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은 세상과 나를 둘러싸고 있는 층들을 걷어내야 보인다. 다른 말로 복음은 세상과 죄인을 둘러싸고 있는 육의 층들을 예수의 피로 걷어낼 때 보인다. 마치 아스팔트를 새롭게 포장하려면 기존에 깔려있던 파손된 도로를 포크레인으로 걷어내고 새 것으로 깔아버리듯 복음도 죄로 파괴된 옛 사람의 마음 밭 자체를 성령이 말씀으로 뒤집어 버리고 그 자리에 예수의 피로 덮어버릴 때 분명히 똑똑히 보인다(겔 36:34; 호 10:12).
요한복음4장에 등장하는 사마리아 여자가 결혼한 여섯 명의 남편들과 자신의 육의 층이 기경되지 않은채 매일 야곱의 우물가에 나와 물을 긷는 악순환을 되풀이하는 격이라고 할까! 죄로 파괴된 옛 사람의 마음으로 자연세계에서나 구할 수 있는 '배'를 위한 '물'만 구했지 그 우물이 '야곱'에게 속함을 알았겠는가! '야곱'의 노선만이 얍복나루에서 육의 죽임을 당하는 축복을 자신의 조상 아브라함의 언약안에서 재확한 '그 야곱'이 왜 사마리아 여자에게는 보이지 않았던가? 이것이 단지 사마리아 여자만의 문제인가? 아니다. 우리의 문제고 인간의 총체적 문제일 것이다.
예수는 찾아오시는 분이다. 마귀의 피에 미쳐서 장구치고 지랄( 마구 법석을 떨며 분별없이 하는 행동을 속되게 이르는 말)같은 교회는 날마다 예수를 사마리아 여자처럼 찾아가지만 그것이 그렇게 쉽게 만나지나! 인간이 예수를 찾는 것이 아닌 예수 당사자께서 죄인을 찾아오시는 것이 십자가의 방식인데 그것이 안보이는 것이 의인이 되어버린 인간이다.
얍복나루터에서 '어떤 사람(한 남자)'가 찾아와서 야곱과 씨름하셨듯이(창32) 사마리아 여인에게 '싸움꾼 예수'가 찾아오신 것이다(요4:4).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해야) 하겠는지라'. '하여야(해야)'는 그 어떤 이물질도 예수 자신에게 개입되지 못하는 아주 절박한 상황이다. 마귀도 간섭할 수 없는 악한 영들도 중재할 수 없는 사마리아 여인을 향한 예수 심장이 뜀박질하는 순간이다. 혹이나 여기에 방해꾼이 등장하면 '싸움꾼인 예수'는 그의 '피'로 그를 죽인다. 이것은 제자들의 인간적 설득과 윤리적 고매함으로 중재할 문제가 아닌 예수 당사자가 친히 내린 결정이었다.
그러나 이런 계시(십자가)의 찾아듬의 방식을 인식하지 못하는 세상과 인간은 예수를 자신의 육의 층을 걷어내지 않는채로 연구만 하고 있다. 예수는 인간의 '연구용'이다. 예수란 단지 인간의 손에 놓여있는 '장난감'에 불과하다. 만지막 만지막 거리다 지겨우면 고물창고에 내다 버리는 것이 인간 손에 들려진 예수다. 고대의 철학자들이 그러했고 과학자들이 그러했고 사회사업하는 복지사들이 그러했고 왕국의 원수들이 그러했고 우리들이 그러했다. 이에 예수는 그런 세상과 인간의 연구와 도전으로부터 저 멀리 떠나 자신의 본향인 '십자가'로 다시 숨어버리신다.
왜 인간에게 이런 반복적인 '찾고자 하는 심보'의 악순환이 되풀이 되는 것일까?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버릴 수 없는가? 누가 좀 나서서 인간자체를 괴롭게 하는 뭔가를 산산조각낼 수 없는가?
불행히도 인간편에서는 그 해답의 열쇠가 없는 것 같다. 인간을 휘어잡는 세력이 엄연히 실제한다고 성경에서 밝히고 있기에 그 악순관의 관계를 인간편에서 끊을 수 없어 보인다. 고대 철인 탈레스는 '만물의 근원을 물이다'고 했다. 왜 그는 만물의 근원을 물로 봤는가? 그가 본 이 '물'은 자연의 일부로 존재하는 물이 아닌 자신안에 이미 존재했던 그 무엇이 자연의 '물'과 일치했음을 보여주는 것 같다. 자신이 생활했던 지역과 소유주와 피지배계층의 사회적 부조리를 통해 본 그만의 통찰력이라고 할까 그는 사물의 관찰을 통해 '만물의 근원이 물이다'라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탈레스 이후 수 많은 철학자들이 그에 대한 주장을 다양한 각도로 사색해서 이색적인 주장을 내놓을지언정 그들은 탈레스의 본질적인 틀을 즉 아담의 한 형상이란 층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모든 철학자들은 이성을 무기로 온 우주를 사유하고 해석해서 세상에 내어 놓지만 그 모든 것은 아담의 한 형상으로서 작품일 뿐이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이 뭍어 있지 않는 것이다.
철인들이 우주와 인간을 보고 신을 찾거나 혹은 이성과 윤리도덕을 정의하고 나름 사색을 통해 인생과 우주의 기원을 운운했지만 그것은 한낯 개똥철학이었다. 물론 개똥철학도 철학이지만 그 철학을 통해 신비로울 정도로 심오한 인간의 심연을 간접적으로 배울 수 있다.
철인에 대해 잠시 멍청하게 생각해본다. 철인들은 우주와 무지한 인간안에 자신의 정체를 감추고 죄로 밀려오는 날조된 마음의 욕망을 날마다 억제하면서 하늘에 무의미한 헛소리만 쏟아 올린 '작은 신들'이었다. 철학자들을 칭하여 궤변론자와 사변론자라고 하는 것은 자신이 죄의 시궁창에서 날마다 쏟아놓는 역겨운 사색들을 자신조차 이해불가능하고 또한 타인들도 알아 듣지 못한 말에서 유래한 것일 것이다.
'궤변'이란 정의가 무엇인가? 상대편을 이론적으로 이기기 위해서 상대편의 사고와 이념을 혼란시키거나 감정을 격앙시켜 거짓을 참인 것으로 꾸며 대는 논리적 사고를 궤변이라고 말한다. 이 정의를 어디서 많이 듣던 것이 아닌가? 우리 주위에서 많은 경험된 이야기가 아닌가? 부끄러운 것은 주위를 둘러볼 것 없이 '내'가 바로 그런 자다. 내가 바로 철인이었고 내가 바로 우주와 무지한 인간속에 나 자신을 감추고 '신'과 '인간이란 누구인가?'를 잠꼬대하면서 내뱉은 말이다. 그리고 선악과로 타락한 아담의 형상을 인간에게 심는 궤변론의 제1인자인 '마귀'의 영향권 아래 살아가는 인간이었다.
그런데 예수는 궤변론자인 마귀와 철인(인간)을 십자가에 못박았다. 그리고 십자가의 피로 그들의 세계를 덮어 버렸다. 이제는 예수의 피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신세가 되었다. 하나님은 한 번도 만물이 처음부터 예수의 피 밖으로 나온 적이 없다고 공언하신다. 궤변론자 마귀는 날마다 온 우주에 분명히 똑똑히 덮여 있는 피의 층을 걷어내고 육의 층을 덮고자 속이고 유혹하는 영으로 오늘도 피의 언약안에서 일할 뿐이다. 신자는 누구인가? 신자는 궤변론자인 마귀에게 속고 속임을 당하면서 피의 언약안에 있음을 새삼 오늘도 확인당하면서 살아가는 자다. 이것이 '싸움꾼' 야곱이 받은 하늘의 축복이 아니겠는가? 신자가 예수의 피의 현장의 싸움꾼으로 초대받지 않고 신앙할 그 때에 하나님은 당신의 '피'의 뜻을 이루기 위해 궤변론자 마귀를 수시로 보내신다.
He is a cross pendant.
He is engraved with a unique Number.
He will mail it out from Jerusalem.
He will be sent to your Side.
Emmanuel
Bible Verses About Welcoming ImmigrantsEmbracing the StrangerAs we journey through life, we often encounter individuals who are not of our nationality......
Who We AreWhat We EelieveWhat We Do
2025 by iamachristian.org,Inc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