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외란, 남들로부터 따돌림이 아니라 자기가 자기로부터 배신당하는 최근 세계의 공통적인 현상을 말합니다. 자본주의 상황 아래에서는 남자나 여자나 자기가 하는 일이 스스로의 욕구를 만족시킬 수 없는 지경을 이릅니다.
어떻게 해서 이 지경이 된 겁니까? 왜 내 행복을 위해서 내가 손수 일한 것이 결코 나의 행복으로 되돌아 올 수 없는 겁니까? 누가 훼방하는 겁니까? 이 훼방의 구조가 자본주의라는 겁니다. 옛날부터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생각해 온 삶의 방식, 즉 “나는 나의 행복을 목적으로 능력껏 일한다”는 당연한 진리가 자본주의 구조 안에서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바로 이런 현상을 ‘소외’라고 말하는 겁니다. 이 소외를 경제적 구조로 설명한 사람이 마르크스입니다. 그는 노동자들의 애쓴 노고의 대가가 자본가의 창고로 들어가 쌓여 있다고 말합니다. 이 현상이 일회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쌓여 있는 여분의 자본으로 인해 날로 노동자가 얻을 수 있는 자기 노동의 대가는 쪼그라들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본주의를 노동자 주의로 바꾸는 혁명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겁니다.
그러나 원인이 거기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남이 갖고 있는 것을 탐하고 ‘목적 위주의 삶’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옛날에는 사람들의 그저 살아가고 있다는 그 자체를 행복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목적 달성을 위해 미리 계획하지를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목적 달성이 행복이 아니라 산다는 그 과정이 곧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알기 쉽게 말해서, 자아라는 것을 아예 자연의 이치 속에 던져 넣어버리게 되면 자연과 한 덩어리 되어 만사가 돌아가기 때문에, ‘∼부터 소외’라는 것이 발생할 여지가 없는 겁니다. ‘이런들 어떠리 저런들 어떠리’입니다. 요즈음 들어와서 각 가정마다 자식을 이런 식으로 교육시키는 데가 거의 없습니다. 성공의 목적을 높게 설정해놓고서는 자식들을 족치는 식으로 몰아세우게 됩니다. 성공을 모르는 교육은 아마 깊은 산골, 홀로 남은 구식 할머니가 치킨 사 달라는 손자 아이에게 백숙 해 먹이는 사례를 통해서나 비쳐 나올 뿐입니다. (영화:집으로)
목적이나 목표를 일체 상정하지 않고 사는 대로 살아가는 자는 이 자본주의 구조에서는 남들의 눈 먼 탐욕에 희생물로 전락됩니다. 목적이 있다는 자체에 이미 소외의 조짐이 엿보입니다. “저것을 쟁취 못하면 나의 행복도 접는다”는 오기와 객기의 만남은 ‘과정, 자체에서 오는 행복’을 상실시킵니다. 즉 인간의 행복은 삶의 과정에 있지 신기루 같은 목표에 있지 않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은 목표가 세워지지 않으면 과정도 생겨나지 않는다고 오해하고 있습니다. 목표가 일단 만들어져야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조치로 과정이 의미 있게 비로소 깔리게 되리라고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믿음입니다. 왜냐하면 목표를 의식한 과정은 그 과정의 색깔이 이미 변질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집에서 앞치마 두르고 동태찌개 맛있게 끊어놓고 식탁보로 덮고서는 베란다에 나가서 한 손에는 뜨거운 커피 잔을 들고 아파트 주차장에서 남편의 퇴근을 한가로이 기다리는 가정주부가, 막상 생활전선에 뛰어들게 되면 그동안 자신이 가정에서 살림하는 것이 얼마나 어처구니없게도 돈 버는 시간들을 부질없이 낭비해왔는지를 통감하게 됩니다. 남들이 돈 벌 때, 자신은 실속 없는 낭만만 즐긴 것입니다.
이제 생활전선의 세계에서는 “누가 돈 많이 벌었다”는 소문이 자신에게 새로운 비전을 제공합니다. 오기가 부글부글 올라오면서 한 달 소득의 목표를 상향조정에 들어가고 그 목표 달성을 위한 새로운 스케줄이 깔리게 되면 그녀의 인생에서 ‘과정 자체에서 오는 행복’은 물 건너가 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현대인의 ‘소외’입니다. 즉 이 구조 안에서는 남자나 여자나 이상스럽게도 자신이 일한 만큼 기대한 행복이 자기 쪽으로 돌아오지 않고 있음을 감지하게 됩니다.
이런 점은 결혼을 포기해서라도 능력 있는 여성으로 살기 위해 일찍 생활전선에 뛰어든 사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돈도 있고, 내 아기도 가지고, 남자로부터 공주 같은 대접도 받고” 이 세 가지를 다 갖지 못한 것에 대한 불만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이처럼 서로가 서로를 보면서 상대방의 처지를 상상하면서 부러워하는 가운데 다 같이 소외감을 느끼는 것이 오늘날 세상의 모순입니다.
목회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영혼 구원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서 기도하고 심방하고 상담하고 설교단에서 외쳐봤자, 이상스럽게도 자신이 노력한 만큼의 결과가 되돌아오지 않고 항상 미흡함을 느낍니다. 더 이상 목표한 도달될 여력이 없다는 데서 오는 자괴감과 동시에 나의 행복도 저 산 너머 꼴까닥 넘어가 버렸다는 절망감이 함께 밀려옵니다.
“남이 가진 저것이 나의 것이 되었다면 나는 더 행복할 것이다”는 신기루가 자신을 망치고 있는 겁니다. 자신을 자신에게서 소외시키고 있습니다. 오늘날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편만한 소외감을 달리 분출할 길이 없어 나타난 현상이 바로 ‘자기 파괴-타인 파괴’ 현상입니다.
“네 죽고 내 죽자” 주의입니다. 성폭행, 강도, 시비 끝의 폭력 행사, 과음과 폭음, 공권력에 의도적으로 시비걸기, 과도한 다이어트, 빈번한 잔소리 싸움, 도박과 복권 구매, 개임과 스포츠와 광분하는 것, 과도한 주식 투기 현상 등등의 사태들은 “나만 죽을 수 없다. 다 같이 죽자!”는 무의식적 선동의지가 분출한 겁니다.
자기 행복을 가져간 불특정 다수를 향하여 울분을 터뜨리는 겁니다. 보복하고 복수하겠다는 겁니다. 열심히 일하고 뼈 빠지게 일했음에도 불구하고 돌아오는 것이 목표에 미달될 때, 공멸의 길로 역복수하고 싶어지는 겁니다.
원인도 모르는 채 살아가고 있고, 행복이 어디에 있는지 잃어버린 현대인들, 세상이 주는 축복을 기대한 것 자체가 자신을 불행의 늪에 빠지게 한 원인입니다.
자아란 자신이 홀로 만들어 낸 작품이 아니라 주변을 둘러싼 어두운 세상이 만들어 낸 작품이었습니다. 그 어두운 세상은 우리들에게 행복이 될 만한 목표 같은 것을 제공해 왔습니다. 큰 교회, 큰 목회가 목회자에게 제공해 준 검은 사료들이라면, 대기업, 최고 기업은 기업가에게 지공한 검은 사료들이었고, 젊음, 통통한 피부, 명품 가방 같은 것은 여성들에게 제공한 검은 사료였고, 승진, 최신형 자동차, 인기맨, 능력있는 인재 소리 듣는 것은 젊은 사람들을 환각에 사로잡히게 하는 검은 사료들이었습니다.
이처럼 인간들은 그동안 악마의 궁전에 갇혀 살고 있었습니다. 이제는 그 천장이 보입니다. 아무리 몸부림쳐도 벗어날 수 없는 이 창고 같은 세상!
놀랍게도 이 죽음을 뚫고 예수님의 태어났으며 죽음을 뚫고 승천하셨으며 죽음을 박살내면서 예수님은 재림하신답니다. 중요한다는 그 과정입니다. 이 구원의 과정 위에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말씀을 남겼습니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요 17;16)
찾은 이가 거의 없다는 좁은 길, 이 얼마나 큰 기쁜 소식입니까!
He is a cross pendant.
He is engraved with a unique Number.
He will mail it out from Jerusalem.
He will be sent to your Side.
Emmanuel
Bible Verses About Welcoming ImmigrantsEmbracing the StrangerAs we journey through life, we often encounter individuals who are not of our nationa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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