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우리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왜 우리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항상 거짓말쟁이 그레데 사람 1


(딛 1:12, 개역) 『그레데인 중에 어떤 선지자가 말하되 그레데인들은 항상 거짓말장이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장이라 하니』


같은 의미의 글이라서 먼저 올려 봅니다.



마가복음 27 : 왜 우리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2011/07/01 14:33 in 마가복음


마가복음 27 : 기도(빈터, 십자가=처음자리, 뒤로빼돌리기) 외에는 귀신의 정체 조차도 밝혀내지 못함


2011년 6월 30일 목요일 오후 11:16:48  김대식



(막 9:14, 개역) 『저희가 이에 제자들에게 와서 보니 큰 무리가 둘렀고 서기관들이 더불어 변론하더니』
(막 9:15, 개역) 『온 무리가 곧 예수를 보고 심히 놀라며 달려와 문안하거늘』
(막 9:16, 개역) 『예수께서 물으시되 너희가 무엇을 저희와 변론하느냐』
(막 9:17, 개역) 『무리 중에 하나가 대답하되 선생님 벙어리 귀신 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왔나이다』
(막 9:18, 개역) 『귀신이 어디서든지 저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하여 가는지라 내가 선생의 제자들에게 내어쫓아 달라 하였으나 저희가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막 9:19, 개역)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하시매』
(막 9:20, 개역) 『이에 데리고 오니 귀신이 예수를 보고 곧 그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저가 땅에 엎드러져 굴며 거품을 흘리더라』
(막 9:21, 개역) 『예수께서 그 아비에게 물으시되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하시니 가로되 어릴 때부터니이다』
(막 9:22, 개역) 『귀신이 저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막 9:23,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막 9:24, 개역) 『곧 그 아이의 아비가 소리를 질러 가로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하더라』
(막 9:25, 개역) 『예수께서 무리의 달려 모이는 것을 보시고 그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가라사대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하시매』
(막 9:26, 개역) 『귀신이 소리지르며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나가니 그 아이가 죽은 것 같이 되어 많은 사람이 말하기를 죽었다 하나』
(막 9:27, 개역) 『예수께서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이에 일어서니라』
(막 9:28, 개역) 『집에 들어가시매 제자들이 종용히 묻자오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막 9:29, 개역)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막 9:30, 개역) 『그곳을 떠나 갈릴리 가운데로 지날새 예수께서 아무에게도 알리고자 아니하시니』
(막 9:31, 개역)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연고더라』
(막 9:32, 개역)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무서워하더라』



퇴마사 라는 자들이 있습니다. 소위 귀신을 쫏아내는 것을 전담으로 하는 직업입니다. 더 웃기는 것은 카톨릭에서는 이런 퇴마사와 같은 것을 실제로 인정을 하고 전담반으로써의 신부사제까지 양성이 되고 있다는 겁니다. 뭐 실화 라는 둥의 영화로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실화 속의 귀신이라고 손 치더라도 그거 다 가짜입니다.
뭐 가짜라고? 만약 당신의 눈에 실제로 벌어진다고 해도 가짜란 말이냐?
너 기독교 잖아? 교회 다니잖아? 예수 믿잖아? 성경에도 나오는 귀신인데?
네 가짜입니다.


왜 가짜인고 하니 소위 귀신이라고 나타나는 현상을 보면 그 귀신을 쫏아내고자 하는 자를 상대적으로 설정하게 되는 사건이 벌어지게 되는 겁니다.


자 그러면 신부(사제)든 퇴마사든 무당이든 결국 그 중간의 영매자들이 몰아내든지 또는 타협을 하든지 하는 갑자기 귀신보다 인간의 역할이 중요하게 부각이 되는 겁니다.


결국 귀신이 주인공이 되어야할 자리에 인간이 주인공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사건은 그런식으로 흘러가는 겁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십자가 외에는 귀신의 정체가 밝혀지는 법이 없습니다. 십자가에서 비로소 규정되는 것이 귀신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왜 우리는 능히 귀신을 못 쫏아냅니까 라고 묻는 것 자체가 문제입니다.
만약 귀신을 쫏아내면 큰일 납니다. 얼마전 나온 실화를 다루었다는 영화 속의 카톨릭 신부처럼 귀신쫏아내는 퇴마의식이 성공했다는 식으로 제자들도 성공해 버리면 큰일나는 겁니다.


음 그 영화 제목을 찾아봐야겠네요 영화를 보고 서평을 올렸는지 모르겠네요
더 라이트 : 악마는 있다 (The Rite 2011) 지금 찾아보니 안올렸네요 영화평도 적지도 않았구, 아무튼 악마는 있다고 하는데 그런식으로는 악마가 있는게 아니겠지요. 약간 기대했는데 실망스러운 영화였습니다. 전혀 전혀 악마도 아닌 겁니다. 단지 지젝의 말대로 공포란 결국 자신의 괴물성을 본다는 말이 떠오르더군요. 자기가 자기 얼굴 보고 놀라는 겁니다. 그래서 공포영화를 자주 보라고 합디다. 자주 놀래라고. 지 얼굴 자기가 보고 놀래라고. 그 영화를 보고서 생각난 말입니다.


왜 제자들이 귀신을 쫏아내면 큰일나는고 하니 자기를 장악한 주인을, 종 주제에 주인을 내 쫏을 수가 없습니다. 자기 짝을 자기가 쫏아내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기도 외에는 귀신이 나가는 법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막 9:29, 개역)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아 그럼 기도하면 되겠네요? 기도하자 기도하자
그럼 귀신 쫏겨날까요? 귀신이 비웃습니다.


주인이란 강한자입니다. 강한자는 품성이 온유합니다. 그래서 온유함으로 자기 종을 열심히 섬기고 있기 때문에 그 섬김에서 벗어날 종이 없습니다.


아침식사 중에 갑자기 이런 대화가 나왔습니다. 왜? 이스라엘이 그 당시 가장 미약하고 약하고 숫자가 가장 적은데 그것이 하나님께서 선택한 이유라고 하시는 줄 아십니까?


상대적인 강한 존재를 의식한 겁니다. 물론 그 당시는 애굽입니다.


그런데 새로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약한 것이 사실은 악합니다. 결핍상태라는 것은 거의 히스테리 상태입니다.


그러나 충만한 상태는 이미 결핍을 채워버렸기 때문에 온유합니다. 그래서 강합니다.


야곱은 약하고 악합니다. 오죽하면 팥죽 한그릇으로 장자권을 빼앗을려는 그 못땐마음을 가지고 있었겠습니까? 그런다고 형과 아우라는 서열이 날때부터 정해져버린 운명의 서열이 팥죽 한 그릇에 팔릴 리가 있겠습니까? 그러니 아버지 이삭은 아무리 봐도 듬직한 형 에서가 낫지요. 백날해도 야곱은 그것을 넘어설수가 없습니다.


형 에서는 강합니다. 그리고 누구처럼 못땐마음은 아닙니다. 사냥을 잘했다는 것은 단순히 기술이 좋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것으로 아버지를 기쁘게 하고 사냥의 기술로인한 자연과의 조화 자연으로부터 배움을 받게된 겸손한 자입니다. 그러니 마음이 누구보단 훨씬 낫다는 겁니다. 적어도 누구보단 말이죠.


동생이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 팔아라 라고 말도 안되는 소리에 버럭 화를 내는 예민함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니가 백날해도 그것은 빼앗거나 빼앗길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라고 농담으로 여유있게 넘어가는 식입니다. 그러니 팥죽에 넘기는 겁니다.


두 사람의 행동에, 문제는 예수님의 약속이 개입해 버린다는 겁니다.
(이 개입이 항상 문제입니다. 사건은 결국 이 개입이 사건을 일으키는 겁니다. 개입자 때문에 뒤바꿔치기가 되는 겁니다. 형 에서, 형 가인, 맏아들(탕자의 형). 원가지 이스라엘, 그 의를 쫏는자들이 하루아침에 악이 됩니다.)


이것은 확대 증식이 되어 모세와 애굽왕 바로의 충돌사건에서 그대로 재생산됩니다.


내 백성 내 놔라? 여호와가 달란다.  여호와? 여호와가 누군데?
위에서 듣고 있던 여호와께서 오냐 내가 누구인지 꼭 보여줄게   기 다 려 봐~~~~~


그리고 악하고 못땟던 야곱에게 씌여진 악함을 순하고 어리덮숙한 에서에게 뒤짚어 씌우는 겁니다. 더 웃기는 것은 이삭이 나도 어쩔수 없다 라고 나오는 겁니다. 선지자이니까 말이죠.
그 말도 안되는 부조리에 자신(부모)들이 부여한 형 아우 라는 장자 순서를 자기들이 줘 놓고, 나중에는 뒤바꿔치기 하니까 말이 안되죠. 그런데 선지자 부모는 말 된다 라고 합니다. 이유는 개입 때문입니다. 외부의 개입 말이죠. 개입한 이상은 강하다 약하다의 순서의 배치가 바꿔치지 당했다면 바꿔친 그 결과를 말하는 것이 선지자(부모)입니다.


이 말도 안되는 상황이 애굽과 이스라엘의 대비에서 그대로 나타납니다.


자 영화 더 라이트 악마는 있다에서의 엉터리는 강한자가 주인이고 약한자가 종입니다.
강한자는 마귀요 약한자는 인간입니다. 그렇다면 주인공은 마귀여야 합니다.


정말 배꼽잡고 웃기는 것은 주인공이 결국은 인간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마귀는 주인공 되어본적도 없이 엑스트라다 짖만 하다가 뻘쭘하게 영화 끝나는 겁니다.


니체의 말이 계속 맴도네요. 강한자를 약한자들로부터 보호하라. 상대적인 의미죠. 약한자가 훨씬 악하기 때문입니다. 그 악한자인 이스라엘을 들어서 강한자 온순한자를 강퍅을 뒤짚어 씌워버리는 겁니다. 광야에서는 이스라엘이 똑같이 당하는 겁니다. 이런 거룩함을 행하지 않으면 인간의 악마성을 지적하는 사랑이 없는 겁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겁니다. 즉 구멍뚫기 돌파 십자가막대기로 수셔버리기입니다. 구원이란 뿔로써 뚫어버린다 라는 뜻입니다. 희년이란 뚫혔다 라는 뜻이고요. 수치가 물러가다입니다. 해방 해방


왜 제자들이 우리는 능히 귀신을 쫏아내지 못하는 겁니까? 라고 묻는 것은 우리가 왜 주인공이 되지 못합니까? 라는 말과 같습니다.


더 라이트 : 악마는 있다 라는 영화처럼 마귀를 경쟁상대 즉 힘의 우열로써 같이 경쟁하여서 승리하거나 패하거나 하는 경쟁출발점이 같은 스타트에 놓여있다고 보는 겁니다. 빨리 달리면 마귀도 이길수 있다고 보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시선은 영 딴 판입니다. 너희는 갇혔다 라는 겁니다.


기도 외에는 안된다는 말은 주여 저 마귀에게 갇혔습니다 라고 해야 하는 겁니다.


귀신들린 아이의 아비가, 당신은 귀신도 쫏아낸다는데
당신의 제자는 귀신을 능히 능~~~히 왜 못쫏아냅니까? 라고 고자질해 버립니다.
바로 코 앞에서 보란 듯이 말이죠.
대략난감해진 제자들도 자신들의 무능을 지적받아야 할 입장 뿐입니다.
고자질이 목적이 아니라 그만큼 귀신의 활동이 실제상황의 급박성인데
죄의 심각성인데 인간은 수수방관 속수무책 손쓸수 없는 불가의 상태임으로 간격이 너무 멀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또 잔소리 하십니다. 믿음이 없는 세대 라고 말이죠.


(막 9:18, 개역) 『귀신이 어디서든지 저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하여 가는지라 내가 선생의 제자들에게 내어쫓아 달라 하였으나 저희가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막 9:19, 개역)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하시매』


하실 수만 있다면 고쳐 주십시오 라고 귀신들린 아이 아버지가 긴박하게 이야기 하자
믄 소리냐? 할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 라고 하십니다.


(막 9:23,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할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 라고 하니까 결핍을 채울려는 단체에서는 이것을 구호로 집단 구호로 파시즘을 추구하기도 합니다.


에수님이 못 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죄를 못 짖습니다. 거짓되지 못하십니다.


자 결국 이 말은 초인사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딱 듣고픈 말이였다 라는 겁니다.
무슨 말이 딱 듣고팠는데요.


부르짖음입니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등장함으로써 출애굽기는 출발합니다.
요셉은 계시 전달자입니다. 은혜성입니다. 그런데 그 은혜를 알지 못하는 새로운 왕의 등장으로써 출애굽기 1장은 시작 합니다. 무 질서에서 혼돈에서 창조로 나누이시는 겁니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의 등장으로 인해 주님은 더더욱 그 새 왕으로 압박을 가하도록 하십니다. 맞습니다. 자작극입니다. 부르짖음을 유발케 하시는 겁니다.


참아도 못하네 울어도 못하네 눈물 많이 흘려도 못합니다.
그냥 부르짖으면 됩니다.


안 부르 짖고는 못합니다.


그 부르짖음이 나올 때 까지 쪼아대고 쪼아대서 드디어 부르짖음을 들었고 라는 말씀구절이 빛을 발하게 되는 겁니다. 말씀이 말씀을 이루는 방식입니다. 부르짖었다는 행함을 감히 첨가시킬수가 없습니다. 우리도 부르짖었잖아? 자기가 말해 놓고도 말도 안되도록 하십니다.


그 부르짖음을 듣고 드디어 실행을 하십니다. 그냥 실행하지 않습니다.
마징가 제트가 물 속에서 수영장을 반틈 가르고 물 속을 가르며 나타나듯이
죽음을 가르고 모세가 물 속에서 나옵니다.
모세가 이름을 부여 받는 것은 단순한게 아닙니다.


그리고 모세가 여호와로 차출 됩니다. 내가 나의 백성의 부르짖음을 들었다.
우짜라고요? 우짜긴 건져야지
딴 사람한테 카이소
아니다 나는 너의 원망을 담아서 반드시 너를 보낸다. 안할랍니다.
내가 할때는 도와달라고 캐도 안 도와 주더니 이제와서 와 카십니까?
너는 부르짖음이 아니거든
오늘 본문처럼 제자들 자신이 주인공이 될려고 하니까 능히 못 쫏아내는 겁니다.
그래서 현실 즉 실상을 보여줍니다. 제자들은 지금 갇혔습니다.
모세도 갇혔습니다. 남이 아니라 자기자신에게 갇혔습니다.


백성들이 부르짖고 있는 가운데서도 주님은 서두르지 않습니다. 모세를 조져버립니다.
제자들을 조져 버립니다.


이 부르짖음에 누가 방해요소가 되는고 하니 항상 우리 자신이다는 겁니다. 제자요 모세요
그래서 별세해 달라고 변화산에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밑에노선에서 벌어지는 대화가 뭔지 모릅니다.
그것을 지적당하는 사건이 오늘 본문입니다.
모세에게
가시떨기나무의 불꽃으로 여호와가 등장 합니다.
그런데 가시떨기나무의 속성을 누구보다 모세가 가장 잘 압니다.
햇빛에만 닿아도 말라서 자연발화 하는 연약한 나무이기에 그늘에서만 자랍니다.
그런데 그런 가시떨기나무에 불이 붙었고 타들어가지도 않고 생생하고 강렬합니다.



왜 부르짖음을 들으실려고 일부러 그런 일을 벌리시는 것일까요?


맞습니다. 가시떨기나무에 불 붙은 여호와의 불의 상황을 만드시는 겁니다.


할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들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 라는 말은 긍정을 말하는 집단구호가 아닙니다. 집단엑스타지 상태에서 원하는 것 얻을수 있을지 몰라도 그건 속임수입니다. 퇴마사의 의식을 벌리는 방식이 바로 그겁니다. 두려움을 내어쫏아서 겁 없는 상태를 만들면 뭔가를 획등할수 있다 라고 빡빡 우길 뿐입니다.


할수 있다 라는 말은 뭔 말이냐? 부르짖음인데 왜 부르짖도록 하느냐?
너희는 못해도 나는 한다 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악마와의 전쟁이다 라는 겁니다.
우리야 당연히 못하죠 우리는 단지 그 전쟁의 전리품이다는 겁니다.
전리품 주제에 자꾸 주인공 될려고 하니 이 전쟁이 무슨 의미로 벌어지는줄도 모른다는 겁니다.


그래놓고 자꾸 왜 나는 못하지 왜 나는 못하지 주여 왜 저희들은 능히 귀신을 못 쫏아냅니까 라고 묻는 겁니다.


몇 번 용서 해야 합니까? 라고 묻는 것과 같습니다.


기도 외에는 안된다는 겁니다.  그럼 기도 하면 될까요? 역시나 안됩니다.
기도란 요청입니다. 자신이 무능하다는 겁니다. 즉 자기도 귀신 쓰였다는 겁니다.
그것을 인정 하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시떨기에 불이 붙는 것은 여호와 만이 하신다 라는 겁니다. 그럼 가시떨기 나무는요? 바로 그겁니다. 아무 무가치하고 무능하고 자기도 자기가 감당 안되는 가시떨기 나무가 뭐 불을 감당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전쟁에 목격자로 동원이 되는 겁니다.


나는 귀신 못 쫏아내는데 주님은 귀신 쫏아냈어 라고 증인이 되는 겁니다.
저봐 저봐 우리 혼쭐 낫잖아 얼마나 긴박한 저 절박한 아비의 요청에 우리는 못하는데 주님은 너끈히 하셨어 우리는 늘 지적 받는 사랑을 받은거야 주께만 범죄했사오니 나도 고침받았습니다. 라고 외치는 겁니다.


모세가 주인공이 될려고 하니까 자꾸 힘빼서 더 이상 힘을 의지할수 없을 정도의 80살에 드디어 그 부르짖음에 응답하시는 겁니다.


웃기죠 웃기잖아


그 부르짖음 언제 부르짖었는데 참 빠르다 그죠


그래서 40살에 모세가 우쌰 하고 나섰잖아요
안됩니다. 빼 빼 빼 힘빼 힘빼 힘빼야 합니다.
그래서 80살이 되어야 합니다.


부르짖는자 죽어난다 그죠.


아니 그 부르짖음 조차도 그들이 추호도 부르고픈 마음이 없는데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의 등장으로써 부르짖도록 하신 겁니다. 기도하기가 아니라 기도되기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손해 보는 것 없습니다.


자 80살 되어서 지팡이를 의지해야 걸을 수 있었을때야 비로소 그 부르짖음에 응답하십니다. 참 잘도 응답하신다 그죠. 도대체 누구 편인지 모르겠습니다. 주님은 주님 자신의 편입니다. 인간편 죽어도 안들어 줍니다. 모세 편도 아닙니다. 그래서 모세가 혼쭐 나는 겁니다.


제자도 혼쭐 나는 겁니다.


기도 외에는 귀신이 나가는 법이 없다는 말이 뭔 말입니까?


주여 주여 내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도 쫏아내고 귀신이 우수수수 떨어집디다


그 희열의 감격에 주님은 초를 칩니다.


귀신 쫏아낸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것을 더 기뻐하라 라고 말이죠.


이 말씀이 그 해답이 될수 있습니다.


기도가 아니면 귀신이 나갈 수가 없습니다.


기도란 성령의 자리요 빈터인데 성령의 놀라운 탄식(뒤로 빼돌리기)을 들어보면
지금 내가 귀신 쫏아내어야할 내 숙제로 주변에서의 압박 주님으로의 압박 나 지신으로의 압박에서 결국 내 숙제로 보고 있는 시각을 성령은 탄식하는 겁니다.(정작 성령은 뒤로빼돌리기하시는데?)


그 탄식은 쫏아내기는커녕 갇혔습니다. 도리어 포로된 귀신들린자가 바로 나 이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불쌍히 여겨달라고 부르짖어야 하는 겁니다.


만민이 기도하는 집에 두 사람이 성전에 있습니다.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입니다.
바리새인은 주인공이 자기라고 우깁니다. 하나님이 말씀을 주셨으니 그 말씀을 지키는 것은 나 자신으로 본 겁니다.
그러나 또 한 사람은 말씀을 주셨는데 지키기는커녕 도저히 못 지키는 자신을 발견해서 자꾸 불쌓이 여겨달라는 겁니다. 즉 뭔가가 방해한다는 겁니다. 그런 존재가 있다는 겁니다. 자신자신도 포함해서 말이죠


그렇다면 요청의 기도가 내용이 달라지는 겁니다.


기도란 난 안되는 군요 구해주세요 라는 겁니다.


기도란 성령의 시선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세력간의 다툼 속에 있다는 것을 보는 겁니다.
그것이 안 보이면 자꾸 내 숙제 내 기도가 되어버립니다.


(삼상 25:10, 개역) 『나발이 다윗의 사환들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다윗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뇨 근일에 각기 주인에게서 억지로 떠나는 종이 많도다』
(삼상 25:14, 개역) 『소년 중 하나가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에게 고하여 가로되 다윗이 우리 주인에게 문안하러 광야에서 사자들을 보내었거늘 주인이 그들을 수욕하였나이다』


나발이 참나 다윗이 누군데? 이새의 아들이 뭔데? 라고 여호와가 누군데 라고 애굽왕이 그랬던 것처럼 누구관데 나랑 뭔 상관인데 라고 하니까
다윗이 그 소리를 듣고 쳐들어 옵니다.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은 지혜로와서 


(삼상 25:25, 개역) 『원하옵나니 내 주는 이 불량한 사람 나발을 개의치 마옵소서 그 이름이 그에게 적당하니 그 이름이 나발이라 그는 미련한 자니이다 여종은 내 주의 보내신 소년들을 보지 못하였나이다』
(삼상 25:26, 개역) 『내 주여 여호와께서 사시고 내 주도 살아계시거니와 내 주의 손으로 피를 흘려 친히 보수하시는 일을 여호와께서 막으셨으니 내 주의 원수들과 내 주를 해하려 하는 자들은 나발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삼상 25:37, 개역) 『아침에 나발이 포도주가 깬 후에 그 아내가 그에게 이 일을 고하매 그가 낙담하여 몸이 돌과 같이 되었더니』
(삼상 25:38, 개역) 『한 열흘 후에 여호와께서 나발을 치시매 그가 죽으니라』
(삼상 25:39, 개역) 『다윗이 나발의 죽었다 함을 듣고 가로되 나발에게 당한 나의 욕을 신설하사 종으로 악한 일을 하지 않게 하신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여호와께서 나발의 악행을 그 머리에 돌리셨도다 하니라 다윗이 아비가일로 자기 아내를 삼으려고 보내어 그에게 말하게 하매』


아비가일은 화친을 요청하고 살아서 아내가 되지만, 자기자신을 의지한 특히 부요함을 믿었던 자 나발은 죽고 다 빼앗기고 맙니다.


(눅 14:31, 개역) 『또 어느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으로서 저 이만을 가지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눅 14:32, 개역) 『만일 못할 터이면 저가 아직 멀리 있을 동안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


즉 기도란 자기 꼬라지를 아는 겁니다. 나는 죽은자요 망한자입니다. 불쌓이 여겨주시옵소서


(시 2:12, 개역)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다 복이 있도다』


길 거리에 가는데 아들이 지나가면 입맞추어야 합니다. 만약 입맞추지 않으면 돌파 급습하여 죽여버립니다. 아니 얼굴도 모르고 나발처럼 다윗이 누군데 무슨 수로 입맞춥니까?


못보는 이유가 기도 즉 자기는 망할자입니다. 불쌍히 여김받아야 할 자입니다 라는 성령의 탄식이 없기에 안 보이는 겁니다.


왜 가시떨기 나무에 여호와의 불꽃이 맹렬하게 붙어야 합니까?


자기가 주인공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난 주인공 아니고 이 눈에 안보이는 불꽃이 주인공입니다. 라고 외치면서 벌리는 전쟁이 거룩한 전쟁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모세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여호와의 불꽃입니다.
그런데 의도적으로든 추호도 그런 마음이 없었던 40살의 모세는 결과적으로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버리고 만 상황이 여호와로 인해서 벌어진 겁니다.
80살에 삐쳐서 따질 수밖에 없지요 왜 그때 안도와줍니까?
자 봐라 가시떨기나무의 여호와의 불꽃이다.
아이고 제가 망할자입니다 이래 됩니다.


왜 우리는 귀신을 못 쫏아냅니까?
내가 망할자요 귀신으로써 쫏겨나야할 자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르짖음을 보게 되면 나 말고 성령의 탄식을 보면


성령께서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아이고 주여 저 놈이 자기 주제를 파악 못하고 있습니다.
뭐 귀신 쫏아낸다고. 지가 귀신인줄 모르고 주여 저에게 씌인 귀신 쫏아내 주세요 라고 기도하지 못할망정 도리어 귀신을 쫏아내는 퇴마사가 못 됩니까? 라고 묻는 겁니다.


퇴마사 중에 귀신 쫏아내는 놈 단 한 놈도 없습니다.
무당도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겨자씨 만한 믿음으로 산을 옮기는 믿음을 가진자 없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너가 바로 그 불가능한 산과 같은 존재인데 예수님이 겨자씨 만한 모습으로 쳐들어 왔다는 겁니다.


그래서 매일 매일 예수님으로부터 옮김을 당하는 입장에 놓여졌다는 겁니다.
남을 일곱 번 용서할 입장이 아니다. 도리어 예수님으로부터 7에 70 490번? 땡 틀렸습니다. 무한대로 용서 받지 않으면 죽어 마땅한 자인 망한자 라는 겁니다. 가시떨기나무다 라는 겁니다.


마리아 보세요 기도하 잖아요 자기가 싸웁니까? 둘이 싸움 붙여놓고 자기는 싹 얍샵하게 빠져버립니다. 그것이 기도요청 부르짖음입니다. 브로큰애로우 폭격요청입니다. 마귀와 예수님 간의 싸움이다는 겁니다. 얼마나 제대로 기도했으면 목격자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 머슴아들은 말귀를 못알아먹어서 항상 내 숙제인냥 강박관념에 사로잡혀있습니다. 마치 말씀도 지키기 경쟁으로 빠져듭니다. 누가 누가 잘 믿고, 누가 누가 말씀 더 잘 아는가? 누가 누가 큰자 인가? 바로 오늘 본문 밑의 구절이 바로 누가 누가 크냐 라는 싸움으로 이어지는 이유가 그겁니다.


자 그럼 나는 망해야 할 자입니다 라고 기도를 하면 귀신을 쫏아낼수 있을까요?
만약 귀신을 쫏아내는 것에만 지금 신경이 씌이신다면 숙제에 대해서만 신경이 씌이신다면
망한다는 것은 우찌 받아들여야 할까요?


자기가 자기를 귀신으로 인식하고 자기를 쫏아낼수 있을까요?
이것 조차도 불가능한데 어찌 조건갖추기를 형성할수 있단 말입니까?
지금 논란이 되고 있는 모 교회 모 목사의 주장을 방패막이로 삼아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인데
결국 조건 조차도 무슨 수로 귀신들린자가
입에 개거품 물고 불 속으로 물 속으로 던져지는 상황이 생생하게 벌어지고 있는데
아니 그런 자가 조건을 갖추어요? 뭐 막살지 않겠다고요? 


(막 9:19, 개역)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하시매』
(막 9:20, 개역) 『이에 데리고 오니 귀신이 예수를 보고 곧 그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저가 땅에 엎드러져 굴며 거품을 흘리더라』
(막 9:21, 개역) 『예수께서 그 아비에게 물으시되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하시니 가로되 어릴 때부터니이다』
(막 9:22, 개역) 『귀신이 저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지금 귀신이 씌인 상황을 아주 세세히 상세히 실제상황으로 보여줍니다. 생중계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돼지떼 속에 귀신이 들어가서 몰살되는 상황이 벌어져야 비로소 실제가 되지 그 이전의 귀신들린 두 청년의 무덤가의 상황은 자기랑 별 상관없습니다.
그런 귀신 쫏아낸다고 해서 내가 구지 쫏아가 달려가서 주여 저도 귀신씌였으니 귀신 쫏아내 주소서 라고 할 동네사람은 없습니다. 그런 지혜로운 아비가일 여인이 없습니다. 그런 아들에게 입맞추는자 없습니다.


언제 심각해 지는고 하니
자기 재산에 손해가 나타났을 때 비로소 심각해 집니다. 또 심각해져도 상황이 거꾸로 해석합니다. 귀신이 나쁜놈이 아니라, 돼지 떼를 몰살 시킨 귀신의 요청을 들어준 예수님이 문제꺼리가 되어서 예수님을 쫏아냅니다. 이것이 인간이 귀신 씌인 이유입니다.


귀신을 볼 줄 아는 자 없습니다. 망한자만이 죽은자 만이 기도가 덮친자만이 보여집니다.
보게되면 남이 아니라 자기가 귀신 씌여진 자입니다.
그런데 귀신을 왜 우리는 못 쫏아내냐 구요?


예수님께 집 세 채를 주겠다고 엘리야 모세 예수님 각각 아파트 세채 교회 세 채를 주겠다는 것이 바로 기도가 뭔지 몰라서입니다.


너희는 도리어 마귀의 집이다 라고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그러니 마귀를 못 쫏아냅니다.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 되는 성령의 탄식이 덮치면


감히 고개도 못들고 주여 저는 귀신 씌인 자입니다. 저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라고 부르짖는 겁니다.


지금 남이 아닌 모세가 귀신이 씌여진 것을 탄식해야 합니다.
40살 때 왜 날 안도와 줬느냐 라는 것을 따지고 있다는 자체가 귀신씌인 겁니다.
그러니 부르짖는 백성을 구할게 아니라
모세부터 구해야 하는 겁니다.
모세는 지금 하나님의 백성을 구해야 한다고 합니다. 40살 때
그런데 주님이 그런 생각 심으시고 주님이 그런 모세를 치십니다.
80살 때 비로소 모세를 건지십니다. 남이 아닌 지금 한참 부르짖고 있는 그들이 아닌 모세를 먼저 급히 건지십니다. 모세가 원했던 하나님으로부터 그 가짜 하나님으로부터 구원 빼내시기를 하시고서 가시떨기나무의 불꽃으로 나타나십니다. 모세는 비로소 아는 겁니다.
자기 속에 마귀가 심은 그 가짜 하나님으로부터 건짐받아야 함을 말이죠.


자 너무 길어서 또 지쳐오는데 결론 내리겠습니다.


기도 조차도 내가 할수 없는 저는 죄인입니다. 나는 망한자입니다. 나는 귀신들린자입니다.
를 찾는 것이 기도입니다. 주님의 기도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기도는 부족분 밧데리 충전해서 자기가 싸워보겠다는 자기 숙제 자기주체를 염두하고 있습니다.


기도는 힘빼기입니다. 괴롭히는 전능자를 앞장세우는 겁니다. 남이 아는 나를 괴롭히는 전능자.


나 이런식으로 내가 귀신 씌여진 것에서 고침받았소 라고 외치는 증인인 겁니다.
그런데 귀신 씌인적은 없다고 여기고 도리어 귀신을 쫏아내어야 할 상황으로서의 숙제가 덮쳐지니 자기숙제인줄 착각하고 있더라 라는 겁니다.


뻔뻔하게 예수님에게 떠 넘기세요
그 말이 기도 외에는 귀신을 쫏아낼 방법이 없다 라는 뜻입니다.


숙제 살며시 예수님에게 밀어서
난 못합니다 주님이 이거 제일 잘하시잖아요 라고 솔직하게 부르짖으면 됩니다.
어차피 안되는 숙제입니다. 퇴마사 불러도 소용없습니다. 안됩니다.
혹시나 막살지 않으면 숙제 할수 있지 않는가? 안됩니다.
다윗이 그 혹시나를 혹시나 해 봤습니다. 택도 없습니다.
그냥 예수님께 떠 넘기세요.


우리는 그저 이런 죄악성 원수성을 예수님으로부터 차압 당하는 부도맞은 인생으로 지적당할 뿐입니다.
이것도 딱지 붙고 저것도 딱지 붙고 내가 손대는 마다 다 딱지 붙어서 몽땅 차압당하는 겁니다.


이것이 기도 외에는 귀신을 쫏아낼 길이 없는 기도가 주인공이 되는 말씀의 취지입니다.


우리의 원수성(귀신성)을 담으시고 그 위에 불쌍히 여기심(기도)을 뿌리사
너희가 날 사랑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사랑했다고 여디디야 하시는 그 주님의 입에 발에 입맞출수 있는 무능한자 망한자 귀신들린자 임을 발각당하는 그 사랑을, 불쌍히 여겨주심을 기도하는 집이 바로 성령의 전인 주님이 집으로 이전되는 겁니다.


(잠 10:12, 개역)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
(벧전 4:8, 개역)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요일 4:10, 개역)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주님! 우리의 원수성(원망)을 담고자 마귀가 심은 가짜하나님을 들통내고자
날마다 날마다 꾸지람을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징계가 아니면 사생아라고 했습니다.


우리 속에 있는 마귀를 쫏아내 주심을 감사합니다.
그리고 우리 속에 있는 마귀를 쫏아내 주시길 간구합니다.


우리가 귀신 쫏아내어야 할 입장이 못 된다는 것을 성령의 탄식으로써 알게 하소서
도리어 남이 아닌 우리 속의 귀신을 쫏아내시는 성령의 기도를 요청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The Cross Pendant

He is a cross pendant.
He is engraved with a unique Number.
He will mail it out from Jerusalem.
He will be sent to your Side.
Emmanu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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