善 하라 惡 하지말라 vs

善 하라 惡 하지말라 vs


善 하라 惡 하지말라 vs 생명나무
(은혜,긍휼,용서,십자가 피 나무)


걸림돌 형상( 종말 형상 = 특이한 형상)



2010년 8월 29일 일요일 오전 9:13:38   김대식


 


어떻게 쉽게 설명하지?
간밤에 이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고 있다가
믄뜩 생각이 났습니다.


잠결이라서 우에 우에 할 수도 없고


참 특이한데
정말 특이한데
어떻게 말로 표현할 방법이 없을 정도로 특이한데
직접 이 특이성을 말하기도 뭐 그렇고



참 쉽습니다. 참 특이합니다.


답을 미리 말해 놓고 문제를 풀겠습니다.


천국에는 생명나무만 있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없습니다.
자 그럼 이것을 미리 미래완료임에도 불구하고 미리 땡겨 봅니다.
이 땅에 가시화 시킵니다.


알파와 오메가 다 라고 했습니다.


땅이라는 것은 저 결론을 이 땅에 그림그리듯이 하는 겁니다.


그래서 창조 때에 나눕니다.
선악나무와 생명나무 라는 두 구조를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우주만물을 선악으로 만들지 않고 생명 곧 은혜로 만들었습니다.



선과 악은 예수님만 아는 겁니다.
거룩은 예수님만의 것인 고유의 것입니다.
이 거룩은 인간이 소유할 수도 없습니다.
거룩으로 적용 당할 뿐입니다.


예수님 본인도 선악으로 창조 하지 않고
은혜로 창조 했습니다.


자 이렇게 선악에 손 놓고 은혜로 창조하니까
손 놓은 이 선악을 누가 덮썩 잡는 고 하니


가장 더러운 마귀들이 그 선악이라는 것을 덥쑥 잡아버립니다.


예수님의 믿음은 선악으로 창조하지 않고
은혜로 창조 했다는 믿음입니다.
얼마나 미쁘신지
온갖 시험을 걸어도 넘어지지 않는 넉넉함입니다.
든든한 안정감입니다. 미쁩니다. 전혀 시험들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미 시험을 든 놈들은
자기가 더러운 악한 자임을 모르기에
광명한 천사 노릇으로 가면을 써야
자기가 봐도 자기가 안 놀랩니다.
자기 얼굴 보고 놀래버리면
자기 형상 보고 시험들어버리면
낙담할꺼 아닙니까?
그래서 마귀는 주님이 손 놓은 그 선악을 냅따 잡아버립니다.


사실은 흘려 버린 것인데 ㅋㅋㅋ


잡아도 소용 없는 것인데


예수님의 믿음으로 선악이 아닌 은혜로 생명나무로 하겠다는 취지인데
괜히 손 놓은 것을 잡았다고 좋아라 한 겁니다.
(이 부분은 제가 제 블로그 댓글에 적은 것에 좀더 살을 붙인 것이니 조금 참조하면 됨)



그래서 이 땅에서 두 나무의 구조로써 둡니다.
인간은 이 양쪽 나무의 성질을 드러내는데 동원이 되는 소모품입니다.
사적인 영역이 없습니다.


그런데 생명나무를 먼저 잡을 수가 없습니다.


모조리 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로 인해 하나님과 같이 되었습니다.
가짜 하나님이 된 인간입니다.


그런데 옳치 성공이야 라고 생명나무 부랴 부랴 치워 버립니다.
아무도 못 먹었습니다.
결핍입니다.


선악을 알아버렸지
하나님과 같이는 되어 버렸지
그런데 불멸 영생을 하지 못하니
어설픈 하나님이 되고 말았고
지숨 지숨 영웅 노릇과 왕 노릇을 하는 마귀가 되고 말았습니다.


자 그럼 생명나무를 부랴 부랴 치워버리는데 성공한 하나님은
바로 그런 가짜 하나님을 형성해 놓고
참 하나님을 증거하십니다.


이제 우상과 여호와의 싸움에 놓입니다.


행함과 믿음의 싸움이 됩니다.
비언약과 언약의 싸움이 됩니다.
선악과와 생명나무의 싸움이 됩니다.


그것을 이 땅을 배경으로 마당터로 해서
묵시적인 하늘의 뜻을 펼치시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하라 하지말라 라는 구도에 집어 넣는 이유도 그러합니다.


이 전쟁 속에 집어 넣습니다.
그래서 십자가 스스로가 펼치는 전쟁의 구조 속에서
보라는 겁니다.


이 충돌도 없는데 어찌 한쪽을 넙쭉 잡을 수 있겠습니까?
또 잡아 봐도 밀끄덩 미끄러 집니다.
(손 때라 라는 취지입니다. 십자가에 못박히는 것을 거쳐서 보라 라는 겁니다.)


물에 빠진 베드로가 그러했습니다.


분명 성령으로 고백했음에도 불구하고 뭐가 뭔지 모르기에
사탄아 라고 바로 욕먹게 됩니다.


또 어차피 인간은 선악을 알기에 양심이 있습니다.
양심 있다고 양심대로 하는게 아닙니다.

도리어 양심이 부담이 되어 양심을 속이는데 활용이 됩니다.

선을 하고프면 악이 땡기고
악을 하면 선에 의해 죄책감이 땡기는 겁니다.


이것을 약속의 자녀들에게는 더더욱 구체화 시킵니다.
즉 문서화 시킵니다.
마음판에 언어화 시킵니다.
그렇다면 더 잘 지킬수가 있겠구나 가 아니라
더더욱 인간의 죄가 깊어 집니다.


바로 이 깊어지는 죄에 더욱더 깊어지는 은혜를 보여줄려고
율법이 가입이 된 겁니다.


죄 아래 가두는 겁니다.


구체적으로 말입니다.


양심을 줘 놓고 양심이라는 감옥소가 저들에게는 없지만


율법을 줘 놓고 율법의 감옥소가 이스라엘에게는 특이하게도 있습니다.
그것이 성전입니다.


결국 율법을 준 이유는
주님의 긍휼을 기다리는
죄 아래 가두어짐을 말하는 겁니다.


(롬 13:8, 개역)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율법을 다 이루시니
남을 사랑하는 자가 나타나야 비로소 율법 완성이 됩니다.


그런데 어줍짢게 마귀가 자기 더러움을 감출려고
광명한 천사 노릇을 하는 방식이
주님이 손 놓은 이 법을 냅따 쥡니다.


이 가라지를 이스라엘 속에 심어 넣습니다.
알곡이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율법의 가두어 짐을 거쳐서 율법의 완성을 봐야 하는데
그래서 난 선해도 악해도 내 쪽에서는 긍휼이 거룩이 나올수 없구나
사랑이 안 나오는구나 라는 알아라고 준 것인데


선악을 냅따 쥐니
모조리 돌삐를 쥐는 겁니다.
더더욱 악에 해당되는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그냥 간음이 아닙니다. 현장이니까
간음한자도 빼도 박도 못하고
돌삐 든 자도 빼도 박도 못하고
예수님도 어쩔수 없이 빼도 박도 못합니다.


그러니까 올무죠
문어잡는 통발이에 제대로 걸려든 겁니다.


돌삐를 안 쥐고는 못 배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창조를 은혜로 창조 했습니다.
이 창조의 차이성을 드러내는데 있어서
반드시 반발 세력을 통해서 그 차이를 드러냅니다.


창조는 은혜가 아닌 선악으로 만들었다고 거짓을 주장하는 자들이 반드시 등장 시켜서 말이죠.


그래서 창조는 나누임으로써 더더욱 보시기에 좋았더라입니다.
(은혜란 보란 듯이 선악 법 앞에서 반칙을 뻔뻔스럽게 당당하게 추구합니다.)

두 패로 나누임 말입니다.


창조 반발세력은 은혜 공짜로 창조한게 아니라
법으로 선악의 법으로 만들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돌삐 든 법 쥔 자들이
예수님이 뭐라 뭐라 땅에 쓱쓱 쓰니까


하나 둘 쓱쓱 빠져 버립니다.
법 법 법 그렇게 큰 소리 치는 자들이
어느새 씩씩 다 빠져 나가고


예수님과 여자만 남아 버렸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예수님의 믿음이(창조) 펼쳐지고 그 믿음이(창조) 여인에게 덮쳐 집니다.


여인아


너를 정죄하던 돌로 치러 하던 자들이 어디 있느냐?


없는데요?


여인아 나도 너를 정죄 치 않는다.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라고 놀라운 예수님의 믿음,
예수님의 창조를 부으십니다.


이 여인은 새 창조를 당합니다.
선악이 아닌
은혜로써 말입니다.


선악에 대해서 주님이 손 놓았다는 겁니다.
주님만이 선악을 적용하셔도 되는데
주님 조차도 안 적용하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마귀가 그것을 적용하겠다고 넙쭉 잡아버리니
그 마귀가 잡은 선악나무에
인간들도 모조리 다 잡아 버린 겁니다.


주님 창조 실패 했나요?


천만의 말씀 창조가 더더욱 창조 답게 하기 위해
이제 본격적으로
예수님의 믿음으로 펼쳐지는 창조가 새로 시작이 됩니다.(토기장이)


여기에 마귀와 모든 인간은 선악을 이미 잡아버린 상태에서
바이러스에 갇혀 버린 상태에서


주님의 빼돌리기 반칙 사건이 벌어지는 겁니다.
(누구는 백신 알약을 주고 누구는 때려죽어도 안 줍니다.)


왜 사도바울이 하라 하지말라 라는 것을 또 적용하는 것으로 보이는 고 하니
적용이 아니라


이미 너희 몸 자체가 그러하다는 겁니다.


이번 레위기 수련회에서


유출병 곧 남자는 몽정병 여자는 월경병이 있습니다.


다들 압니다. 이방인도 다 양심처럼 다 알고 있는 것을
왜 이스라엘에게 특이하게 더 세밀하게 다룹니까?
그것도 율법적으로 말입니다.


그것은 다른 몸이 있다는 예수님의 믿음 때문입니다.
우리 믿음은 우리 그릇에서만 나오기에 그것은 철거 대상입니다.
그러나 다른 몸이 있기에 이스라엘은 더더욱 세밀하게 지적 받습니다.


이미 출애굽 했으면 구원인데
왜 또 광야로 집어 넣어서
청함을 받은 자는 많은 60만 장정인데
택함을 받은 자는 적은 딸랑 다른 몸 입니까?


이것은 인간 구원이 목적이 아니라
이스라엘에게 부은 특이성
다른 몸 때문입니다.


그 차이나는 몸을 신약에서도 보여주십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는 첫 번째 몸입니다.
부활하는 첫 번째 몸입니다.


왜 하라 하지 말라 속으로 다시 집어 넣는가?
믿는 구석이 있어서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불순물이 썩인 것을 광야에서 걸러내듯이 걸러내시는 겁니다.


뭔고 하니


하라 하지말라 라는 것을 바닥을 치는 지혜를 만나라 라는 겁니다.


하라 하지말라의 바닥의 바닥
종말의 종말을 만나면


그 하라 하지말라의 뒤에 있는
그 바닥친 현장에서 지혜를 만나면 게임오바입니다.


그 지혜란 반드시 하라 하지말라를 거쳐서 오라는 겁니다.


바울은 반칙입니다.


자기가 격은 그 불가능성을 뻔뻔스럽게 당당히 거쳐오라고 또 헷갈리게 합니다.
본인도 헷갈려서 그렇게 힘들어 해놓고
심지어 스데반도 죽여 놓고 말이죠.


그러나 다윗도 그 바닥친 현장에서 상한심령을 만났습니다.
상한 심령은 그 속에 있었던 겁니다.


하라 하지말라의 바닥 그 뒤에 지혜가 있었던 겁니다.


그러니 바울은 달리 말할 수가 없습니다.
믿는 구석이 있으니 말이죠.


그런데 바울처럼 그 바닥을 쳐서 그 지혜를 만나고
그 지혜에 덮침을 당하면


성경에 하라 하지말라가 없습니다.
캬 놀랍죠


마치 천국을 미리 앞당겨 누리는 삶 뿐이듯
생명나무만 있지


하라 하지 말라 라는
선 하라 악 하지 말라 라는 선악의 나무는 없습니다. 어디에? 천국에,


반칙이요 반칙 맞죠?


그래서 사랑은 원래 반칙입니다.
사랑을 법으로 보는 자는 아무리 시험 안해도 이미 그 사람은 시험 든 겁니다.(죄의 소원)


나무가 선악나무이니 선악열매만 나오지 다른 열매가 나올수 없거든요.


또 나무가 생명나무라면 우리는 아무리 선악에 빠져 있어도 생명의 열매만 도출 됩니다.



자 그런데 여기서
또 사도바울의 하라 하지말라의 의미는


이 생명나무의 열매가
저들에게는 아무리 봐도 걸림돌의 열매이기에
걸림돌의 역할로써 하기 싫어도 저들이 이미 법을 쥔 이상 걸림돌로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그들이 아무리 성경을 보고 봐도
선악 외에는 달리 해석할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이 생명나무의 정죄치 않는 열매를
아무리 들따 봐도
걸림돌일 뿐입니다.


해석이 안 됩니다.


이것을 특이성이라고 합니다.


저들은 아무리 봐도 보편성으로 보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법을 들어도 된다고 본 겁니다. 법을 들게 되니 걸려든 겁니다. 올무가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의 특이성은 원래 우리의 신체가 유출병으로 이미 병든 몸임을 알려주는데 있어서
하라 하지말라 라는 율법을 더욱더 세밀하게 적용함으로써
빨리 퍼뜩 바닥을 치라는 겁니다.


몸 속에 고여 있는 그 썩은 물을 빨리 빨리 빼어내고
외부에서 공급 받는 물로 퍼뜩 바닥 쳐서 오라는 겁니다.


그래서 할례라는 의미는 남성의 성기 짤라버리기와 여성의 불임(생명없음)을 통해서
남들이 지적 받지 않는 그 신체의 한계성(율법 외에 한 의 때문에 바닥쳐야할 몸)

단순히 하나님과 같이 되지 못하는 신체가 아니라.
선악을 담아버린 그릇을 빨리 빨리 깨뜨리고 못박으라 라고


십자가에 못 박힐 것을 미리 앞당겨 보여주는 겁니다.


그런데 정작 예수님이, 죄도 없는 그 분이 못 박혀 버리면
이것은 하라 하지말라는 개념은 휙 날라가 버리고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도다
이스라엘 중에 있으면서도 하라 하지말라가 소용이 없구나
영광을 봐 버렸는데?
그 영광이 자기 영광 버리고 낮아지신 영광에서
내가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하고도 안 타죽다니 말도 안된다!



사고방식인 완전 딴판인 법 법 법 카다가
왕짱 짤려버려서
그런 선악을 담은 그릇의 사고방식에서
긍휼이냐 긍휼 아니냐 로만 생각하는 사고방식으로 교체당합니다.


십자가 아니면
긍휼 아니면 저 죽습니다
긍휼로만 용서로만 자비로만
매일 매일 공급받는 십자가의 죽으심 만이 날 살립니다 라는 사고방식으로 바뀝니다.


결국 하라 하지말라의 바닥을 친


지혜를 덜커덕 만남 당해 버린 겁니다.


그런데 그 지혜가
나의 하라 하지말라를 맨날 신경쓰고 있는 그런 죄 때문에
대신 죄값을 치른 갈기 갈기 찢겨 죽는
자기목숨을 내어주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지혜입니다.


상한 심령입니다.



죽게 된 마음입니다.
새까맣게 다 타버린 마음입니다.
선악 곧 선하라 악하지말라 라는 그것을 없애버리기 위해서 새까맣게 대신 타버린 몸입니다.


그러나 창세전에 택하지 않은 자는
그 선 하라 악하지 말라 라는 지키지도 못하는 죄의 소원을 뒤짚어 씌워서 지옥 보내십니다.


나누이시는 창조로써 말입니다.


이 말씀을 어떤 육체가 가히 감당하겠습니까?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는 하나님의 일이지
사람의 일은 선악 외에는 달리는 아는 것이 없고,
생명나무의 의식 곧 십자가의 사고방식은 단절 되었기에
믿음으로 이를 수 없습니다.
겨우 선악 안다, 돌삐 들 듯 법만 쥘 뿐입니다.


(롬 1:17, 개역)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이스라엘의 특이성은 마귀의 질투성을 유발케 됩니다.
선악을 쥐고서도 성도만큼은 그들에게 걸림이 됩니다.
더 나은 형상이 특이성이 그들에게 입혀져 있기 때문입니다.


종교인에게는 걸림이 되고
일방인에게는 어리석음이 됩니다.


그래서 이 긍휼이 덧입혀진 자들은
세상 사람들이 미워 합니다.


우리를 미워 하는게 아니라
예수님을 미워하는
선악나무의 열매들이기 때문입니다.


(요 7:7, 개역)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못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 증거함이라』
(요 15:18, 개역)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요 15:19, 개역)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주님이 주님 스스로 자신의 숙제를 잘 하셨다는 증거이지
우리 숙제란 없다는 겁니다.


창세 전과 미래의 천국을
처음이요 나중인 예수님이
역사 속에서
묵시로써 역사를 마음껏 요리하시는 겁니다.


미래 천국을 미리 앞당겨 누릴 수 밖에 없고
창세전의 계획을 적용 당할 수 밖에 없는


신부의 특이성은


마귀 보란 듯이 펼쳐지는 겁니다.


그래야 마귀의 가면이 거짓임이 들통나죠?


(이건 여담인데요 하나님의 형상 회복 운동 펼치는 놈들의 특징이
도리어 특이한 형상을 제거하고 발로 차버리는 식으로 운동을 펼치더군요
줘도 못 먹더군요. 특이성이 그들에게 붙을까봐 기겁을 하면서 퍼뜩 퍼뜩 제거할려고 하더군요.
참 제대로 주님이 일하신 겁니다. 그들에게는 그 특이성이 악취가 되기 때문입니다.
도리어 바울이 배설물로 여긴 똥을 쳐 바르고 있습니다. 그리고서는 법적으로 보편성으로 갖추어 버리니


이것 또한 참 특이하고 신비롭지 않습니까?)

The Cross Pendant

He is a cross pendant.
He is engraved with a unique Number.
He will mail it out from Jerusalem.
He will be sent to your Side.
Emmanu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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