기 위해 동원된 것입니다. 특별히 그가 바친 향유는 예수님께서 장차 자신의 백성들을 어떻게 자신의 몸안으로 불러들이실지를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장사됨(죽으심)과 연결된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직접 해석해 주고 계십니다. 이러한 해석은 오직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해석입니다.


새 언약의 성취자에게 부여된 새 계명, 즉 사랑이 어떻게 지켜지는 지를 똑똑히 보여주기 위한 그 몸을 위해 마르다는 향유를 붓는 죄를 예수님의 발에 쏟아 붓습니다. 마르다는 가룟유다의 지적처럼 구제하라는 법에 충실할 수도 있습니다. 가룟유다의 말을 듣고 "아차!" 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구제하라는 법이 마르다와 분리되어 있는 이상, 그 법은 마르다로부터 죄를 유발할 뿐이지 그것을 지킬려는 마르다를 구원할 수는 없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의 의해 이미 법에 충실할 필요도, 아차 실수했구나를 인정할 필요도 없는 영역에 놓여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마르다는 새언약의 담당자이신 예수님의 몸과 자신의 몸이 어떻게 하나가 될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현장을 그대로 보여주면 그 뿐입니다. 마르다는 향유를 쏟아 붓지만 그 역시 죄입니다. 그 죄까지 용서하시는 예수님의 방식은 바로 죽으심입니다. 대속입니다. 새계명의 완성입니다. 마르다의 행위(죄)는 예수님에 의해 '나의 장사됨(사랑)을 위하여'에 쓰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으로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이 그를 죽일 것이며, 그 살해현장에서 자신 또한 공범으로 발각될 처지이기에 마르다는 그 분앞에서 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의 말씀처럼 영원한 대제사장에 의해서 말씀의 검으로 난도질 당해야 함을 옥합을 통해 보여주는 것이지요.


예수님과 연합되지 않는 자는 옛언약을 파기했던 이스라엘 백성의 노선을 그대로 따라갑니다. 자신이 주체가 되어 예수님의 몸을 장난감삼아 이런 저런 모양으로 조작하는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계속 자신의 죄인됨을 확인하고 또 확인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의 몸을 자신의 음식으로 삼았던 인간들의 욕정을 그대로 노출시킵니다, 동시에  그 욕정까지 용서하신 새계명(하나님의 무조건적 사랑)이 어떻게 성취되는가를 또한 그대로 노출시킵니다.


오늘 두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율법의 완성이신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자랑할 수 밖에 없다는 성경 말씀이 다시 한번 응하게 되는 기적을 목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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