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제2차 세계 교회 회의
제2차 회의는 381년 콘스탄티노플에서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소집함으로써 열렸다. 안디옥의 감독 밀레티오가 회의를 주도했는데 그가 죽은 후에는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가 의장이 되었다. 이 회의가 소집된 동기는 신인양성(神人兩性)이 예수라고 하는 한 사람의 인격 안에 어떻게 서로 결합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 아폴리나리스가 하나의 학설을 주장했는데 이것이 논쟁을 불러 일으켰기 때문이다.
아폴리나리스는 플라톤의 심리학설 곧 인간은 몸(body)과 마음(soul)과 영(spirit)의 셋으로 구성되었다는 설에 근거하여,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로고스가 인간의 영을 대신했고, 로고스와 마음과 몸으로써 하나의 인격을 이루었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그리스도에게 영이 없다는 말이 되므로 아폴리나리스(Apolinaris)의 주장은 결국 그리스도의 인성을 제한하는 결과를 가져왔고 이것이 문제가 된 것이다.
이러한 주장에 논박한 가장 유력한 신학자들는 갑바도기아의 두 그레고리우스 곧 닛사의 그레고리우스와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였다. 이들은 로고스가 그리스도의 자아(自我)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그 로고스는 모든 인성을 섭취하고 동화하여 인간적인 행위와 감정의 주체가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이 회의에서는 아폴리나리스 학설을 부정(否定) 기각(棄却)하고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이시며 완전한 인간이라고 결의하였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신인양성(神人兩性)이 모두 완전하다는 사상은 자연히 예수님 안에 하나의 인격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신인(神人)의 양격이 있다는 말이 되어서 나중에 이 때문에 다시 큰 논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2.제3차 세계 교회 회의
제3차 회의는 431년 에베소에서 열렸는데 소집자는 테오도시우스 2세였다. 이 회의의 의제는 네스토리우스(Nestorius)의 양성론에 관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네스토리우스는 안디옥의 대감독으로 있다가 나중에 콘스탄티노플의 대감독이 된 사람인데 그는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을 명확히 구별하였다. 그는 그리스도는 신이 아니고 로고스가 임한 사람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그의 주장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인격은 하나의 인격이 아니라 두 개의 격으로 나누어질 수 있는 위험성이 있었다.
이에 대해 알렉산드리아 감독 키릴로스(376-444)가 적극 반대하고 항의하였다. 그는 그리스도의 인격의 통일성을 주장하였다. 키릴로스파는 동방교회의 회원들이 도착하기 전에 그 틈을 타서 네스토리우스를 교회에서 추방할 것을 결의했다. 이에 네스토리우스파가 도착하자, 그들은 그들대로 키릴로스를 이단이라고 결의하였다.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처음에 두 결의를 모두 비준하였는데 후에는 케릴로스에 대한 선고를 취소하고 네스토리우스를 출교하였다. 이로 인해 키릴로스는 점점 세력을 얻게 되고 435년에는 마침내 네스토리우스를 아라비아로 귀양가게 만들었다.
3.도적 회의
이 회의는 449년 에베소에서 열렸는데 의제는 유티케스(Eutyches)의 일성론(一性論, Monophysitism)에 관한 논쟁이었다. 유티케스는 콘스탄티노플 부근의 수도원장으로서 열심있는 키릴로스파의 한 사람이었다. 그가 주장한 일성론이란 그리스도는 인성과 신성의 두 성질로 되어 있는데 두 성품이 합일한 후에 인성은 신성에 침범되고 흡수되었다는 것이다. 이 주장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몸은 우리의 몸과는 다른 신비적인 몸이 된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성육신 이전에는 양성으로 있었으나 후에는 일성이 되었다는 것이다.
콘스탄티노플 지방 대회는 이러한 유티케스의 일성론을 부정하였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인성을 우리의 인성과 다른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의 디오스키루스는 이 논쟁에서 일성론이 득세하는 것이 자파의 세력을 펴는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여 유티케스에게 지지를 보내고 테오도시우스 황제에게 권하여 회의를 소집하게 하였다.
알렉산드리아 감독 디오스코루스(Dioscorus)는 그 회의의 의장이 되어 군인들과 무뢰한들을 동원하여 반대파를 위협하는 가운데서 일성론을 반대하는 안디옥파 지도자들의 추방을 결의하고 이미 정죄받고 쫓겨난 유티케스를 복직시켰다. 이런 이유로 인해 이 회의를 <도적회의>라 부르고 정식 교회 대회에 넣지 않는다.
4.제4차 세계 교회 회의
이와 같이 여러 차례 세계 교회 회의가 열려서 기독론에 관한 논쟁이 전개되었지만 교회는 아직도 그리스도의 인격을 완전히 표현하지 못했다. 성경은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서만 아니라 인간으로도 나타내고 있다. 그리스도가 인류의 구주가 되기 위해서는 완전한 신성뿐 아니라 완전한 인성도 절대적으로 필요하였다. 교회 안에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 관한 많은 다른 견해들이 존재하였고 이의 조화를 위해서는 아직도 더 많은 연구와 토론이 필요하였다.
결국 451년 니케아 근처 칼케돈(Chalchedon)에서 또 하나의 종교 회의가 열리게 되었다. 소집자는 마르키아누스(Marcianus)황제였고 600명 정도의 감독이 참석했다. 이 회의에서 유명한 칼케돈 신조가 작성되었다. 이 신조는 니케아 신조와 마찬가지의 중요성을 띤 신조이다.
이 신조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충분하고 완전한 신성}을 믿음과 동시에 {그리스도의 충분하고 완전한 인간성}을 믿는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을 주 내용으로 하고 있다. 더욱이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 두 성품, 곧 인성과 신성이 존재함을 고백하였다. 교회는 이 두 성품의 관계에 대해 두 성품은 혼동이 없고, 변함이 없으며, 분리가 없고, 불화가 없이, 조화를 이루며 존재한다고 말했다. 결국 교회는 그리스도는 두 성품을 가져도 한 인격이지 두 인격이 아니라는 고백을 한 것이다.
⊙ 칼케돈 회의의 결의 사항 요약
① 예수 그리스도는 신성에도 완전하고 인성에도 완전하며 각기 그 성질을 보전한다.
② 그리스도는 참 신이시며 참 인간으로서 이성이 있는 영혼과 육체를 소유하였다.
③ 그의 신성은 성부와 같고 그의 인성은 우리와 같으나 죄가 없으며 이 양성은 혼합되거나 변하지 아니하며 떠나지도 아니한다.
④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인성으로 동정녀에게 탄생하였다.
5.제5차 세계 교회 회의
칼케돈 회의는 교리 논쟁에 있어서 일단락을 짓게 하였으나 싸움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그래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527-565)는 즉위하자마자 곧 일성론자와의 타협을 꾀하고 또한 로마 감독에 대해서도 독립된 지위를 얻으려는 동기를 가지고 삼장령(三章令)이라는 발표하였으나(삼장령이란 안디옥파의 세 신학자, 테오도레트, 이바스, 테오도레의 주장을 반박한 것), 소득이 없고 도리어 소란만 일어나서 결국 콘스탄티노플에서 제5차 대회를 소집하였다. 여기서 칼케돈 신조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정통 교리로 삼고, 일성론을 취한 교회는 분리하여 고립된 단체가 되었다. 이집트에 있는 콥트 교회, 이디오피아 교회, 알메니아 교회, 시리아 및 메소포타미아 근방에 있는 야곱 교회가 그것이다.
6.제6차 세계 교회 회의
제6차 회의는 콘스탄티노플에서 680에 열렸다. 소집자는 콘스탄티누스 4세로서 세르기우스의 一意論(單意論, Monothelitism)과 그 주장을 지지한 로마 감독 호노리우스를 정죄하였다. 그들의 주장은 그리스도는 인성과 신성을 다 가졌지만 오직 한 뜻 곧 神意만 가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회의에서는 이 주장을 배격하고, 그리스도에게는 두 의지가 있으며 단지 인적인 의지는 신적인 의지에 복종할 따름이라는 이의론(二意論)을 채택하였다.
7.제7차 세계 교회 회의
제7차 회의는 니케아에서 787년에 열렸는데 동방 교회 마지막 대회였다. 소집자는 콘스탄티누스 6세였는데 이 회의는 레오 4세 황제가 금한 성상(聖像) 사용 문제를 다시 논의하기 위해 소가지 일으몄집되었다. 레오 4세가 성상 숭배를 금했을 때 많은 수도사들과 신자들이 반발했는데 레오 황제는 이들을 탄압하였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 6세가 즉위하여 다시 이 문제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회의를 소집하였고 거기서 성화 숭배를 허용하기로 결정했다. 이 회의에서는 '성화, 십자가, 복음서들은 존숭(尊崇)할 것이니 참 예배는 신성(神性)에 한하나 이상(以上)에 대한 존숭은 그 물질 자체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것들이 표현하는 내면적 실재에 대한 존숭이다' 라고 선언했다. 이 회의가 성상 숭배가 정당하다고 결정한 근거는 예수님이 참 사람이셨다는 사실과 복음 사건들이 참 역사적인 사실이라는 데 두었다. 신성이 물질계에서 멀지 않다는 것과 성육신(成肉身)에서와 마찬가지로 물질계가 하나님께 접근케 하는 매개체가 될 수 있다는 원칙이 승리한 것이다.
⊙ 사벨리우스(Sabellius ?―260?)
사벨리우스는 로마의 신학자인데 리비아 태생이라고 하나 불확실하다. 삼위일체를 둘러싼 고대 교회의 기독론 논쟁에서 아리우스와 함께 양대 이단설 중 하나(사벨리우스주의)를 주장한 인물이다. 그는 성부(聖父)·성자(聖子)·성령(聖靈)을 삼위일체로 보며 이 세 위격(位格)은 동일 본질과 영광을 지니지만 각각 3가지 고유성을 지닌다고 하는 전통적 기독론에 반대하여, <아들과 성령은 아버지와 구별되는 고유성을 지닌 위격(位格)이 아니고 아버지인 신(神)의 단순한 현현양태(顯現樣態)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는 <양태론>(樣態論;modalism)을 주장했다. 이 주장은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과 수난을 아버지 자신의 강림과 수난으로 보는 성부수난설(聖父受難說;patripassianism)로 연결되었기 때문에 사벨리우스는 비판을 받고 파문 당했다.
⊙ 아리우스主義
아리우스가 주장한 것으로서, 고대 기독교회의 기독론 논쟁에서 사벨리우스주의와 함께 양대 이단설 중 하나이다. 아리우스는 그리이스 철학의 사변(思辨)에 따라 하나님의 유일절대성(唯一絶對性)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기는 하지만 결코 아버지 하나님과 동등한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지는 않았고, 설령 절대적으로 뛰어난 위치를 차지한다 할지라도 그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이 무(無)에서 창조해 낸 피조물(첫 피조물)이라고 하였다. 이것에 대하여 아타나시우스를 비롯한 정통적 삼위일체론자(三位一體論者)들은 325년 니케아 회의에서 아리우스주의를 배척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동일본질(同一本質)을 갖는다는 것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아리우스주의는 그후에도 정치 권력과 손을 잡고 많은 영향력을 끼쳤다. 성서적(聖書的)·구속사적(救贖史的) 기독교 신앙이 철학적·우주론적 헬레니즘 세계에 전해졌을 때, 필연적으로 대결할 수밖에 없었던 사상이었다.
5.기독교의 국교화 과정
기독교에 자유를 준 콘스탄티누스가 전체 로마 제국의 황제 자리에 오른 것은 그의 대적 리키니우스를 무찌른 324년이었으나 콘스탄티누스는 그 전에 이미 제국을 양분하고 있던 동방의 리키니우스는 협약을 맺어 모든 종교에 자유를 주기로 한 바 있다. 이것이 313년의 밀라노 칙령인데, 이로 인해 기독교는 오랜 박해를 벗고 자유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리키니우스는 콘스탄틴과 최후 대결을 할 무렵에 입장을 바꾸어 다시 잠시 기독교를 박해했지만 얼마 안가 전쟁에 패함으로써 기독교에 대한 박해는 오래 가지 못했다. 콘스탄티누스는 재위 기간 동안 비록 기독교를 제국의 공식 국교로 정하지는 않았지만 할 수 있는 한 모든 호의를 베풀며 장려 보호했다. 그러나 361년 콘스탄티누스가 죽은 후 제국은 일시적으로 소위 '배교자 줄리안'이라고 불리는 콘스탄티누스의 사촌 줄리안(율리아누스)에 의해 2년 동안 지배를 받았다. 그는 기독교를 편향적으로 옹호하는 조치를 철회하였다. 그러나 전처럼 교회를 박해를 하지는 않았다. 다만 이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에 동등한 자유를 부여하는 중립정책을 실시한 것이다. 그가 그렇게 한 것은 기독교가 로마 제국을 봉합하고 번영케 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콘스탄티누스의 생각에 동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줄리안은 불과 재위 2년만에 죽고 말았다. 그가 죽은 후 스페인 출신의 데오도시우스 1세가 황제의 자리에 올랐는데 그는 공식적으로 기독교를 국교로 정했을 뿐 아니라 모든 종류의 이교와 이단을 박해했다. 그들의 기독교 집회 외의 모든 집회와 의식을 금지하고 집회 장소와 재산을 몰수했다. 더 나아가 438년에 데오도시우스 2세 때에는 데오도시우스法이라는 법이 공포되었는데 이 법은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자들(예컨대 아리우스파 등)과 기성 교회를 부정하고 재세례(再洗禮)를 시행하는 자들(예컨대 도나투스파 등)에게 사형을 내리도록 하는 법이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제 기독교는 로마에서 허용되고 장려되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로마와 연합하여 하나가 되었다. 바야흐로 이제 로마는 기독교 국가가 된 것이다.
그런데 이런 과정이 진행되는 동안 로마 제국의 사상적 변화도 있게 되었다. 줄리안이 등장하기 전에 콘스탄틴의 세 아들이 나라를 삼분하여 다스리는 동안 서방은 아다나시우스파의 니케아신조를 견지했고, 동방은 아리우스파의 견해를 견지했다. 그러나 동방을 다스린 콘스탄티누스의 셋째 아들 콘스탄티우스가 전체 로마를 다스리게 되자 로마 제국은 전체적으로 아리우스파가 득세하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서 등장한 줄리안은 이교를 비롯한 모든 이단파들을 복권시켰다. 이러한 조치는 제국 전반에 걸친 그동안의 아리우스파의 우세를 끝내고 아다나시우스파가 득세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그것은 유배되었던 정통파 주교들이 줄리안의 조치로 복권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He is a cross pendant.
He is engraved with a unique Number.
He will mail it out from Jerusalem.
He will be sent to your Side.
Emmanuel
Bible Verses About Welcoming ImmigrantsEmbracing the StrangerAs we journey through life, we often encounter individuals who are not of our nationa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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