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개발 지역, 교회에서의 탈출|
재개발 지역이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신월 6동에서의 추억은 교인들이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고 아이들이 태어나서 자라고 어느덧 청년들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마에 새겨진 주름살만큼이나 세월은 흘렀다.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살았던 신월 6동이 쥐도 새도 모르게 재개발 구역으로 확정이 되었다. 투기바람이 불었다. 집값이 오를 때로 올랐을 때 일찌감치 집을 팔고 나간 원주민들은 돈을 챙겼다. 그렇게 어디선가 불어온 세찬바람처럼 금방이라도 재개발이 될 것 같았는데 경제상황과 조합장의 횡령과 각자의 이기심으로 중단이 되었고 돈 많은 사람들이 투기 목적으로 집을 사둔 집들은 빈집들이 되어 방치가 되었다. 그래서 재개발 지역에 묶여 오지도 가지도 못한 신세로 전락해버린 동네는 폐허가 되어 밤이 되어도 군데군데에서 켜지는 불빛만이 조용하게 새어 나올 뿐이었고 이제 더 이상은 재잘거리며 학교 가는 아이들의 시끄러운 소리로 아침잠을 깨지 않는다.
하지만 세월과 함께 말과 소문만 무성했던 재개발이 이젠 정말인가 보다. 신월 6동 주민들은 서류를 내기에 정신없이 분주하며 조합사무실에는 빗발치듯 문의 전화가 온단다. 그래서 나도 문의 전화했다가 괜히 화풀이를 당했다. 하루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전화를 걸어서 상담하는데 일일이 다 어떻게 알아봐 주냐는 것이다. 처음에 그 마음을 십분 이해하기에 고분거리며 물어보다가 화가 치민다. 보상 대상이 된다, 안된다만 이야기해주면 될 것을, 그래서 어떤 자격 서류가 필요하다고 말해주면 될 것을, 허위로 보상에 눈독 들이는 자로 취급하기에.....,그렇게 함이 세상 이치고 당연한 것이겠지. 그냥 이유가 없다. 당해야 되는 것이다.
결국 신월 6동에 거의 20년이 넘게 거주했던 의존교회 예배당은 제외대상이었다. 상가로 보상을 받자면 사업자등록증이나 또는 영업신고증이나 세금영수증 같은 것이 필요했고, 전세자로 보상을 받자면 세입자가 그 구역에서 거주해야만 한다. 둘 다 해당사항이 없었다. 교회 등록해서 세금을 낸 것도 아니었고 전세계약 명의가 목사님 이름으로 되어있지만 목사님 가정은 신월 6동에서 이사한지가 꽤 오래되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냥 전세계약서만 있을 뿐이다. 우린 전세금만 주인한테 받고 나오면 되는 것이다. 보상금을 바라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지만 받을 수 있다면 마다할 사람이 어디 있을까?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근데 생각지도 못한 결과는 이런 고백 외엔 다른 것을 토해내지 못하게 하셨다. ‘하나님의 일처리 한번 참 깔끔하시네!’ 전세금은 그 때 동참했던 교인들에게 돌려 줄 것이고 의존교회는 목사님 댁에서 모이기로 했다.
3월 27일 주일을 마지막으로 정들었던 2층 장소는 재개발과 함께 사라지게 될 것이지만,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교회는 새롭게 또 발생될 것이다. 이주시기가 확정되었을 때는 당장 예배당이 어디로 갈 것인지 그것부터 걱정했다. 그래서 우린 이런 생각을 서슴없이 했다. 이럴 때 교인 중에 돈이 많이 있는 사람이라도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라고. 이럴 때 상가라도 운영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참 좋을 텐데..라고. 로또를 사야 하나? 라고. 무슨 일만 생기면 우린 먼저 돈을 생각하고 우리 힘으로 어떻게 해보려고 하는 것이 우리의 오랜 습관이고 지워지지 표범의 반점과 같다. 이 세상의 해결방식을 그대로 따른다. 돈으로 다 해결되는 세상, 그 세상에서 우린 산다. 아니 살게 하셨다. 우리 존재가 세상이니까.
주님의 백성을 공중권세 잡은 자의 세상에 패대기치시고 주님이 얻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런 질문은 참으로 어이없는 질문이겠지만...주님은 흘리신 피 값을 다시 찾는 방식으로 우리를 처음부터 고아와 같이 버려두시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이라는 족보의 먹잇감이 되어 철저하게 보호받을 수 없는 그 상황으로 몰고 가시는 것이다. 고아라는, 그 처한 입장이 밝히 드러내주는 것은 주님의 흘리신 피였다. 주님은 주님을 얻는다. 주님은 주님을 증거 하는 말씀을 얻는다. 그게 전부니까. 우린 고아처럼 사용되어져도 주님의 흘리신 피로 말미암아, 추운 겨울 솜이불을 덮어주시는 그 사랑땜에 결단코 고아가 아니었다. 그것이 주님의 동행이시고, 그것이 우리를 다시는 세상에서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신다는 약속성취이시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요14:18).
십 여 년 전에 조그마한 사무실을 다녔었다. 내가 다녔던 옆 사무실 겉은 누가 봐도 단순한 사무실이었다. 나도 처음에는 사무실로만 알았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역겨운 냄새가 흘러 들어왔다. 어릴 때 시골에서 맡아 본 적이 있었던, 동네 아저씨들이 개를 잡아서 그슬리는 냄새였다. 겉은 사무실처럼 꾸며 놓고 불법 도축을 해서 파는 개장사들이었던 것이다. 개를 마대자루에 넣고 망치로 머리를 한방에 쳐서 죽이고 털을 태웠다. 개들의 울음소리... 그슬린 냄새...누가 신고했는지 얼마 되지 않아 그들은 나갔다. 옛날 어릴 때 시골에서는 흔한 일들..시커멓게 태워진 그 개는 자기가 키우던 메리였고 해피였고 흰둥이였다. 지옥 불에서 타다가 건짐 받은, 아직 꺼지지 않은 연기 나는 숯불이 바로 지옥에서 올라온 자들이라는 말씀을 들을 때면 이 장면이 떠오른다. 그렇게 주님은 우리를 시커멓게 그슬린 냄새나 피우는 자들로 사정없이 몰아넣으신다.
예수님의 죽으심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 예수님의 죽으심의 실체를 예표한 그림자로서 어린양을 제사로 드렸다. 내 죄 때문에 내 대신 어린양이 제물로 드려져야만 한다는 현실을 하나님은 그들에게 주셨다.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하기 위해서 그들을 독수리 날개로 업어오셨다. 애굽의 종살이에서(출19:4-6). 왜, 어린양이 피 흘리고 죽어야 하나? 그 물음을 품고서 살아야 할 신세가 된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한 두 번이지 매일 드려지는 번제는 형식적이 되었다. 자기가 죽게 생겼으니까 양이라도 잡아서 그 죽음을 면해보고자 형식적인 제사는 드릴 수 있어도 마음은 엉망진창이다.
성경을 처음 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동일한 입장이었음을 감 잡지 못하고 나는 그들과 다른 존재라고 한 발짝 뺐다. 이스라엘이 언약을 지키지 못해서 멸망했다면, ‘그렇다면 나는 예수님을 잘 믿고 교회생활 잘하면 심판의 대상에서 면제시켜 주고 천국 갈 수 있겠네...’ 라는 식으로 성경을 해석하고, 모든 것을 내 관점에서 해석한 해석오류. 이사야 1장을 보면서 그 가슴시린 기억을 잊을 수가 없다. 하늘과 땅을 만드신 하나님이 오죽했으면 하늘과 땅에 하소연하실까? 자식을 양육했는데 부모를 거역했다는 것이다. 말 못하는 짐승도 주인을 알아보는데 하물며 자식임에도 불구하고 키워준 부모를 알아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나쁜 백성들이 있나? 그래! 그러면 나는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이 하신 일을 알아주겠어.’ 또 해석오류다. 모든 성경을 다 그렇게 해석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을 없는데서 생겨나게 하신 것은 인류의 모델로서 선악과 따먹은 증거를 보여주기 위함이었음을, 숨어있는 배후의 생명나무의 실체이신 예수님을 증거 하기 위함이었음을, 감 잡게 하셨다.
그렇게 마음 없는 제사, 제사로는 도저히 자기 마음을 바꿔치기 할 수 없는 불가능은 점점 더 그들의 속성에 불을 붙이고 부채질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 일이 얼마나 번거로운고? 코웃음 치며 눈먼 것, 저는 것, 병든 것을 가져간다. 하나님은 내가 그것들을 받을 것 같으냐? 라고 하신다. 무수한 제물을 가져와도 내게 무엇이 유익하며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않는다고 하신다. 그럴 거면서 도대체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제사를 요구하셨나? 다 필요 없이 한 마음을 얻기 위해서이다. 곧 다윗의 마음이다. 오직 다윗의 마음을 얻고자 역겨운 제사를 받으신 것이다. 시편 51편의 고백을 받고자 하신다.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 하시나이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16-17). 이것이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언약이셨다.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예수님의 마음. 다윗은 예수님을 증거 하는 용도로 사용되었을 뿐이었다. 아버지는 절대로 그 아들의 마음을 거절치 못하실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의 피를 주고 산, 창세전에 선택한 백성들의 마음을 바꿔치기 하실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윗의 상한 심령에로 모으셨듯이.....,창세전에 선택한 백성들을 주의 날개 그늘 아래 모을 것이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10:45).
전에는 모든 것이 무서웠다. 모든 일이 무서웠다. 이제는 무섭지 않다. 두렵지 않다. 히브리서의 말씀대로 한평생 죽기를 무서워 종노릇하는 자들을 놓아주셨기 때문이다. 바울이 말한 대로 다시는 무서워하는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기 때문이다. 전에 같았으면 교회로 모일 건물이 없어진다면 무서워했을 것이다. 하나님이 이 교회를 버리시려고 그러시는가? 하고. 역시 저주 받아 합당한 자에게서 나오는 당연함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그 말씀을 이루시기에 “내 이름으로” 라는 것으로 못 박아두셨다. 내 이름으로 모이는 것만이 교회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18:20). 예수님의 이름의 행하심을 고백하지 않는 모임은, 주님에 의해서 마음이 바꿔치기 당함이 없는 자들의 모임은, 주여! 주여! 불러봤자 사탄의 회다.
그래서 이 근호 목사님은 이렇게 복음을 선포하셨다.
『하나님의 의로 행복하다면 보상금과 비할 수 없다. 천국은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니다. 살아서 이미 천국 사람으로 바꾸어져야 한다(서울강의에서). 교회는 말씀과 말씀의 만남이기 때문에, 말씀 전하면 임시적으로 목사 하면 되고요. 그 사람 입에서 복음 안 나오면 목사라고 해도, 교인들이 취급 안 하면 되는 거예요. 왜? 교회는 있는 것이 아니고 그때그때마다 발생되고, 그때그때마다 생성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대구 우리교회 오후설교에서). 교회 생각하지 말고 말씀 생각하고 그 말씀 속에서 말씀하시는 주님의 다음과 같이 해석에 휘말려야 한다.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 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눅 24:45-46) 이게 바로 항상 우연적으로 발생하고 소멸을 반복하는 참된 교회의 모양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마 5:6) (영화 스포트라이트 평에서).』
아멘!!!
He is a cross pendant.
He is engraved with a unique Number.
He will mail it out from Jerusalem.
He will be sent to your Side.
Emmanuel
Bible Verses About Welcoming ImmigrantsEmbracing the StrangerAs we journey through life, we often encounter individuals who are not of our nationa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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