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케아회의 시대 (313-590년)[5]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에 너희는 생명을 위해 짐을 지고 예루살렘 성문으로 들어오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4.어거스틴의 잘못된 교회관

어거스틴은 서방 제국의 몰락을 보면서 자신의 유명한 책 {하나님의 도성}에서 "비록 지상 최대의 위대한 도시는 몰락될지라도 하나님의 도성은 영원하리라"고 말했다. 그러나 무엇이 하나님의 도성인가에 대한 견해에서 그는 잘못된 가르침을 낳고 말았는데 그것은 눈에 보이는 카톨릭 교회를 그 신국(神國)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오직 (카톨릭) 교회에 의해서만 그리고 교회의 성례를 통해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구세주의 손에서 구원을 빼앗아 인간의 손에 맡긴다는 것, 구세주와 죄인 사이에 인간이 만든 체계를 끼워 넣는다는 것은 복음과는 맞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들에게 친히 "내게 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어떤 사제나 교회도 그 사이에 끼어들 권한은 없다.

교회를 일치시키고자 하는 열망을 가진 어거스틴, 특히 교회가 하나로 일치되지 못하고 사소한 이유로도 분열되며 각색의 모양을 하고 있던 것에 대해 혐오하던 어거스틴은 거듭난 체험을 통하여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한 모든 성도들을 하나로 묶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실체를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지나치게 교회의 외형적 일치를 중시한 나머지 교회의 영적 생명력과 교회의 궁극적인 일치에 대한 올바른 시각을 상실하고 말았다. 그는 각 지역 교회들이 그리스도 및 성령님과의 개별적이고 직접적인 관계를 통해 다른 교회들과 관계를 맺는다는 사실을 도외시하였다. 그는 교회가 성령 공동체임을 보지 못했다. 그 원인은 그가 교회도 세상 조직의 일부라고 보는 형식적이고 외형적인 교회관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며 또한 지나치게 눈에 보이는 일치를 강조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도나투스파와의 논쟁에서 이런 글을 남겼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징벌이나 고통에 대한 두려움 飁문이 아니라 가르침에 의한 깨달음 때문에 이루어진다면 참으로 좋다. 그러나 가르침에 의해 더 좋은 사람이 만들어진다는 대의 명분 때문에 가르침을 거절하는 사람을 무시해도 좋다는 것이 아니다......베드로나 요한을 부르심같이 바울을 부르셔서 굴복시키기 위해 주님은 말씀(소리)만 사용하신 것이 아니라 그의 눈을 멀게 하시는 방법도 사용하셨다. 그러나 교회는 잃어버린 양들을 찾기 위하여 강권적인 방법을 쓰지 않고 있다." 어거스틴의 이런 사상은 로마 교황으로 하여금 이교도였던 로마가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행했던 것과 유사한 잔혹한 박해를 교회들에게 행하도록 부추기고 독려했다. 비록 단순하고 정열적이며 온건한 기질의 소유자였지만 성경의 원리에 철저하지 못한 것 때문에, 그는 비록 선한 의도에서였다 할지라도 광범위하고 잔인한 박해 조직에 연루되게 되었던 것이다.

12. 펠라기우스 논쟁.

 

1.배경

동방 교회가 기독론에 대해 논쟁을 하고 있을 때 서방 교회는 죄와 구원 문제에 대해 논쟁을 했다. 그것은 라틴인들의 특성이 이론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문제보다 실제적인 문제에 더 관심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헬라 교회는 主知的 성격을 띠었다. 종교는 하나님과 우주에 대해 옳은 지식을 가지고 이 지식 위에 세워지는 도덕이라고 보는 경향이 강했다. 인간의 현 상태에 관한 견해는 일반적으로 낙관적으로 기울었고 인간의 구원은 하나님의 은총에만 달린 것이 아니라 사람의 적극적인 반응에도 달려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라틴 교회는 인성(人性)에 대해 그처럼 낙관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죄의 심각성에 대해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 테르툴리아누스가 죄의 유전(遺傳)을 가르친 이후 암브로시우스나 힐라리우스 같은 학자들은 원죄의 관념을 기초로 하여 사람이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구원이 전적으로 은혜에 의존한다고 주장할만큼 철저하지는 못했다. 그러던 것이 어거스틴 시대에 와서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사상이 분명하게 제시되었다. 이런 사상은 펠라기우스와의 논쟁에서 더욱 분명하고 철저한 입장으로 확립되었다.

 

2.펠라기우스

펠라기우스는 영국인 수도사로서 5세기 초에 로마로 와서 도덕의 부패를 보고 이를 바로 잡기에 힘쓴 사람이다. 그는 성질이 온순하고 품행이 단정하고 지식이 많고 총명한 사람이어서 어거스틴조차 그의 인격을 인정했다. 그는 사람의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보다 인간의 노력에 더 의존한다는 잘못된 주장을 했다. 그는 카르타고의 장로가 되려고 했으나 파울리누스의 반대로 되지 못하고 나중에 에베소의 장로가 되었는데 제자들에 의해 그의 학설이 널리 퍼져나가게 되었다.

그러나 431년 에베소에서 열렸던 세계 대회, 곧 네스토리우스 사상을 이단으로 정죄한 회의에서 펠라기우스의 사상 역시 이단으로 규정되었다.

 

3.하나님의 은혜와 자유 의지에 관한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의 논쟁

어거스틴은 생전에 펠라기우스(Pelagius)와 많은 논쟁을 벌였다. 평신도였던 그는 30세 경에 성경에 관한 잭을 저술하는 능력 있는 사람이었다. 펠라기우스는 일종의 개혁자였다. 신앙을 고백한 자들의 방탕하고 방종한 삶이 그로 하여금 인간의 책임과 자유 의지에 대해 강조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는 진리의 한쪽으로 너무 기울어졌다. 그는 인간의 책임에 대해 너무 강조한 나머지 인간의 자유 의지를 지나치게 강조하고 하나님의 은총을 지나치게 축소하고 말았다. 펠라기우스가 이런 주장을 한 것은 그가 어거스틴과 같이 인간의 죄와 무능에 대해 깊이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어거스틴과 같은 깊은 영적 체험을 갖지 못했으므로 이 문제를 단지 원리적으로 해결하려는 경향을 보인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인간의 구원은 인간 자신의 '선으로 나아가려는 의지적 노력'에 의해서만 달성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어거스틴은 인류의 시조 아담은 본래 죽지 않아도 되도록 지음 받았지만 범죄로 인해 죽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펠라기우스는 '아담은 본래 죽을 인생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죽은 것이며 범죄 여부와 상관없이 죽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비록 아담이 범죄했지만 그 범죄는 아담 자신에게만 영향을 주는 것이며 인류 전체에는 무관하다고 말했으며, 아담의 죄는 죄의 성질 또는 도덕적 부패를 자손에게 유전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자손들이 죄의 책임을 지는 것도 아니라고 했다. 그는 말하기를 '오늘의 인류는 아담이 처음 지음을 받았을 때와 같은 상태에 있으며 다만 죄의 유혹하는 힘이 강해졌을 뿐'이라고 했다.

그에 의하면 원죄란 없고 모든 사람의 죄는 자신의 행위의 결과였다. 그래서 펠라기우스는 {선택의 힘}과 {실제적 선택}과 {선택한 바를 실제로 행하는 것} 이 세 가지 중에서 첫째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지만, 둘째와 셋째는 (일단은 첫째 것에 의해 성립되기는 하지만) 선택의 주체가 사람이며 실행하는 것고 사람이라는 주장을 강하게 폈다.

또 어거스틴은 인간의 죄는 유전이 되므로 유아에게도 원죄가 있음을 주장했지만 펠라기우스는 어린 아이는 무죄의 상태서 태어난다고 말했다. 또 어거스틴은 인류의 죽음은 아담의 범죄와 죽음으로 인한 것이며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해 온 인류가 살아날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펠라기우스는 (인간에게 선을 택하여 실행할 능력이 있기 때문에) 율법도 복음과 같이 인류를 천국으로 인도한다고 주장했다. 또 펠라기우스는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시기 전에도 무죄한 자들이 있었다고 했다. 그는 유아 세례를 가르치긴 하였으나 카톨릭 교회들이 전통적으로 생각하는 바와 같이 그것이 중생의 수단이라고는 여기지 않았다. 그것은 단지 어린 아이를 은총의 상태로, 하나님의 나라로, 구원과 생명, 죄 씻음과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세계로 한 걸음 나아가게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그의 가르침은 카톨릭 교회와 정면으로 충돌했다. 펠라기우스의 가르침에 반대한 어거스틴은 회중들 앞에서 150년 전 키프리안이 쓴 글, 곧 '어린 아이들도 죄를 용서받기 위하여 세례를 받는다'는 부분을 인용하여 펠라기우스에게 교회의 교리와 관례로부터 벗어난 잘못된 가르침을 삼가라고 경고했다.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는 크게 논쟁을 벌였다. 그러나 펠라기우스의 주장은 널리 힘을 얻었기 때문에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한 회의가 소집되었다. 동방에서 온 사람들은 펠라기우스를 무죄라고 옹호하였고 서방에서 온 사람들은 그를 정죄하였다. 서방 교회의 이런 입장은 하나님의 의지를 인간의 의지보다 앞세우는 라틴 교회의 어거스틴의 영향력 때문이었다.

회의는 로마 교황 인노센트(Innocent)에게 판결을 의뢰하였고, 교황은 자신의 권위를 나타낼 기회를 가졌다. 교황은 펠라기우스와 그를 따르는 무리를 정죄하여 파문시켰다. 그러나 그의 후임자인 조시무스(Zozimus) 교황은 그들을 다시 복위시켰다. 이로 인해 서방 감독들이 다시 카르타고에서 모여 펠라기우스파를 파문시키고 재산을 압류시켰다. 이를 본 조시무스 교황은 자신이 불리해짐을 느끼고 자신의 견해를 바꾸어 펠라기우스를 정죄하였다.

펠라기우스의 가르침 속에는 진실하고 유익한 부분도 많으나 펠라기우스의 가르침의 전체적인 방향은 성경뿐 아니라 인간의 본성에도 위배되는 것이다. 사람은 자신의 부패하고 타락한 본성과 죄의 종된 상태를 스스로 알고 있으며 삶 자체가 그것을 확증해 주고 있다. 우리가 첫 사람 아담과 생명과 본성을 공유함으로서 그의 죄를 지고 그의 죽음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은 명백한 것이다. 우리 자신의 선택과 노력으로써 영원한 생명과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할 길을 찾을 수는 없으며, 오직 그 자신의 선택과 노력으로써 그런 길을 열어주신 둘째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믿음으로써만 영생을 얻으며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이다.

⊙ 아우구스티누스와 펠라기우스의 신학적 차이

아우구스티누스 펠라기우스

구원 : 하나님의 예정, 불가항력적 은총 / 인간의 의지적 노력으로.

죽음 : 아담이 범죄함으로 죽음 / 처음부터 죽게 정해진 것임

죄의 유전 : 아담의 죄가 후손에게 영향 / 아담만, 인류에게 유전 안됨

원죄 : 유아에게도 원죄 있음 / 유아는 타락전 아담처럼 무죄

방법 : 그리스도만이 구원 / 율법도 사람을 천국으로 인도

오직 믿음으로, 세례를 받아야 함 / 그리스도가 오기 전에도 무죄한 자가 있었음

 

4.반(半) 펠라기우스 설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의 논쟁 속에서 새로운 조화를 위해 반(半)펠라기우스설이 나왔다. 이 설은 마르세이유에 수도원을 세운 캇시아누스와 레이의 감독 파우스투스 등이 주장했다. 반펠라기우스설은 펠라기우스설처럼 인류의 죄악을 가볍게 보지는 않는다. 아담의 죄의 결과로 인류는 죄인이 되었고 죄로 인해 의지가 속박 당하고 자신의 행위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점에 있어서는 어거스틴의 주장과 같다. 그러나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사람에게 제시되어 각 사람이 자기 의지대로 이것을 받든지 거절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점에서 (알미니안의 주장과 비슷함) 어거스틴의 주장과 차이가난다.

13.니케아 시대의 생활상

이 시대에 나타난 두드러진 변화 중 하나는 크고 웅장한 교회당 건물이 건축되었다는 것이다. 박해 시대에는 집회소로 모일 건물조차 제대로 가지지 못하던 교회들이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처럼 보호받게 되자 이제는 크고 화려한 건물들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이교의 사당을 개조하거나 일부를 수용하여 사용하는 일도 적지 않았다. 건축은 바실리카 양식이 가장 많았다. 바실리카 양식이란 넓은 홀이 주랑(柱廊)으로 둘러싸여 있는 양식이다. 그밖에 원형, 혹은 다각형의 건축물들도 있었다. 이런 양식들은 세례당 혹은 순교자의 기념당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으며 동방에서는 보통의 집회를 위해서도 이를 사용하였다. 동방에서 행해진 건축 양식은 비잔티움 양식이었다. 이 양식은 하나님의 중심이 있고 길이가 같은 네이브(nave)가 그 중심을 교차하여 십자형을 이루고 그 위에 둥근 지붕이 있어서 하늘을 상징하는 양식이었다. 콘스탄티노플의 성 소피아 교회당이 이를 대표한다.

굴 무덤의 벽 또는 석관의 외부에 조각을 하는 풍습은 이 시대에 널리 행해졌다. 그러나 이는 상징적인 성질을 띠었지 조각품을 경배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이 기술은 5세기 중엽부터 쇠퇴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림은 점점 더 많이 사용되었다. 순교자를 위해 세운 회당에 순교의 시종을 그리거나 성경의 사실을 그리는 일은 이전부터 있던 풍습이었으나 그리스도를 직접 그리는 것은 피하였다. 그러나 키릴로스가 네스토리우스파와 싸워서 승리한 후 예배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화상을 사용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장 오랜 초상은 440년 경의 것으로서 예배를 위해 그린 것이다. 그 후 6세기에 이르러서는 그리스도의 초상을 회당 안에 걸뿐 아니라 집집마다 보관하여 모시게 되었다.

성자들을 숭배하는 풍습은 순교자를 숭배하는 풍습에서 시작되었다. 순교자의 무덤 앞에서 예배를 보는 풍습은 나중에 그곳에 회당을 세우는 풍습이 되었고 회당을 세울 때 순교자의 유골을 옮겨서 제단 밑에 간직하는 풍습이 행해졌다. 기도할 때 죽은 순교자들이나 사도 혹은 선지자들을 불러서 도움을 구하기도 했는데 이렇게 한 것은 그것이 기도의 응답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갑바도기아의 세 신학자는 성자들을 찬미하며 그들이 인류를 수호하며 성도들의 기도를 듣는 자라고 했으며 암브로시우스나 제롬도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순교자를 존중하는 풍습은 나중에 그의 유물과 유골까지 숭상하는 풍습으로 확대되었다. 그것은 그런 물건들에 병을 고치는 힘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성자들의 유물이나 유골이 고가로 매매되기도 했다.

성모 마리아에 대한 숭배도 여러 가지 모양으로 나타났다. 바실리우스는 마리아에 대해 그녀는 예수를 낳은 후 다른 자녀도 낳았다고 믿었다. 그러나 에피파니우스에 이르러서는 그런 생각을 정죄하고 이단시하여 영구처녀설을 확립하였다. 당시에도 마리아를 성부 성자와 성령을 경배하는 것처럼 직접 경배하는 것에 대해서는 경계하는 원칙이 있었으나 마리아 숭배는 점점 보편적이 되어갔다. 직접 경배는 않더라도 하나님께 기도할 때 마리아를 불러서 도움을 받는 것은 아무 제한을 받지 않고 시행되었으며 마침내 마리아는 인류의 구원에 참여하여 역사하는 힘있는 존재로 여겨졌다. 암브로시우스와 같은 사람은 창세기 3:15를 마리아 숭배의 근거로 제시하였으며 에베소 대회때에는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로 불러도 좋다고 결의했다.

그러나 천사를 숭배하는 것은 신약 성경에 이것을 직접 금하는 말씀이 들어 있기 때문에 주저하였으나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주저하면서도 행하였다. 이것은 점점 습관이 되어 성자들의 이름과 함께 이것을 섬기게 되었다. 어거스틴은 이것을 경계하였으나 암브로시우스는 이것을 피하지 않았다.

이 시대의 집회(예배)는 사도 시대의 형태와 많이 달라졌다. 이미 속사도 시대에도 그러한 경향이 있었지만 이 시대에 들어와서는 모임은 말씀(설교) 중심이 아니라 거의 의식(儀式) 중심이 되었다. 설교는 서방보다 동방에서 더 왕성하였다. 서방은 일반적으로 설교보다 의식을 중시했다. 그러나 동방은 원래 수사(修辭)와 문장(文章)이 발달한 지역이었으므로 강론이 흥왕했으며 대 설교자들도 많이 나왔다.

부활절 풍습은 전 시대와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다. 이 시대에 들어서 나타난 변화는 성탄절을 축하하는 풍습이 생겼다는 것이다. 기록에 나타난 최초의 성탄절 기원은 로마 감독 리베리우스 당시(354년)에 12월 25일을 예수의 탄생일로 정하고 축하한 것이다. 그후 379년에 이르러서는 동방의 콘스탄티노플에서도 축하되었고 이집트와 팔레스틴에도 전해졌다. 본래 성탄절 풍습은 로마의 이교 풍습에서 비롯되었다. 로마에서는 12월 말에 세 가지 축제가 행해졌다. 첫째는 사투르나리아(Saturnalia, 17-24일)인데 이것은 사투룬 신이 지배한 황금 시대를 기념하는 제사로서 이 절기에는 모든 민중들이 환락에 함께 빠졌다. 둘째는 시길라리아(Sigillalia)인데 12월 하순에 거행된다. 이때는 어린 아이에게 인형을 선사하며 아이들로 하여금 즐기게 한다. 셋째는 브루마리아(brumaria)인데 이것은 동지(冬至) 제사이다. 이는 태양 빛이 다시 돌아오는 것을 축하하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이 축제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따로 모여서 다른 의미의 축하 행사를 가질 필요를 느꼈다. 이에 그리스도는 참 태양이니 이 무렵(동지)을 구주 탄생의 날로 축하하자는 아이디어가 실현되어, 성탄절이 이 로마 축제 기간 중에 잡힌 것으로 보인다.

이 시대에는 성경의 번역과 위경 등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콘스탄티누스는 50부의 신약 성경을 양피지에 복사하여 주요 교회에 기증했다. 여기에 포함된 성경들은 그동안 논란의 대상이 되어 왔던 성경들(베드로서, 계시록 등)일지라도 정경으로 확증되는 효과를 얻었다. 365년에 아타나시우스는 구약 22권과 오늘날 인정된 신약 27권을 열거하면서 여기에 더 보태거나 빼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363년 라오디게아에서 열렸던 지방 대회에서 제정한 규칙에는 신구약 66권 중 계시록만 빼고 나머지를 다 포함시켰다. 그러나 393년 힙포와 397년 카르타고에서 열렸던 지방 대회에서는 신약 성경은 지금의 것과 같이 정했고 구약은 정경 외에 외경(Apocrypha)이 추가되었다. 제롬의 라틴역 성경의 목차는 지금 성경과 같다. 외경은 제외되어 있었으나 나중에 추가되었다. 이처럼 신구약 성경은 대략 이 시대에 완전히 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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