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케아회의 시대 (313-590년)[4]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에 너희는 생명을 위해 짐을 지고 예루살렘 성문으로 들어오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9.서방의 교부들

1.힐라리우스 (Hilarius, 295-368)

이 시대에 나타난 서방 교부들 가운데 가장 초기의 사람은 힐라리우스이다. 그는 지금의 프랑스 지역 프와티에에서 출생했는데 철학과 문학에 뛰어났다. 그는 장년이 되어서야 예수를 믿고 처자식과 함께 세례를 받고 교회를 위해 헌신했다. 그는 350년에 고향 교회의 감독으로 임명되었는데, 이 지방은 아리우스설이 왕성한 곳이었다. 그러나 그는 정통 교리의 투사로서 투쟁하여 [아리우스를 쳐부수는 방망이]라는 별명을 얻기에 이르렀다.

그의 주요 저서로는 <삼일일체 신론>, <신앙론>, <시편 주해> 등이 있다.

 

2.암브로시우스 (Ambrosius, 340-397).

4세기 후반과 5세기 전반에 활동한 서방 교회 지도자로서 유명한 3인은 암브로시우스, 히에로니무스 제롬, 아우구스티누스이다. 이 세 명을 가리켜 라틴 교회의 교부들이라고 한다. 이 중 암브로시우스는 340년 고올(Goul)의 수도 토리에서 출생하였는데 그의 부친은 로마 정부의 고관을 지냈으므로 로마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어려서부터 큰 재능을 발휘하였다. 그의 재능으로 인해 그는 젊을 때(370년) 북 이탈리아 지역 장관이 되었다. 그의 거주지인 밀라노에는 많은 아리우스주의자들이 있었다. 밀라노의 감독 악센티우스가 죽자 후임자 문제로 분쟁이 일어났는데 이를 진정시키려고 회의장에서 암브로시우스가 연설을 하자 어떤 소년이 '암브로시우스는 감독이다'라고 외쳤다. 이 말이 마치 하나님의 음성처럼 권위있게 받아들여져서 암브로시우스는 즉석에서 후임 감독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아직 세례도 받지 않고 있었으므로 곧 세례를 받고 감독직에 취임하였다. 그는 이것을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생각하고 그의 모든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감독으로서 헌신하게 되었다.(374년)

암브로시우스는 니케아 신조의 강력한 지지자였다. 그는 아리우스파와 평생 싸웠다. 그는 많은 책을 지었으며, 위대한 교사, 학자로 불렸다. 그는 또한 성가(聖歌)를 많이 발전시켰으며 신학과 성경 연구에 힘썼다. 또한 그는 대단한 행정가로서 교회를 잘 통솔하며 교회의 권위를 유지시켰으며 신앙 생활의 높은 표준을 담대히 지킨 것으로도 유명하다.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데살로니가에서 일어난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 잔혹한 학살을 감행하자 암브로시우는 격분하여 황제의 성만찬 참여를 거절하고 공식 참회를 받은 후 8개월이 지나서야 겨우 사면해 주었다. 그는 그의 훌륭한 설교로서 아우구스티누스를 회개시킨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저서로는 <설교집>과 <성경주해>, <찬미가> 등이 있다. 암브로시우스는 강인한 성격과 불굴의 정신, 정열과 고상한 인격으로 무너져가는 제국 속에서 교회를 지탱한 위대한 교회의 지도자로 불린다.

 

3.히에로니무스 제롬 (Hieronumus Jerome)

제롬은 고대 서방 교회가 자랑할만한 가장 유능한 학자였다. 그는 346년 달마티아 근교 스토리돈에서 출생했다. 그는 20세에 세례를 받고 오리게네스의 번역자 루피누스를 만나 종교 문학에 뜻을 두었다. 그는 여행을 좋아해서 수년간 로마 제국 각지를 여행했는데 안디옥에서 병을 얻어 머무르던 중 꿈 속에서 주님의 꾸지람을 듣고 374년부터 5년간 칼키스 사막에서 은둔 생활을 하면서 히브리어를 배웠다.

제롬은 교부들 중 수도원 생활을 가장 격려한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완전한 묵상과 종교적 근신에 헌신하기 위해 세상을 떠나 수도 생활을 했다. 평생 그의 생활은 수도자의 자세로서 책을 읽고 저술하며 엄격한 신앙 생활을 하는 것으로 보냈다. 그는 385년 동방 여행에서 애굽수도원을 보고 부유한 과부 파울라와 함께 베들레헴에 수도원을 여러 개 세웠다. 그는 수도원장으로 34년간 일하다가 420년에 죽었다.

제롬의 일생 일대의 사업은 신구약 성경의 라틴어 번역이었다. 당시에도 라틴역 성경이 있기는 있었으나 그것이 거칠고 오역이 많았기 때문에 교황 다마수스는 제롬에게 새로운 번역을 권했다. 이에 그는 먼저 388년 경에 신약을 번역했는데 이것은 이전 번역에다 일부 수정을 가해 완성하였다. 그리고 구약은 처음부터 새로 번역하였다. 약 12년의 작업 결과 완성된 이 번역은 심지어 어거스틴의 의견까지 무시하며 70인 헬라역(LXX)을 버리고 히브리 원문을 사용하여 완전하게 번역하려고 노력한 산물이었다. 이 라틴역은 후에 불가테(Vulgate ; 통용)로 불리며 카톨릭 교회에서 범용되었다.

10.제국의 변천

 

1.서로마 제국의 멸망

서방에서 제국 정부는 콘스탄티누스 시대 이래로 끊임없이 변경으로 밀려드는 야만족들을 저지하는데 힘을 써 왔다. 갈리아는 주기적으로 프랑크족과 알라마니아족에게 위협을 당했고, 브리타니아(영국)는 픽트족과 스코트족에게 위협을 당했으며, 주변 해역은 색슨족에게 위협을 당했다. 다뉴브강 유역의 속주(屬州)들도 고트족에게 시달렸으며, 한 번 이상 그들에게 정복당했다. 동방 황제들과 서방 황제들이 서로 다투는 동안 제국의 국력은 약해졌고 무거운 조세가 속주들의 힘과 충성을 약화시켰다.

5세기가 시작되면서 로마는 심각한 위협에 처하게 되었고, 마침내 로마는 410년 알레릭이 이끄는 서고트족에 의해 처음으로 약탈당했으며 그 뒤 가이세릭이 이끄는 반달족에 의해 또 다시 약탈당한 뒤 로마는 마침내 거대한 세계 제국의 수도로서의 기능과 면모를 완전히 상실하고 말았다. 476년 로마의 최후의 황제인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는 게르만 출신의 지휘관인 오도아케르에 의해 폐위되었으며 이로서 로마 제국은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2.제2의 로마

서로마제국은 멸망했지만 로마 제국 황제의 칭호는 제2의 로마라 불리던 동로마제국 곧 콘스탄티노플(비잔티움)의 비잔틴제국 군주들에 의해 보존되었으며 로마 제국도 동쪽에서 부분적으로 지속되었다. 특히 6세기에 등장한 유스티니아누스(527-565재위)는 영토를 확장하여 옛 로마의 영광을 대부분 회복하였고 문화도 진흥시켰다. 그러나 그의 사후 국가 재정의 파탄으로 그의 후계자들은 서방의 영토 대부분을 상실하고 겨우 동쪽 부분을 유지하는데 급급했으며 1세기 반의 암흑과 혼란의 시기를 거쳐 11세기 이후부터 비잔틴 제국은 크게 쇠퇴하였다.

 

⊙ 동로마제국 (Byzantine Empire)

동로마제국이란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을 수도로 한 로마의 동방 지역을 일컫는 말이다. 서쪽의 로마를 중심으로 하는 서로마 제국이 망한(476) 뒤에도 나중에 비잔틴제국의 모체가 된 로마 제국의 동쪽 영토에는 1453년까지 그리스도교와 고대 그리이스 문화, 그리고 로마의 정치 체제가 지속되었다. 이곳의 언어는 헬라어가 공용어였다. 그리이스 정교(正敎)가 국교인 이 제국은 전 중세를 통하여 그리이스 정교권의 맹주(盟主)로 군림하였다. 특히 나중에 새롭게 탄생하는 슬라브계 여러 국가에게 있어 이 제국의 정치·종교·사회·문화 및 경제는 그 모든 면에서 모범이 되었으며 콘스탄티노플은 바로 [동로마]였다. 문화적으로는 그리스의 고전 문예를 가장 잘 보존·육성·발전시켜 이것을 서유럽 여러 나라 및 이슬람권에 전하였다. 또한 이탈리아 인문주의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비잔틴 제국은 1453년 봄 회교 제국인 오스만 투르크의 술탄 메메트 2세의 공격으로 무너졌다. 그러나 그리이스 정교회는 오스만 투르크의 종교적 유화정책에 따라 존속이 허용되었다. 성화(聖畵), 교회음악과 교회건축으로 대표되는 종교 예술은 그리스정교회와 함께 오늘날까지 비잔틴문화의 계승자로 남아 있다. 비잔틴제국의 정치·법률·문화를 수용하고 그리스정교를 국교로 한 슬라브의 여러 국가, 특히 불가리아·세르비아·루마니아·키예프·러시아(나중의 모스크바 대공국)에는 제국 멸망 후에도 여러 방면에서 그 영향이 계속되었다. 그 중에서도 모스크바 대공국의 이반 3세는 비잔틴제국의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재위 1449∼53)의 조카 소피아와 결혼하였다. 그는 비잔틴황제의 즉위식을 본보기로 대관식을 거행하고 스스로를 비잔틴제국의 후계자로 자처하였다. 또한 모스크바를 [제2의 로마](콘스탄티노플)>에 다음가는 [제3의 로마]라고 선언하였다.

11. 어거스틴

 

1.생애

아우구스티누스라고도 불리는 어거스틴(Aurelius Augustinus, 354∼430)은 고대 교회가 낳은 가장 탁월한 신학자, 교회 지도자 중 한 사람이다. 그는 로마 제국 말기의 라틴 교부로서 북아프리카의 누미디아(지금의 알제리)의 타가스테(Tagaste)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파트리키우스는 시의원이었는데 성질이 사납고 방종한 인물로서 거의 세상을 떠날 때까지 신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 모니카(Monica)는 독실한 신자였다. 그녀는 어거스틴을 어릴 때부터 열과 성을 다하여 신앙적으로 양육했다.

청소년기에 어거스틴은 카르타고 등에서 수사학을 공부하였다. 그는 라틴의 문학과 철학을 공부하고자 했다. 그러나 대도시의 퇴폐한 풍속에 물이 들어 품행은 그리 좋지 못하게 되었고 신앙도 잃고 말았다. 어거스틴은 17세 때부터 한 여자와 약 14년간 동거 생활을 했고 한 아들을 낳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감각적 본성에 일찍 눈뜬 것처럼 지성적으로도 일찍 깨었다. 19세에 키케로의 호르텐시우스를 읽고 감동을 받았고 그 후에 진리 탐구에 몰두하게 되었다. 그는 처음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공부했으나 그에게서 지적 만족을 얻지 못하자 당시 유행하던 동방(페르시아)의 신비 종교인 마니교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기독교에도 관심을 가졌으나 성서의 소박한 문체나 가톨릭 교회의 보수성에 만족하지 못하고 빛과 어둠이라는 이원론(二元論)을 주장하는 마니교의 합리주의와 미적 종교성에 이끌린 것이다. 마니교는 기독교와 이교의 사상을 혼합한 이원론 사상이었다. 어거스틴은 8년간 마니교에 몰두했으며 그 중에 마니교적인 미학서 《미와 적합》을 썼다. 그러나 마니교에 깊이 들어가자 거기에 내재해 있는 지적(知的) 도덕적 불합리를 보게 되었고 마침내 마니교에 회의를 느끼게 되었다.

마침내 어거스틴은 383년 로마에서 신아카데미아학파의 회의주의를 접하게 되어 마니교를 떠나게 되었다. 그는 친구들의 권유로 384년에 밀라노로 가서 수사학 교사가 되었다. 거기서 그는 플라톤과 신플라톤주의자들의 책을 많이 읽었으며 그러던 중 진리의 실재(實在)를 깨닫게 되었다. 그가 주로 읽은 책은 신플라톤주의의 학자 플로티누스의 작품이었는데 386년에는 [불변의 빛]을 보았다는 체험 곧 신플라톤주의의 신비적 황홀경 체험을 경험하기도 했다. 이것은 그로 하여금 회의주의에서 벗어나게 하는데 도움을 주었고 또한 마니교의 물질주의에서 벗어나 영적 실재에 대한 확신을 얻는데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밀라노에서 어거스틴은 여전히 방탕한 생활을 했다. 이 무렵이 그의 가장 암흑기였다. 그러던 중 함께 간 어머니의 기도로 인해 모종의 변화의 기회를 얻었는데 그것은 암브로시우스를 만나게 된 것이었다. 어머니의 노력으로 인해 어거스틴은 차츰 기독교 설교자인 암브로시우스의 인격과 메시지에 매료되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는 스스로 바울의 편지에 관해 관심을 갖고 연구를 하게 되었으며 안토니우스의 전기를 읽기도 했다. 그런 중에 그는 점점 빛을 향하여 인도되었으며 마침내 근본적인 회심에 이르게 되었다.

그의 회심에는 특히 빅토리누스(Victorinus)로부터의 영향이 컸다. 빅토리누스는 로마에 살고 있는 신플라톤 학파의 유명한 학자였는데 말년에 기독교를 믿고 신자가 된 인물이다. 그는 신플라톤학파의 철학에 조예가 깊은 사람이었고 또한 바울의 사상도 깊이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었으므로 어거스틴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회심 후 그는 교수직을 그만두고 밀라노 교외의 산장에서 토론과 명상을 하면서 《독어록(獨語錄)》 등 철학적 대화편을 저술했다.

그 무렵 어거스틴은 아프리카에서 여행하고 온 폰티티아누스(Pontitianus)라는 사람에게서 애굽의 수도원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것은 자신의 초라하고 타락한 생활과 너무도 차이가 나는 새로운 삶이었기 때문이다. 어느날 그는 자신의 삶에 대한 회의로 갈등과 번민에 사로잡혀 정원 풀밭에 누워있었는데 그때 마침 담 너머에서 아이들의 민요 소리가 들려왔다. 그 내용은 "취하여, 읽으라(Tole, lege)"는 것이었다. 그는 그것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알아듣고 즉시 일어나 성경을 집어 읽었는데 그 부분은 로마서 13:13,14이었다. 곧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투쟁과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는 말씀이었다. 이 말씀을 읽고 어거스틴은 생의 전환점을 맞았다. 386년 늦은 여름에 맞은 이 체험으로 말미암아 어거스틴은 지금까지 찾지 못했던 마음의 평화를 찾았고 죄악을 이길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느끼게 되었다.

다음해인 387년 그의 나이 34세 때 어거스틴은 암브로시우스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그는 밀라노를 떠나 고향 아프리카의 타가스테로 돌아갔다. 가는 중에 그는 어머니를 여의었다. 어거스틴은 고향에서 수도원을 세우고자 했다. 그 무렵 그는 아들을 잃고 실의에 잠겼으나 영적 소망으로 위로를 받았다고 한다. 그는 수도원 건립 계획의 추진을 위해 힙포에 갔는데(391년) 거기서 그는 반 강제로 안수를 받아 성직자가 되었으며 4년 뒤 발레리우스 감독이 죽자 그의 뒤를 이어 그곳 감독이 되었다.(395년)

그는 북아프리카에서는 처음으로 힙포에 수도원을 세웠고 거기서 많은 성직자와 수도사를 배출했다. 어거스틴은 그가 관할하는 교회들을 변화시키려고 노력했고 이웃에 대해 사랑의 손길을 많이 폈으며, 말씀 증거와 새 신자를 위한 교육에 힘을 썼다. 뿐만 아니라 어거스틴은 계속 글을 써서 당시 기독교회의 신앙적 문제를 정통적 입장에서 잘 변증하였다. 특히 기독교회의 이단 종파에 대한 그의 변증과 변호는 유명했다. 그는 게르만족인 반달족이 힙포를 포위했을 때인 430년 8월 28일에 76세로 세상을 떠났다.

어거스틴은 다방면의 성격과 능력을 소유한 비범한 사람이었다. 그는 바울과 같은 회심의 체험을 가지고 가장 바울을 잘 이해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가 한 번 매료되었던 플라톤 철학의 흐름과 마니교의 색채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점도 있다. 그의 신학 사상은 이레니우스, 터툴리안, 빅토리아누스, 암브로시우스 등의 서방 신학자들의 사상으로 영향을 받아서 세워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또한 동방의 신학자들로부터도 영향을 받았다. 이처럼 그는 라틴 신학을 집대성하고 장래에 일어날 여러 가지 사상의 근원을 마련하였다. 그의 사상은 포용하는 바가 크므로 자연히 모순도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사상은 한편으로는 대단히 개인적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단체적이기도 했다.

민중들과의 접촉을 통한 어거스틴의 사색은 성경의 문구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내어 전달하려고 하는 '해석학적'인 방법을 취함으로써 더욱 깊어져 갔다. 그 동안 마니교도와의 논쟁, 타락한 성직자들을 인정하지 않는 도나투스파와의 논쟁, 인간의 자유 의지로 죄 없이 생활할 수 있다고 믿는 펠라기우스파와 같은 이단과 벌인 말년의 논쟁 및 로마 원로원의 이교주의(異敎主義)에 맞선 변증(辨證) 등을 계기로 그는 많은 신학적·철학적 작품을 발표하였다.

 

2.사상

1.신론

어거스틴의 신론의 주요 사상은 신을 '인격적 체험의 대상'으로 믿는 것이었다. 언제나 사람에게 참 만족을 줄 수 있고 선을 주실 수 있는 분과 인격적 관계를 맺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신을 철학적으로 생각할 때는 신플라톤학파의 용어를 사용했다. "신은 피조물과 구별되시는 순수, 절대자시요 모든 실존의 기반, 근원이다." 이런 관념에서 그는 삼위일체를 다룰 때도 신의 단일성을 강조했다. 그의 대작 {삼위일체론}(On the Trinity)은 이후 서방 사상을 결정적으로 지배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한 하나님이시다. 그는 자존하시며, 전지 전능하시고, 선하시고, 의롭고, 자비하시며,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지으신 분이시다." "성부 성자 성령은 한 본질에 속해 계시며 창조주 하나님과 전능하신 삼위 일체는 구별될 수 없다." "삼신(三神)도 아니고 삼선(三善)도 아니고 오직 선하시고 전능하신 삼위일체가 구별될 수 없는 상태로 하나로 일하신다." 터툴리안이나 오리겐, 아타나시우스는 성자와 성령이 성부께 종속된다고 가르쳤으나 어거스틴은 신의 단일성을 강조하여 삼위의 완전 동등함을 가르쳤다. "삼위는 너무도 동등하사 신성에 있어서 성부는 성자보다 더 크시지 않으실 뿐 아니라 성부 성자의 합체도 성령보다 더 크지 않으시다." 그는 삼위(三位) 곧 위격(位格, person)이라는 말보다 더 좋은 표현이 없으므로 그 용어를 쓴다고 했다. 그는 "삼위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인간의 용어는 너무 빈약하여 그것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을 사용하는 것은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수는 없어서 쓴다"고 말했다. 그는 여러 가지 비교법을 써서 삼위일체를 설명하려고 했는데 그 예로 기억(memory), 이해(understanding), 의지(will)로 표현한 것이나 lover, loved, love 등으로 표현한 것이 있다.

2.그리스도론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에 대해서 어거스틴은 두 성품을 똑 같이 강조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요 참 사람이다. 온 세계보다 먼저 계신 하나님이시요 우리 세상의 사람이시다.....그러므로 그가 신(神)이신 점에서는 그와 아버지와 하나요 그가 사람이신 점에서는 그보다 아버지가 더 크시다.....그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이시니 그를 통해서만 죄가 용서된다."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해서 그는 일관성 있는 분명한 설명 없이 단지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께 드린 희생 제물이며, 하나님의 택한 백성의 형벌을 대신 받으신 것이고, 죄악의 세력에서 해방시켜 자유를 주기 위한 대속물이라고 했다.

3.은혜론

어거스틴에 의하면 사람은 선하고 바르게 창조되었고 자유 의지를 가졌으며 범죄치 않고 영생할 가능성을 가졌기 때문에 그 본성에 아무 충돌이 없고 행복하게 하나님과 교제하였다. 그러나 아담의 범죄로 이런 상태에서 타락했는데 그 죄의 본질은 교만이고, 그 결과는 선(善)의 상실이었다. 하나님의 은혜는 박탈되고 그의 버림을 받은 영은 죽었다. 영의 지배에서 떠난 사람은 정욕(육신)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아담의 죄의 결과는 온 인류를 포괄했으며, 만일이 아담 안에서 죄인일 뿐 아니라 다 정욕에서 났기에 큰 죄인들이 되었다. 결국 온 인류는 갓난 아기마저도 멸망할 자식이요 하나님의 진노를 받은 자식이 되었다. 이처럼 어거스틴은 죄의 원인이 의지에 있음을 말하였고 아담의 죄는 유전된다고 하여 죄의 유전설(traducianism)을 취하였다.

죄가 유전되고 의지는 죄 때문에 속박을 당하게 되었으니 인간은 자기의 의지로 구원을 받을 수가 없게 되었다. 이런 죄의 절망 상태에서 은총은 구주밖에는 없으며, 구주밖에는 인간을 구한 이도, 구하는 이도, 구할 이도 없다. 구원의 은혜는 값없이 주어지는 구주의 선물이다. 그런데 이 은혜는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에게만 오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가 형벌하시고 구원하실 자들을 '예정'하시는 것이다. 이 같은 그의 사상에서 예정론이 나타난다.

어거스틴의 은혜의 교리를 한 마디로 말한다면, 자유 의지를 상실한 원죄의 인간은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에 의해서만 속죄될 수 있으며, 인간의 행위와 공로는 무용지물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는 불가항력적이며 구원받을 자의 선택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의지(예정)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4.교회론

그는 교회를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로 구분하였다. 전자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여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곳이요, 후자는 하나님의 나라라고 말하였다. 그는 또한 교회에서만 성령이 부어주시는 참 사랑을 찾을 수 있다고 하며 카톨릭 교회를 높이 평가했다. 그는 '교리와 조직면에는 정통이지만 배교자들을 용납하고 그들의 성례 집행을 허락한 카톨릭 교회는 참 교회가 아니라'고 부정한 도나투스파에 대해 '교회의 일치를 원치 않는 자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한 자들이다. 그러므로 카톨릭 교회를 떠나서는 성령을 받을 수 없다고 보는 것이 옳다. 이단들이 받는 것은 다 카톨릭 일치가 주는 특별 은사인 모든 죄를 가리우는 사랑이다' 라고 말했다. 또 성례는 하나님의 일이요 사람의 일이 아니므로 그 집행자에게 효력이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여 타락한 사제로부터 받는 세례나 성찬이 유효함을 말했다. 이를 통해 그는 인격(영)과 분리된 의식(儀式)의 의미를 인정하였다. 즉 의식은 그 자체로서 효력이 있는 것으로 본 것이다. 그는 "성례는 카톨릭 교회밖에서 받은 것도 유효하나 그 결실은 카톨릭 교회 안에서만 가능하니 이유는 거기서만 교회가 증거하는 사랑 곧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요소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5.성례론

어거스틴은 성례에 교회의 모든 거룩한 관습과 의식을 포함시켰다. 성례는 거룩한 것들이 의미하는 내용을 볼 수 있도록 나타내는 표시이다. 그래서 그는 마귀를 쫓아내는 축사(逐邪), 안수, 결혼, 세례후보자들에게 주는 소금까지 성례로 보았다. 그리고 세례와 성만찬은 특별 성례로 보았다. 그는 교회는 성례로 결속된다고 했다. "종교가 가짜건 진짜건 신자들을 맬 성례전이나 눈에 보이는 상징의 띠의 역할 없이는 종교 단체를 이룰 수 없다."고 했다. 더구나 성례는 구원의 필수 조건이라 하여 "세례를 받지 않은 자나 성만찬에 참여치 못하는 자는 구원과 천국, 영생을 받을 수 없다"고 했다.

6.인간론

젊은 시절 어거스틴은 《독어록(獨語錄)》에서 하나님과 영혼 외에는 어떠한 것에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고 말했는데 그때 그의 사상은 이미 고대 철학의 우주론적 관심에서 벗어나 인간학적 지평을 열고 있었다. 우주 속의 미소한 존재인 인간이 존재의 근원인 하나님과 그 은총에 대해 감사하고 찬양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인간 존재의 의미라고 하는 사상이 그의 철학의 근저를 이룬다. 또한 그는 인간을 정신과 육체로 나누어진 존재가 아니라 몸과 마음이 하나로 된 통일체로 파악하였다.

어거스틴은 {利用}(uti)과 {누림}(frui)이라는 개념을 사용했다. 인간은 끊임없이 행복을 추구하는데, 저서 {행복한 삶}에서 그는 '행복이란 오직 하나님을 누리는 데 있다'고 말했다. 《기독교 교의》제1권 첫머리에서 누림(frui)이란 '이용(uti)'과 관계 있다고 말했는데, 하나님을 '누린다'는 것은 하나님을 그 자체로서 존경하고 사랑하며 그 안에서 안식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이용한다'(우티)는 것은 事物을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다른 것을 위해 이용하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은 이용이 아니라 누림의 유일한 대상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이용하는 행위나, 이용에 그쳐야 할 하나님 외의 모든 사물을 누리는 행위는 도착적(倒錯的) 사랑에 빠진 것과 같다고 했다. 이 세상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면서도 이 세상을 적극 이용하는 그의 사상은 이렇게 탄생했다.

이러한 어거스틴의 사상은 대체로 명료하지만 모순적인 부분도 많다. 그것은 그의 사상이 당시의 교회 전통에다 그의 종교적 신플라톤 철학을 혼합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구원은 하나님이 그의 기뻐하시는 사람에게 은혜로 베푸시는 것이라는 예정론을 가르치는 한편 성례전 특권을 가진, 눈에 보이는 교회에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치기도 했다. 그는 진정한 경건이란 하나님을 믿는 것과 하나님과 사랑의 인격적 관계를 가지는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율법적 수도원적 금욕주의도 적극 지지했다. 이런 점에서 중세기는 어거스틴을 넘지 못했다. 그의 학설의 모순들을 조화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후대의 여러 가지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3.저술

어거스틴의 저서는 매우 방대하다. 철학적·신학적 저술 외에 일상의 목회 활동에 기초한 많은 설교집, 《시편 강해》, 《요한복음 강해》와 같은 성경 주해와 이단이나 이교도들과의 논쟁적 변증서 및 편지들도 남아 있다. 그 중에서도 지금까지 자주 읽히고 있는 책은 다음과 같다.

①《독어록》(2권, 386∼387) : 초기의 대표적인 철학적 작품이다. "하나님과 나를 알고 싶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알고 싶지 않다" 라는 대화로 시작된다. 이 책은 그가 진리의 근본이라고 믿던 '하나님과 영혼에 대해 탐구한 책이다.

②《그리스도교 교의》(4권, 396∼427) : 성경의 내용을 발견하는 방법(1-3권)과 그것을 전달하는 방법(4권)으로서의 해석학적 방법이 서술되어 있다.

③《Confession, 참회록》(13권, 397∼400) : 가장 유명한 책으로서 자신의 경험을 고백한 글이다. 11-13권은 창세기 첫머리를 둘러싸고 미래의 삶을 논하였다.

④《삼위일체론》(15권, 400∼421) : 하나님의 삼위일체성(三位一體性)과 인간 영혼의 삼위일체성을 비교하였다. 1-7권은 삼위일체론의 전통적 교리를 그대로 설명하고 있고, 후반부인 8-15권은 믿음의 세계를 이성으로 이해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데 이미 주어진 삼위일체론을 더 깊이 이해하려고 하고 있다.

⑤《Civitas Dei, 하나님의 도성》(22권, 412∼426) : 이 책은 어거스틴의 일생 일대의 대작으로서 412년에 쓰기 시작하여 14년 후에 완성되었는데 410년 야만인들이 침공하여 로마를 약탈함으로써 기독교의 도성 로마가 멸망의 위기에 처한 것을 보고 쓴 것이다. 어거스틴은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 고찰하면서 결국 지상 나라를 망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다스리심)는 영구불변하다는 것을 변증하고 있다. 10권까지는 이교도에 대한 반론, 22권까지는 하나님의 나라와 지상 나라의 관계를 역사신학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어거스틴의 저술은 크게 다섯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성경 주석들이고, 둘째는 변증적 저술인데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도성이다. 셋째는 마니교, 도나투스파, 펠라기우스파 등의 교리에 대해 반박하는 논쟁적 변증서들이며, 넷째는 금욕적인 생활에 관한 것으로서 주로 독백과 명상으로 이루어진 책들이다. 다섯째는 자서전적인 책인데 그의 참회록 및 만년의 생애를 기록한 회상록과 270통의 서신이 있다. 이러한 방대한 저술에 대해 샤프는 이렇게 말했다. "어거스틴은 그의 풍부한 사상을 다 기록해 놓았다. 그가 이처럼 많은 저술을 한 것은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지식에 있어서 그는 오리겐이나 유세비우스, 제롬 등에 비해 떨어진다고 할 수 있지만 사상의 깊이와 풍성함에 있어서는 모든 헬라 및 라틴 교부들 중 가장 뛰어난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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