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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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도서 3:3-4
전에는 “비나이다” 이 행위는 전능자를 의식하면서 인간들이 보여주는 근원적 태도입니다. 장례문화는 옛적부터 매장 방식이었습니다.
흙 속에 묻혀 사라진 자신의 전부를 인간들은 미리 예상하고 몸서리칩니다. 따라서 세상 속에서 빌고 또 비는 것은 매장되는 것, 즉 자신을 사라져 잊혀지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신에게 비는 궁극적인 바람은 오직 하나입니다. “내가 영원히 살아 있게 하옵소서. 그것도 천국에 살아있게 하옵소서!”이런 요구는 이미 창세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거절 당한 내용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선악과 따먹도 뭘 요구하게 될 지를 미리 알고 계셨습니다.(창 3:22) 이런 인간의 요구에 호응하기 위해 지상에 대기 된 존재가 마귀입니다.
“끝까지 너를 잃어버리지 않게 해줄게. 힘 내!”그래서 이 세상의 종교의 프로젝트는 사람들이 천국갈 수 있는지 여부를 죽기 전에 확인할 수 있는 증표들을 제작해내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식은 이게 아니라 아예 인간의 가치와 의미가 이미 사라졌음을 보여주는 증표를 제시하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입니다.
이로서 모든 인류는 십자가 앞에 집결되게 되며 그 십자가 안에 들어선 자와 십자가 밖으로 퇴출당한 자로 구분됩니다.
부담없이 편하게 세상 생활한다는 것은 하나님로부터 거부당한 자에게 주어진 마지막 자율입니다. 이들의 활동을 통해서 십자가는 여전히 오늘날 시대에서 살아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뜻은 십자가 지신 분만이 영원히 영광스럽게 살아있게 하시는 겁니다. 반대로 역시 영원히 살아있되, 저주 속에서 영원히 살아있는 존재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저주 속에 영원히 지내야 될 마귀입니다. 이 사실을 익히 알고 있는 마귀 입장에서는 자신에게 인간 지배의 권한이 주어진 마음껏 사용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자율에 완전히 미치게 만듭니다.
곧 자신이 자기를 판단하고 평가하게 만듭니다. 이런 모습을 십자가 안에서 바라보게 되면 이것이 바로 ‘세속적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