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과의 조우

죽음과의 조우

건방진 말씀드리겠습니다. 인생사, 원인과 결과가 분명한 터, 원인에 투자하고 또 투자하면 그만한 결과가 나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지성이면 감천이고 일찍 일어난 새가 많은 벌레를 잡을 수 있으니, 노력하고 갈고 닦으면 인생살이가 뭐 그렇게 애닳고 서글프고 고단할까요.


 


그런데 열심히 원인에 전력투구하면서 달콤한 결과를 상상하며 기계처럼, 혹은 개처럼, 혹은 돼지처럼 살다가 의외의 사건과 충돌합니다. 죽음과 직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열심히 무엇인가 계획하고 실행해서 이제 어떤 결과물을 얻을 때 쯤, 그 사람이 없어집니다. 말을 하지 못합니다. 사랑하는 가족도 알아보지 못하고 그 누구도 그 사람을 깨우지 못합니다. 수 천만원의 병원비를 지불하여도, 아무리 좋은 의사가 진찰해도, 철없는 자녀가 울며불며 애원해도, 20대의 미망인이 기절해도 그 사람은 돌아올 수 없습니다. 원인과 결과가 깨집니다. 허무라는 단어만 먼지처럼 날립니다.


 


캄보디아 여행기 추락사고의 희생자 중에는 1살짜리 아이도 있습니다. 그 아이는 다른 사람보다 조금 빨리 세상 밖으로 불려나갔습니다. 이 세상의 주인이 과연 누구인가를 드러내기 위해 죽음은 이렇게 불청객처럼 불쑥불쑥 나타납니다. 죽음이 등장하면 인간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남아야 한다는 자기 체면에 더욱 골몰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은 올무에 걸린 멧돼지가 몸부림치다가 과다출혈로 죽는 것과 흡사한 처사입니다. 죽지 않기 위해서 발버둥치면 칠수록 죽음의 명성은 더 높이 올라가고, 진정 이 세상의 주인이 인간, 즉 내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차갑게 인식하게 됩니다.


 


죽음은 죄가 이 세상의 주인이 따로 존재하고 계심을 통보하는 그의 강력한 무기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모든 인간이 죽기를 두려워하는 탓에 죽음까지도 주관하는 참 주인이 누군인지 알아볼 새도 없이 살려고만 애씁니다. 그 결과 평생 죄의 종으로 살게 됩니다. 그렇게 모든 인간은 자신이 스스로 생겨난 듯 자신의 행위를 되새김질 하며 살았지만 죽음에 즈음해서야 자신이 소유한 삶이 아니었음을 인정하게 됩니다. 물론 그가 인정하던 부정하던지 죽음에 의한 삶의 지배라는 현실은 변경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주 낯선 죽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 죽음입니다. 이 위에서 죽은 33살의 유대인 청년은 평소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물론 사람들은 그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참으로 두려워하는 주인에게 그를 넘겼습니다. 이제 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죽음이라는 사건은 인간이 계획하고 실행하고 노력해서 벌어진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피조물에 의해 희생당하는 하나님의 형상을 언약 속에 감춰 두셨던 분의 약속 이행이었습니다.


 


사막에 비를 내리시는 분! 죄인의 얼굴 위에 아들의 피를 내리시는 분! 그 분은 죄의 삯을 그렇게 지불하시고는 인간이 죽기 두려워 매달리고 있는 원인과 결과라는 구조를 마구 뒤섞어 놓습니다. 죄 없으신 분의 죽음! 그는 죽음에 해당하는  아무런 원인도 가지고 있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죽음이라는 결론이 끝이 아님을 부활의 능력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인간의 죽음 조차 아무 것도 아님을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그저 오늘 하루도 죽기싫어, 자존심 구겨지기 싫어 죽음의 궤도 위에서 헐떡거리고 있는 인간에게 그 궤도 밖에 진정한 길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님의 확정된 뜻입니다. 죽음이라는 철책선으로 둘러쌓인 인생들이 갈망하는 것은 죽음에서 벗어나는 것이지만, 인간의 손에 남는 것은 더욱 또렷한 주검의 그림자 뿐인 것입니다.


 


희망과 비전으로 삶을 리모델링하지 않기를 수백번 다짐했지만, 마치 마약중독자처럼 오늘은 어제보다 나을 것이라는 희망을 끝끝내 버리지 못하고 욕망이 이끄는대로 첨벙첨벙 잘도 놀아나다가 저녁 무렵, '아... 또 속았구나'를 중얼거리듯이 지친 발걸음만 공허하게 거리에 울릴 뿐입니다.


 


사람이 사람답다는 것은 창조주의 뜻 안에 있을 때 뿐입니다. 창조주의 뜻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잔인한 살해장면 속에서만 드러납니다. 그안에 진정한 사랑과 증오가 있으며, 진정한 죄와 의가 함께 공존하고 있습니다. 결국 예수의 죽음에 함몰당한 인생만이 참 인생이며 그 인생의 의미는 십자가 공로에 감사하는 것에 있습니다. 그 감사를 통하여 창조주는 창조주다운 영광을 되찿을 수 있게 되며, 성도는 그렇게 사용하신 주님의 일하심에 할렐루야 찬송하는 것입니다.


 


마귀에 속아, 죽음이 두려워 어떤 사건사고를 만나던지 나, 내 가족, 내 돈, 내 건강에서 단 한치도 벗어난 해석이 불가능한 인생이 바로 안개, 지렁이, 들풀, 개, 돼지, 독사의 새끼인 것입니다. 이러한 범주에서 불쑥 돌출한 예수의 죽음에 누군가 편입되었다면 주님의 은혜인 줄 알고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의 죽음에 편입되었다는 사실은 세상에서 알아주는 사건이 아닙니다. 세상은 모르는 사건이며 숨기고 싶은 사건입니다. 왜냐하면 예수의 죽음을 유발한 당사자가 바로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종들은 복음만 아니라면 좋다고 합니다. 세상은 적그리스도의 사상으로 똘똘뭉쳐있습니다. 소위 교회라는 인간단체는 더욱 그러합니다. 십자가만 치우고 이야기 하면 부활도 승천도 천국도 모두 자신의 소유물로 삼을 수 있기 때문에,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수 만, 수십만에 이르고 있기 때문에 물량지상주의에 빠져있는 저들의 눈에는 비복음이 진리가 되어버린 셈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의 내심처럼 십자가만 걷어차면 이 세상 살아볼 만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같으신 분이 나 같은 죄인 위해 죽어 준 사건만 아니라면 나는 나름대로 먹고살기 위해 노력하면서 단란한 가정 꾸미면서 영어도 공부하고 해외여행도 다니면서 잘 살 수 있는 괜찮은 인간입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가끔 이런 소식이 들립니다.


 


또 누군가 죽었다더라.....


죽음을 잊지 않는 인생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The Cross Pendant

He is a cross pendant.
He is engraved with a unique Number.
He will mail it out from Jerusalem.
He will be sent to your Side.
Emmanu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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