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에 의한 버려짐(6월 모임)

영에 의한 버려짐(6월 모임)

어떤 나라가 있다. 이 나라가 건국한 이래 알고 있는 스포츠 종목은 단 하나! 축구뿐이다. 그런데 이 나라에서 야구경기가 처음으로 열리게 되었다. 야구규칙을 알리 만무한 이 나라 국민들은 어떻게든 이 새로운 게임을 이해하고 싶다. 하지만 같은(?) 스포츠라는 멍에때문인지 머리 속에 가득한 축구규칙을 통해서 야구를 해석 할 수 밖에 없다.


 


왜 공이 저렇게 작을까, 왜 공을 손으로 던지는가, 골대와 골키퍼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십자가의 영을 받지 않고 성경을 읽는 것이 마치 이렇다. 축구규칙밖에 모르면서 야구를 즐기는 척 할 수는 있지만, 자꾸 주위 눈치를 살피게 된다. 혹, 누가 알겠는가? 내 옆 사람이 야구규칙을 알고 있는 사람일지. 언제 환호해야 할지, 언제 안타까운 한숨을 내쉬어야 할지 그리고 도대체 언제 이 알 수 없는 경기가 끝나는 것인지 조차 주위 사람들을 살피고 또 살펴야 할 지경이다. 마음껏 야구를 즐기고 있는 사람들이 눈에 보인다. 도대체 뭐가 재미있는 것일까. 호기심과 경계심 그리고 아는 척 하는 자의 형벌인 두려움이 팽배해 진다. 그가 계속 열심히 해야 할 일은 야구 즐기기가 아니라 들통나지 않도록 [나를 챙기는 일]이다.


 


고린도전서는 마치 영이라는 야구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구원받은 사도바울이 인간의 언어로 게임을 즐기고 있는 것과 같다. 육이라는 세상에서 단 한번도 있지 않았던 영이라는 경기장에서 마치 육의 세계에서도 잡아낼 수 있는 언어를 가지고 요리조리 경기를 하고 있다. 물론 야구규칙을 통해서 야구를 해석해야 하듯이 영의 규칙을 알지 못한채 고린서전서를 읽게 되면 자꾸 풀수 없는 질문만 튀어나오면서, 결국 나를 챙기는 일에 매진하게 된다.


 


그렇다면 사도바울이 따르고 있는 영의 규칙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의 지혜와 말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다. 그럼 왜 고린도전서를 적어 지금 나에게까지 읽히게 하는 의도가 무엇인가? 육은 육으로, 영은 영으로 남도록 하기 위함이다. 눈으로 귀로 마음으로도 알아낼 수 없는 영이라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그 사랑하는 자들에게 주시고자 예비하고 또 예비한 모든 것의 속성이다.


 


고린도전서 2:9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지금 사도바울을 장악하고 있는 영의 규칙은 분명하다. 영이라는 것은 오직 십자가지신 예수님의 세계다. 바울은 이것 말고 다른 것은 모르기로 작정했다. 인간의 지혜와 말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미련하고 어리석게 보인다. 그래서 성령이 아니라면 그것을 알 수가 없다. 십자가의 세계는 인간의 언어로는 "모순"이라고 밖에는 표현될 수 없다. 왜냐하면 신이라는 좋은 것이 죽음이라는 나쁜 것에 의해 점령당했다는 증표이기 때문이다. 좋은 것은 좋은 결과를 내야만 한다. 신이라면 더욱 그렇다. 예수님조차도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누가복음 6장 43절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느니라


 


그런데 십자가처럼 나쁜 결과가 또 있을까? 십자가처럼 처참한 실패의 증거가 또 있을까? 그 모순을 이해하는 것이 아예 처음부터 차단되어 있음을 알고 부활을 그 통로로 사용한다. 죽었지만, 살아났다는 것이다. 죽음을 이기고 살아났으니 이제 처음부터 다시 시작이다. 이제 다시는 죽을 일 없도록 더욱 강하게 믿고 소망하고 사랑하자. 처참한  몰골은 지나갔다. 그리고 내뱉는 안도의 한숨. 나를 돌아보게 될 때 한결같이 나오는 결론. [나는 괜찮은 거지?]


 


하지만 그 모순을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영쪽에서 부르시는 것이다. 주님이 자꾸 보이는 것이다. 바울이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것처럼, 성도로 부름받은 자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는 것처럼.


 


고린도전서 4장부터는 1장에서 언급했던 세례와 같은 사례를 영의 규칙으로 마구 흔들어 낸다. 세례(1장)도 사도성의 판단 문제(4장)도, 5장에 등장하는 음행의 문제와 6장의 성도간 송사 문제 또 음행의 문제, 7장의 결혼문제 등이 모두 육에서도 판단 가능하다. 아니 육은 이것을 오해할 수 밖에 없다. 사도바울은 그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처음부터 육이 오해하도록 장치해 놓았다고 하는 편이 낫겠다. 바울은 이 단어들을 사용해서 편지를 쓰면 육과 영이 완전히 갈라져 그 틈새로 십자가의 주님의 피가 흔건히 베어 나올 수 밖에 없음을 알고 있다. 그래서 분명히 확인되는 것은 십자가 지신 예수님말고는 영의 세계는 없다는 [터]만 증거되어 진다.


 


사도바울의 사도성에 대한 의심과 사도와 성도간의 구별의 문제를 놓고 무엇이 옳고 무엇이 틀렸는지 사람들은 육의 규칙에 의해서 판단하고 구별했을 터다. 마치 축구에 정통한 그 국민들이 야구를 심도있게(?) 즐기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의심받고 있는 주제에 바울은 이상한 말을 한다.


 


고린도전서 4장 4절


내가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한다고 한다. 야, 정말 지고지순한 경지이다. 칸트가 들으면 기절초풍할 고백이다. 반성하지 않는 인간은 인간도 아니라는 것이 칸트의 주장아니던가. 하지만 바울은 더 나아간다. 반성할 것을 깨닫지 못하지만, 그것이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한다고 해버린다. 육이라면 이 주장들은 상호 모순이다. 반성할 것이 없을 정도로 나는 의롭다라는 문장이 자연스럽다. 자책할 것이 아무 것도 없지만 의롭지 못하다. 왜? 자책은 내가 하는 죄에 불과하지만 의롭다는 판단은 자책할 것이 없다는 나를 판단할 수 있는 유일한 분, 십자가 지신 주님뿐이기 때문이다.


 


이제 문장이 아주 자연스럽다. 내가 나를 돌아볼 필요도 없다. 내가 나를 자책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님께서 자신의 피를 이유로 바울을 의롭다고 하시면, 게임이 종료된 것이다. 육의 판단은 모두 주님을 죽인 죄의 실체요 마귀의 술책인 것이 들통난다. 그런데 무엇때문에 사도바울이 주저하겠는가.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 아무것도 판단하지 마라, 판단하시는 분은 따로 별도로 계신다. 그분이 오신다.


 


고린도전서 4장 19~20절


그러나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의 말을 알아볼 것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보겠노니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그러나 주께서 허락하시면 알아보겠단다. 무엇을? 하나님의 나라의 능력이 있는지 없는 지를! 하나님 나라의 능력이 무엇인데 그것을 꼭 확인해야 할까?


 


고린도전서 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십자가가 바로 기준이기 때문에 그것만 알아보면 된다. 그것 외에 사도됨, 성도됨 등 부르심의 흔적이란 없으니 말이다. 십자가의 도가 바로 하나님 나라의 능력이다.


 


그럼 아비의 아내를 취하는 음행의 문제는 영의 세계, 십자가의 세계에서는 어떻게 처리될까? 이 문제가 어떻게 하나님 나라는 십자가의 능력으로 지지되고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드러낼 수 있는가.


 


고린도전서 5:2~3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물리치지 아니하였느냐


 내가 실로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어서 거기 있는 것같이 이 일 행한 자를 이미 판단하였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는 논점을 확장하면 판단은 우리의 몫이 아니니까 고린도교인들이 마음대로 음행한 자를 용서하면 안된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도 주님이 오시는 날까지 기다려야 옳다. 그런데 이상하다. 이러면 안되는데. 사도바울은 이미 판단해 버렸다. 어떻게 판단했는가?


 


고린도전서 5:4~5


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 이런 자를 사단에게 내어 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게 하려 함이라


 


사도바울은 육신은 멸하고 영은 구원한다고 한다. 구원문제까지 판단해 버린다. 왜 일까? 나를 판단하실 분이 십자가 지신 예수이기 때문이다. 사도바울은 자신을 부르신 자 안에서 그러니까 내가 나를 판단하는 차원에서의 판단이 아니다. 내가 나를 자책할 것을 깨닫지 못하는 상태가 곧 나를 판단하고 계신 주님의 판단이다.


 


정리하면 이렇다. 판단이라는 단어는 동일하다. 야구 공도 공이고 축구 공도 공인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이야기하는 사도성 판단의 문제는 사도바울이 과연 누구인가라는 문제이다. 내가 누군인가의 문제이다. 그런데 [나]와 [사도]라는 말은 서로 원수관계가 있다. 그러니가 바울의 사도성이라는 문제는 처음부터 부르심이 없다는 성립될 수도 없는 이슈이다. 부르심을 깨달을 수도 없는 주제의 사람들이 판단하는 것이다. 눈 먼 사람이 코끼리를 만지면서 옆에 서 있는 시력좋은 자에게 지금 자신이 만지고 있는 것이 "왜 코끼리가 아닌가"를 과학적으로 논리적으로(세상의 지혜와 말에 의존해서) 설명하는 꼴이다. 이 때 시력좋은 자가 나서면 문제가 복잡해 진다. 보이지 않는 세계에 빠진 사람에게 어떻게 본다는 것을 설명할 수 있겠는가. 맹인으로 하여금 자신이 맹인임을 [볼 수있도록] 하는 자가 그 일을 맡아야 한다.


 


그 일을 맡을 수 있는 분이 한 분 계시다. 바로 너희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다고 말씀하는 분이시다. 보는 것과 보지 못함을 인간이 소유할 수 있는 기능으로 보지 않으시고 죄의 문제로 몰고가시는 분. 결국 그 죄를 자신의 희생으로 해결하실 수 있는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시다. 즉, 이 부분에서의 판단은 하지 않음으로써 십자가 지신 분의 판단이 가능하다.


 


그런데 음행의 판단문제에서의 판단은 해야 한다. 왜 그런가? 판단함으로써 그리스도의 희생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사도바울은 이렇게 적고 있다.


 


고린도전서 5: 7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 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그리스도의 희생을 보여주기 위한 내어 버림이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희생을 보여주기 위한 내어버림이란 이미 누룩없는 자이지만 묵은 누룩을 내어 버려야 하는 처지를 말한다. 성도 각자가 그 자체로 독립적으로 누룩이 없어서 누룩없는 자라고 한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라는 희생이 만든 새 덩어리에 걸맞는 누룩없는 자는 없다. 묵은 누룩을 항상 버려야 할 처지의 자들이 새덩어리 즉, 그 희생 속에 들어가고 나니 그들에게 얼토당토하지 않게 [누룩없는 자]라는 주님의 판단이 쏟아져 내린다. 성도는 늘 묵은 누룩이 주님의 희생에 의해 버려지는 상태에 놓여 있다. 그런데 묵은 누룩없는 자는 아예 그 희생이 필요없는 자이다. 모두 주님의 희생에 의해 버려짐을 통해 곧 새 덩어리로 하나됨을 목격한다.


 


새 덩어리는 주님의 희생 위해 인간이 무엇을 보탬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늘 배제될 수 밖에 없는 처지의 인간을 용서하신 주님의 희생으로 꽉꽉 채워져 있다. 주님의 희생은 버려질 수 밖에 없는 인간의 몸이 어떤 상태인지를 고발함으로써 더욱 확연해 진다. 희생할 만한 것이 못되는 것임이 폭로되는 순간 그것조차 용서하신 분의 희생은 사랑의 양상으로 다가온다.


 


그렇다면 이제 버려질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상태를 고발할 차례이다. 그것을 한 마디로 압축한 단어가 다름아닌 [음행]이다. 아비의 아내를 취한 음행, 창기와 합하는 음행. 이 음행이 바로 나의 몸이 죄를 처리할 수 없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이 몸 자체가 죄를 양산해 내는 공장과 같다. 인간의 존재 자체가 죄의 근거가 된다.


 


마음에 음욕을 품은 자마다 간음한 것이요 창기와 합하는 자는 그와 한 몸이 되는 것이니 음행은 이제 인간의 몸과는 불가분의 관계가 된 것이 아닌가! 몸과 죄가 구별되지 않고 내 몸뚱아리가 나의 존재 자체가 죄였다! 그렇다면 그 몸을 버릴 수 밖에 다른 길은 없다. 그 몸을 죽여야 하는 것이다. 다른 몸이 필요하다. 그 죽음을 대신 감당하신 분이 바로 새 몸을 허락하신 십자가 지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영이신 새 덩어리는 각질처럼 우리 몸과 하나되어 있는 음행의 몸을 버리는, 죽이는 구조를 드러내야만 한다. 그러한 버려짐의 현장이 새덩어리, 바로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다(고전 6:19). 주님의 것이다. 음행한 자를 사단에게 내어 줌으로써 육신은 멸하고 영은 구원을 얻게 하려한다는 사도바울의 기록은 이렇게 성전의 건축양식을 그대로 투영하고 있다.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다.(고전 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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