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의 임신
사라의 임신
히브리서 11:11-12
사라의 임신인간의 예상은 가능성을 바탕으로 결과가 생기기를 바라는 겁니다. 만약에 이미 자궁이 죽었다면 이는 새로운 아기가 생기는 가능성이 전무(全無)함을 말해주는 겁니다.
구원받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인간들의 모든 ‘구원 가능성’을 배제하는 가운데 이루어집니다. 교회를 나가고, 하나님 믿는다면서 ‘천국 갈 가능성이 전혀 없음’을 통보받을 때 그 사람은 무엇을 획책하겠습니까?
이왕 이렇게 된 것은 남은 삶을 자신의 욕망에 준해서 즐길려고 할 것입니다.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눅 12:19)
왜냐하면 그것만이 믿을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이기 때문입니다. 영생을 방해하는 것이 뭘까요?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마 19:22-23)
인간은 가능성을 밑천으로 움직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무엇은 근거로 움직일까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불가능성으로 움직이도록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가능성이 있는 여인이 있습니다. 그것은 종인 하갈입니다. 반대로 불가능성의 여인인 사라입니다. 하갈은 임신 가능합니다마는 사라는 불가능성입니다.
가능성에서 나온 자식은 ‘아브람’의 자식이지만(창 16:4) 사라에게 나온 자식은 ‘아브라함’의 자식입니다. (창 21:1) 이로서 아브라함은 약속의 자식인 이삭의 존재에 종속됩니다.
아브라함의 미래는 이삭의 자손에게 달렸습니다. “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창 22:17)
이삭과 이스마엘의 존재 사이에는 대적(對敵)관계가 형성되었습니다. ‘아브라함 자손’만이 복된 자의 후손들입니다. 바로 이점을 드러내기 위해서 상호 이질적인 견해가 생기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