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째)
Hallstatt 10:50 배 타고 →11:12 Badisul 12:23출발→ 150버스 타고 Zalsberg 14:12에 도착 17:55분 출발→ 쾰른 22:30분 집에 도착
아, 피곤하다.
깊은 밤을 홀로 질주는 고속열차는 안 팍으로 조용하고 마치 단선으로 흐르는 바이올린 선율같다.
밤이 되면 모든 것이 어두움에 덮히는 것처럼 동일하다. 인간의 본래의 자리를 나타난다.
저녁이 없는 아침은 없단다.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창 1:5)
이종분 집사님의 친구분 김oo 권사님에게 전화가 왔다.
만나 뵙고 싶단다.
하나님은 ‘오기로 믿는 것이 아니라’는 교훈이 필요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오용익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서 잤다.
(10일째)
바깥에는 비 내리고 바람 분다.
졸지에 현재는 없어지고 과거로 떠밀려간다.
과거는 항상 올려놓지 못한 연극 같은 것이다.
등장인물이 5명이었다가 4명이 생각나다가 3명이 생각나다가 2명이 생각나다가 1명만 이 끝까지 살아남아 생각나는 연극이다.
그 한명이, 바람처럼 후딱 지나가면서 흔적을 남기신 엠마오의 길의 예수님이 되었으면…(눅 24:13-31)
더 필요치 않다면 이미 다 얻은 것이다.
(11일 째)
계속 비가 내린다는 예보가 떨어졌다.
오늘은 라인강을 탔다. Koblenz시에서 내려 마르크스Marks성까지 유람선을 탔다. 시속 10km. 딸이 답답해한다. 의견 존중. 후딱 내렸다. 롤렐라이 언덕까지 얼마 안 남았는데…약간 미련은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내린 그 마을이 대박이다. 옛적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가이드가 결코 안내하지 않을 한적한 마을이다. 그 동네 이름은 Braubach 마을이다.
동양인 세 명이 어슬렁거리는 것을 보고 마을 사람도 이상하단다.
일부로 되돌아가는 기차를 뒤 시간으로 미뤄가면서 조용한 마을을 조용한 마음을 산책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마을은 시간이 정지되어 있다. 백설동주 동화책에나 집들로 즐비한데 집들의 특색은 집 골격을 하얀 선굵은 페인트로 표시한 그 옛집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자세히 보니 그 집 연대가 1063년부터 시작된다. 오, 1050년 된 가정집이라니!
(12일째)
로마라는 복잡한 동네에 내 몸 하나 꼭 추가해야 하나?
관광객이란 늘 유령으로 대우받는 신세다.
그 서러움을 어쨌든 이겨내야 하는데…
이탈리아 피오미치노 공항에 도착했다. 로마 시내까지는 대구에서 영천까지의 거리다.(38km)
기차를 타야 했다.
피오미치노공항→ 3:45 Tuscolana역→ 4:43 폰테논고 pdnte longo→Nunidio Quadrato역 -조이아 민박 5:00
살짝 열어놓은 창문 틈으로 도시의 밤 소음이 들어온다.
여기는 조용한 나라가 아니다.
술꾼들의 잡담과 함께 밤은 길게 이어진다.
그들의 걸쭉한 억양들은 억지로 듣고자 하지 않더라도 어느새 자장가가 된다.
자다가 깨든지.
깨다가 자든지.
그러다가 아침이 되겠지.
(13일째)
아침 8시. 바티칸 성당 앞으로 갔다. 빨리 줄서야 관람한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긴장되는 검색대를 통과해서 바티칸 베드로 대성당으로 들어갔다. 뉴스에도 나오고 영화(다빈치 코드)에도 나오는, 마당에 오벨리스크가 우뚝 선 그 건물이다.
초대 기독교 교회 형식에는 직사각형의 바실리카와 둥근 원형의 두 종류의 기본형이 있었다. 313년 6월 15일,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모든 종교에 관용을 베푸는 밀라노 칙령을 공포한 후, 지하에는 비밀리에 예배를 보던 기독교인들은 공공연하게 예배와 성찬의식을 행할 장소가 필요하게 되었다.
로마의 신전은 많은 신을 섬기던 건물들로, 우상과 박해의 기억 때문에 기독교의 예배장소로는 적합하지 못했다. 그들은 로마의 공공집회 장소를 쓰던 바실리카basilica를 빌려 사용했으나 교인들이 불어나자 바실리카를 개조해 실내집회를 하기에 알맞은 그들 자신의 교회를 지었다. 성 베드로 대성당은 이 바실리카 형식의 초대교회다.
초대 교회 성 베드로 대성당은 바실리카 형식의 전형적인 교회였다. 로마 시대에 바실리카에는 판사나 문제의 해결사들이 직사각형으로 된 실내 양쪽 끝에 한가운데 들어간 ‘앱시스apsis’라 불리는 감실監室에 책상을 놓고 앉는 자리가 있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강단에서 설교를 하거나나 세례의식에 집중하기 때문에 한쪽의 앱시스(감실)만 필요했다. 바실리카 형식은 후에 서구 교회와 한국 교회의 구조적 기반이 되었기 때문에 성 베드로 대성당의 예를 들어 좀더 자세히 설명하기로 한다.
로마의 바실리카를 모델로 한 옛 성 베드로 대성당은 16세기에 허물고 현재의 바티칸을 새로 지었다. 원래는 길거리에서 정문이라고 할 수 있는 프로필레움을 지나고 기둥이 늘어선 빈 마당인 아트리움을 지나야 성당 내부에 들어갈 수 있었다.
실내구조를 보면 교회 한복판에 직사각형의 큰 좌석 공간이 있다. 교회를 배에 비유하는 넓은 공간을 ‘네이브nave’라고 한다. 우리말로는 ‘배’라는 의마의 腹板이라고 하는 게 좋겠다. 왜냐하면 해군이라는 뜻인 ‘navy'나 배꼽인 'navel'도 배에서 왔기 때문이다.
교회의 중앙 좌석 양쪽에는 기둥이 줄기어 있는 ‘아일aisle'측랑(側廊)’이라는 긴 복도 공간이 달려 있다. 제단이나 설교단이 놓이는 벌린 팔 모양이 가로로 놓인 교회 공간을 서양에서는 트랜셉트transcept라고 한다. 우리말로 날개에 달렸다는 의미로 익랑이라고도 한다. 교회의 머리 같이 맨 끝의 익랑 뒤에 반원의 앱시스 공간이 달려 있다. 팔 위의 머리 같은 부분이다.
지붕은 평면의 목조로 덮여 있다. 실내의 채광은 기둥 위의 벽에 있는 채광에서 들어온다. 베드로 대성당은 애초에 베드로의 무덤 위에다 순교교회를 지어 354년 헌당식을 가졌다. 성당은 측랑이 좌우 양쪽에 두 개씩 모두 네 개에 긴 팔이 뻗친 익랑 공간이 있어 1만 3천명의 많은 교인들을 수용할 수 있었다.
원래 익랑은 밑에 있는 베드로의 무덤과 교회의 배같이 넓은 중심부인 네이브 아래에 있는 일반 신자들의 무덤을 분리하기 위해서 썼다. 1940년대와 50년대의 발굴에 의하면 지금의 제단 7m 밑에 있는 한 이방인의 무덤 위에서 베드로의 순교기념비가 발견되었다.
비잔틴 교회의 모자이크 미술(425∼540년)
기독교로 개종한 콘스탄티투스 대제는 330년에 지금의 터키인 이스탄불인 콘스탄티노플로 로마 제국의 수도를 옮겼다. 한편 서로마 제국은 서고트족의 위협 때문에 호노리우스 황제는 수도를 베네치아에서 40마일 떨어진 아드리안 해안에 위치한 라벤나 시로 옮겼다.
476년에 서로마 제국은 게르만 족의 손에 함락되고, 493년에 라벤나는 동고트 왕국의 수도로 전락했다. 그러나 539년에 콘스탄티노플을 지배하던 동로마 제국의 유스티아누스 황제의 장군이 이곳을 탈환한 후 서유럽의 경제와 군사, 예술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때 유럽은 벌써 끊임없는 야만 민족들의 침략에 의해 파괴되고 분열되어 500년부터 900년대까지 소위 암흑의 시대에 들어갔다.
라벤나의 여러 지배들은 5세기와 6세기 사이에 이곳에다 궁궐과 교회를 세우고 비싼 대리석과 화려한 모자이크 장식을 통해 고대 로마와 동코트족과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시대에 콘스탄티노플 양식의 다양한 모자이크 예술 작품들을 후에 남겼다. 조그만 도시 라벤나에는 가장 찬란한 모자이크 예술로 장식된 아름다운 비잔틴 교회들이 있다. 모자이크 기술은 로마에서는 세속적인 예술 기교로서 고도로 발달했으나 라벤나에서는 기독교 미술로 발전시켜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
교회 장식에 사용한 모자이크는 특히 벽에 기독교 교리와 설화를 나타내는 데 적합한 물감매체였다. 빛을 흡수하지 않고 반사하는 네모진 유리 테세라tessera는 수명이 길다. 라벤나의 모자이크는 색깔을 섞지 않고 단순한 패턴 속에 햇빛을 받아 반짝이도록 탄탄하게 조립되었다. 라벤나에에서는 로마의 신전 바닥이나 궁전을 섬세하게 장식했던 테세라가 아니라 큰 유리조각들을 사용하여 교인들이 잘 볼 수 있게 했다.
카롤링거 왕조의 미술(751∼987년경)
게르만 족들의 대이동과 정착이라는 대혼란기에 지금의 독일과 프랑스를 주축으로 하는 프랑크 왕국은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안정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프랑크 왕국의 카를 대제(재위 768∼814)는 기독교화된 로마 제국의 회복하고 로마의 옛 영광을 되찾으려고 노력했다. 그는 동서로는 바르셀로나에서 함부르크까지, 남북으로는 로마에서 네델란드의 유틀란트 반도까지의 유럽을 결속시켜 800년 성탄절날에 로마에서 교황 레오 3세로부터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추대되었고, 그때부터 카롤링거 시대가 시작되었다.
카를 대제의 취임과 동시에 유럽은 암흑시대에서 벗어나 문화가 다시금 부흥되기 시작했다. 카를 대제는 수도를 아헨에 두고 옛 로마의 문화를 부흥시켰다. 카를 대제가 시작한 로마 복원의 결실은 성당 건축과 성서 필사본, 교회 유물 등에서 발견할 수 있다.
814년에 카를 대제가 죽자 그의 제국은 그의 아들과 손자에게 넘겨졌다. 그의 세 손자인 카를, 로타르, 루트비히에 의해서 동프랑크, 서프랑크, 중프랑크가 각각 성립되었다. 이 가운데 중프랑크는 다시 3분활된 후 명맥이 끊겼고, 동프랑크와 서프랑크는 후에 각각 독일 왕국과 프랑스 왕국으로 발전해갔다.
동프랑크왕국은 카롤링거 왕통이 끊기자 여러 제후들에 의해 국왕이 선출되다가 오토 1세에 이르러 제국의 기반을 다지고 교황으로부터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추대된다. 오토는 문화와 전통을 보전했을 뿐만 아니라 이를 더욱 발전시키고 풍요롭게 만들었다.
유럽은 1050년 경, 게르만 족의 이동과 정착이라는 혼란 속에서 헤어나 기독교와 봉건제도이 새로운 시대에 들어섰다.
봉건제도는 왕들이 신하에게 땅을 주고, 신하들은 그들의 부하에서 또 땅을 떼어주어 최종적으로 농노까지 미치는 일종의 지주농업제도다. 그들은 땅을 받는 대신 군대나 노동력을 제공해 부를 축적하고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안정을 얻었다.
봉건주의 시대에 교회는 급성장하여 새로운 교회당이 필요했다. 교인들의 급성장과 성지순례로 갑자기 많은 교회당이 클뤼니Cluny 교단에 의해서 건축되었다. 많은 헌금과 유산상속으로 모은 거대한 재원 때문에 클뤼니 종단은 점차 사치해지고 타락해갔다.
종단들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 생활의 주요 특징은 신자들의 단체 순례였다. 신자들은 권능이 있고 병을 고치는 성자와 순교자들의 무덤이 있는 곳까지 대단히 위험한 순례의 길에 올랐다. 베드로와 바울의 순교지인 로마 외에 가장 인기있는 순례지는 성 야곱의 순교지인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성당이었다. 예루살렘 십자군 원정단도 집단순례라고 볼 수 있다.
교회는 순례자와 많은 교인들을 수용하는 목적뿐만 아니라 노르만 족과 마자르 족이 약탈 때문에 파괴는 교회를 재건하는 복구 차원에서 건축되었다. 특히 스페인의 콤포스텔라로 가는 큰 길목들에 ‘로마네스크 Romanesque양식(노르만 양식이라고도 한다)’의 순례 성당이 많이 세워졌다.
로마네스크란 말은 19세기에 처음 쓰여진 말로, 고대 로마의 건축양식과 비슷하다는 뜻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크기뿐만 아니라, 교회의 구조 자체에 새로운 변화가 생겼다. 물론 로마네스크 양식은 지역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확고하게 공통적인 양식적 특성들을 갖고 있다.
먼저 육중한 기하학적 블록 같은 직시각형, 입방체, 원통, 반원통 등의 윤곽을 가졌다. 성당은 아주 정확한 기하학적 모델 같다. 도안의 육중한 육각기둥과 무거운 아치로 표시한 십자가교차부가 새로 도입되었다. 입구에는 동쪽 제단으로 교인들을 인도하던 장방형 바실리카 양식에 수정을 가했다.
새로운 교회건축은 세심하게 네이브(동랑을 분할하고 재분할해 교인들의 행진을 통제했다. 네이브 육중한 각기둥과 원형기둥이 떠받는 둥근 아치의 칸으로 네이브와 익랑을 다시 정의했다.
르네상스의 미술
르네상스는 15세기 초에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처음 시작되었다. ‘문예부흥’이라고 번역되는 불어 ‘르네상스’는 이탈리아어 ‘다시 태어나다’에서 비롯되었다.
르네상스는 한동안 잃어버렸던 고대 학문과 예술, 특히 미술이 새롭게 다시 태어나는 운동 전체를 말한다. 르네상스 미술가들은 그 당시 이탈리아에 많이 남아 있던 로마 제국의 건축, 조각, 그림에서 직접 고대의 미술을 배울 수 있었다.
16세기는 황금의 시대, 또는 종교개혁의 시대, 최고의 문예부흥의 시대며, 천재들의 시대다. 교황청은 1500년에서 1527년 동안 권력과 능력이 있는 야심 찬 교황들의 전성기였다. 강력한 교황들의 권위와 부가 왕실의 권위에 도전하던 시대다. 교황 율리우스 2세가 초석을 놓고 메디치 가의 교황 레오 10세가 베드로 성당을 새로 지어 천재 미술가들의 걸작으로 화려하게 장식했다. 그러나 교회의 권세와 부는 신성로마 제국 찰스 5세의 1527년 로마의 약탈 때문에 기울기 시작했다. 루터는 베드로 성당을 새로 짓기 위해 면죄부를 판 교황청에 도전하고 종교개혁의 신교를 창설했다.
1500년에서 1527년 사이는 서양미술의 전설적인 인물인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티치아노, 틴토레토 같은 천재 미술들이 활동한 르네상스의 전성기였다. 그들 대가들로 서양미술에 불후의 걸작들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장인기능에 불과했던 미술의 지위를 시時의 지위처럼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렸다.
매너리즘의 화가들(1525-1600년 경)
라파엘로가 죽은 이후 1523년부터 바로크 미술이 시작되는 1600년 까지의 75년간의 미술을 후기 르네상스라는 이름 대신이 매너리즘mannerrism 미술 양식이라 한다. 매너리즘 미술은 창의성보다는 손재주를 부리는 지나치게 과장된 수법의 인위적인 미슬이다.
르네상스 양식이 인체의 우아한 안정성과 세련된 균형감각에서을 발견했다면, 매너리스트 양식은 난폭할 정도로 불안정한 상태에서 몸을 틀고, 과장하는 자기 특유의 양식을 추구했다. 매너리스트들의 창작공간은 질서정연한 르네상스 화가들과는 달리 막연하고 중심점이 없다.
로마의 바로크 미술과 화가 카라바조(1571-1610)
17세기의 바로크 미술은 카톨릭 교회의 신앙과 권위를 표현한 교황과 군주들을 위한 미술이다. 교황 우르반 8세와 스페인의 펠리페 4세, 영국의 찰즈 1세, 루이 16세 같은 카톨릭 왕들이 고용한 미술가들은 교회의 권위와 신앙의 절대성, 신이 부여한 왕권을 찬양하는 수단으로 건축과 조각, 그리고 그림을 이용했다.
루터 신교도들의 도전으로부터 서서히 회복되어 교세를 확장하기 시작한다. 카톨릭 교회는 순교자들의 이미지들을 통해서 신앙의 신비를 재강조하는 제단화를 많이 그려 신자들의 감정에 호소하고자 했다. 또한 미켈란젤로나 라파엘로가 부각시킨 아름다운 인간묘사 대신에 미술을 교황과 왕, 귀족 같은 특정 인물의 영광을 찬양하는 수단으로 이용했다.
성 베드로 성당을 나와서 그 곁에 붙어 있는 바티칸 박물관으로 입장하기 위해 무려 1시간이나 줄을 서야 했다. 어느 여행자는 여름이 이곳에 들어가려고 2 시간을 기다리다가 졸도 했다고 한다. 줄 서 있는 대열 가운데서 미국 여자 관광객이 담배를 피운다.
한국에서의 버릇처럼 제지하려고 나서다가 아차, 영어가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황급히 제자리로 돌아왔다. 언어가 안 되면 약자가 된다.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 나그네와 이방인이 그래서 불리한가?
유난히도 수녀 아줌마들이 많이 들끓는다. 그것도 유니폼이 각양각색이다. 카메라를 들이대었더니만 발작 증세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정중하게 예를 갖추어 흠숭해도 시원찮을 분을 감히 어딜 관광용품 취급하냐”는 투다. 그렇다면 특별한 유니폼을 차려입고 마치 경건한 사람이 따로 있는 양 위선을 떨기는 왜 떠느냐?
10시 20분에 드디어 입장했다.
한마디로 말해서, 미술학원에 들어 선 기분이다. 조각들 사이로 귀신 나오겠다.
그림들은 모두 그 당시 만화들이었다. 오기 전에 현대미술관을 돌아본 것이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왜 오늘날의 천재 화가들이 그림을 요상하게 뒤틀려진 심보를 가진 것처럼 그리는지 그 이유를 알겠다.
어떤 이는 말한다. “로마를 보고 죽어라”고. 하지만 나는 달리 말하고 싶다. “로마에 오면 생사람 잡는다”고.
천지창조가 그려진 홀에는 사람들이 고개만 쳐들고 가이드를 앞세운 관광객로 인해 계속 미어터진다. 바티칸 경찰이 사진을 찍지 말라고 계속 호각을 불어댄다. 그런데 내 딸은 들은 척도 안하고 카메라로 동영상을 다 찍어 버렸다. 외국에 오래 살더니만 간만 커졌나보다. 언어가 되니까.
영어도 못하는 나는 잡히면 불리하다. 따라서 어느 나라에서든지 그 나라에서는 그 나라말이 곧 법이요 힘이 된다.
그런데 이 ‘로마식 교회=천주교’라는 이 오래된 이단집단은 천국의 말을 전혀 할 줄 모른다. 하나님은 뭔가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심을 그들은 알지 못한다.(행 17:25) 또한 사람의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도 않으시는 분임을 그들은 알지 못한다.(행 17:24)
로마 제국이 주도적으로 개입해서 시작된 ‘로마식 교회=천주교’는 하나님의 뜻이 그리운 것이 아니라 인민들이 제공하는 권력과 환호성이 고대하고 그리워한다. 오늘날 한국교회와 같이.
사람들을 저주의 세계로 인도한다. 자기도 천국에 못들어 갈뿐더러 들어가고자 하는 자들도 지옥으로 인도하는데 그들에게는 천국의 언어를 알려주지 않고 만화책으로 온 성당을 도배했다. 눈에 보이는 감각적인 것으로 어두운 영혼들을 위로해 주면서 영업해 온 것이다.
교회란 피와 피와 연결로만 성사됩니다. 그것도 목회자의 피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피’다.(행 20:28/요 6:53-5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그런데 꼭 이런 교회에 이리들이 들끓는다.(행 20:29) 사도가 떠난 뒤 자리에 흉악한 이리들이 ‘하나님의 피’의 자리에다 자신들의 후해 해 보이는 미소로 애정 공세를 쏟아붓는다. 양을 잡아 먹으려는데 무슨 짓을 못할까!
십자가를 상품으로 해서, 자신이 차려놓은 교회라는 가게로 사람들을 데려오려 한다. 교회가 있고 목회자가 있다는 사실이 이래서 복음을 가리게 만든다.
현대 예술은 악마의 겸손한 작품이요, 중세 예술은 악마의 교만한 작품이다.
성도는 예수님이 쓰시는 도구가 아니라 아예 그 자체가 예수님의 작품이요 열매요 성전이다. 인간의 모든 솜씨는 그 피의 능력 앞에서 쓰레기로 드러나야 한다.
하나님으로부터 쓰여져서 남겨진 작품이라고 해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것을 십자가 피 앞에서 부정하는데서 영광이다.
바티칸 박물관을 나오면서 옛날 기능인들(라파엘, 미켈라젤로 등)을 보고 다음과 같은 소리를 하고 싶다.
“애쓰시고 용썼습니다. 그러나 인생은 짧고 허무하듯이 예술도 기술자인 당신네들의 죽음과 더불어 허무할 겁니다.”
(14일째)
아침 7시에 로마의 중앙역에 해당되는 테레미역 24번 노선 앞에 나갔다. 오늘은 소위 ‘남부 투어’를 하는 날이다. 로마에서 고속도로로 4시간 달려 봄페이 유적지를 돌아보고 곧장 남부 해변의 절경을 구경하는 날이다.
로마 7:20-폼페이(나폴리)-소렌트로-아말티 해안-포지타노 절벽
한국의 젊은 부부와 갓난 아기와 그 외 젊은이들과 같이 동행하게 되었다. 모두 인터넷으로 ‘투어 콘서트’라는 회사로 신청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젊은 사람들을 볼 때마다 불쌍하다. 이 험난 세월을 앞으로 더 살아야 하니 마치 제대신고식 하는데 연병장에 막 자대 배치 받아 들어온 신병들을 보고 있는 그런 심정이다.
속으로 말한다. “어지간하거든 대충 살아라. 너희들 천재 아니거든. 영웅 아니거든. 그저 한 마리의 바퀴벌레요 그냥 점이다 여기고 살다가 소리 소문없이 세상에서 사라져라.”
하지만 28살 먹은 된장남 가이드는 투어 차가 출발하자마자, 자신을 ‘말하는 천재’라고 소개하면서 객지 생활에서 오는 한풀이를 벼른 듯이 풀어 내고 있다. 미치겠다. 자신이 존경하는 인물을 김제동이란다. 그런 식으로 무려 오고 가며 8시간을 떠들어 대었다. 그것이 자기 회사만의 특징인 ‘투어 콘서트’란다. 맨 앞자리에 듣다 듣다 그만 내가 멀미를 하고 말았다. 너무 속이 상해서 멀미 난 것이다.
여행 가이드란 있는 둥, 없는 둥, 마치 교회 목회자처럼 존재해야 한다. 필요할 때만 답해주면 된다. 자신이 주도권을 쥐면 여행자는 불편하다. 같은 풍경이요 같은 유적이라도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과거 기억과 연계해서 관광지를 돌아보게 되어 있다.
차 안의 시간의 누구들의 시간인가? 여행자들만의 소중한 시간이요 경험들이다. 그런데 가이드는 왜 강제로 그것을 말살하려고 덤벼드는가? 지옥여행 따로 없었다.
점심 식사 때에 나왔던 파스타와 피자는 손도 못되고 콜라만 마셨다.
이탈리아는 남북의 생활 수준이 크게 차이 난다. 그것은 16개의 도시 국가로 분할 된 것을 근대에 무솔리니가 들어서면 전쟁을 통해서 억지로 한 민족 개념을 유발하려 했다. 하지만 경제가 뒷받침 되지 아니하면 불만 요소는 늘 상주하기 마련이다.
무솔리니의 파시즘 정권은 표면적으로는 소농과 소생산자들의 덕목을 찬양하면서도 실제로는 대기업으로의 경제집중을 꾀하고 있었다. 그 이후 이탈리아 최초로 보통 선거권 하에 치러진 선거에서는 왕정이 폐지되고, 제헌 의회가 구성되었다. 왕정에 관한 투표에서 반대 양상을 보였던 남부와 북부는 정치적 성향도 달리 했다. 기독교 민주당은 카톨릭 성향의 북동부에서 힘을 얻은 반면, 좌파는 북부에서 중부에 이르는 지역에서 다수의 지지를 받았다.
전후 자유주의적 제도의 틀 안에서는 노동자들의 의사를 제대로 대표할 수 없었다. 기독교 민주당의 당수는 당의 주요 지지기반인 남부 유력인사, 교회, 기업가, 미국의 영향력에서 보다 자유로운 독립적인 당 구조를 확립하길 원했다. 그래서 기독교 민주당은 많은 이탈리아의 공공자원을 그들의 독립된 자금조달원과 새로운 지지기반 확대를 위해 유용했다. 당시 6~70년대의 지속적인 호황기에는 그다지 문제시되지 않았던 이러한 일은 오늘날 이탈리아가 공공부문에서 거액의 적자를 기록하고 있고, 만성적인 부패구조에 시달리게 된 원인이 된다.
그러던 중 94년 선거에서 신생정당이 다수당의 자리를 차지하고, 기업가 출신의 실비오 베를루스코니(Silvio Berlusconi)가 혜성처럼 나타나 수상의 자리에 오르면서, 남북의 소득의 격차는 더욱 벌어졌다. 북쪽에서 자동차 회사나 패션관련 사업체를 건설했는데 이는 북쪽 유럽과의 물류비용을 감안할 때 어쩔 수 없는 조치였다. 거기에 비해서 남쪽에는 겨우 관광 수입으로 연연하는데 관광객들이 많은 이탈리아라고 하지만 관광수입은 이탈리아 총생산의 20% 밖에 안된다. 제일 큰 수입은 대리석을 깨다가 해외에 수출하는 1차산업이다.
서기79년 8월 재정 로마시대에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로 화산재에 파묻힌 도시가 봄페이다. 원래 바람이 정상적으로 불었으면 화산재가 봄페이로 오는 것이 아니라 나폴리로 날아갈 뻔했다고 한다. 약 25,000명이 살았던 도시가 몽땅 7∼8m 잿더미에 묻혔는데 1709년 4월 한 농부의 우연한 곡갱이 끝에 그 실체가 드러났다고 한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서기 79년 경에는 이것은 해안도시였다. 따라서 선원들이 이곳에 와서 아폴로와 제우스 신전에서 제사하며 항해의 안전을 기원했다.
보이지 않는 신을 현실이 뭉개버린 것이다.
신이 있는 현실보다 현실이라는 신이 더 세시다.
현실 속의 인간들은 신을 만들어 내고 그 신을 현실이 뭉개버리고.
그 뭉개버린 현실 속에서 인간들은 신을 또 만들어서 그 신을 다음 현실이 또 뭉개버리고.
신마저 현실에 밀린다.
보이던 신이든 보이지 않는 신이던 신이란 늘 무능하다.
무능하기에 인간들은 그 인간적인 면이 있는 신을 좋아하다.
나중에 진짜 신이 나타나면…?
인간은 경악할 뿐이다.
포지타노 해변이 세계 7대 해변이라고 우기지만 내가 보기에는 돈 있는 사람에만 해당되는 이야기다.
(15일째)
이제는 기대되는 곳도, 보고 싶은 곳도 없다.
집에 가고 싶다.
여행의 목적이란 타인을 통해서 자신을 다시 돌아보는데 있다. 나를 모시고 다니는 것이 여행이다. 집에 가고 싶다는 것은 집에 있을 때 훨씬 자신에 대해서 잘 보였다는 말이다.
아침 일찍 스페인광장에 나가 로마 시내 관광을 하기로 했다.
스페인광장이란 근처에 스페인 대사관이 있기 때문이다. 별 뜻없다.
스페인광장→명품거리→뜨레비 분수→부잣집 정원→베니치아 광장→판테온→나보나 광장→떼레베 강→천사의 성
스페인광장 맞은편에 명품가게 소복히 모여있다.
길 건너서 오른편 가게가 Dior- 맞은편 Ysl - 옆 가게 PRADA- 맞은편 GUCCI -옆 가게 BVLGARI -맞은편 A. Testoni -맞은편 Angeletti -길 건너고 맞은편 Giorgio Amani - 맞은편 Louis Vuitton - 옆가게 Valentino -옆가게 S.Ferragamo -옆 가게 Hermės -맞은편 Max Mara
Louis Vuitton 뒷 가게 Givanchy 등이 있다. 두 개의 골목을 건너가면 VERSACE(베르사체)가 있다. YSL 오른쪽 가게는 Missoni가 자리잡고 있고 맞은편에는 SHANEL 이 있다. 명품거리 앞과 끝에는 BENETTON이 자리잡고 있다. 별 5개짜리 호텔과 함께 있다.
명품에 붙는 가격을 상징적 가격이라고 한다. 그것을 구입하는 동시에 멤버쉽이 형성된다. 어지간한 자들은 우리 노는데 끼어 들지 말라는 말이다. 상대적 우월감을 획득하는 대신 지불하는 값이 명품 값이다.
베네똥을 차고 다니면서도 자신을 똥으로 여기는 자가 있다면 그건 기적이다. 이런 기적을 맛볼 기회가 어디 올려나?
판테온 성전 앞에서 맥도날드 햄버거를 사 먹는데 무려 30분 동안 줄 섰다. 외국 사람들은 여자들도 보통 2 세트를 먹는다. 그렇게 보니 별로 헐한 가격도 아니다.
뜨레비 분수 앞에서 500명도 훨씬 더 되는 인파가 모여 있다. 경찰이 분수 안으로 들어가지 말라고 호각을 부르대지만 정작 만인들이 보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뽀뽀하는 연인들은 말리지 않는다. 그들은 일종의 단단한 언약식으로 하고 있는 중이다. 만인 앞에서 한 맹세이기에 각자 마음 속에 자신들의 관계가 오래 간직되리라 믿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이 분수에 세 번째 동전을 던지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해주지 못한다. 이 분수에 세 번째 동전을 던지면서 구하는 자비는 “제발 이혼하게 해 주세요”라는 자비다.
5박 6일동안 아침 저녁은 민박집에서 한국음식을 대하게 되었다. 거기서 여러 한국 젊은이들은 만나게 되었는데 한국에서 온 사람은 거의 없고 주로 프랑스나 영국에서 유학 온 학생들이 방학을 맞아 이탈리아에 관광하러 자들이 태반이다.
둥근 식탁을 마주하면서 자연스럽게 자신들이 하는 일들을 한국말로 주고 받았다. 어떤 여학생은 다니던 직장 그만두고 영국에 저널을 연구하려 왔고 했고 어떤 여학생은 국가 정책에 관한 연구하러 영국에 왔다고 했다. 30대 후반의 처녀 아줌마는 직장 그만두고 소녀 시절 때하고 싶었던 미술사를 공부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이 때 내가 거들었다. “하고 싶은 것은 젊을 때 마음껏 하셔야 합니다.” 그러자 다들 기분 좋은 얼굴을 들어서 내게로 향했다. 거기에다 한 마다 덧붙였다. “그래야 그것이 얼마나 허무하다는 것을 압니다.”
분위기가 싸늘해지는 것을 말할 것도 없다. 화가 약간 난 30대 후반 처녀 아줌마는 다음과 같이 즉각 쏘아댄다. “그러면,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은 지금 하시는 일이 허무하겠네요?”
예상했던 반응이 드디어 왔다. 쾌재를 부르면서 연이어 다음과 같이 말로 운을 뗄려고 했다. “모든 것이 허무함을 아는 그 순간, 비로소 허무로부터도 자유를 얻습니다.” 하지만 아내가 어느 틈에 막고 나섰다. 남편이 불리하다고 여겼던 모양이다. “이이는 갈 데까지 다 가보고 하는 말입니다.” 이런 헛발질!
조이아 민박 주인이신 이oo 께서 학생편을 든다. “나도 성악을 하고 있지만 아직도 더 이룰 꿈은 제게도 있답니다.”
“아, 좋은 기회였는데…”
(16일째)
오늘의 일정은 이러하다.
콜로세움→-팔라피노언덕→포로로마나→성 지오바니 성당→카타콤베 오후 2:30
아침 일찍 콜로세움을 보러 갔다.
원형경기장 콜로세움은 시간의 검투사에 의해 사정없이 한쪽 어깨가 짤려 나간 모양새를 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조차 승자의 여유로 보인다.
절개된 지하실이 반쯤 노출되었다. 불쌍한 검투사와 짐승을 대기해 놓았던 장소다. 7만 여 관중들이 함성을 지을 때, 검투사들은 일시적으로 스타의식을 느껴졌을 것이다. 존재의 의미를 맛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죽음을 대가로 얻어낸 환각이다. 오늘날의 연예인들이 이런 인기 매력에 빨려들어간다. 집어등처럼.
팔라피노 언덕은 조용한 공원같다. 집 뒷동산에 올라온 기분이다. 오랜간 만에 신발에 흙이 가득하다. 황토빛 흙 위에 올리브 나무만 가득한 언덕. 곳곳에 파인 곳인 벽돌공장같은 고대 주거터다.
있다는 것 때문에 없던 질문들을 퍼붓게 된다. “당신들은 왜 거기 살았습니까?” 여기에 대해서 그 땅의 선조들은 다음과 같이 답변한다. “그런 질문을 하는 너희들을 있게끔 하기 위하여”
이로서 있음에서는 그 어떤 해답도 안 나온다.
시간이 약간 흐르자 수많은 여행단들이 콜로세움 주변을 포위했다. 그 와중에서 우리 가족이 본의 아니게 이별하게 되었다. 두 시간을 찾아 헤맸다. 나중에 알고 보니 불과 20m 사이에는 두고 같이 찾아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만나기로 약속한 장소를 모호하게 지정해서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와서는 서로의 모습들이 가려져 버린 것이다.
외지인에게 있어 로마가 관광지로 보이지만 실은 그 안에 사는 진짜 로마인에게 로마란 삶의 본래적 기능이 전부다. 갑자가 화단을 가로질러 마구 뛰어가는 자들이 있었다. 조잡한 스카프를 팔던 스리랑카 잡상인들이었다. 순찰차가 뜬 것이다. 이것이 로마가 지닌 삶의 본래적 기능이다. 잡히면 추방이다. 로마는 관광지가 아니라 목숨을 담보로 하는 곳이다.
로마의 마지막 여행코스로 카타콤베로 잡았다.
가이사 황제의 기독교 핍박을 피해 120년 동안 많게는 20,000명의 사람들이 이 지하토골 속에서 먹고 마시고 예배드리고 그리고 죽어갔다는 그 지하 무덤세계다.
가이드의 안내로 속으로 들어갔다. 마치 열차 침대칸 같다. 무덤이 촘촘히 쟁여져 있다. 곳곳에 비둘기 형상과 요나 고기 그림이 어설프게 그려져 있다. 그 중에서도 재력있고 고위층(교황)의 것은 면적이 넓었고 대리석으로 장식했다고 한다. 가족묘로 따로 설치할 수도 있었다. 위를 보니 약 15m쯤 되는 듯 보인다. 하지만 안내원은 말한다. “이 밑으로 지하 3층이 더 있습니다”
길이 너무 좁아서 어깨 넓은 이는 통과하기 곤란했고 축축했고 서늘했다. 손톱으로 몰래 흙을 파보니 쉽게 파인다. 안내원 말이 이 흙은 공기가 접촉하면 시체 썩는 냄새를 흡수한다고 한다. 너무 넓어 일부만 보여주었다. 어떤 일본 관광객은 이 안에서 실종되었다고 한다.
폐쇄공간에서 나오니 마음이 서글퍼진다.
과연 이들이 순교자일까?
그들은 단지 세상을 떠나는 방법을 서툴게 의식했던 자들일 뿐이다. 본인들이 동의할 수도 없고 동조할 수 없는 최후를 강요당했다. 그래서 지하로 내려갔다. 자신의 신념에 부합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스스로 숨긴 자신들의 은밀한 최후를 까발리는 것은 무슨 심보인가? 자랑스런 최후라고 그들이 믿었다고 여기는 것들을 도로 곱게 흙으로 묻어두어야 한다.
신앙의 기적은 8유로(12,000원)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갇혀 있는 그렇게 영원히 갇혀 있을 때 그들의 소박한 소망도 고이 간직하는 법이다. 15m로 덮여 있는 흙을 파내어서는 안 된다, 차라리 흙으로 묻어주는 시간의 지혜를 배워야 한다. 소망이란 공개하면 허망하게 깨어지는 법이다. 어차피 인간은 먼저 뭉치인 인간이 어쩔 수 없이 내뱉는 소망이라면 그냥 인간들의 한계라고 여기고 하나님의 계시와 연계하지 말아야 한다.
신앙이 아니라 신념의 무덤들.
구원은 우리의 소망이 아니라 예수님의 소망이다.
숙소에서 로마의 마지막 밤을 보내었다.
도시의 밤에는
기차가 하늘로 다닌다.
닭 가슴살 달이 한적함을 채울 때,
진지하게 기도했다.
주여, 속히 이 세상을 멸망시켜 주시옵소서.
말라빠진 베데스다 못들.
더 이상의 자비가 사라져버린 연못들이 유적이 되었다.
왠지 차창 밖과 차창 안의 차이가 없어지는 기분이다.
그동안 살아온 것을 부끄럽게 여겨할 도시가 로마다.
신마저 표절하는 동네.
죄란 바로 이런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다.
역사란 ‘여전히 still’를 추앙하는 것이다.
거기 있으니 거기를 간 것이다.
거기에서 본 것은?
신보다 더 센 현실이다.
(17일째)
떠나기 전에 이종분 집사님 친구분에게 약속대로 전화를 넣었다. 복음에 대해서 한 말씀해달라신다. 교회에서 벌렸던 지난 과거를 깨끗하고 버리고 십자가 피부터 새로 시작하시라고 했다. 그리고 그것이 마지막 할 일이라고.
(18일째)
드디어 한국.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떡볶기 1인분 시켜 먹었다.
He is a cross pendant.
He is engraved with a unique Number.
He will mail it out from Jerusalem.
He will be sent to your Side.
Emmanuel
Bible Verses About Welcoming ImmigrantsEmbracing the StrangerAs we journey through life, we often encounter individuals who are not of our nationa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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