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케아회의 시대 (313-590년)[3]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에 너희는 생명을 위해 짐을 지고 예루살렘 성문으로 들어오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6. 수도원의 발달과 영향

 

1.발생 배경

(1) 기독교가 국교가 되자 기독교의 세속화 현상이 심화되었다. 이에 대한 반동으로 금욕 생활과 경건 생활을 추구하는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리하여 은둔 생활이 유행하게 되었고 수도원이 발달하게 되었다.

(2) 교회가 지나치게 조직화, 규율화 사회제도화 됨에 따라 좀더 단순하고 개인적이며 자유로운 신앙 생활을 도모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그들의 뜻을 이룰 수 있는 특수한 사회(곧 수도원)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3) 물질적인 가치보다 영적이고 정신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자꾸만 물질적, 육적 생활로만 기우는 복잡한 도시 생활에서 떠나 물질과 상관 없이 하나님과의 교제만으로 만족할 수 있는 새로운 삶을 도모하게 되었다.

 

2.기원

수도원은 이런 저런 이유로 도시 교회에서 갈라져 나와서 혼자 살게 된 은둔자들로부터 시작되었다. 수도원은 처음에 동방에서 시작되었다. 최초의 유명한 은둔자는 안토니우스(Antonius, 356년 사망)이다. 그는 이집트 사람으로서 부자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조실부모하고 누이와 같이 살았는데 항상 속세의 일들이 번잡함으로 인해 고민하다가 마19:21에서 주님께서 부자 청년에게 소유를 팔고 나를 따르라고 하신 말씀에 감동하여 전 재산을 팔아 정리하고 혼자 굴속으로 찾아 들어갔다. 이 소문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추종자가 되었다. 안토니우스는 빈부귀천을 불구하고 찾아오는 모든 사람들을 가르치며 돌보았다. 그리고 박해가 있었을 때는 여러 번 알렉산드리아로 가서 신자들을 격려했다.

안토니우스가 가는 곳에 그를 사모하여 찾아가는 사람이 많았던 것처럼 유명한 은둔자가 거처하는 곳 주위에는 초막을 짓고 같이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촌락을 이루고 때로 서로 만나서 기도를 같이 하였다. 그러다가 점차 한 집에 같이 살면서 공동생활을 하는 풍습이 생기게 되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은둔자들의 독거 생활 중 생길 수 있는 위험과 시험들을 방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수도원이 시작되었다.

 

3.규칙

1.규칙 제정의 필요성

수도원에 엄격한 규칙이 제정된 것은 수행자들의 독단적 수행으로 인해 극단적 금욕 행위가 생기는 것을 방지하고, 게을러지거나 자유 방종케 되는 것을 방지하며, 조직의 유지를 위해 질서를 확립하기 위해서였다.

2.규칙 제정자들

수도원의 규칙을 처음으로 제정한 사람은 {파코미우스}이다. 그는 나일강의 타벤나이(Tabennae)섬에 수도원을 설립하고 계획에 따라 수도 생활을 시작했다. 파코미우스 제도의 특징은 금욕주의자들이 공동생활을 하면서 한 권위자 아래서 복종하는 것이었다. 이전의 금욕 생활에는 단지 청빈과 순결만 요구되었는데 이제는 여기에 복종이 첨가되었다. 그들은 규칙적으로 예배를 드리고 공부를 하며 노동을 하였다. 규칙적인 의식을 어기는 자에게는 징벌도 가했으며 훈련은 군대식으로 엄격하게 이루어졌다.

또 가이사랴의 {바실리우스}(Basillius the Great)도 애굽과 팔레스틴의 은둔자들에 대해 흥미를 갖고 자신도 그런 생활을 실천하다가 수행 생활의 결점을 발견하고 친히 수도원을 세워서 새로운 타입의 수사 제도를 발전시켰다. 그의 수도원제도의 특징은 첫째, 개인적인 수도 생활보다 조직 안에서의 완전한 공동 생활을 주력한다는 것, 둘째, 수도원 건물을 사막에서 도시 가까운 곳으로 옮겨 세우는 것, 셋째, 수도원 생활이 지나치게 엄격해지지 않도록 제한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기도 시간(8시간 이내)이나 고행 시간을 줄이고 일상 생활이 정상적으로 영위되도록 했다. 넷째, 학문을 닦게 했다. 이로 인해 수도원이 신학의 산실이 될 수 있게 만들었다.

수도원이 이집트와 동방의 여러 나라에서 유행되어 그 수가 증가하고 여성들을 위한 수도원도 생기자, 극단적인 금욕 생활의 위험성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수사들은 극단적으로 기도하며 거의 미친 사람처럼 생활하기도 했다. 콘스탄티노플의 아코메타이는 주야로 잠을 자지 않고 기도하였으며, 시리아의 유케타이는 일을 하지 않고 기도만 하였다. 이러한 극단에 빠지지 않기 위해 규율을 세울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4.서방 수도원

원래 동방에서 시작된 수도원 제도는 4세기 중엽에 서방에도 전파되었다.

(1) 마르티누스(Martinus)가 고올(프랑스)에 수도원 설립함.

(2) 암브로시우스(Ambrosius)가 밀라노에 수도원을 설립함.

(3) 카씨아누스(Cassianus)가 고올 남부 마르세이유에 수도원과 수녀원을 설립했다. 이곳은 서방 수도원의 중심지가 되고 카씨아누스의 글은 바실루스의 규칙 번역문과 함께 수도원 생활의 표준이 되었다.

(5) 서방에서 수도원 규칙을 세우는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베네딕투스}(Benedictus, 480-543)였다. 그는 이탈리아의 카씨아노 山에 수도원을 세웠는데 이 수도원은 서방 수도원의 전형이 되었다. 베네딕투스가 세운 규칙은 서 유럽 수도원의 전형이 되었는데 그 규칙은 다음과 같다.

衁. 수도원장은 수도원 전체 선거에서 일치로 선출. 선거가 원만히 안될 때는 그 지방 감독과 신자들의 도움을 받아 원만히 처리되도록 할 것.

遁. 큰 일은 전체 회의에서, 작은 일은 원장이 수도사 연장자와 협의하여 처리할 것.

鑁. 수도원장이 되려는 자는 일정한 기간동안 시험을 받은 후에 수도원에 정주할 것과 엄격한 도덕을 지킬 것과 규율에 복종할 것을 서약해야 함.

鱁. 명상과 수행으로만 시간을 보낼 것이 아니라 노동을 장려하고 남의 도움을 받지 않고 자력으로 생활할 것.

처음에 수도원은 세상을 멀리 떠나 은둔하면서 개인적 신앙 생활을 도모하는 것이 목적이었는데 그레고리우스 1세는 수도원에 이교도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임무를 맡겼다. 그리고 수도원을 학문의 중심지로 만드는데는 카씨오도루스(Cassiodorus)의 힘이 컸다. 그는 수도원에서 학문을 강의하고 저술을 하면서 수도원을 학문의 전당으로 만들었다.

수도원은 형식적으로는 세상을 떠나 있었지만 실제로는 세상에 있는 일반 교회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주며 서로 교류하였다. 수사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 교회의 주교나 사제로 임명되는 일이 많아졌으며, 이들이 주교로 임명되면서 수도원적인 금욕적 규칙들, 특히 독신주의를 교회의 일반 성직자들에게도 강요하는 일이 많아지게 되었다. 수사들은 교회를 섬기러 사회로 돌아오는 반면 주교들은 영적 충전을 위해 수도원으로 들어감으로써 교류가 이루어진 것이다.

 

5.수도원 제도의 한계

교회들이 성경의 가르침에서 이탈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되자 교회를 성경의 정신대로 개혁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일어나게 되었고 몬타누스파나 도나투스파와 같은 무리들이 이러한 교회 개혁의 선봉에 서 있었다. 이들 상당수는 세속적 삶에서 자기를 지켜 거룩과 하나님과의 긴밀한 교통을 추구하였다. 경건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점점 사람들과의 교제를 끊고 자신을 거룩하게 지키는 일에만 몰두하게 되었다. 게르만족 등의 야만인들에 의하여 로마가 초토화되고, 교회들은 국가와 결탁하여 진리에서 벗어나 타락하는 것을 본 이들은 세상(일상 삶) 속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며, 또한 기존 교회의 틀 안에서는 바른 신앙 생활과 성도의 참된 교제를 누리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그들은 일상적 삶의 미혹과 유혹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사람들이 찾지 않는 험한 광야나 산으로 갔으며 거기서 은둔자(隱遁者)처럼 살았다. 그들은 명상으로 자기 영혼을 맑게 하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통찰력을 얻으려고 노력했다. 남자들뿐 아니라 여자들도 세속적 삶을 떠나 안식할 곳으로 수도원을 찾았다. 남녀를 불문하고 약하고 곤고한 자들이 피할 곳은 수도원 뿐이었기 때문이다. 야만인이 득세하고 모든 것이 혼란해진 상황에서 그나마 학문이 보전되고 성경이 필사되고 번역되고 읽혀지는 유일한 곳은 수도원이었다.

그러나 마귀는 이러한 수도원들을 그대로 두지 않았다. 마귀는 수도원들로 하여금 우선 하나님의 은혜보다는 인간의 노력과 훈련에 더 관심을 두게 만들었다.

타락하고 물질화된 교회에 대한 반발로 수도원이 형성되었기 때문에 수도원의 수사들 중 많은 사람들이 '물질은 악하다'는 당시의 철학적 영향을 받아서 영적 삶을 저해하는 요소를 극복하기 위해서 극도로 검소한 생활과 금욕적 수양을 행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육체 단련과 금욕적 수행은 믿음으로 사는 것과 성령을 좇아 행하는 것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것이었다. 육체의 정욕을 꺾기 위해 고행을 하거나 세속적 삶을 피하는 것은 죄와 정욕을 처리하는 근본적인 방법이 될 수 없었다. 하나님의 방법은 인간을 훈련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으로 넣으시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하나님의 방법에 주의하지 않은 수도자들은 죄를 이기기 위해서 오직 자신들의 고행과 금욕적 노력에 의지하였고 이것이 효과를 보지 못하자 그들은 점점 더 심한 고행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여러 가지 기괴한 행위들이 다 나오게 되었다.

교회가 세속과 권력으로 집착할수록 수도원은 하나님과 영적인 순수함을 추구하려는 많은 사람들로 채워졌다. 그러나 수도원 생활이 곧 성경적이고 정상적인 신앙의 길로 돌아가는 것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곧 깨닫게 되었다. 수도원의 수립과 발전은 그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었지만 그러나 그것이 곧 교회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세속화된 로마 교회를 떠나 수도원으로 온 많은 사람들이 수도원 안에서도 참 교회가 줄 수 있는 생명과 안식을 발견할 수 없었다. 수도원들은 점차 도저히 성령의 자유로운 역사를 경험할 수 없을 정도로 조직적이고 규율적이 되었으며 종교적이고 율법적이 되었다.

이처럼 수도원의 영적 기초가 약화되자 이제 수도원의 외형적 경건도 무너지게 되었다. 초창기에는 가난과 절대적 자기 부인(否認)에서 시작한 수도원들이 나중에는 점차 부와 권력을 축적하게 되고 자기들이 이전에 떠나온 교회들과 전혀 다를 바 없이 타락하게 되었다.

수도원이 잘못 끼운 첫 단추는 그들이 인간(수도자)의 연약함을 감안하여 수많은 규칙과 율법 및 그것에 따른 수행과 훈련이었다. 이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성령의 인도와 성경의 가르침대로 행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성령보다 조직과 제도에 더 의지하고 말씀보다 의식과 훈련에 더 관심을 가진 교회들이 타락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성령보다 조직과 제도, 말씀보다 규율과 수행에 더 관심을 가졌던 수도원들도 같은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되자 수도원은 더 무서운 사탄의 공작을 받아서 걷잡을 수 없는 타락의 길로 내달았는데 그것은 수도원이 교황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진실한 신앙을 회복하고자 하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 도구가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교회가 박해를 받던 때에는 별로 타락하지 않다가 국가와 세상의 환영 속에서 지지를 받고 그것과 연합하게 되었을 때 타락하고 만 것처럼 수도원도 카톨릭 교회의 관심 밖에 있을 때에는 별 문제가 없었지만 교회의 관심을 얻게 되고 지지를 받아서 힘을 가지게 되자 곧 타락하고 세속화되고 말았다. 세속화되기 전에는 수도원은 타락하고 왜곡된 교회들에게 신선한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수도원 자신이 세속화됨으로 인해 그들은 타락한 교회들과 함께 참된 신앙을 갈구하는 민중들을 압제하고 괴롭게 하는 또 하나의 도구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성령님은 암흑 시대를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역사를 계속 일으키셨다. 성령님은 도처에서 일단의 무리들을 일으키셔서 그들로 하여금 '성령'과 '성경'을 신앙과 신학의 유일한 근거로 삼게 하시고 개인 생활이든 교회 생활이든 오직 이것을 기준으로 하며 능력의 원천으로 삼게 만드셨다. 이들은 타락한 교황과 교회의 가르침을 거부하고 성령님의 인도를 받았으며 성경이 말하는 바를 따라서 자신들의 신앙을 지켜나갔다.

7. 로마 교회의 교황권 강화

니케아 시대에 이르러서는 로마 교회와 감독의 영향력과 권위가 현저히 강화되었다.

 

1.교황권이 강화된 이유

첫째, 로마 교회는 로마 제국의 수도(首都)에 있는 교회였으므로 자연히 타 지역 교회들에 대해 위세를 떨칠 수 있었고, 또한 대도시 교회라서 유력한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었고 전도와 구제 사업을 많이 하며 각처에 지어지는 교회당 건축비 등 재정적 부담을 많이 감당할 수 있었기 때문에 자연히 영향력이 커졌다.

둘째, 로마는 베드로와 바울의 순교지였으므로 로마가 신앙과 교회의 중심지처럼 여겨지게 되었고 따라서 로마 교회의 감독의 권위도 높아졌다.

셋째,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정치적 수도를 동방의 콘스탄티노플로 천도한 후에는 황제나 기타 유력한 사람들이 로마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로마 교회의 감독(교황)이 상대적으로 로마에서 가장 유력한 사람이 되었다.

넷째, 레오 같은 유능한 감독이 있었기 때문이다. 야만인들이 침입하여 로마가 위기를 만났을 때 레오 감독은 그의 영향력을 행사하여 군대를 일으켜서 이를 물리쳤다.

다섯째, 343년 불가리아의 살디카에서 지방 대회가 열렸는데 여기서 로마 교회가 교회의 본부 역할을 하도록 결정되었다. 또한 이 결의를 근거로 하여 그후의 몇몇 로마 황제들이 로마 교회의 지위를 더욱 격상시켰다.

 

2.레오 1세

레오 1세는 440년부터 461년까지 로마 감독이었다. 그는 웅변가요 설교가였으며 문학적인 재질과 행정적 정치적 재질이 풍부한 사람이었다. 그는 모든 기회를 이용하여 로마의 교권을 장악하였으며 또한 그 교권의 근거를 밝히기에 노력하였다. 그가 제시한 근거란 마태복음 16:9 말씀인데, 로마 감독은 바로 여기서 말하는 바 주님의 권위를 위임받은 베드로를 계승한 자라는 것이다. 레오는 하나님께서 로마 제국을 세운 것은 기독교를 위한 것이므로 수사도(首師徒;베드로)의 교위(敎位)가 있는 곳이자 제국의 수도에 있는 교회는 당연히 모든 교회의 수장의 위치에 있어야 한다고 했다. 당시의 서로마 제국 황제 바렌티아누스 3세는 칙령을 내려, 로마의 감독은 서방 교회의 원수(元首)이므로 이를 거스리는 것은 국가를 거스리는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에베소와 칼케돈 회의는 레오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동방 교회에서 레오는 일반적으로 존경을 받지 못했다. 레오는 기독론 문제를 해결하는데는 유능한 사람이었으나 449년에서 451년 사이에 열린 회의에서 그의 정책은 배척을 받았다. 이때부터 로마와 콘스탄티노플 사이에 대립은 커 갔으며 이것은 마침내 동서교회의 분열을 초래하였다.

8.동방의 교부들

A. 알렉산드리아와 팔레스틴의 교부들

 

1.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 (260-339년)

유세비우스는 가이사랴의 감독이며 교회사의 아버지로서 유명하다. 그는 260년 팔레스티나에서 출생하였고 신앙으로 인해 감금된 일도 있다. 그는 가이사랴에서 팜필루스에게 배우고 315년에 가이사랴의 감독이 되었다. 그는 니케아 회의에서 아리우스 논쟁이 벌어졌을 때 온건파로서 니케아 신조의 원안(原案)을 제출하기도 하였다. 후에 그는 황제의 은총을 입고 339년 죽을 때까지 궁정 출입을 하였다. 그는 변증, 역사, 해석, 변론 등에 대한 책을 많이 썼으나 가장 유명한 것은 {교회사}(敎會史)이다. 그의 교회사는 서방 교회사의 사료(史料)보다 동방 교회사의 사료가 많다. 그의 저서는 교회사 외에도 {기독교 변증론}(20권), {유대인 변호史}(15권), {콘스탄티누스 대제傳} 등이 있고, 고대 저술가들의 저술을 발췌하여 복음에 들어가는 길을 열고자 하여 쓴 {복음의 준비} 및 유대인을 위해 예언에 근거하여 기독교를 변증한 {복음의 증명}(20권)이 있다.

유세비우스 감독 외에도 교회사에 나오는 유세비우스는 6명이나 되는데 그 중에서 이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는 특히 훌륭한 변증가로서 그의 교회사 역시 역사적 사실로서 기독교회가 이교와 이단들과 싸워 훌륭히 이겼다는 사실을 변증하기 위해 쓴 것이다.

유세비우스의 교회사의 뒤를 이어 교회사를 쓴 유명한 세 사람이 있는데 하나는 5세기 초의 콘스탄티노플의 수사학자인 소크라테스(Socrates)이다. 그는 은퇴 후 유세비우스의 역사가 끝난 시대부터 439년까지의 역사를 기록하였다. 소조멘(Sozomen)은 소크라테스와 같은 시대, 같은 곳에서 같은 직업에 종사한 사람이었는데 같은 시대의 역사를 소크라테스와는 다른 시각에서 기록하였다. 또 하나는 테오도렛(Theodoret)인데 그는 387년 경 안디옥에서 출생하여 부귀 영화를 버리고 전도에 헌신한 사람이다. 423년 구브로섬의 감독이 되었으나 이단 혐의를 받고 교회에서 쫓겨났다. 그러나 후에 이단이 아님이 밝혀졌다. 그는 428년까지의 교회사를 기록한 교회사를 남겼다.

 

2.아타나시우스 (296-373년)

아리우스를 반대하여 정통적 교리를 세운 교부로 유명한 아타나시우스는 당시의 신학계에서 가장 유능한 학자였다. 역사학자 샤프는 말하기를 '콘스탄티누스가 정치계와 세속에서 니케아 시대의 중심 인물이었다면 아타나시우스는 신학계와 교계에 있어서 중심 인물이었다'고 했다. 아타나시우스는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알렉산드루스가 죽으면서 그의 후계자로 추천되어 326년 알렉산드리아 감독이 되었다. 그는 46년 동안 감독직에 있으면서 정통 교회의 간성(干城)으로서 끈기 있게 아리우스 이단과 대항하였다. 그러나 궁정의 방침이 자주 바뀌어 335년 콘스탄티누스 황제 때 트리야로 유배되었으며, 342년에는 로마로 유배되었고 351년에는 사막으로 유배되었다. 그는 이처럼 20년이라는 세월 동안 귀양살이를 하였으나 말년에는 평화롭게 살았고 그 동안 이단을 반박하는 글을 끊임없이 썼다.

그의 저서로는 <로고스의 성육신>, <아리우스를 반격함>, <콘스탄티누스에게 바치는 변증론>, <안토니오의 전기> 등이 있다.

 

3.키릴로스(Cyril)

키릴은 알렉산드리아의 감독(413-444)이었으며 네스토리우스와 논쟁한 인물로 유명하다. 그러나 그의 학설은 정통적이었만 성격이 과격, 포악했으며 당파심이 강하여 적을 대하여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싸웠다.

 

B. 시리아와 소아시아 지방 교부들

1.데오도레 (Theodore)

테오도레는 길리기아의 몹스에티아의 감독이었는데 성경 주석자로 유명하다. 그 단편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그는 성경을 우화적으로 해석하는 폐단에서 벗어나 시대를 앞서서 역사적 언어학적 주석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2.바실리우스(Basilius the Great, 330-379)

소아시아의 갑바도기아 지역에서 배출된 사람들으로서 정통 신앙의 중요 옹호자요 아리우스 이단에 대항하여 싸운 세 명의 감독이 있는데 {대 바실리우스}와 그의 아우인 {닛사의 그레고리우스}, 그의 친구 {그레고리 나지안주스}이다.

이 중 바실리우스 형제는 부유하고 경건한 가문 출신으로서 그의 선조들 중에는 순교자가 많이 있었다. 바실리우스는 330년에 출생하였는데 할머니의 신앙적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는 아테네에서 그레고리 나지안주스와 알게 되어 한 평생 친구가 되었다. 그는 안디옥, 콘스탄티노플, 아테네에서 수학했고 355년 고향에서 변호사가 되었다. 그러나 한 자매의 권고로 수도원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365년에 가이사랴 교회의 부름을 받고 그 교회의 부목사가 되었으며 5년 후에는 감독이 되었다. 그리고 가바도기아의 총감독이 되었다. 바실리우스는 379년 50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병약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교회를 지도하여 아리우스 주의에 대항했다. 그는 신학자와 설교자로서도 유명하였으나 교회를 통솔하고 지도하는 행정적 정치적 지도력이 특출하였다. 그는 수도원 생활의 규칙을 제정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저서에는 <그리스도의 신성론>, <성령론>, 설교집, 서신 등이 있다.

 

3.닛사의 그레고리우스 (Gregorius Nassenus, 332-395)

바실의 동생인 닛사의 그레고리우스는 형과 마찬가지로 몸이 약했는데 수사학 교사가 되었다. 후에는 형의 감화로 수도원에 들어갔고 372년에 닛사의 감독이 되었다. 그는 감독으로서의 사명을 충실히 수행했으며 380년에 콘스탄티노플에서 신학 논쟁이 있었을 때는 총회에 참가하여 가장 탁월한 신학자로서 활약하기도 했다. 그도 자기 형처럼 삼위일체 교리와 화신(化身)의 교리를 입증하는데 주력하였는데 그의 사상은 모든 니케아 시대 교부들 중 오리게네스의 사상과 가장 가까웠다고 한다. 그의 저서로는 아폴리나리스를 반박한 글이 있다.

 

4.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 (Gregorius Nazianzus)

그는 가바도기아의 교부 중 마지막으로 바실리우스의 친구였다. 331년 출생하여 390년 경에 죽었다. 그의 어머니는 논나(Nonna)인데 크리소스톰의 어머니 안투사와 아우구스티누스의 어머니 모니카와 함께 교회사상 유명한 어머니 중 하나이다. 그레고리는 젊을 때 장로가 되었는데 374년 감독인 아버지가 죽자 본인의 의사와 관계 없이 나지안주스의 감독이 되었다. 그는 380년 콘스탄티노플에 초청되어 신학 논쟁에 참가하고 강권을 받아 대교구장에 추대되었다가 이듬 해에 콘스탄티노플의 대회가 열리자 그 의장이 되었다. 그는 닛사의 그레고리우스와 함께 회의의 수뇌였다.

그레고리는 유능한 설교가였다. 동방 교회에서는 크리소스톰 외에는 그를 따를 사람이 없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의 저서로는 설교와 편지 및 시(詩) 등이 남아 있다.

이 세명의 갑바도기아 교부들은 다 자연을 매우 사랑하였다. 그들은 자연미에 대한 감흥과 그들의 영적 열망을 결합하였다. 그들은 자연의 아름다움과 하나님의 영원한 아름다움 간에는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보았다. 이들의 또 하나의 공통점은 오리게네스를 존경하였다는 점이다. 그들은 아타나시우스가 밝힌 입장을 지켰으나 오리겐의 입장에서 아타나시우스의 교리를 해석하였다.

 

5.크리소스톰 (Chrysostomus)

크리소스토무스는 346년 안디옥에서 출생했다. 그의 아버지는 장군이었는데 일찍 죽었고 어머니 안투사(Anthusa)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어머니 모니카와 같이 칭찬받는 신앙인이었다. 그의 이름의 뜻은 [황금의 입]으로서 그의 후례들이 설교에 능한 그에게 붙여준 이름이다. 그는 훌륭한 성경 주석가요 설교자요 또한 법률가였다. 그는 당시 유명한 수사학자인 리바니우스에게서 문학을 배웠다. 리바니우스는 안투사를 칭찬하면서 그의 아들 크리소스톰이 그리스도인만 되지 않았다면 그의 후계자로 삼았을 것이라고 하며 아쉬워했다. 코르소스톰은 잠시 수사학자와 변호사가 되었다가 안디옥의 감독 멜리티우스에게 신학을 배운 후 세례를 받았다. 그 후 그는 안디옥 근처의 산에 들어가 수도 행활을 하였다. 거기서 그는 깊은 신앙 체험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지나치게 금욕 생활을 한 결과 건강을 해치게 되어 380년 안디옥으로 가서 집사와 장로를 거쳐 394년 안디옥 감독이 되었다. 그리고 397년에는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총감독)가 되었다.

그는 같은 시대의 교부들처럼 신학 논쟁에 참가한 적이 별로 없으며 사변적이기보다는 실천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특히 설교와 성경 해석에 힘을 기울였다. 그의 설교는 대개 본문을 해석한 것으로서 성경 각 권을 순서대로 해설하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만 600여편에 이른다. 그의 설교의 특징은 성경 해석을 중점으로 한 것 외에도 고문학의 소양이 풍부한 것과 도덕적이고 실제적인 것으로서 당시의 사회적 문제에 대해 많이 언급하였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그는 당시 풍속이 문란하고 사치와 방종으로 흐르는 것을 공격하였다. 심지어 그는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미망인인 황태후를 공격하다가 노여움을 사서 404년 길리기아의 한 시골로 추방되기도 했다. 그는 귀양가서도 전도에 힘쓰고 신자들을 가르치며 권면하는데 힘을 썼다. 그는 407년 쓸쓸하게 세상을 떠났다. 한 전기 작가는 그에 대해 말하기를, '그는 편협한 독단설과 격한 논쟁을 피하고 실행이 없는 정통설보다 실제로 경건한 생활을 더 강조하였다'고 했다. 또 다른 사람은 말하기를, '그는 자기가 믿는 바를 설교하고, 성경에서 말하는 바를 설교하고, 성경에서 금하는 바를 정죄하고, 성경에서 명하는 바를 권장하였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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