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은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 때문에 출현했고 하나님의 언약을 증거하기 위해서 ‘흙’이라는 형태로 회수됩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언약을 보여주기 위해 심판받아야 될 시료가 됩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이 점에 대해서 예수님의 몸도 예외가 아니십니다. 하나님이시만 하나님의 영광을 비우시고 죄 있는 죄인의 몸으로 사셨는데 이 모든 것이 다 언약과 그 완성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죄로 인하여 예수님의 몸도 무척이나 피곤하고 지친 양상을 보여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몸은 죽음의 힘에 둘러싸여 있음을 의식하고 어찌하든지 그 덮쳐진 죽음의 공포 속에서는 기운을 내어 살아남아야 한다는 의욕을 불태우게 되게 됩니다. 하지만 이런 와중에서 매번 악마의 유혹이 강력하게 다가옵니다. “돌로 떡 되게 하라. 너를 살게 하는 것으로만 너에게 소유되게 하라. 떡이 사는데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늘 인정하라. 이 진리 외에 다른 진리는 없다는 것을 너도 알지 않느냐”
쉽게 말해서 “죽기 싫거든 살아라!”는 말입니다. “살고자 하거든 소유하라!”는 겁니다. “소유하고 싶거든 내 말을 들으라!”는 겁니다. “세상의 부귀영화를 줄 테니 다른 데 눈 돌리지 말라”는 겁니다. 따라서 예수님조차도 성령이 아니고서는 하나님의 언약을 생각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언약의 내용인 아버지가 원하시는 ‘그 온전한 희생적 죽음’을 이루어낼 수도 없었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가게 해 달라’는 예수님의 솔직하신 기도도 평소에 담고 있었던 마음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또 다른 마음을 성령을 통해 갖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이 사실은 곧 ‘인간이란 마귀의 힘이 아니면 살 수 없고, 성령의 힘이 아니면 죽을 수 없다’는 언약의 실체를 예수님을 통해서 다 드러나게 하신 것입니다.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요 예수님을 위하여 죽고자 하면 산다’는 역설적 진리는 다 예수님을 통해서 보여진 언약적 비밀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과 연결된 사람은 ‘언약적 비밀’, 곧 ‘그리스도의 비밀’을 위하여 존재하게 된 언약 사람들이 됩니다. 당연히 성령의 힘으로 살아야 될 사람들입니다.
왜 ‘비밀’의 양상을 띠는 겁니까? 그것은 몸이 피곤하면 자투리 화젯거리로 피곤을 달래려는 본성을 발휘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을 지배하는 악마는 어떻게든 성도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비밀’에서 눈 돌려놓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피곤을 풀 수 있는 방식으로 악마는 인간의 몸을 사용하게 됩니다. 그 방법은 이러합니다.
인간의 몸으로 ‘자아’를 구성을 체험들을 채취해냅니다. 그리고 그 경험들을 조립해 봅니다. 그래서 악마의 세상적 욕구에 합당한 자아성을 구축시켜 보는 겁니다. 즉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요일 2:16)로 무장된 자아성으로 갖고 해서, 몸에서 뿜어 나오는 피곤함과 저주스러운 그때 그 때 잊으려고 시도하게 만듭니다. 이것은 하나님께로 온 속성들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즉 하나님께 속하지 않는 것에서 주입되는 속성들입니다. (요일 2:15) 잠시 있다가 몸과 더불어 사라질 것들입니다. (요일 2:17)
그런데 이 작업도 수월치 않다는 것을 몸이 직감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세상에 눈에 띄는 괜찮은 것들로 자아성을 구축하고 싶어도 군데군데 이빨 빠지듯이 빠져나가는 것들이 있게 만듭니다. 자아는 그 책임을 타인에게 돌려버립니다. “왜 너는 내 몸이 원하는 욕망 행위를 방해하느냐 말이야”라고 말입니다. 본인이 ‘내가 누구지’를 형성하는 작업에 원활치 않으니 그 이빨 빠져나간 빈 칸에다 새로운 타인상들을 이것저것 마구 쑤셔 넣게 됩니다.
뭔데 근사해 보이고, 괜찮아 보이고, 숭고해 보이고, 온전해 보이는 것들을 닥치는 대로 다 쑤셔 넣게 됩니다. 그런 것들을 누더기 같은 기존 자아성에 군데군데 갈아 끼어 넣다 보니 그 갈아 끼어진 것이 자아의 부속품이라고 간주되지만 실은 그 반대로 갈아 끼어진 타인의 부속품으로 본인이 끌려가고 있고 부속품 노릇을 하면서 말려든 지경에 이릅니다. 화투판에서 돈 잃으면 그 화투판을 부정해 버리면 그만이겠지만, 그렇지 않고 그 화투판 속에서 자신을 기어이 승자가 되기 위해 그 화투판에 본격적으로 뛰어드는 경우가 이런 경우를 말합니다.
즉 ‘그리스도의 비밀’이라는 세상의 중심 사항에는 관심이 없고, 피곤에 찌들고 지친 몸을 가지고 드라마나 가수나 인간 스포츠 선수나 성적 매력으로 부비 대는 그런 밤의 세계나 연예계 이야기에 몰두 하다 보니, 자신이 응원하는 야구팀이나 축구팀이 마음을 들지 않거나 혹은 자신이 싫어하는 배우가 배역을 맡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기를 얻게 되면 속이 상해서 머리를 쥐어뜯게 됩니다.
이러한 자투리 가십거리에 자기 인생의 의미를 거는 이런 버릇은 교회 안에서도 예외가 아닙니다. 지금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날마다 얼마나 큰 언약완성의 능력으로 예수님의 몸을 구축해 나가시는지, 성경의 내용이 무엇인지, 복음의 내용이 무엇인지에는 관심이 없고, 옆에 앉는 집사님의 옷차림이나 액세서리나 목사님의 가방 색깔이나 옷차림이나 누구의 가정형편이나 혹은 내가 갖고 싶은 것은 다른 교인이 먼저 갖고 있는 것에 분개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다복해 보이는 남의 가정 분위기에 분노하고, 상대적으로 자신의 전 일생에 대해서 박탈감으로 이해해서 늘 몸부림치듯이 살아가는 양상을 보이게 됩니다. 이런 식이라도 자기 몸을 기어이 자신이 살려내고 싶은 데서 오는 피곤함을 교회 안에서 달래고 싶고 다른 사람과의 비교성에서 달래고 싶은 겁니다.
이 모든 것이 스스로 자기 몸을 원형으로 하면서 자아성을 구축하려는 시도에서 비롯됩니다. 성도의 참된 자아성은 항상 ‘그리스도의 비밀’에서만 도출되고 연결되어집니다.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9)
받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증거하기 위해 우리 몸이 언약적 구조 안에 놓여 있고, 그 증거를 위하여 여태 우리의 몸은 이 지상에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자아란 성령께서 책임지고 오직 ‘그리스도의 비밀’만을 늘 짜내게 하는 자아입니다. 사는 것이 너무 힘들다는 핑계를 대면서 우리 자신이 우리 자아를 너무 못살게 굴지 맙시다. 우리 몸은 우리 것이 아닙니다. 이미 그리스도의 피값이 담겨 있는 몸입니다.
He is a cross pendant.
He is engraved with a unique Number.
He will mail it out from Jerusalem.
He will be sent to your Side.
Emmanuel
Bible Verses About Welcoming ImmigrantsEmbracing the StrangerAs we journey through life, we often encounter individuals who are not of our nationa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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