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일이 어느새 나의 일로

주의 일이 어느새 나의 일로

주의 일이 어느새 나의 일로


 


디모데전서 4:3-4에 이와 같은 말씀이 나온다.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 할 터이나 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만약에 사람에게 ‘감사함’이 상실되었다면 그것은 자신이 원하는 자아상을 따로 챙겨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 자아상으로 인하여 내가 원치 않는 자아상으로 달라지는 것을 참지를 못하고 내부에서 극렬하게 저항하게 된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몸은 ‘감사함이 나올 수 있는 몸’이다. 그러나 내가 고수하고자하는 자아상은 ‘감사함’이 나올 수 없는 몸이 되고 말았다.


 


과연 자기가 원하는 자아상을 따로 고수하는 것이 십자가에서 흘러내리는 피 앞에서도 성립될 수 있을까? 예수님의 사람이 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나에게 찾아온다는 말이다. 예수님의 방문은 우리와 협상이나 타협을 이끌어내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것을 강탈하고 뭉개버리고 더 나아가서 예수님 자신의 것으로 전환시켜 소유시키기 위함이다. 이것은 곧 ‘나의 일’이 곧 ‘주의 일’의 일부이었음을 비로소 알게 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나에게 일어나는 일 중에서 주의 일이 아닌 것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무지몽매하기도 우리들은 ‘자신의 일’ 따로 챙기고 ‘주의 일’을 따로 챙겨두는 오류를 늘 범하면서도 그렇게 해서라도 하나님께 감사 할 수 있다고 장담한다. 과연 그럴까? 과연 내 몸의 가치를 여전히 챙기면서도 하나님이 원하는 진정한 감사가 과연 나올 수 있을까? 그 여부에 대해서 어떤 글을 인용하므로서 생각해 본다. 다음의 글은 어느 사이트(부천개혁교회)에 있는 글이다.


 


제목 : 피같은 내 돈 백만원 글 쓴이: 어장검


 


“얼마전까지만 해도 교회 세우는 것을 포기하려 했습니다. 형편상 교회임대는 불가능하다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물론 마음만 먹으면 어떻게든 교회는 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보증금 백만원에 월세 20정도의 상가지하교회 같은곳은 꾸준히 광고에 올라오니 말입니다.


 


 


그러나 은인교회의 헌법에선 상가교회나 지하교회를 엄금하고 있습니다.


상가나 지하공간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오늘날에 와서까지 이러한 장소를 선택하는 것은 하나님의 집을 사모한다기 보다는 목회자 개인의 경솔하고 섣부른 야심에 기인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잠깐이나마 저도 교회개척의 암울한 현실을 보며 어쩔수 없이 상가 지하건물로 들어가야 되는 것 아닐까 고민한 적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내 뜻만큼은 하나님 보시기에 선하고 의로우니 주께서도 이해하시리라 스스로 정당성을 부여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그것은 결국 이기적인 변명일뿐이라는 양심의 부르짖음을 끝내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저의 뜻과 목적이 성경적이라 할지라도 또 다시 상가나 지하교회가 세워진다면 그것은 복마전같이 더럽고 추악한 한국 개척교회 현실에 재차 저의 지저분한 발을 하나 더 얹는것밖에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일 내 동기만큼은 다른이들과 달리 정말 순수해서 하나님이 인정해주실 것이라 생각했다면, 이미 저는 하나님의 종이 아닙니다. 독선(獨善)이라는 사탄의 함정에 깊이 빠져 허우적거리는 불쌍한 육신의 종과 다를바 없겠지요.


 


 


어쨌든 수중에 경제적 여유가 전혀 없던 저로서는 단독교회를 개척하기란 불가능해보였습니다. 보통 독립교회를 임대하기 위해서는 보증금으로만 몇 천만원이 필요했기 때문인데 요구되는 시설비까지 감당하려면 미니멈으로 천오백만원이나 이천만원이 필요합니다.


 


겨우 2~3백만원밖에 융통할 수 없었던 저는 결국 교회 세우는 것을 포기하기로 작정한 것이지요.


 


 


그래도 늘 아쉬운 마음에 습관처럼 멍하니 이 교회 저 교회 구경이나 했습니다.


그리곤 마침내 현재의 교회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이 교회는 주변에 인가가 드물고 사람간의 왕래도 많지 않습니다. 외관도 별 볼품이 없을뿐더러 시설도 열악하지요.


많은 목회자들이 교회개척 일순위로 꼽는 대규모 아파트 단지는 정말 산넘고 물건너 바다 건너서야 도착할 수 있을듯 싶더군요.


그래서 아마도 장기간 임대되지 않고 외면당했던 듯 싶습니다.


 


그러나 저는 천만원이라는 보증금을 마련하는 문제를 빼고는 나름대로 만족할 수 있었습니다.


건물자체가 교회용도로 만들어져 새로이 제정한 교회 헌법에 어긋나지 않게 되었고, 주변도 시끌벅적한 도시 한가운데를 벗어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얼른 계약하려는데 갑자기 조금 겁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건물주가 계약금으로 백만원을 요구했고 보증금도 전혀 깎아줄수 없음을 잘라 말했기 때문입니다.


 


 


제 속마음은 어떻게 해서든 천만원의 보증금을 오백정도로 내려볼 생각이었습니다. 오백만원이면 궁여지책으로 마련은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천만원은 아무래도 역부족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조금 더 생각해보겠다 말씀드리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다시 다른 교회를 찾아보는데 아무리 시골 촌구석에 있는 교회라 할지라도 단독교회는 단위가 기본 7,8천이고 매매가는 억대를 호가하였습니다.


 


결국 교회를 세우려면 어제 둘러본 그 교회밖에 없겠다 생각이 들었으나 과연 보증금을 마련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습니다. 자칫하다간 계약금 백만원만 그냥 날릴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한참을 고민하던 저는 마침내 굳은 결심을 하였습니다. 일단 통장에 있는 돈으로 계약금을 걸고 나머지는 은행에서 대출해보자 계획한 것이지요.


 


 


'끝내 보증금 만들지 못하면 까짓거 백만원정도는 손해볼 각오하지 뭐.. 어차피 교회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시작한 건데 돈은 잃을지언정 주께서 이러한 내 마음과 열정만은 알아주실 것 아닌가....'


 


 


다음날이 되어 임대인에게 계약하러 가겠다 전화를 건 저는 통장을 들고 차를 몰기 시작했습니다. 집과는 상당히 멀리 떨어진 곳이기 때문에 경부고속도로를 타야만 했지요.


 


쭉 뻗은 도로를 혼자 운전하던 저는 그토록 원했던 교회를 이제 드디어 세울수 있게 될지 모른다는 기대감에 마음이 설레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복음송 CD를 들으며 흥얼거리는데 불현듯 은근한 걱정이 또 다시 저를 엄습해 왔습니다.


 


'그나저나 보증금은 어떻게 마련해야 되지. 만일 마련치 못하면 정말 피같은 돈 백만원만 날리게 되는데...그리고 또 교회운영은 어떻게 해야 할까..앞으로 수년간은 월세조차 매달 일해서 갚아야 할 형편일텐데..어휴...이거 정말 내가 잘하고 있는건지 모르겠네...휴....'


 


 


이런 근심도 잠시뿐, 그래도 교회를 계약하러 간다는 생각에 마음이 다시 즐거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며칠전까지만 해도 내 양심에 조금도 어긋남이 없는 교회를 세울수 있을 것이라곤 전혀 기대조차 할수 없지 않았잖습니까..


 


그런데 지금은 약간의 서광이라도 비취고 있으니 미래에 대한 염려와 근심을 잠시 제쳐둘만 한 것이지요.


 


 


그렇게 이 생각 저생각하며 운전하는데 갑자기 저도 모르게 눈물 한 방울이 제 뺨에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곤 이내 수도꼭지를 튼 것처럼 정신없이 두 눈에 눈물이 흐르는 것이었습니다.


 


'어.. 이상하다. 날씨도 화창하고 기분도 좋은데 왜 눈물이 나는거지?..... '


 


고속도로를 운전중이었으므로 흐르는 눈물을 닦고 마음에 평정심을 찾으려 애썼습니다. 그러나 참으면 참을수록 더욱 마음이 애절해지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심령에서 터져나오는 통곡을 견디지 못하고는 엉엉 소리내어 울게 되었지요. 덕분에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 얼른 휴게소를 들러 깨끗이 세수해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계약을 마친 며칠후 대출을 받으러 은행엘 갔습니다.


대기표를 뽑고 차례를 기다리는데 약간 긴장되기 시작하더군요. 집담보 대출을 이미 받았던 터라 현재로선 마이너스 대출한도를 올리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순서가 되어 자리에 앉자마자 상담원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는 대출한도를 늘려줄 수 있는지 초조히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잠시 서류를 살펴보던 직원은 이내 저를 보고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기 시작했지요.


 


" 손님. 손님은 현재 더 이상의 대출은 어렵겠는데요. 지금 손님의 대출등급은 3등급인데 이미 3등급의 범위를 다 받으셨어요. 그래서 한도가 더 늘려질순 없겠군요.."


 


" 아..그..그렇군요... 그러면 저.. 어떻게.. 도저히 될수 없다는 말씀인가요...? "


 


낙심에 찬 제 얼굴을 보고 상담원은 자기 잘못이 아니라는듯 책상 모서리에서 두툼한 책 한권을 꺼냈습니다.


 


" 저희도 임의대로 심사하는 게 아니구요. 은행에서 발급한 이 책의 약관대로 하는것 뿐이예요. 보세요. 손님의 경우는.."


 


책 이곳저곳을 뒤적거리던 상담원은 중간쯤 가서 어느 한곳을 가리키며 제게 부연설명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 이 곳을 보시면 직장경력이라든지 급여수준같은 대출심사 요건이 나오거든요. 그런데 손님은 이미 소득에 비해서 대출이 꽉 찬 상태라 어쩔수 없네요. 여기 제 8조라 쓰인 곳 밑의 세번째 항목 보이시나요? "


 


 


더 이상 직원의 말이 들리질 않았습니다.


내 머릿속에는 이제 교회세우는 일은 물 건너갔다는 낙심과 함께 내 돈 백만원은 아까워 어떻게 하나 하는 후회만 가득하게 된것이지요.


 


 


"그럼 다른 종류의 대출도 전혀 안된다는 말씀인가요..? "


 


 


애써 불안감을 감추며 조심스레 물어보는 저에게 남자 직원은 늘상 있는 일이라는 듯 담백하면서도 약간 오만한 말투로 싱글싱글 대답해 주었습니다.


 



" 음... 글쎄 어렵겠어요. 일단 어느정도 가능성이 있으면 심사에 넣어보기라도 하는데 손님 경우는 우선 서류상으만으로도 확인이 가능하고..그리고 이미 받으신 게 있는데 어떻게 더 대출될수 있겠어요? 그찮아요..? "


 


 


더 이상 기댈곳이 없다는 생각에 어쩔줄 몰라 하던 저는 문득 정집사님을 생각해 냈습니다.


예전에 저한테 교회개척에 사용될 돈을 모아놨으니 계좌번호를 알려달라 부탁하셨던 분이시지요.


그때 저는 마음으로 깊이 고마움을 나타내되 아직은 받을때가 아니라 정중히 거절했었습니다.


 


정중히 사양한 이유는 제 소유가 넉넉해서였기 때문이 아니고 믿음의 선배 사도바울이 전한 다음과 같은 교훈때문이었습니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 (롬13:8)


 


 


개인적으로 저는 그 어떠한 이유이든 사랑의 빚외에는 아무 빚도 지고 싶지 않았습니다.


설령 그 배경이 소위 '주의 일'이라 부르는 종교성을 띠고 있다 할지라도 말이지요.


 


 


제가 생각하는 사랑의 빚이란 성도간의 위로나 격려, 혹은 관심이나 사랑같은 무형적인 요소를 의미한다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것외에는 가능하면 아무 빚도 지고 싶지 않았던 것인데


 


물론 사랑의 빚이라는 의미안에 넓게는 금전적인 도움과 후원, 혹은 기부도 포함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결코 본질된 요소라 말할 수는 없고, 진정한 사랑은 평생을 통한 신뢰와 믿음 그리고 절대 실망치 않는 상호간 기대와 애정아닐까요..?


 


만일 사랑이라는 명분아래 금전과 물질, 후원과 같은 지엽적인 요소에 집착하게 되고 또 이것이 빈번히 흐르다 보면 결국 본질적 사랑은 퇴색되어 그 빛이 바래질 수 밖에 없을것입니다.


 


따라서 저는 집사님을 비롯, 그 누구에게든지 사랑의 빚외에는 아무 빚도 지지 않으려 노력함으로 마음에 심겨진 그리스도의 사랑을 깊이 간직하며 보존케 하고 싶었던 것이지요.


 


 


다시 대출받던 그 상황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상담원의 부정적인 대답에 낙심한 저는 정집사님께 전화를 드려볼까 생각했습니다. 아마도 집사님이시라면 흔쾌히 저의 부탁을 들어주시리라 기대한 것이지요.


 


그러나 그냥 교회를 포기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일단 위의 로마서 13장 8절 말씀도 있고 더군다나 일전에 말씀드리길 교회창립에 관하여서는 저에게 일임케 해달라 부탁드린것도 있고 해서입니다.


 


그래서 백만원이 아깝긴 하지만 어쩔수 없다 생각하며 마음을 정리하려는 순간, 저를 상담하던 직원이 이번에는 먼저 제게 되묻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얼마가 더 필요해서 대출받으시려는 거예요..?"


 


 


일일히 설명하기 귀찮아진 저는 그냥 심드렁하게 얘기했습니다.


 


 


"아..네..천만원이요.. 그것도 안되면 한 오백정도... 아는분이 이사하려 하는데 돈이 좀 모자라다 해서요"


 


"천만원이요? 아니 그럼 왜 대출받으려 하는거지요? 본인 통장에 그 정도 돈이 있잖아요? "


 


"네? 돈이 있다니요... ? 저 돈없는데요...? "


 


"아니 지금 여기 손님 명의의 다른 통장에 천만원정도 들어있잖아요. 여기 보세요. 정확히 구백육십오만원..이거 모르셨어요?? "


 


 


상담원이 뭔가 착오를 일으켰나보다 생각한 저는 자리에 일어나 직원이 가리킨 서류를 들여다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전혀 사용하지 않는 오래된 제 통장 계좌 내역에 분명 잔액 일천만원이 적혀있는 것을 볼 수가 있었지요.


눈이 휘둥그래진 저를 보자 상담원도 덩달아 눈이 커졌습니다.



"이거 손님 통장 아닌가요? 분명히 손님 성함 맞잖아요...."


 


"어..어..제 통장이 맞긴 맞는데...그게..저도 모르는 돈이..왜 들어있는걸까요? 그게 누..누구..돈이지요..? "


 


 


대체 누가 누구에게 물어보냐는 듯 상담원은 의아한 얼굴로 저를 쳐다보기 시작했습니다.


 


 


"하하하.. 아니 손님이 모르시면 누가 알아요? 그리고 입금날짜가 꽤 오래됐는데 그래서 저는 아까부터 손님이 이 돈 말고도 돈이 더 필요해서 대출받으시는건가 혼자 생각했던 거거든요..?"


 


 


 


"아..그..그렇군요..제 돈이 마..맞군요.. 분명히..제가 만든 통장에 들어 있으니..내 돈이 틀림..없지요...모르는 돈이 아닌 내 돈..."


 


 


 


너무 놀래는 저를 보고 직원은 의심스러운지 계속 꼬치꼬치 물어보았습니다.


혹시나 전산사고로 잘못 입력된건 아닌가 생각했나봅니다.


 


 


 


"근데 왜 본인이 모르시는건가요? 오래돼서 까먹으신건가요? "


 


"저..지금 생각해보니 아무래도 집사람이 저 몰래 비자금 정도로 관리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 계좌는 제가 만들어서 집사람이 갖고 있는 통장이거든요.."


 


 


 


때아닌 마누라핑계에 그제서야 직원의 얼굴에 웃음기가 돌기 시작했습니다.


 


 


 


"큭큭큭...사모님께서 남편모르게 큰 돈을 굴리고 계셨네요.


 


그러면 그냥 이렇게 계좌로 놔두지 마시고 적금이라도 드시는게 어떠세요? 가계 예금보다 훨씬 이자가 좋을텐데.."


 


 


저는 서둘러 그 통장을 재 발행한후 통장정리하여 내역조회를 해보았습니다.


2년전에 수천만원이 입출금된 후 잔액으로 천만원가량이 남았더군요.


그래서 찬찬히 제 기억을 더듬어보았습니다.


 


 


" 사모님께 전화하셔가지고요 이 돈을 그냥 이렇게 놔두지 말고 제가 권해드리는 방법으로 해보세요. 훨씬 더 수익이 좋을겁니다!"


 


"네..네...맞습니다. 집에 돌아가서 와이프하고 논의를 해보지요..."



 


상담원에게 대답한 것과는 달리 그 통장은 아내가 관리하는 통장이 아니었습니다.


 


아내의 숨겨둔 비자금은 더더욱 아니었지요.


 


 


대략 2년전쯤 이사하는 과정에서 수천만원이 그 통장에 입금되고 또 출금이 되었었습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잔액 천만원이 남게 되었던 것인데 당시 머릿속으로 계산했을때에는 정확히 입,출금이 다 완료됐다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아내나 저나 계산 착오로 잔액 천만원이 우리에게 더 남게 되었었음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던 것입니다.


 


 


후에 직장을 옮기면서 월급통장을 새로 만들었었고 따라서 아무 잔액이 없을것이라는 확신하에 천만원이 들어있던 계좌는 더 이상 사용치 않아 죽은 통장이 되어 버린 것인데


 


2년이 흐른 지금에 와서야 비로소 다시 세상에 나타났으니 어떻게 천만단위의 돈에 대해 저희부부가 동시에 착오를 일으킬 수 있었을까요?



 


" 어! 손님 그냥 가시게요? 그러지 마시구 이 돈을요 이번에 새로나온 적금통장으로 바꿔보세요. 이것으로 바꾸시면 매달 납입금액을 절약할수도있고..."


"허허허..."



 


이제 대출직원과 저의 입장이 바뀌었습니다. 돈꾸러 왔다가 오히려 상담원의 부탁아닌 부탁을 들어줄 처지가 되었네요.


 


 


" 또 장기적금으로 가입하시면요 나중에 대출심사 받을때 유리하게 작용할수 있어요. 한도도 지금보다 더 커지고 말이지요. 이게 그니까 수익률이 일반보다 좋은 이유가..."


" 허허허.."


 


 


아내와 논의한 후 다시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서둘러 은행을 빠져나왔습니다.


그리곤 교회를 세우고자 필요로 하는 액수에 정확히 떨어지는 통장 잔액을 다시 한번 확인하면서


 


감동스런 얼굴로 천천히 하늘을 올려다 보았지요..


 


 


돈 몇만원의 출입도 꼼꼼히 따져보는 저희부부가 2년전 이렇게 커다란 착오를 했다는 것이 지금도 믿겨지지가 않습니다.


그리고 만약 그때 이 사실을 알았더라면 이 돈은 다른데 사용되어 남아있지 않았을것이고 따라서 지금과 같이 이 것으로 교회를 세울수도, 그리고 피같은 제돈 백만원이 허무하게 날라가는 것도 막을 수 없었겠지요.


 


 


독자 여러분들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과연..하나님께서 은인교회 세우는 것을 널리 용납하시는 것일까요..?


아니면 여호와 이레와는 아무 상관없는 단순한 해프닝일뿐일까요..?


 


이에 대하여는 훗날 은인교회가 주어진 사명을 다 감당하고 저 또한 주안에서 그 달려갈 길을 마친 후 하늘로 영혼이 올리울때 주께 여쭈려 합니다.


그때 하나님은 어떻게 제게 대답하실까요...? 내가 환한 웃음으로 하늘을 바라보았듯이 내 아버지께서도 저를 바라보시며 환히 웃지 않으실까요..?



 


글을 마치겠습니다.


 


 


앞으로 은인교회는 외형적 부흥에 조금도 전념치 않을것입니다.


 


성도의 수가 늘거나 적어짐은 아예 관심밖의 일이지요.


 


모든 재정은 나그네와 같이 행하여 축적하거나 남기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예산은 세우지 않습니다.


 


 


또한 은인교회는 아무나 성도의 직분을 주지 않습니다.


본 교회에 오는것은 자유이되, 무릇 호리라도 범죄하는 자는 그 죄에서 돌이키든지 아니면 교회를 떠나야만 합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자를 찾을것이로되, 찾게 되면 성령이 한량없이 부어지도록 그리스도께 그 영혼을 부탁할 것입니다.


 


 


예배와 절기와 헌금을 강요하는것보다는 정의와 정직과 진실을 서약케 할것입니다.


봉사와 교제와 나눔을 가르치기보다는 영과 혼과 골수를 찔러 쪼개는 주의 날선 검을 전달하여 소유케 할것입니다.


세상 행사에 동참치 않고 도리어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 증거하여 교회의 순결을 보존토록 할 것입니다 (요7:7)


 


 


핍박과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되 의로 다시 일어나며,


가난한 자를 찾아 복음을, 눈먼 자에게 눈을, 저는 자에게 온전함을, 걷지 못하는 자에게 뛰게 함을 베풀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은인교회가 그리스도의 핏값으로 세움을 입으신 바 되었으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영영한 주의 처소로써 그 성결을 간직할것입니다.



 


만유의 주재 하나님께 이 교회를 부탁합니다.


건축자의 버린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게 하였다 하셨으니


내 아버지여.


이 후로는 은인교회가 세상의 원수와 같이 되겠사오나


하늘에서는 주의 일곱 촛대중 하나와 같게 하옵소서.


주의 오른손에 일곱 별과, 일곱 금 촛대와, 일곱 교회가 서 있는것을 내가 보았나이다.


 


 


'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 (마16:18)”


 


이 [피같은 내 돈 백만원]에 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댓글들이 달렸다.


 


{ 어장검 10.12.07. 11:51 본문에 나온것처럼 이제 교회를 세운지가 1년하고도 4개월이 지나가는군요...


비록 아주 적은 시간에 불과하지만 예배와 교회에 대한 성령의 가르치심은 유난히 인상깊었던 것 같습니다...


 


박경찬 10.12.08. 00:02 교회는 건물(예배당)이나 단순한 사람의 모임이 아닌 예수그리스도 자신입니다. 그리고 주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창세전 택하신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예수그리스도의 몸된 지체로써 그들을 주께서는 지금도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영원히 부르시는 일을 하십니다. 신고


 


어장검 10.12.08. 10:02 말씀하신 것처럼 저도 교회란 본질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라 봅니다. 그렇지만 건물이나 사람의 모임은


아니라는 말씀에는 선뜻 동의하기 어렵겠는데요....


왜냐하면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두 세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다면 나도 그들중에 있겠다 말하셨기 때문입니다. (마18:20)


다시 말해 그리스도께서 임재하는 곳 어디라도 교회라 말할 수 있는 것이지요...



어장검 10.12.08. 10:01 따라서 두사람 이상이 모인 예배의 처소(성전)나 사람의 모임은 다 교회라 할 수 있습니다.


우선적으로 그 안에 교회라 불리시는 예수께서 자리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박경찬 10.12.09. 23:55 어장검님 본 카페는 어떤 논쟁의 요소를 갖고 가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어장검님의 남길 이 글과 댓글을 통하여서 논쟁이나 개인적인 생각은 뒤로 하려합니다.


교회에 관해서 말씀하신대로 예수그리스도 자신입니다. 성전의 개념은 구약의 배경을 갖고 있는 것으로 인하여 성전이라는 표현보다 예배당이라는 표현이 더욱 적절하다고 생각되며, 예수그리스도와의 관계성 안에서 우리가 몸된 지체로써 교회로 불려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므로 믿는자들(택한자들)은 곧 두사람이든 한사람이든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가 아니겠는지요? 이제 더이상의 댓글은 달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우선 어장검 씨의 글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본인이 하고 싶은 하는 일을 하면서도 끊임없이 그 일을 주의 일로 보여지고자 부단히 애를 쓰고 있다는 점이다. 쉽게 말해서 ‘나의 일’→‘주의 일’→‘나의 일’ 이 되게끔 안달이 나 있다는 점이다.


 


즉 ‘나’→‘나의 일’만 고수하면서 살던 어떤 사람이 어느 날 처음 교회에 나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고 부터는 ‘나의 일’→‘주의 일’이 되어야만 내가 바른 성도로서 사는 모습일 줄 알았던 모양이다. 그런데 이 분은 ‘나의 일’→‘주의 일’→어느새 도로 ‘나의 일’이 되는 경우를 염두에 두지를 못했던 모양이다.


 


쉽게 말해서 교회에 나와서 소위 ‘주권 사상’이라는 배웠던 모양이다. 그래서 나의 모든 것이 다 주님의 뜻 아래서, 주님의 관권적인 주권 아래서 움직여진 ‘주의 일’이라는 사상을 접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이 분은 이 사상을 복음인 줄 알고 받아들였던 모양이다. 그런데 문제는 “나의 일이 모두 주의 일이다 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 그 때부터 내가 무슨 일을 하던지 간에 다 ‘주의 일’이 된다는 사실을 내가 확인할 수 있을 때만 나는 비로소 나를 구원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용의가 있는” 그런 인간으로 그대로 그 자리에 한 치로 달라짐 없이 머물러 있다는 사실을 본인이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복음에 대해서 많이들 듣기는 들었지만, 그리고 그 복음을 지식으로 몽땅 흡수하기는 했지만 전혀 성경에서 예언된 사항, 즉 ‘감사함이 나오는 자가 곧 성령이 있는 성도’라는 모양새는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주의 일’→도로 ‘나의 일’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감사함보다 억울함, 더 나아가서 분통 터짐, 화딱지남, 철저하게 이용 당했음, 세상이 다 원망스러움, 궁극적으로 나를 이런 몸으로 태어나게 하신 하나님께 달려들어 칼 질하면서 저주하고 싶어짐으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성령 안에서의 작업은 다음과 같이 되어야 한다. ‘나의 일’→‘주의 일’→‘나의 일’→‘주의 일’→ … 이런 식으로 끊임없이 이 몸이 죽을 때까지 반복되게 된다. 이 ‘→’가 진행될 때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아파하신다. 괴로워하신다. 이 괴로움이 개입되면 극히 짧디짧은 순간이지만 그 순간만큼은 성도는 본인도 예상 못한 감사와 감격이 터져 나온다. 문제는 그 짧디짧은 순간의 감사와 감격마저 곧장 ‘도로 나의 것’으로 돌변됨에 따라 “이토록 신앙 좋은 나를 왜 힘들게 하느냐”는 식으로 도로 화가 폭발한다는 점이다.


 


“나는 내가 챙긴다”는 정신이 감사함을 막는다. 그것이 곧 죄인 것을 아는 그 짧디짧은 순간만큼은 성령 안에서 감사함이 나온다. “짧으나마 이런 순간이 찾아오니 나는 그래도 성도 맞이요?”라고 묻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런 묻는 그 순간은 이미 ‘주의 일’→‘나의 일’이 되어 버린 상황이라서 ‘감사함’이 달아나버린 이후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감사함'만 받고 우리는 늘 버린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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